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면 상촌리] 5백년전 마을형성, 성주이씨 집성촌
[동이면 상촌리] 5백년전 마을형성, 성주이씨 집성촌
<1994년 11월 26일 취재>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4.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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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면 상촌리

옛부터 들뫼라 불리다가 통상 '들미'라는 명칭으로 통용되는 곳. 들뫼란 마을 이름은 한자화하면서 '들'이라는 뜻으로 '坪'(평) 자를, '뫼'라는 뜻으로 '山'(산)을 써 평산이 되었다.

1910년 행정구역 개편시 이남 이소면 관할이었다가 1914년 4월1일 동이면이 새로 생기면서 오늘과 같은 명칭을 얻게 되었다. 더욱이 이번 주에 가보는 상촌(上村)리는 같은 법정리동인 평촌(坪村)과는 지형상, 지리상의 경계 때문에 나뉘어졌다기 보다는 행정편의상의 문제로 분리되게 되었다.

따라서 평촌과의 지형상 구분에 의한 마을 분리는 의미가 없다. 마을 주민들도 사실상 별다는 점을 느끼지 않고 생활한다.  전체 45호 1백40명의 주민들이 이곳 마을에 살고 있는 전체 주민의 수. 한때 상촌에만 70호까지 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나 이농에 따른 주민수의 감소로 지금은 50대인 정재명씨가 새마을지도자를 맡고 있을 정도로 마을에 젊은 인력이 없다.

"내 나이가 그래도 가장 젊은 편"에 속한다는 정재명씨의 말에 상촌리의 현실이 있다.  옛부터 상촌도 그 영향권에 있다. 45호의 주민들 중 30호가 아직도 성주이씨다. 지비성촌이다보니 흔히 '들미이씨'라고 부를 정도이다. 이종평 이장이 이곳에 처음 거주한 할아버지의 20대손이니 마을 형성은 대략 5백년 안팎으로 추정된다.

성주이씨를 제외하고는 밀양박씨, 경주,전주이씨가 몇 가구씩 거주하며 1개 성씨만 살고 있는 경우도 5가구에 달한다.  이 마을의 주요재배 농산물은 벼농사이다. 밭농사라고 해봐야 고추, 콩 등 일반작물에 불과해 역시 별다른 소득작물이 없는 상황. 인근 세산리나 적하리 등지가 포도재배를 통해 부촌을 이룬 것과 비교하면 크게 대비된다.

물론 포도재배의 시작은 세산리 만큼이나 빨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재배 등 과수재배가 뿌리를 못내린 것에 대해 주민들의 분석은 어찌보면 어이없는 것이었다.  '포도농사가 옛날 보리농사보다 조금 더 소득이 좋을 뿐, 별다른 소득작목은 아니다'라는 말이 마을 주민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진 인식 때문이었다는 게 마을이 전체적으로 침체되게 된 계기라는 설명이다.

뒤늦게나마 몇몇 주민들이 이제야 포도나 복숭아 등 과수재배에 눈뜬 것도 최근의 일이다. 포도 3가구, 복숭아 2가구 정도가 현재 상촌의 과수재배 현황.  과수와 함께 주민들은 축산단지를 신청해 축산 마을을 꿈꾼다. 한편으로 주민들은 주요 생업인 벼농사를 더욱 잘 짓기 위해 숙원을 갖고 있다. 장찬리 저수지에서 공급되는 용수로가 마을을 지나지만 대부분 지형이 낮은 쪽으로만 통과할 뿐, 지형이 높은 곳은 상대적으로 농사철만 되면 물 걱정이 많다.

이에 따라 대형 관정을 굴착해 주민들의 물 걱정을 덜어달라는 주민들의 요구는 생업을 잇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제기다.  일제 때부터 면청사로 사용하던 건물이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이상순씨의 집으로, 마을의 오랜 역사와 함께 조상의 숨결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을 통해 넘어가는 고갯길은 옛부터 이원 등 남부지방에서 과거를 보러 다니거나 볼 일을 보러 다녔던 큰 길 역할을 하고 있어 그에 따르는 얘깃거리가 남는다.

옥천읍 구일리와 경계를 이루는 함박산을 비롯해 마을 뒤 논두렁에서 나오는 샘은 '쪽박샘'이란 명칭을 지닌 채 지금까지도 들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물론, 지나는 이들에게도 물을 제공해주고 있다.  마을 뒷산은 나라에 일이 생겼을 때 북향재배하던 터로 유명하며 근처에 세워진 '망북비(望北碑)'는 최근들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평산리에 거주하던 성주이씨 문중에서 세운 이 비는 고종 황제의 승하를 통곡하며 1921년에 세운 것으로 일제 치하이면서도 일제의 연호를 쓰지 않고 '건국'이라는 표현을 써 민족정기를 지키려는 노력을 엿보이고 있으며 옛 유림들의 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교진 동이초교 교감, 박진하 이원초교 교감 등 주로 교육계 인사를 많이 배출한 상촌리는 서울에 거주하는 박시하씨와 이종웅씨, 이종훈(군 예산계장)씨 형제 등이 고향을 사랑하는 출향인으로 손꼽힌다. 이천순씨가 군 재무과에 근무하고 있으며 박용하 노인회장의 조카로 교육청에 근무하는 박희복씨의 효성이 잘 알려져 있다.  대형관정의 굴착과 함께 마을내 농경지의 경지정리도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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