사목재 고개 위 하늘이 참 맑다. 며칠간 미세먼지로 흐렸던 뒤라 그런지 더욱 청명해졌다. 황사도 주춤해서 모처럼 따듯한 봄날이다. 운동을 하러 체육공원에 올랐다. 겨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을 보며 꽃망울이 금방 터질 것만 같은 개나리와 벚나무 순이 반겨주었다.
서울 삶을 정리하고 고향 옥천으로 이사 온 지가 십 개월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나중에 육십이 넘으면 시골가서 흙장난을 하고 산다고 늘 노래했다. 그런데 고향에 온지 십개월 동안 숨 가쁘게 살았다. 오늘은 한가한 마음으로 먼 산을 돌아본다. 저곳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 시험이 끝나고 남 여 세반이 모여 토끼몰이를 갔던 곳이구나.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앗! 저기 저 산길이 이렇게 가깝게 보이다니. 64년 전 6.25전쟁 때 피난을 가던 그 길이다. 그때 우리 집은 닭을 잡아 온 식구가 푸짐하게 먹은 후 짐보따리를 싸고 야단법석이었다. “엄마 우리 이사가?” “그래” “와! 좋다! 나는 무얼 가지고 가요?”라며 조르니 가방에 미숫가루, 놋수저, 빨래비누 2개를 넣어 메어주셨다. 철부지였던 나는 그저 신났다. 우리 집도 이사 간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건 이사가 아니라 피난길이었다. 아버지는 누가 오라는데 있냐며 솔 고개 사는 작은 고모님 댁에 짐을 내려놓았다. 엄마와 고모가 저녁을 준비하는데 군인들이 와서 빨리 부산으로 내려가란다. 사목재를 넘지 못하고 산 중턱에 짐을 풀고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새벽에 남겨 놓고 온 보리쌀과 이불을 가지고 오겠다고 엄마와 고모가 집으로 간 사이 군인과 미군이 와서 총으로 위협을 하며 산으로는 가지 말랬다.
피난 행렬은 줄지어 가는데 우리는 엄마와 고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섭다고 빨리 가자고 울며 조르기만 했다. 언니는 저 산을 넘으면 개울이 있다, 개울을 건너지 말고 길 옆에서 기다리면 엄마랑 가겠다고 했다. 나는 무서워 울며 가방을 메고 혼자 고개를 넘어갔다. 넘어가 보니 개울을 건너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길을 만들어 어느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겁먹은 나는 울며 아래위로 올라 다녔지만 알 수가 없어 작은 바위 위에서 울고 있었다. 마침 신대 친척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어째 혼자 가냐고 하셨다.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나흘만에 식구들을 만났다. 늦은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져 고개를 넘지 못하고 산 속으로 고생하며 나흘만에 천만다행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아가 되지 않고 살았다.
피난 생활은 그렇게 고생만은 아니었다. 인심 좋은 주인은 고추, 호박, 가지를 따다 주기도 했다. 고종 사촌 오빠들은 피난 갈 때 약빠르게 잘 갔다고 고기 잡으로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고기 잡으로 갔다가 거머리가 얼마나 많이 다리에 붙었는지 떼지 못하고 모래밭에 뒹굴러 모래로 비벼서 떼어냈다. 그건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는 추억이다.
또 복명관에서 키우던 송아지만한 후지개또라는 개를 사서 큰고모와 둘만 먹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같이 즐겨 먹지를 않았나보다. 육포 해놓고 즐겨 먹다가 체해서 죽을 고생을 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온 몸이 퉁퉁 부어서 무엇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이 부어 있었다. 들마루에 앉아 있는데 고모가 엄마에게 “언니 쟤 먹고싶은 거 먹여 보내야겠어요” 엄마는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팥밥”했다. 찹쌀에 팥을 넣고 찰밥을 해서 주었다.
이상하게 그 밥을 먹고 체한 게 내려가 나았다. 그 다음부터는 고기 냄새만 맡아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했다. 쟤 먹고싶은 거 먹여 보내야겠어요, 한 뜻을 지금은 알 수 있다. 내가 성인이 되어 신대아주머니한테 생명의 은인이라고 장에서 만나면 술과 식사를 대접해 드렸다.
오늘은 사목재 고개가 그립다. 부모님 얼굴이 겹쳐서 보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봄은 다시 오건만 이제 그 시간은 내 기억 속에서 살아있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홀로 고향에서 바라본 그 고개는 어쩌면 오랜 세월을 지켜낸 나의 모습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