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면 수묵리] 3.1만세운동 이끈 육창주 의사 등 독립유공자 추존 숙제
[이원면 수묵리] 3.1만세운동 이끈 육창주 의사 등 독립유공자 추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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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3.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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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묵리 전경

해마다 3월1일이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는 이원면 수묵리 마을에 전달되어 이원면 전체의 소리로 크게 번진다.  묵방공 육창주, 허상기, 수영골 김용이 의사의 목소리에서부터 시작된 만세 소리는 이윽고 이원면 전체로 확산된 후 전국에 올려 독립지사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19년 3월27일 이원장터에서 뜨겁게 타올랐던 만세운동의 불길은 아직도 우리의 가슴속에,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수묵리 후손들 속에 타오른다. 해결하지 못한 숙제와 함께.  당시를 기억하고 전해들은 주민들의 증언은 만세 운동은 단연코 육창주 의사의 역할이 압도적일 만큼 중요했다고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 마을에서 만세운동으로 인한 공적을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독립 유공자로 추서된 의사는 모두 7명으로 이중에는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김용이, 허상기 의사를 비롯하여 이금봉, 허련, 허상구, 허상준, 허찬 의사 등이다.  이들은 모두 1919년 3월 27일 이원장터에서 미리 준비해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형을 살았는데 한 마을에서 이처럼 많은 애국지사가 배출됨은 물론 독립유공자가 많이 배출되었음은 매우 드문 일이다.

독립유공자로 추존된 이들 7명 이외에도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육창주 의사는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어디론가 끌려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로 인해 독립유공자로서의 추존도 받지 못하고 있다.  만나는 주민마다 '육 의사의 독립유공자 추존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는 반응을 보며 안타까움과 함께 육 의사의 비중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3,1운동을 기념해 이원역 앞에 세운 기념비에 새겨진 명단 중 조이남, 이호녕 의사도 독립유공자로의 추종이 안된 상태이다. 마을의 자랑거리인 수묵리 독립운동은 이제 주민들의 긍지로 자리잡고 있으나 마을 전체의 뜻을 모은 추모제가 열리길 바라는 뜻있는 목소리가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묵방공과 수영골 등 2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수묵리.  모두 63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수묵리 여느 농촌풍경과 마찬가지로 노인인구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하루에 열서너차례 운행되는 시내버스가 주민들의 교통수단으로 영동군 심천면 마골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묵방골 입구와 수영골 한 가운데를 지난 비포장 도로는 굽이굽이 '마리산'(지금까지 마니산으로 불리워 왔음) 자락을 따라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까지 이어져 간다.

지금까지 마니산이라고 불리운 이 유서깊은 산은 평계리와 수묵리 마을에 접해 있으면서 마니산성의 흔적이 있고 고려말 공민왕의 피난처였다는 전설과 함께 영국사와 연결되었다고 전해지는 '소가죽다리'가 구전된다.  따라서 한문으로 마니산으로 표기되고 있는 이 산을 주민들은 '우두머리'의 머리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마리산이라고 부르고 있어 이 산을 신성시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데 이원면 개심리를 지나며 사람의 얼굴같기도 하고 짐승의 머리같기도 한 산날이 멀리서도 마리산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현재 마을안길 포장이 제대로 안된 점을 들어 한가지 숙원으로 대두되고 있는데 소득작목이라야 20가구가 하고 있는 복숭아, 8가구가 참여하고 있는 포도재배이며 담배농사도 6가구가 짓고 있다.  포도의 경우 한 가구가 하우스를 이용한 가온재배에 참여, 선진농업기술을 마을에 전파하고 있으나 대부분 노령화로 인한 별다른 소득작목 개발에는 기대를 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묵방골과 수영골을 합해 금녕김씨가 20여가구에 걸쳐 거주, 가장 많으며 경주 김씨 10여가구, 양천허씨 9가구 등의 성씨분포를 보이는 한편 옥천육씨도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주로 교육공무원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김준호씨와 김성재씨, 김용환씨 등이 그들이다. 또한 대전에서 경찰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김기영씨와 철도청에 근무하는 김기철씨, 육군에 근무하고 있는 김관술씨 등이 주민들에게 낯익은 얼굴들이다.

묵방골 주민과 출향인들간에 조직된 친목계(회장 허범옥)에서 어버이날을 전후하여 효도관광과 음식을 장만, 대접해주는 등 모범을 보이고 있어 주민들의 칭찬을 받고 있고 대전에 거주하는 수영골 출신 김종만씨는 마을에 들를 때마다 노인들에게 단 한잔의 막걸리라도 대접, 항상 주민들의 곁에 있는 출향인으로 통한다.  또한 서울에 거주하는 김규창(48)씨는 장화리와 수묵리 입구를 비롯, 평계리와 갈라지는 지점과 묵방골 입구 등에 마을 이정표를 달아줘 이곳을 찾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머뭇거리지 않게 해주었다.

특히 수묵리에는 나라를 잃었을 때 의기를 모아 독립만세를 불렀던 정신이 이제는 효성으로 연연이 나타나 효성이 지극한 주민들이 많은 것도 자랑거리이다.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오순옥씨를 비롯하여 역시 홀로된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고 있는 장시충씨 부부,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난 허범옥씨 부부 등이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이미 지난 91년도에 충북도로부터 모범가정 표창을 받은 바 있는 전영옥(55)씨 가족도 빼놓을 수 없다.

마을 안길 포장과 함께 농산물집하장을 숙원으로 간직하고 있는 마을. 보통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크게 다를 바 없으나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 마을이라는 긍지를 굳게 가진 특별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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