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면 석탄2리] 대청댐 건설로 비옥한 논밭 물에 잠겨
[동이면 석탄2리] 대청댐 건설로 비옥한 논밭 물에 잠겨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4.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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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면 석탄2리

마을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래된 구석이라곤 찾아볼 도리가 없다. 전통도 좋고 옛 것도 좋다지만 석탄2리에서는 처음부터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37가구 1백30여 주민들이 고만고만하니 그렇게 살고 있는 곳이 바로 동이면 석탄2리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석탄2리란 지명이나 마을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다만 선돌이나 고인돌 등 이 고장이 선사유적의 보고라는 점을 확신시켜준 안터 유적지가 있는 석탄리가 있었을 뿐.

사람들이 물을 자원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목적아래 대청다목적댐이 건설되었고 옥천을 수려한 호반도시로 가꾼다는 핑크빛 미래가 정부의 설계이자 대주민 홍보안이었다. 그 와중에서 석탄2리는 탄생했다.

핑크빛 미래가 제시되었건만 정작 이 주민들에게는 낯설움과 고향을 잃는다는 설움이 더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 간척한 간척지로 떠나갔고 인근에 정착한 사람들이 이 마을을 이루었다. 30여호 남짓. 처음 석탄2리를 이루었을 땐 어설프기도 했지만 고향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은 그나마 위안이 되기도 했다.

수몰되기 전 인근 지역에서는 물론 옥천읍에서까지 비싸게 거래되었던 비옥한 논밭은 거의 물에 잠기고 논밭을 따라 옮겨온 이곳에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물을 가두어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수답이 대부분이다. 그것마저 모자란 것이 이곳의 현실이고 보면 석탄리 주민들의 한은 누구의 말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37가구 중 논밭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있는 가구수는 20여 가구. 나머지 15가구는 한 뙈기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다. 농사거리라야 예전부터 전해 내려온 벼농사가 고작이다.

조충렬 이장이 지난해 포도재배를 시작한 것 등을 제외하고는 소득작물 개발 여파는 전혀 이곳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몇몇 젊은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나 대부분이 막노동판에서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마을의 현재를 규정짓고 있는 이 모든 현상들은 따지고 보면 대청댐 수몰로 인해 파생된 것들이다. 마을전체적으로 2만평 정도의 농경지로는 처음부터 땅에서 높은 소득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돈다고 조충렬 이장이 한숨이다.

그중 부지런한 사람들은 남의 땅께나 부치고 부인은 식당 등에서 일하는 등 맞벌이로 소득을 보전한다. 이런 이유로 주민들은 당장 석탄2리가 자랑거리도 없고 가장 빈약한 마을이라고 생각한다.  어렵게 짓고 있는 농사임에도 가물면 가물 때 대로 시달려야 하는 천수답이 대부분이니 농민들의 어려움은 더욱 크다. 이 까닭에 농업용수를 얻기 위한 관정 시설은 이젠 숙원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불러 시추해 보았으나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똑같은 대답만 얻었을 뿐이다. 이쯤 되자 먹을 물조차 마을 주민들의 심사를 편치 못하게 하고 있다.  어찌 어찌해서 먹을 물을 찾기는 했으나 충분한 분량이 안돼 현재 주민들은 아침, 저녁으로 제한급수를 하는 등 불편을 겪고 있다. 제한급수를 하지 않아도 먹을 물이 충분하게 하기 위해 주민들은 아예 물이 나오는 땅을 매입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행정상으로야 석탄 1,2리로 나뉘어졌지만 실제 생활은 별 차이가 없다. 진작부터 꾸려오던 상여계가 두 마을 주민들을 아직까지는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네 마을, 내 마을 하는 식의 분리 의식이 없어 무슨 일이 생기면 함께 돕는다.  현재 석탄1리와 2리를 연결시키는 도로포장공사가 한창이다. 기존의 남곡리로 돌아가는 도로가 있긴 하지만 커브가 심해 몇 번씩이나 사고위험에 부딪혀 오히려 주민들이 불안해 했으나 이 도로가 완공되면 주민들의 주요 교통로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80년당시 30여호에 달하던 가구수는 그후 지양리가 고향인 박춘임씨가 개척한 지석교회를 비롯, 오히려 가구수가 늘었고 현재 20호가 살고 있는 자연명칭 '산을기'가 가장 큰 마을이 되었다.  물로 인해 수몰된 마을을 떠나 살곳을 찾아 나선 이곳 주민들. 아직까지 대청호가 만수위가 되면 마을의 코 앞까지 물이 들어차 영락없이 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 되었다.  시 '농사꾼'으로 문단에 데뷔한 향토시인 김덕관씨가 이렇게 고향을 노래한다.


"내 고향 옥천" 철봉산 구비구비 휘어 돌아 금강물 흘러가고/모래미 고갯길 산 열매들/고운 빛깔로 산딸기는 부끄러운 듯 황혼빛에 물들고/시집간 누나와 향수에 젖던 실개천/포도송이 종알종알 수놓은 기슭/메밀꽃 행복스러운 듯 벌거벗은 내 고향 옥천에/밤이면 밤마다 덧없이 소쩍새는 예정이 그리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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