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옥각리] 400년된 은행나무가 지키는 곳, 봉화금씨 문중 본거지
[옥천읍 옥각리] 400년된 은행나무가 지키는 곳, 봉화금씨 문중 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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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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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읍 옥각리

마을 앞 야트막한 산기슭에는 여러가지 잡목 등과 함께 훌쩍 솟아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나이가 400여년에 높이가 34m, 둘레가 7m로 동이면 남곡리, 군서면 은행리 은행나무 등 군내에 5그루 밖에 없는 군 보호수 가운데 하나다.

주민들이 이 은행나무를 좀더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 그중 하나가 이 은행나무에 전해 오는 짧막한 전설 때문이다.

조선시대 말엽의 어느 시기. 은행나무로서 나무가 좋은 것을 확인한 한 목재상이 이 나무를 베기 위해 벌목을 시도했고 그 순간부터 나무에서는 요란한 곡성이 나왔다. 그래서 벌목은 중단되었고 은행나무를 베려던 그 목수는 3개월 후에 결국은 죽고 말았다는 얘기.  나무에 영험이 있어서인가?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얘기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이 은행나무와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대표적인 전설이 되었고 그만큼 나무는 주민들에게 신비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은행나무는 매년 주민들의 마을 기금 모으기에도 도움을 준다. 매년 추석을 전후해 이 나무에 달린 은행을 수확해 파는 것이 그것이다. 많이 수확할 땐 30말씩 수확했다고 하며 지난 95년만 해도 은행을 팔아 25만원의 마을기금을 적립했다. 마을 기금을 모아주는 듬직한 재원이기도 한 셈.

옥천읍 옥각리는 본래 군서면 서정자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옥곤리(玉崑里)와 각신리(覺新里)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옥각리로 되어 옥천읍에 소속되었다.  말하자면 옥각리란 법정리동상 지명이고 각신리와 분리되어 별도로 이장이 있게 된 지금 우리가 보고자 하는 마을은 정확히 옥곤리인 셈이다.

옥곤리란 지명은 일부에서는 마을 뒷산에 차돌이 옥(玉)같이 박혔다 해서 생겼다는 설명이 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마을이 옥같이 맑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생겼다는 설명도 있어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단정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어떤 유래를 선택하든 마을이 옥과 연관되어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편이 이해가 쉽다. 옥곤이란 지명은 점차 '외꼰'이라고 변형되기도 했다.

옥각리와 서화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지당은 도 유향문화재 제42호이다. 이지당은 비록 위치는 군북면 이백리에 있지만 옥각리 사람들과 연관이 많다.  이지당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자 의병장인 중봉 조 헌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던 서당으로 한동안 퇴락해 있던 것을 1901년 옥각리의 금씨, 안씨, 조씨 등의 문중에서 주축이 되어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지당의 관리는 현재 이들 문중에서 돌아가며 관리를 하고 있다. 이를 보면 이지당은 비록 위치는 이백리이나 옥각리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1996년 현재 마을의 가구수는 모두 130여 세대. 옥천읍 외곽지에 있는 마을 치고는 규모가 꽤 큰 편이다. 다행히 조선 말의 기록이 있어 비교가 가능하다.  1890년 나타나는 기록에는 옥곤리에 33호가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과 비교하면 100호가 늘어난 것이다.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540년 전인 1460년께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일각에서는 봉화금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고 일부에서는 순흥안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는데 96년 현재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문중만 따진다면 금씨가 마을 전체 세대의 거의 절반이 넘는 70여세대에 달하고 안씨는 10여호에 달한다.  특히 봉화금씨 문중은 이곳에서 터를 잡은 후 이원면 윤정리 등지로 자손이 퍼져 나가는 등 옥천에서 봉화금씨 본거지 역할을 해온 유서깊은 마을이다.

이곳 마을은 현재 변화의 물결이 치고 있다. 한때 옥천공고 존속론이 대두되었을 때는 마을 뒤 야산을 정리, 학교 터로 활용한다면 최적의 터가 될 것이라며 대학유치 신청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무산되고 말기는 했지만 최근들어서는 경부고속도로 선형개량공사와 관련, 4차선으로 확장되는 37호 국도와 연계, 옥각리에 옥천 인터체인지가 들어설 계획이어서 바야흐로 교통의 요충지로 변화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하고 있는 농사는 특작이 없고 대부분 벼농사 위주의 경작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마을에는 전임 읍면장을 지냈던 이상욱씨와 금기훈씨가 살고 있으며, 99년 현재 군 기획감사실장을 맡고 있는 금효길씨가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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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옥천사랑 2021-02-22 09:01:28
三韓拾遺紀 琴氏는 音卞國 出身

奉化琴氏始祖 琴容式
琴克儀(琴儀)-琴輝-琴應倫-琴 薰-琴允義-琴遇工-琴用和,琴以和-琴滌,琴淑-琴克諧,琴克和-琴柔- 琴少詠-琴梓.琴時述-琴應浹-琴撥.(應壎)-


奉化琴氏系譜
琴應-琴容式-琴得璜-琴卓英(神虎衛散員,上將軍贈職)-琴忠立(檢校太子少保,左僕射)-唐就(昌安宅衙典左僕射贈職) 配位:利川徐氏 檢校軍器監右丞) 徐淑의딸, 利川郡大夫人-(琴克儀),琴傅-琴暌-琴成禮-琴英且-琴順適-琴自奇-
-琴義墓誌銘-

琴容式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奉化琴氏의 始祖로 太祖의 事業 도와 高麗開國三韓壁上功臣에 策錄되었다. 食邑으로 金浦를 賜籍받았다. 後孫 琴遇工 代에 慶北 東北端에 位置한 奉化 祥雲面으로 터를 옮겼다.

始祖 琴容式 高麗初 三韓壁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