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면 인포리] 보도연맹 관련 죄없는 주민 15명 희생
[안내면 인포리] 보도연맹 관련 죄없는 주민 15명 희생
<1993년 12월 11일 취재>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3.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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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면 인포리

92년도 안내면 인포리에서 배정받았던 벼 수매량은 불과 400여개이다. 인포리 화인, 관곡, 걸포 등 3개 자연마을 70가구에 배정된 물량 치고는 1가구당 10개씩도 안되는 물량이다. 아무리 보아도 지나치다 싶다.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의 경우 한 농가가 100개 가까이 물량을 배정받는 경우에 비하면 너무 적다. 그러나 표면상의 이 수치가 나오기까지는 이 마을주민들의 슬픔과 한이 배어 있다.  1980년 대청댐 건설이 그 가장 큰 원인이다.

대청댐이 건설되기 이전 1970년대까지의 인포리 마을이 1, 2리로 나뉘어져 있을 만큼 큰 마을이었다. 가구수도 현재보다 훨씬 많은 170호에 달했었다.  1, 2리로 나뉘어져 있었으니 이장일도 두명이 보았었다. 화인, 관곡이 100여가구, 걸포가 70여가구였던 마을은 댐이 건설된 후 화인 37가구, 관곡 23가구, 걸포 10가구로 줄었다.

농경지의 감소는 더욱 두드러진다. 현재의 걸포와 현리의 경계지점에서부터 장계교 호반식당까지 드넓은 수면은 한가운데의 안내천을 제외하곤 모두 문전옥답이었다. 유응현 이장은 수몰된 농경지의 면적이 10만 정보는 족히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논면적의 대부분이 수몰되자 마을주민들은 자연히 밭농사에서 소득을 기대할 도리밖에 없어졌다.

노동력의 노령화로 특수작물재배도 힘들어진 요즘, 반이상이 짓던 담배농사도 이젠 7가구로 줄었고 관곡에서 3~4가구가 인삼을 경작하고 있다. 그나마 마을에서 가장 젊은측인 육원근씨가 유일하게 느타리버섯을 재배, 한해 평균 1천5백만원의 소득을 올리는 농가로 꼽히고 있다.  화인마을 뒤로는 주민들이 `성재'라고 부르는 화학산성이 위치, 옛날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로서 요충이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한편으로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인포교 부근에 화인역이 설치되어 오고가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다.

이곳이 안남면과 안내면으로 갈라지는 교통의 삼거리지점임을 감안할 때 옛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꼽혀온 점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앞으로 인포-연주간 251군도가 확포장되고 지방도로 승격된 후 안남면 소야-청산도로가 확포장될 계획이 완료되면 이 도로는 기존의 안내 오덕리 도로가 가졌던 옥천-청산간 직통도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증약찰방역의 속역이었던 이 화인역은 상주, 보은, 옥천, 금산을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 금강변의 화인나루와 가까이에 있었던 중요한 역으로 대청댐 수몰전 안내중학교가 위치했던 인포교 바로 위쪽이 바로 역자리였다.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은 물론 인간이 축적해온 무형, 유형의 가치를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지만 6.25전쟁은 인포리, 특히 걸포마을에는 크나큰 시련과 상처를 남겨주었다.

전쟁이 나기전 이름 높은 반공검사 오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단체인 보도연맹의 실상이 현재에 이르러서야 그 내막이 밝혀지고 있는 바 애꿎은 농민들만 희생된 사례가 군내에서도 적잖이 밝혀지고 있다.  걸포에서도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빨갱이'라고 해서 아무런 내용도 모른 채 단체에 가입했던 15명의 순진한 농민이 끌려가 이유없는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6.25 직후 이 마을에서는 15집이 한꺼번에 제사를 치르는 풍경이 벌어졌고 느닷없는 줄초상으로 인해 대를 잇지 못하는 가정이 속출했다.  이러한 양상은 보도연맹으로 인해 희생된 가족들의 `원수갚음'으로 나타나 당시 보도연맹원 체포에 주동했던 화인마을 신모씨가 주민들에 의해 인민재판을 당해 죽임을 당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그 자손들은 그 충격으로 정신이상자가 된 비극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전쟁을 당한 당시의 우리나라 어디선들 이런 비극을 당하지 않았을까마는 걸포 주민들의 아픔은 매우 컸다. 지금은 거의 모든 피해자 가족들이 외지로 나가 당시의 상황은 마을의 어른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화인마을의 숙원이었던 간이상수도는 93년 6월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해결되었으나 관곡 마을은 여름철 장마기면 흙탕물이 되는 바람에 보수를 원하고 있다. 특히 관곡은 몇해전 정부의 지원금이 모자라자 주민들과 출향인들이 힘을 모아 진입로 포장을 완공했을 정도로 단결심이 대단하다.

본래 김해김씨와 전주이씨가 많이 거주했던 인포리이지만 걸포에는 옥천육씨 제실이 있으며 지금은 성씨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출향인으로는 주완종(충남상고 교감)씨, 조명래(대전 대신고 교사)씨, 김용배(대전시 유성거주)씨와 김홍열(대구 교사생활)씨, 김영배(안내초 교사) 등이 있으며 이건생(농촌지도소 청산주재지도사)씨, 김현숙(이원면 근무)씨 등이 꼽힌다.

옛부터 화인은 조리혈이라 하여 왠만큼 살만하면 이사가야 한다는 말이 전한다. 쌀 한조리를 일으면 쏟아내야 하듯 옛날부터 잘 살던 주민이 계속해 잘사는 예를 별로 찾아보기 어렵더라는 말로 `조리혈'의 설명을 한 주민이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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