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면 장화리] '길게 빛날 동네' 마을이름 유래, 인정 넘치는 곳
[이원면 장화리] '길게 빛날 동네' 마을이름 유래, 인정 넘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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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4.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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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화리 전경

개심저수지가 한개 마을을 뒤덮었어도 장화리는 그곳에 그냥 있었다. 이원면 소재지에서 영동군 양산면으로 향하는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저수지를 끼고 돌아 군 경계의 끝에서 만나는 마을, 이원면 장화리(長華里)이다.

어느 마을이나 그렇듯이 어디에서 마을을 보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도, 못 볼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장화리는 마을 뒤 조그만 소류지에서 보는 모양이 가장 낫다.  주민들에게는 이미 쓸모없는 저수지이거니와 그나마 개심저수지의 전체 모양을 볼 수 있으며 저수지의 물빛에 마을 집들의 아름다운 저녁연기를 비춰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화리의 지리적 특성은 마을이 도 경계 및 군 경계를 이룬다는 사실에 있다. 영동군 양산면과는 고개 하나로 경계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충남 금산군과는 문안산이라 불리는 마을 뒷산과 경계를 이룬다.  양산면까지 옥천군에 속해 있던 시절이었다면 영동과의 군 경계 마을은 아니었을텐데 옥천군 관할이 장화리까지로 결정되면서 경계를 이루고 있다. 금산과도 산 하나로 경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어떤 주민들은 실상 산 하나를 없애면 금산과 가까운 곳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아무튼 군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마을인 만큼 이원면 다른 마을에 비해서는 지대가 높다. 마을 앞으로 수묵리, 평계리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있어 장화리보다 더 깊은 마을이 있음을 알리고는 있으나 물이 부족한 점은 항상 주민들의 숙원으로 손꼽힌다.  본래 개심저수지가 있는 곳이 개심리 중 가장 큰 마을에 속해 있었으나 57년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가장 큰 평지말이 수몰되어 없어진 후 평지말에서 장화리로 올라온 주민도 3가구에 이른다.

바로 도로 밑으로 군내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가 있으면서도 물 부족 사태를 겪어야 하는 주민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저수지가 옆에 위치해 있을지언정 장화리는 지대가 높은 관계로 수로가 미칠 수 없는 지역이므로 용수 혜택을 못보고 있는 것이다.  마을 위로 조그마한 소류지가 하나 있으나 그 물로는 마을의 얼마 안되는 농경지에 물대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3만평 급수를 목표로 시설되었다는 이 소류지는 현재 2만평에도 못미치는 농경지에 물을 대고 있으나 올해 같은 가뭄에는 큰 역할을 못해 주민들이 애를 태웠다.

벼농사 위주의 농사를 영위하고 있는 이들 주민들에게 큰 고통을 주어 산기슭은 아직까지 벼를 베지 않은 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밭작물도 수확을 포기한 채 그냥 놓아두었거나 수확했다 해도 털지 않고 밭에 그냥 둔 경우까지 있었다.  마을 자체적으로는 지난 7월31일 돼지를 잡아 기우제도 지냈다. 신통한 것은 기우제를 지내고 나니 바로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쏟아졌다고 하는 점. 그러나 가뭄으로 인한 주민 고통을 항상 따른다.

올해 가뭄피해로 보상을 받은 농가는 단 두 가구에 불과하다. 농업재해 대책법의 허상이 나타나는 면이지만 주민들은 그런대로 또 그렇게 산다.  '녹두밭머리'. '하늘 밑의 땅'이란 말을 주민들이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듯하다.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야 모두 합해도 38세대 1백여명. 비록 40세대를 넘기지 못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전통이 있는 마을이다.  진주강씨가 대대손손 살아온 집성촌이다.

대부분이 떠나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마을에는 10가구가 남아 마을의 전통을 지켜내고 있다.  마을 한켠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세거비와는 달리 세유비(世遊碑)가 세워져 있다.  강선웅 이장의 11대조부터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 하니 이제 마을이 형성지는 3백50여년 쯤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벼농사 이외에 요즘은 포도가 많이 재배된다. 포도와 함께 자두, 복숭아가 주요 과수로 현재 20가구 정도가 2개의 과수계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마을에서는 강대우씨가 이름난 효자로 유명하며 강범열씨의 부인인 이경자(34)씨는 병석에 누워있는 시부모를 10년동안이나 극진히 간호해온 것으로 효부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마을 형편에 그나마 고향에 관심을 쏟고 있는 강영복, 강미장, 김재천, 육종우, 육종수(이상 서울 거주)씨 등이 대표적인 출향인이다.  농업용수는 부족하지만 식수는 좋아 피부병이나 기형아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주민들. 뒷산에는 연자방아를 연상하게 하는 쌀개바위가 있어 아직도 주민들의 기억속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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