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면 원동1리] '원동포도' 유명한 풍요로운 마을
[이원면 원동1리] '원동포도' 유명한 풍요로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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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4.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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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동1리 전경


월이산은 이원사람 모두의 눈길을 받으며 마을을 감싸 안는다. 월이산의 보살핌에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잊지 않고 산제를 마련한다. 음력 정월 초사흘이면 월이산 중턱의 산제당에는 제물과 함께 원동리 사람들의 무병장수와 한 해 풍년을 비는 기원이 가득 찬다.

현재 있는 산제당은 지난 60년에 지은 건물로 주민들의 말을 빌리면 6백년 가까운 세월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산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최근까지만 해도 월이산이 마을 주민들을 보살핀 증거(?)가 있다. 

때는 6.25 전쟁 당시. 당시 철도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고 원동리에 진을 친 인민군과 영동 양강에 진을 친 미군들의 대치국면. 금강을 건너는 원동철교는 폭격의 대상이었고 덩달아 인민군이 주둔해 있던 원동리도 집중적인 포탄세례를 받았다.  신외식(70) 노인회장이 당시 전투 및 전쟁 참상의 목격자로 이 포격 덕분에 금강 나루에 있던 인민이 많이 죽었으며, 마을의 40가구가 넘는 집들이 불탔다. 그러나 그 포탄 세례로 인해 죽은 원동리 주민들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월이산의 정기를 증명할 수 있는 사례.

1.2로 분리된 원동1리에서는 현재 88가구, 3백명 가량의 주민이 산다.  백촌 김문기 선생의 출생지인 백지리와는 지척으로 금녕김씨 중시조인 호판공이 이곳에 근거를 두고 거주하기 시작한 이후 28대손까지 마을에 있으니 대략 마을 형성은 6백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녕김씨의 집성촌인 이곳은 88가구 가운데 아직도 50호 가량이 김씨 문중으로 이루어져 있다.

벼농사로 타산을 맞출 수가 없다는 인식을 빨리 한 주민들은 일찍부터 과수 재배를 눈을 돌렸다. 과수재배를 처음 시작할 당시 복숭아가 주작목이었던 이곳은 최근 포도재배가 크게 늘어 50농가가 포도 재배에 참여, '원동 포도'라는 유명세를 만들어냈다.  포도와 더불어 복숭아는 30가구가, 자두는 8가구, 사과도 3가구가 재배해 가히 과수재배 마을이라 해도 될 정도.

이들 과수를 통털어 형성된 작목반은 김일진씨가 회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으며, 연간 포도 소득만도 2억원이 넘는다. 그렇다고 벼농사가 적은 것은 결코아니다. 한해 벼 수매량만도 보통 3천가마에 이르고 있으니 웬만큼 큰 마을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주민들의 생활이 여유롭다 보니 마을 단합이나 화합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 특히 타지역에서 들어왔거나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사례도 많아 풍요로운 원동1리를 뒷받침한다.

우선 남의 집살이를 하며 어렵게 생활했던 김영기(63)씨는 이러한 사람들 중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초창기 막노동을 하며 자수성가의 꿈을 키운 김씨는 이제 포도와 축산 등으로 3천만원대의 고소득 농가로 탈바꿈했다.  북한에서 단신 월남해 어렵게 생활하던 백남명(64)씨도 같은 경우. 이와 함께 남용원(57)씨와 김기천씨도 역시 포도 농사 등으로 마을에서 인정받는 독농가가 되었다. 원동1리의 마을 분위기가 이같은 독농가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는 얘기.

원동은 옛부터 적등(赤登)나루와 함께 조선시대 지방에 출장가는 관리들의 숙소였던 원(院)이 있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육상 교통로가 시원치 않았던 옛날에 나루터는 교통로의 필수조건이었고, 적등이란 마을 옆 동산은 숱한 옛 사람들의 애환이 숨쉬는 그런 곳이다.  주민들은 현재 지탄리와 영동으로 향하는 국도와의 갈림길에 우뚝 서있는 적등은 본래 '붉은 산'이란 의미에서 이름 붙여졌다고 하는데 숙소인 원 옆에는 금강을 바라보도록 세워진 누각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적등루(赤登樓)이다.

조선초의 문호 서거정이 쓴 적등루기문(赤登樓記文)이 아직까지 여지승람에 전하고 있으며 기록이 없어 언제 허물어졌는지 모르지만 많은 문장가들이 적등루의 풍경을 읊었다.  또한 적등에는 우리나라에서 단 한개뿐인 송시열 선생의 부친 송갑조옹의 유모 '헌비'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양반, 노비의 신분차이가 엄격했던 조선조였음을 볼 때 일개 노비의 신분인 헌비의 고마움을 비석을 세워 표현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주민들 사이에는 옛날에 붉었던 적등이 숲으로 뒤덮이면 마을이 풍요로워진다는 속설이 전해지는데 이를 증명이나 하듯 마을 전체는 풍요로움을 구가한다.  마을은 현재 안길까지 깨끗하게 포장돼 깔끔한 모양을 보이고 있으나 본래 마을 중앙을 국도와 경부철도가 지나고 있어 분리시켜 놓은 점이 한가지 불만이다. 앞으로 공사가 진행되는 고속전철 노선도 마을과 불과 70여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 이 직(李稷)이란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 작은 시로 원동리의 풍취를 되새겨보자. 

오가는 길손들이 하루에 만 명이 넘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배는 한 척 뿐
다시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으니
물오리도 한가로이
물 가운데 떠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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