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면 묘금리] 괴골, 방아골, 쇠종골이 한마을 이룬 산골마을
[청성면 묘금리] 괴골, 방아골, 쇠종골이 한마을 이룬 산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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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2.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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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금리 전경

청성면 묘금리(描金里)는 괴골(묘동), 방아골(용동), 쇠종골(금점) 등 3개 자연마을로 경부고속도로가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산골 마을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양저리와 함게 청산현 남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조정시 청산현이 폐지되고 옥천군으로 묶이면서 양저리와 분리, 단일 행정단위를 이루게 되었다.  묘금리를 이루고 있는 자연마을이 형성되게 된 유래나 그에 얽힌 주민들간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흥미있는 마을 얘기가 된다.

마을 전체 가구수는 현재 50여호에 이른다. 이중 규모가 가장 큰 방아골에는 25호 가량이 거주한다.  본래 방아골은 마을이 '방아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방아골이라고 불려왔으며, 이를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용동이라고도 불렀다. 주민들에 따르면 발동기로 방아를 찧던 시절에는 묘하게도 방아골에서는 멀쩡하던 발동기가 잘 안돈다든지 해서 방아찧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한다.

방아골에서 방아가 잘 안찧어졌던 일을 마을 지명과 연관지어 생각하려는 주민들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방아골에는 이 부근 초등교육의 요람인 묘금초교가 해방 이전부터 설립돼 인재 양성의 산실 역할을 했다.  묘한 일은 현재 학교가 들어선 곳의 자연지명이 문동골(文童谷)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글을 읽는 지형에 학교가 들어선 것이다.

방아골은 겨울만 되면 해가 두 번 뜬다. 오전과 오후 뒷산인 쇠말봉과 알산 봉우리에 가려 해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13호가 거주하는 괴골은 묘금리에서 두 번째로 크다.  본래 괴골이었는데 괴를 고양이로 발음하여 묘동(描洞)이라고 했다. 이 마을에는 남편이든 부인이든 서씨가 없다. 말하자면 고양이 마을에 쥐가 살 수 있느냐는 얘기다. 주민들은 서씨가 살았던 예도 없고 살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묘동이 된 이유가 어떻든 성씨, 그것도 쥐를 뜻하는 서(鼠)와는 관계없는 서씨가 이 마을에는 살지 못한다는 주민들의 정서가 흥미롭다. 

한때 여양진씨의 집성촌이기도 했던 괴골은 나름대로 '괴골양반 소금자루 검다'라는 말이 아직까지 전해질 정도로 풍부한 얘기 소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 마을에 9대에 걸쳐 진사를 살았던 박씨 문중의 일화가 어느덧 마을 전체주민을 뜻하는 말로 확대된 것인데 박씨 문중의 소금자루는 여느 것과 달라서 비단자루였고 대를 이어 내려와 검게 손때가 묻어 있었단다.

방아골에 있었던 소금장수에게 신용이 좋았던 박진사네에게는 외상거래도 가능했고 당장 돈이 없는 이웃주민들도 이 소금자루를 빌려가면 외상도 가능했다는 얘긴데 요즘은 '괴골양반 소금자루는 검어도 인물은 미끈하네'로 바뀌었다고 주민들은 넉살이다.  3개 자연마을 중 가장 적은 규모인 쇠종골은 옛부터 쇠붙이와 관련이 깊었다. 일제 때는 광산 개발도 시도했었다는 쇠종골은 주민들이 어릴적에는 돌을 주워 자석에 붙여도 붙었다고 얘기할 만큼 철 성분이 있는 지형이다.

쇠종골 앞 논에 있는 선돌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이 마을에 거주했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각 자연마을의 생활은 조금씩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방아골이 축산을 주요 소득원으로 한다면, 괴골은 고추와 호두.감 등을 많이 생산한다.  괴골의 호두 생산은 청성면 내에서도 유명하며 농한기면 다른 곳으로부터 호두를 사들이기도 해서 제품을 만든다.

많이 하는 집은 1가구당 호두 부수입만으로 7∼8백만원에 달한다. 최근엔 청설모(날다람쥐) 피해가 많아 1년에 1집당 50마리에서 1백마리까지 잡는 경우도 있다. 주민들이 청설모 피해 대책에 골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쇠종골은 주로 참깨, 고추 등 밭작물이 주요 농산품이다. 3개 마을 중 가장 노령화가 심한 지역이며 주로 자가소비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을이 각기 분리 되어 있는 관계로 생활은 주로 자연마을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94년까지 3개 마을이 돌아가며 1년에 1번씩 개최하던 경로잔치가 쇠종골의 전반적 노령화 등으로 오히려 노인들에게 부담만 안겨주는 역작용을 가져온 끝에 95년부터 중단돼 아쉬움을 더해준다.

그동안 마을 숙원이었던 괴골 진입로가 95년 공사를 통해 확장되어 주민편의를 도모하게 되었으며, 97년엔 포장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괴골 진입로 확장에는 주재국(서울), 제종천(서울), 진원범(서울), 박우용(대전)씨 등의 출향인이 도움을 주었다.  산간 마을인 만큼 주민들은 곳곳에 늘어나는 유휴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해 과수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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