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서정리] 노인.어린이 위한 잔치 마련, 마을화합 도모
[옥천읍 서정리] 노인.어린이 위한 잔치 마련, 마을화합 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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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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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읍 서정리

옥천읍 서정리는 역사적으로도 전략적 위치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지역으로 여겨왔다. 우선 서정리(西亭里)란 지명은 말그대로 '서쪽에 있는 정자'라는 뜻에서 서정자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서정리는 바로 행정관아의 서쪽에 있는 정자가 있는 마을을 의미했고 최근들어 그 기록이 확인되어 지명의 유래가 사실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옥천읍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서정자와 동정자가 있었는데 서정자는 기묘사화를 피해 낙향한 순흥안씨 문중의 안사전 공이 1518년께 당골 왼쪽 야트막한 산마루에 축조한 것으로 지난해 2월에서야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순흥안씨 문중인 안후영씨와 향토 사학자 정수병씨의 노력에 의해 찾아진 것으로 마을 지명이 유래된 확실한 근거가 찾아진 것이기에 자뭇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서정자는 옥천읍 동정리(東亭里)에서 역시 거의 같은 시기에 확인된 동정자 터보다 30여년 앞선 것으로 우리 고장 지명 연구의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경부선 철로 서정리 터널 바로 옆 산기슭에서 안사전 공이 바위에 앉아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과 함께 안씨 문중에서 세운 유허비를 비교해 볼 때 지금의 서화천은 바로 현재의 경부선 철로 노선과 거의 같은 방향으로 휘돌아 나갔음을 알려주는 옛 자료로 분석되고 있다.  서정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군서면에 속해 있었다. 현재 삼양리 네거리에 있는 교량의 이름이 군서교라는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면이다.

서정리는 특히 옛부터 중요한 요충지로 꼽혔다. 국도 아래쪽의 자연마을 지명이 '진터벌'인 까닭은 그 옛날 동학농민 전쟁시 이곳에서 농민군과 일본군, 관군이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지금은 비록 고속도로가 나 있지만 옥천읍 삼양리 삼거리를 통해 서정리를 지나야 대전-서울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접근로가 된다는 점이 이곳이 요충지임을 알게 해준다.

6.25 전쟁 때에도 마을의 위치적 요인으로 인해 폭격을 맞아 적어도 5∼6가구는 불타버리고 여기서 전투를 벌이다 많은 수의 인민군이 죽었다는 증언이 주민들을 통해 확인된다.  이밖에 국도위 철도 건널목 건너 마을은 청진말, 사람이 거주하다 이제는 거주하지 않는 터로 변한 무터리, 삼양리와 경계를 이룬 서산성 부근은 성밀, 철로 너머로 당골 등의 자연명칭을 갖고 있다.

서정리에는 현재 110여가구 350여명의 주민들이 산다. 옥천읍의 중심가가 아닌 마을치고는 제법 큰 규모로 볼 수 있다. 마을 규모는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달리 변함은 없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젊은이들이 직장을 따라 나가 사는 것은 비슷하지만 부모들은 마을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사는 모양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직장이나 기타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다.

도심 속의 마을도 아니고 전형적인 농촌 마을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의 마을이 된 점이 이 마을의 규모가 비교적 안정세를 보이고 있는 요인이기도하다.  따지고 보면 옥천읍 중심가와 그리 멀지 않고 대전 쪽으로도 어찌 보면 멀지 않은 위치여서 비록 철로가 마을을 둘로 나누고 또 국도가 마을 중앙을 관통해도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든다.

마을 주민들은 '옛날에는 참 살기 좋았던 마을'이라고 푸념하듯 말하지만 지금이라도 살기가 나쁜 마을은 아니다. 여전히 마을 인심이 있고 우애가 있으며 상경하애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마을은 지난 77년에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통해 일제히 정비하기도 했다. 후진국 등을 대상으로 외국인 홍보마을이기도 했다는 서정리는 옛부터 새마을운동 등의 영향으로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체력단련 시설, 마을 어린이 놀이터 등의 시설이 비교적 잘 가꿔져오기도 했다.

단합을 잘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주민들은 5월의 경로잔치도 다른 마을과는 특별하게 마련한다. 5월5일을 기해 마을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와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잔치를 함께 마련해온 지가 올해로 4년째다. 어린이날을 마을 자체적으로 기념해 어른들의 본보기를 보며 효행심을 키우도록 한다는 복안이 깔려 있다.

철로로 마을이 양분되어 있다 보니 사실은 불편한 점이 많다. 비록 자동 차단기는 만들어져 있으나 건널목 통행시의 어려움도 있고 열차 통과시의 소음공해 문제도 있다. 역시 열차로 인한 안전사고 예방 대책 마련과 철로가 통과하는 바람에 고립되어 마을이 진입로가 없어진 당골, 또는 굴너머 마을 8가구의 자유로운 통행방안 마련이 가장 큰 숙원으로 제기된다.

철로 때문에 건널목 하나를 건너야 하는 윗마을의 토지 공시지가가 아랫마을의 절반 정도에 그치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선의의 피해를 입고 있는 점. 마을 전체적으로는 황봉하(64)씨가 마을의 일꾼으로 꼽히고 있으며, 심의회 등 출향인 및 주민들간의 연령별 모임이 활성화 돼 마을 활성화를 이끌고 있다.  교육청 박재학 장학사와 박외과 박재금 원장, 정인영 전 군북면장 등이 이마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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