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면 월전리] 구진벼루 절벽 아래로 백제 성왕의 외침이 들리는 곳
[군서면 월전리] 구진벼루 절벽 아래로 백제 성왕의 외침이 들리는 곳
<월전리...1995년 1월 14일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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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5.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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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서면 월전리

군서면 월전리는 말무덤재를 넘어 마을로 들어서면서부터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월전리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군서면을 휘돌아 옥천읍으로 나갈 마지막 채비를 하고 달려드는 서화천 물에 귀를 기울여 보면 함성은 함성대로, 아우성은 아우성대로, 거기에다 6.25 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많은 원혼들이 잠겨있는 듯 하다.

월전리 초입에 있는 유일한 진입로인 다리를 건너서면 주변의 포도밭 너머로 구진벼루 높다란 절벽이 휘어진 병풍마냥 눈길을 끈다.  94년 세상을 떠난 향토사학자고 한은섭씨는 이곳을 두고 마땅히 '사적지'로 지정되어 보존해야 할 곳이라고 강조했었다.

고대 백제의 중흥을 앞세우며 내달리던 성왕의 최후가 있었던 곳. 백제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이곳 월전리 구진벼루에서 생기게 되었으며, 그후로도 중요한 길목으로 숱한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었으므로 옛 선조들이 월전리를 '군전(軍田)이라 불러온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이름 때문인지 마을은 전쟁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구진벼루 산날 등으로 타고 오르면 국도 건너로 공원묘지가 있다. 공원묘지 부근은 옛부터 '말무덤'이란 지명을 갖고 있다.  말무덤을 아래로 관성산을 오르면 백제,신라의 접경 역할을 했던 관산성. 관산성에서 월전리 구진벼루까지 내달리는 길은 한걸음에 불과하다.  성왕이 최후를 맞았다고 알려지는 이 구진벼루 위 날등은 지형상 쫓기는 편에 매우 불리한 형세다. 아무튼 관산성-말무덤-구진벼루에 이르는 전쟁의 역사는 우리의 현대사인 6.25 전쟁에까지 미친다.

국군이 북진해 올 때 역시 말무덤에서 진을 치고 인민군들은 구진벼루 날등으로 후퇴하며 밤새 교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된다.  6.25 전쟁 당시로 따지자면 아픈 상처를 간직한 곳도 월전리이다. 대부분이 양민으로 무고한 희생이 많았던 보도연맹원 학살이 주로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말무덤재와 용바위 앞 논, 월전리는 아니지만 오동리 칠례수양관 앞 등이 그곳.

군내에서 이제까지 알려진 네 곳의 학살장소 중 세 곳이 월전리 주변이란 사실이 역사의 상처를 되새겨준다. 현재도 이곳에 군부대가 위치해 있으니 지형상 중요한 위치라는 점이 확인됨과 동시에 묘하게도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월전리의 얘깃거리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서화전에서 용이 되려다 승천하지 못하고 바위가 되었다는 유명한 전설을 간직한 마을이기도 하다.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풍수지리학상 용바위 날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장군대좌라는 명당이 있다는 사실.  예전에 옥천관아에서 아전을 살았던 문화유씨가 동네 물방아거리 주막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쓰러진 나그네를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약을 지어먹여 살려줬더니 그 나그네가 터를 잡아줬다는 곳이 이곳 장군대좌.

문화유씨네는 이곳에 묘를 쓰고 무주로 이사를 가서는 9대째 천석꾼으로 인정을 베풀며 살았다는 얘기를 정구현(65) 노인회장이 전한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큰 장사가 난다 하여 장군대좌에서 내려온 혈맥을 끊었다 전한다. 이름하여 쑥고개.  월전리 부근의 풍수지리에 밝은 정구현 노인회장은 장군대좌로부터 흐른 날등이 옛날부터 사람이 다니던 큰 길도 아닐진대 끊겼다는 것은 일본인에 의한 이 땅의 혈맥끊기로 봐야 한다는 말을 한다.

구진벼루가 끝나는 지점의 서화천 건너 골짜기에 있는 한천(일명 찬생)은 옛부터 월전리 주민들의 끊기지 않는 수원으로 통한다.  이 물은 골짜기 일대 1만2천평의 용수로 충분할 뿐만 아니라 55년전 에도 지난해 극심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물이 흘러 인근에 논을 가진 주민들은 가뭄 피해를 입지 않았을 정도였다.
  54가구 1백54명이 살고 있는 이곳 월전리는 군부대 쪽 다리골-월곡(月谷)과 군전이 합쳐져 생긴 명칭이다. 다리골에는 한때 14가구가지 살았으나 지금은 5가구밖에 남지 않은 채 각종 공장들이 입주해 가동하고 있다.  벼농사 이외의 소득원은 포도와 복숭아 등의 과수 농사. 이미 작고했지만 고 정병구씨가 도입한 포도는 아마도 군서면내에서 최초라는게 주민들의 말이다.

포도농가는 10호, 복숭아 재배농가는 7호, 여기에 사과 재배농가는 3호에 달한다. 상대적으로 사과 재배면적이 가장 넓으며 옥천군 사과협회 이성열 회장의 과수 재배면적이 가장 넓다. 옛부터 월전리는 하동정씨의 집성촌으로 54가구 중 절반이 넘는 집성촌으로 54가구 중 절반이 넘는 28호가 지금도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 금씨가 6가구 거주하고 있는데 정씨 문중의 경우 정성현 이장의 16대조 산소가 마을에 있으니 월전리로 들어온 지는 약 5백년이 되는 셈.

마을로 진입하는 진입로가 급커브로 이루어져 진입로를 다시 개설해야 한다는 숙원을 안고 있으며, 현재 죽향초교 학구로 되어 있는 학구를 군서초교나 삼양초교로 조정해 어린이들의 교통편의를 도와야 한다는 여론도 제기되고 있다.  군전 마을 금기대씨는 마을에서 효자로 손꼽히며, 정택규(현대건설 이사)씨와 정자현(군북면 거주)씨 등이 마을에 잘 알려진 출향인이다. 현재 마을주민들의 농가소득 비율은 그리 높지 않으며 많은 가정들이 회사 등을 다니며 받는 월급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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