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면 환평리] 고리산 닮은 듯한 주민 심성 아름다워
[군북면 환평리] 고리산 닮은 듯한 주민 심성 아름다워
<1994년 4월 2일 취재>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4.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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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북면 환평리

고리산 자락에 기대어 땅을 일구며 말없이 살고 있는 곳이 군북면이라면 군북면에서도 환평리는 고리산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런 마을이다. 마을 이름이 그러거니와 99봉 가운데 한 산자락에 매달려 있지만 고리산을 닮은 듯한 주민들의 심성 또한 그러하다. 주민들의 여망과 한이 함께 서려있는 만큼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바로 고리산이다.

대청호변 254군도를 따라 얼마간을 가서야 비로소 환평에 닿을 수 있다. 고리산이 고리산이라 불리지 않고 환산이란 생소한 이름이라 불리듯 환평리도 본래 명칭보다는 행정편의를 위해 한자로 바꾼 사례이다.

고리산의 명칭은 '고리환'으로 해석, 환산이라 했듯 환평이는 환산이란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아흔아홉 고리산 봉우리 기슭에 기대앉아 있는 군북면내 열 개 여느 마을보다 고리산과 환평리가 친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산 명칭에서 마을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본래 환평은 '고무실'이라는 전래의 명칭이 있었다. 고무딸기나무라는 식물이 마을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고무실'이라 불렸는데 환평이란 지명은 일제시대 이후 생겨났다.

지금도 마을의 돌담에 자생하는 고무딸기나무가 '고무실'이란 명칭을 뒷받침한다. 지금도 옛 어른들은 '환평'이란 지명보다는 '고무실'이란 옛지명으로 불러야 쉽게 알아듣는다. 254군도가 대청호변을 따라 대정리까지 이어지듯 환평리에 이르는 길은 수려한 자연경관이 연속되는 그런풍경이다. 그래서 송시열 선생 등 옛 선비들도 자주 찾던 곳 아니었던가? 그러나 실제 주민들의 삶은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많은 변화를 강요당했다. 기름진 논은 거의 대청호수에 수몰되고 마을의 절반 가량이 타의에 의해 타향으로 떠나게 되었으며 이제는 노인가구가 대부분인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대청호라는 인공호수가 생기기 이전의 환평리는 73가구에 달하는 제법 큰 마을을 형성했었다. 하나 둘 주민들이 떠난 지금은 45가구, 1백60여 주민들이 거주할 따름이다. 수치상으로야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실제 주민들이 느끼는 심정은 겉에서 보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그래도 주민들은 묵묵히 삶을 살아낸다. 봄이면 등산객이, 사시사철 낚시꾼이 찾는 이곳이지만 아직은 농촌의 냄새를 물씬 풍겨내는 그런 곳이다.

수몰로 인해 논보다 밭이 더 많은 환평이기에 20년쯤부터 재배되는 포도를 비롯, 밭작물이 소득의 근간을 이룬다. 올해 1농가가 새로 식재한 것을 비롯, 최근들어 포도재배 면적이 크게 늘었다. 현재 16가구가 포도재배에 임하고 있다. 포도도 포도지만 환평에서 최근들어 점차 늘고 있는 작목은 단연 부추이다. 3년 전부터 시작된 부추재배는 평당 1만5천원꼴의 소득을 올리는 작목으로 떠올라 확대재배되는 추세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자연산 산두릅'은 환평리의 명물임에 틀림이 없다.

집집마다 울타리나 돌담에는 어김없이 산두릅나무가 있다. 적게는 몇 그루에서 많게는 수십, 수백 그루까지, 봄철만 되면 주민들의 손길은 두릅순을 따내 다듬기에 바쁘다. 본래 고리산에서 자생하던 산두릅을 따다 팔던 주민들은 10여년전 전상금(68)씨가 집주변에 두릅나무를 심은 것을 계기로 너나없이 한 그루씩 심게 되었고 지금은 아예 산두릅 나무를 전문으로 재배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주민들이 따낸 산두릅 첫 순은 지난해만 해도 한 묶음당 5천원을 호가했다. 땅두릅과는 값이나 맛에서 비교가 안된다는 설명이다. 그야말로 무공해 자연식품인 셈이다. 대청호 수몰로 인해 시련을 겪은 주민들이 그나마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산두릅이나 부추같은 짭짤한 재미가 나는 소득작물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마을에서 고리산으로 올라가노라면 ' 사시골' 이란 절터가 나온다. 이 절터를 주민들은 빈대절터라고도 하는데 그 옛날 작은 암자였던 이곳은 쌀이 바위구멍에서 나왔다고 전하는 곳이다. 손님이 오면 용케 손님 몫의 쌀까지 나오는 이 구멍에 호기심이 생긴 스님이 하루는 쌀이 더 나오게 할 욕심으로 '부지깽이'로 구멍을 후비니 그 자리에서 쌀 대신 빈대가 나와 결국 절까지도 없어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문필봉 중턱엔 장수굴이 있어 6.25 전쟁 당시에는 의용군 징집을 피하느라 젊은이들이 피신했다 하며 날망에는 장수의 손가락 자욱이 새겨져 있다고 전한다. 경주이씨와 전주이씨가 전 가구의 5분의 4를 차지한다는 환평리, 이제는 9세대가 노인 혼자, 8세대가 두 노인만 거주하는 등 전체 거주세대의 3분의 1 이상이 노인들만 사는 마을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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