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상야리] 선비정신 깃든 '학 날아간 명당' 지금은 빨래터로
[옥천읍 상야리] 선비정신 깃든 '학 날아간 명당' 지금은 빨래터로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5.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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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야리 전경사진

옥천읍 장야리(長夜里)를 이루는 마을은 장천리(長川里)와 상야리(上夜里)이다. 흔히 부르게 되는 장야리는 법정 마을 명칭으로, 상야리와 장천리는 행정편의상 부르게 된 지명이었다.

이들 두 마을은 각기 유래를 가지고 있다. 장천리는 내(하천)가 길다 해서 장내라고 불리웠으며 상야리는 야미리로 불렸다. 야미리(夜味里)란 지명은 '밤이'→'뱀이'→'배미'로 변천되는 가운데에서 한자화 되면서 부르게 되었다.

상야리의 옛 지명인 '밤이'에 얽힌 유래는 대략 이렇다.  옛날 어느 시대인가 한 선비가 있었다. 그 선비의 살림살이는 궁색했고 굶기를 밥먹듯 했다. 그 선비가 하루는 파리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았다 가는 걸 보게 되었는데 날아간 자리를 보니 장이 묻어 있더라는 것. 그 장을 찍어 맛을 보니 장 맛이 좋았고 그 선비는 장 맛을 더 보기 위해 파리를 쫓아다녔지만 상야리에 이르러 어두워지는 바람에 파리를 놓쳐 버렸다.

어둠이 깔리는 통에 맛있는 장 맛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이 선비 때문에 이 마을은 '밤이'라고 불려졌고 그 지명은 뱀이→배미로 변천되었다.  상야리는 이래서 밤과 인연을 맺은 마을이 되었다. 마을은 통상 배나무골, 윗배미, 아랫배미, 수골 등 4개 마을로 나뉘어진다. 이중 수골은 마을 앞의 자연현상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보통 이곳을 외부에서는 숯골이라고도 하고 쑥골이라고도 하는데 정작 마을 내에서는 마을 앞의 논에 5∼6군에의 수(논 가운데 땅속에서 나오는 물)가 있어 농사를 못짓는다 하여 수골이라고 했다는 정확한 유래가 전해진다. 말하자면 수골이 정확한 표현인 셈. 지금도 이 부근은 농사를 못짓고 방치되고 있다. 

수골에는 오복동이란 곳이 있다. 옛부터 마을 노인들은 오복동은 부자들이 살았던 곳으로 이곳에는 지금도 기와장이나 구들돌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 옛날 이곳에는 주로 부자들이 살았다는데 불량배들이 재산을 강탈해가는 것을 비롯, 못살게 굴어 결국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상야리에 전해지는 여러가지 얘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학이 날았다는 명당'에 얽힌 전설이다.

옛날 근본을 모르지만 학식과 덕망이 있는 한 선비가 마을에 들어왔는데 이 선비는 죽은 후 자신이 지정한 장소에 묻어달라고만 할 뿐 숙식 이외에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고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선비는 주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10여년 생활을 했고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애도하면서 지정 장소에 묘를 썼다.  그후 이 선비의 아들이 물어물어 찾아와 자신의 선산으로 아버지를 모시려고 묘를 파헤치니 그 속에서 커다란 백학이 날아갔다.

백학이 날아갈 정도의 명당에서는 구수 맑은 찬 샘물이 흘렀고 아무리 가물어도 끊이지 않는 주민들의 명소가 되었으니 지금은 주민들의 빨래터로 이용되고 있다.  이같은 전설을 뒷받침하기라고 하듯 이 샘물 주위에는 항상 황새가 날아들었고 지금도 황새는 해마다 찾아들고 있다는게 이 마을 전장한(의료보험조합 총무과장)씨의 회고다.  옛날보다 찾아드는 황새의 수는 줄었지만 마을과 관련한 옛 전설을 증명이나 하듯 날아도는 황새가 신기하기만 하다.

상야리는 옥천읍을 이루는 마을 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한다. 41가구 229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오대리, 각신리, 동정리 등과 함께 작가로는 다섯손가락 안에 꼽힌다.  주로 복합영농을 주로 하는데 포도 3가구, 복숭아 5가구, 사과 4가구 등 과수농가와 함께 한우 사육도 곁들인다.  새마을지도자이며 농어민 후계자로 전업농에 선정된 송찬두씨는 하우스 소채재배를 통해 독농가로 발돋움했다.

주민들은 생활력이 강해 한 때 '배미로 시집보내려면 리어카 하나만 사줘서 보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옥천읍내 장터에도 절반 이상이 리어카를 끌고 장사를 했었다.  주민의 수가 적어 행정기관으로부터의 지원이 잘 안된다는 소외감을 안고 있었던 이 마을은 80년대 중반 이후 관에서 주도했던 새마을운동과는 달리 마을 자체적으로 새마을가꾸기 바람이 있었다. 자갈을 날라 마을길을 닦았고 자체적으로 마을사업도 펼쳤다.

요즘들어 마을 뒤 돌람산은 옥천읍 주민들의 등산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매일 70여명의 등산객이 오르내리는 이곳은 해발 230m에 불과하지만 옥천읍을 조망할 수 있는 완만한 등산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산 중턱의 마을 산제당은 5년전부터 주로 마을 남자들의 무병장수를 빌어온 곳으로 주민들 중 60세를 못넘기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자 궁여지책으로 시작되었다.

다행히 산제가 시작된 이후로는 마을이 조용한 분위기를 형성해 주민화합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마을을 위해 유승남(대전 대화파출소장)씨, 김영길(옥천읍)씨 등의 출향인과 함께 옥천읍 거주 출향인들로 이루어진 애향회(회장 김칠랑)회원들이 힘을 쏟고 있다.  옥천읍의 오지아닌 오지라고 주민들 스스로 얘기하는 마을이지만 이제 점차로 변화해가는 마을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있는 사람들도 주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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