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면 오덕2리] 금적산 배경 삼은 평안한 마을
[안내면 오덕2리] 금적산 배경 삼은 평안한 마을
<1995년 9월 9일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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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5.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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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면 오덕2리

오덕리(五德里)는 본래 안남면에 속해 있던 마을이다. 교통의 발달과 지방도 개설 등 생활여건이 달라진 73년, 오덕리는 안남면에서 안내면으로 개편되었다.

지금은 1,2리로 분리되어 있지만 본래 안덕(安德)과 오산(五山) 두 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을 지명을 오산의 '오'와 안덕의 '덕'이 합쳐져 오덕이라고 칭해졌는데, 행정편의상 마을을 분리할 때 오산은 1리, 안덕은 2리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 소개되는 2리는 안덕 마을이다.

한자로 표기할 때 安德이지만 그 어원은 순수한 우리말을 내포하고 있다. '안'은 우리말로 바깥과 반대되는 말이고 '덕'은 언덕이나 높은 곳이란 뜻이므로 안언덕, 또는 안 골짝에 있는 마을이 바로 안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마을이 금적산 남향 기슭에 올라붙어 있는 지형상의 특성이 마을 지명을 결정하게 된 요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순우리말을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전혀 뜻이 다른 마을 지명을 만들어냈으니 본래 의도하고자 했던 우리말의 속뜻을 잘 음미해 볼 일이다.  안덕은 단일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규모 자연마을로 새뜸, 안지목, 양지말, 음효 등 4개로 이루어져 있다.  안덕과 오덕이란 지명이 생기게 된 유래는 이러하되 지금 주민들은 한자화된 지명 그대로를 받아들여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안덕'은 한자에서 표현하는 대로 마을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얘기되고 있는 것은 물론 오덕리라는 지명에 대해서도 해석을 내고 있어 주민들의 여망을 대변해준다.  손재철(70) 노인회장의 경우 오덕이란 지명 풀이에 대해 마을이 다섯가지 덕을 입을 지명이니 '그 한가지는 그 험난 일제 말기 때에도 일본으로 징용갔던 사람들 중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귀향했다는 사실', '일제 침략기 당시 금적산 금광 발견자인 이종규씨가 주민들을 기근에서 구해준 점', '마을 위해 소류지를 막아 물 걱정을 덜하게 해준 점' 등 3가지 덕을 꼽는 한편 앞으로 2가지 덕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려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마을 지명의 본래 유래야 어찌되었든 주민들의 여망과 결부시킨 지명 해석에서 우리네 일반 서민들의 소박한 꿈을 되짚어볼 수 있어 자못 고개가 끄덕여지는 점이 없지 않다.  통상 오덕재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본래 그 명칭이 듬티인 정방리-오덕리간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마을이 바로 안덕이다.  금적산을 배경삼아 남향으로 앉아있는 마을은 사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포근함을 준다. 금이 쌓여있다 해서 금적산인 이곳 마을 뒷산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름있는 산이다.

산 이름에서 보듯 금적산은 일제침략기 때부터 일본인 또는 외부 자본에 의해 금광 채굴이 활발했었고, 광산 경기가 좋을 때는 자못 큰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다. 지금은 채굴이 끝난 폐광에 불과하지만 광산의 흔적은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금적산의 금맥은 대구 사람인 이종규씨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금광 발견으로 재미를 본 이종규씨는 마을 공동 명의로 되어 있는 금적산에서 금을 채굴하는 대가로 일제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전기 가설 아니면 봄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도록 양곡을 지원해준다는 제의를 하고, 당장 먹고 살 양식이 급했던 주민들은 그해 봄을 날 양식을 선택, 1년을 잘 넘겼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 일화는 당시 주민들이 71년전 마을에 세워준 이종규 선덕비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쌀 한 말은 논 한 마지기와 바꿀 때였으니 오죽이나 고마웠겠는가?  52가구 130여명의 주민들이 사는 이곳에는 김해김씨가 처음으로 정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때 파주염씨의 집성촌이 이루어진 시기도 있었으나 지금은 다들 떠나고 각성바지 마을에 가깝다.

주민들은 대부분 잎담배 경작을 통해 주요 소득을 올린다. 많을 때는 36가구에 달했던 담배 경작농가는 이제 18가구에 머물고 있지만 다른 작물에 비해 무척 많은 숫자를 차지한다.  주민들 공동소유의 임야와 밭이 있어 대부분 이를 경작한다. 개인 명의의 땅은 아니지만 주민 공동소유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긍심을 갖고 영농에 종사한다. '다 밥먹고 자식 뒷바라지나 한다'는 주민들의 말에서 보듯 별다른 걱정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의 노령화는 자뭇 심각하다. 52가구 중 혼자사는 가구수가 22가구에 달한다. 특히 혼자된 노인들이라도 답답한 도시에서는 못산다며 다시 고향에 돌아오곤 해 혼자 거주하는 세대가 많아졌다.간이상수도의 수량이 모자란다는 점과 마을 앞 횡단보도 표시가 잘못되어 있어 민원이 되고 있다.


마을회관 터를 희사한 염병직씨와 노인정 터를 희사한 출향인 전도섭씨가 주민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있으며, 인천.서울지역 출향인 모임인 선인회(회장 김광석)가 마을발전에 관심을 쏟고 있다.  송도호(대한통운 과장)씨, 염장균(서천경찰서)씨, 염평균(서울 성북경찰서)씨, 유장부(충남도청 근무)씨 등이 대표적인 출향인이며, 마을에 사는 손오목씨는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효부로 이름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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