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면 월외리] 시골인심 살아있는 곳, 출향인 고향관심 유별
[안내면 월외리] 시골인심 살아있는 곳, 출향인 고향관심 유별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2.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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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면 월외리

오후 3시께, 논이나 밭에서 일하기가 여간 어려운 상황이 아니다. 농민들이 하루중 유일하게 점심을 먹은 후 잠시 짬을 내 쉴틈인 것이다. 그동안 집집마다 선풍기 대신 부채가 땀을 식혀주고 있었고 이 마을에서 가장 연로한 박홍훈(95) 할아버지 역시 한낮 더위를 피해 단잠을 청하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취재일행에 어리둥절하던 박씨의 아들 박동운(74)씨, 함순옥(59)씨 부부가 그동안의 내력을 천천히 풀어나간다.  효자에게서 장수부모가 나온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박씨부부는 8명에 이르는 자녀를 모두 도시로 내보낸 채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다.

박씨는 이 월외리는 조선중기인 임진왜란 당시 밀양박씨 할아버지가 서답벌에 움막을 짓고 살게된 것이 첫 마을형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달이 하늘 중천에 올때만 달을 볼 수가 있다'는 뜻으로 처음엔 `달외' `다리' 등으로 불리다가 달의 바깥이라는 뜻으로 `月外'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기록에는 밀양박씨와 함께 경주이씨가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해 이중 박씨집안이 20가구에 이른다.

현재 59가구에 200여 주민들이 평이하게 벼농사를 중심으로 생활응 영위하고 있으며 그동안 주소득원이었던 담배농사도 노동력 부족과 수입하락 등의 원인으로 11가구만이 짓고 있을 뿐이다.  신월동, 용골, 본동, 서답벌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감나무가 많고 여느 마을에 비해 흙벽돌집이 많은 것도 이 마을에 들어선 사람들로 하여금 정겨움을 주는 하나의 요인이다.

특별한 소득작목이 없는만큼 논보다 밭의 면적이 더 넓어 밭이 50.1ha에 이르고 논이 22.6ha에 달한다.  하루에 여섯번 비포장 도로를 따라 들어오던 시내버스가 군의 군도 확포장 공사에 따라 본동까지 말끔하게 포장되어 교통편리를 기하게 되었고 91년 말까지 보은군 수한면 장선리 군도와 맞닿게 되어 옥천-월외-보은간 노선으로의 시내버스 운행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고 있다.

특히 이 마을은 마을주민들과 출향인들간의 유대가 어느 마을보다 좋아 마을 공동사업을 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거리.  따라서 재경 월외향우회와 재대전월외향우회가 따로 구성될 정도로 단합이 잘 되고 고향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청년들이 많아 마을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90년 경로당 준공식때 이들의 지원이 사업비의 토대를 이루었으며 전화기를 사주는 한편 매년 기름값도 지원해주고 있음을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안교석씨를 비롯, 이영석(대전시 내동 언덕배기가든 대표)씨, 이흥석(옥천자동차학원장)씨, 염태진(대전시 문화동 삼성전자 문화동대리점 대표)씨, 박영목(영등포경찰서 정보과장)씨, 고낙진(상업), 안정호(교통부 해운항만청)씨, 어수천씨, 어수걸씨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와 함께 현재 군의원인 이인석씨와 엽연초생산협동조합장인 류덕융씨가 이곳에서 생활하며 군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물론 59가구 중 젊은이의 숫자는 극히 드물다. 30세에서 50세 미만의 숫자는 10여명으로 여느 마을과 같이 인력난을 겪고 있으나 반대로 결혼을 못해 문제가 되는 농촌노총각 문제는 없다.  젊은이들이 농촌에서 견뎌내질 못하고 도시로 빠져나간 결과이기도 하지만 마을 발전의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곧 세워진 마을자랑비는 월외리 입구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지켜주며 월외리임을 알릴 것이다.

도시로 나가 제 할일을 찾는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열심히 이 더위에 맞서며 들에 나가 있는 젊은이들 중 박정삼(35)씨는 담배, 고추 등 작물을 통해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나있다.  담배 10단(4천평)을 비롯, 소득작물재배에 힘을 쓰고 있는 박씨는 대전상고를 졸업, 82년 군 제대후 부인 추수남(29)씨와의 사이에 건중(6), 송이(2) 남매를 두면서 농촌에 정착, 91년만 해도 2천5백만원의 조수익을 올리는 농군으로 변모했다. 

"현재의 농촌이 막다른 길과 같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머리를 쓰면 오히려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봅니다"라며 자신감을 나타내는 박씨가 지키는 월외리는 이제 평이한 농촌에 소득작목으로 전환해 살길을 모색해가는 농촌으로 탈바꿈의 몸짓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역시 논의 면적이 좁은 관계로 경지정리를 못해 소류지라도 하나 조성했으면 하는 것이 주민의 바램.

마을 뒤에서 그윽히 마을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노성산과 앞산인 가재봉에서 6.25 당시 그토록 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도 다친 사람이 한사람도 없음은 노성산의 정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촌로, 본동 마을 한가운데 있는 공동샘터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아무리 가물어도 줄지않는 수량으로 마을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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