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면 은행리] 중봉 선생 숨결 깃든 860년 된 은행나무
[군서면 은행리] 중봉 선생 숨결 깃든 860년 된 은행나무
<은행리...1995년 12월 23일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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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5.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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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서면 은행리

"축사를 짓든, 방을 들이든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해요."  "자기 땅을 주고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게 어디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서화천 건너는 별다른 규제없이 집도 짓고 축사도 짓고 하잖아. 하천 하나 사이로 우리 마을은 마음대로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말이나 돼!"

"도대체 개발제한 구역이라고 해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거야. 아니면 무슨 지원사업을 제대로 해줘...."  "재산권 행사권리를 딱 막아놓고 도대체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고 하는거야." 마을 경로당에 모인 대여섯명 은행리 주민들의 항의성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바로 군서면의 절반 가까이가 대전권 도심지의 무분별한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다는 데에 대해 주민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묘하나 쓰는데도 일정한 절차 없이는 불가능했던 시절을 되짚는 이들의 항의는 '그린벨트 지역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실제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모른다'는 현실론에서 출발한다.

내 터를 두고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이들 주민들의 억울한 심정은 당장 어느 곳에든 한바탕 퍼붓기라도 해야 스트레스가 풀릴 정도가 된다.  이렇듯 주민들이 느끼는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최근 환경부가 대청호 수질을 좀더 개선하겠다는 목표 아래 마련한 고시 개정안은 엎친데 덮친 장애물로 밖에는 인식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환경부의 고시 개정안을 보는 주민들의 시각은 더욱 예민한 상황. '그린벨트를 실질적으로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국회의원으로 찍어줄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는 것도 결코 무리한 얘기가 아니다.  은행리(銀杏里)는 본래 군서면 은행정리(銀杏亭里)에 속해 있었다. 1739년, 1890년의 기록에 각각 56호, 67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개편시 사정리와 은행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주민들록상 1백5세대, 3백44명이 살고 있으니 옛날 보다는 거주 인구가 많이 늘어난 셈이다.  은행리는 옛부터 '양심이'라고 하여 '웃양심이', '아랫양심이' 등 2개 마을로 나뉘어져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조선 초기 이곳을 지나던 한 도사가 "이곳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으니 은행리라고 부르면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하여 '은행리'라고 부른 것이라 한다. 물론 마을 지명을 바꾸게 한 은행나무는 수령이 8백60여년 된 나무로 지금도 살아 봄이면 잎을 피우고 가을이면 은행 열매를 맺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은행나무는 주민들로부터 특히 '효자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하기 때문이다.  마을 이름을 지어준 그 도사는 바로 무학대사로 당시 나무를 살펴보다가 그 나무가 죽게 될 것을 예언하다가 곧 '의로운 사람이 지나게 되어 괜찮을 것'이라고 덧붙였다는데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조헌 선생과 의병들이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전한다.  의병들이 쉴 때에 실수로 인해 불이 붙어 나무 원둥치가 불타게 되었는데 이듬해 불타지 않은 둥치에서 뿌리가 돋아 기울어지는 은행나무를 받쳐 지금도 원둥치를 가지들이 울타리마냥 둘러싸고 있어 효자목의 유래를 가늠케 한다.

은행리는 60년대부터 딸기의 주산지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지금은 7가구 밖에 남지 않았으나 5∼6년 전인 90년까지는 빈 논이 없이 80∼90%가 딸기농사로 소득을 올렸다. 지금은 그 자리를 포도가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포도의 경우 이제 내리막길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어 누구도 쉽게 포도를 소득작목으로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마을을 중심으로 성재, 매봉재, 말목재, 망덕산, 닭재 등 크고 작은 재와 산들이 둘어싸여 있고 성재에는 옛날 삼국시대의 성터가 남아 있어 군내 일원의 성터와 더불어 이곳이 삼국시대 신라, 백제의 접경지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다른 마을과는 특이한 점으로 은행리에는 마을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구성된 이 장학회는 1천만원의 기금을 조성, 해마다 60만원의 장학금을 대학입학생 및 중.고교생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마을 장학회는 육완득(대전 거주), 김석현씨 등 인사들이 당시로서는 큰 금액인 1백만원씩의 기금을 기탁해옴으로써 형성할 수 있었다.  딸기, 포도 등의 소득작물을 주로 재배해온 주민들은 이제 배, 복숭아 등 새로운 과수 재배에 눈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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