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면 증산리] 금천천 낀 옛 고시산군 소재지, 유서 깊어
[군서면 증산리] 금천천 낀 옛 고시산군 소재지, 유서 깊어
<증산리...1994년 8월 20일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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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4.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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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서면 증산리

사철 맑은 물이 흘러 금천(金川)이라 했던가. 군서면 증산리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자연보다도 더욱 깨끗하고 숭고한 인간의 근본 심성이 자리하고 있다.사철 맑은 금천을 바라보며 서있는 2기의 효자문과 1기의 효녀문은 군내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이은 얘깃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들 효자문과 효녀문은 1백53년을 사이에 두고 고조부와 고손자의 대이은 효행을 기리고 있을 뿐 아니라 몸종의 신분으로 주인과 생사를 함께한 한 노비의 애틋한 사연을 담고 있다.  대를 이어 조정에서 효자문을 내렸을 정도로 지극했던 효행은 오늘날 증산리 주민들의 기본심성으로 계승되었다.

울창한 나무 숲 속에  위치한 효자문은 함창김씨인 김영복 공과 김 건공의 효자문, 그리고 김영복 공의 몸종이었던 옥금의 효녀문이다.  김영복 공은 고려시대인 1345년 출생했는데 25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자 갖은 약을 다 구해드리는 것은 물론 잉어까지 잡아다 천수를 누리도록 해주었다.  어릴때부터 효행이 지극했던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여막을 짓고 시묘했으며 1405년 조선 태종 5년 자신의 집에 불이 나 아버지를 두 번 죽게 한 불효막심한 놈이 무슨 낯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겠느냐'며 불길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를 본 그의 몸종인 옥금도 주인이 타죽는데 종이 살아서 무엇하느냐며 불속에 뛰어들어 주인과 생사를 같이 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1407년 태종은 각각 효자 정문과 효녀문을 내렸으며 그후 이 마을은 '효자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1백53년이 지난 1560년 명종 15년에는 김영복 공의 고손자인 김 건 효자가 조정으로부터 효자문을 받았는데 고조부인 김영복 공의 효자문과 나란히 한 지붕 밑에 세워졌다.

물론 함창김씨 가문의 영예이기도 하거니와 '효자동'이라 불렸던 증산리 온주민들도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주민들은 맑은 심성을 갖고 서로 도우며 산다.  모두 53가구에 달하는 주민들 중 처음부터 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40호 가량이다. 나머지 13가구는 평곡리와 맞닿은 경계지점에 '태일금속', '성원기계', '서화공업', '옥포직물' 등 4개 중소기업체가 입주하면서 늘어난 가족들이다.

따지고 보면 증산(甑山)리란 마을 명칭은 주위 지형과 관계가 깊다. 이곳의 옛 지명은 본래 '시림이'로 이를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시루 증(甑)자를 써 증산이라 했다. 항간에 는 마을 뒷산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어 마을 터가 사납다는 얘기가 펴져 있으며 한때 터를 다지기 위해 집집마다 굿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이곳은 신라시대 당시 옥천군의 옛 명칭이었던 고시산군의 소재지였던 곳으로 알려진 유서깊은 마을이다. 자연마을로 '시름이'와 '음지서화'가 금천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어 있는데 시름이가 더욱 큰 마을이다.

현재 마을의 주소득원은 역시 포도. 원래 거주했던 40호 가운데 33호가 포도 재배농가로 군서면 지역에서는 가장 오랜 재배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주인공은 이규대(73) 노인회장으로 금천리 김형구씨와 함께 50년대 후반 군서에 포도를 도입한 장본인이다.  당시 면 전체 포도단지 회장을 맡기도 한 이씨는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포도를 재배해온 산증인이며 이씨와 함께 이양우씨, 김종렬씨 등도 초창기에 포도재배를 시작한 농민으로 꼽힌다.

현재 17명이 회원으로 가입된 포도작목반(회장 김영수)에서는 앞으로 시설하우스 도입 등 농가소득을 좀더 올리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6가구가 늦포도 품종인 세레단을 심어 홍수 출하에 따른 가격 폭락 등에 대비하고 있으며 이곳 포도는 '서화포도' 또는 '금천포도'라는 상표를 달고 출하된다.  올해는 가뭄 때문에 발아포도가 많아져 주민소득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대두되고 있다.

옛부터 서로 돕고 사는 마을 인심을 지켜왔던 터라 마을의 한 주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발벗고 나서 내 일처럼 하는 것은 물론, 주민들의 생일이 돌아올 때면 으레 아침에다 술까지 곁들이 마을잔치로 확산되는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지난 8월 초 태풍의 영향으로 마을내 김종렬씨의 포도하우스가 파손되었을 때 군부대 장병들을 지원받아 청년회 회원들이 모두 나서 깨끗이 복구해준 사실은 마을내 협동의 '백미'로 불릴 만하다.

포도작목반 회장이기도 한 김영수씨가 회장으로 있는 마을 청년회는 말 그대로 마을의 무슨 일이 있으면 적극 해결에 나서는 마을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출향인이 몇 안돼 출향인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한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성국(서울거주), 정중희(대전거주), 김상식(대전거주)씨 등이 마을을 자주 찾는 출향인이다  비록 올해 극심한 가뭄으로 마르기는 했지만 맑은 금천천을 끼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증산리에는 고운 심성을 가진 주민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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