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면 소정리] 소정리 복숭아 최고 품질 자랑
[이원면 소정리] 소정리 복숭아 최고 품질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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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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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정리 전경

이원면 소정리(小亭里)가 윤정리로부터 분리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1985년 10월 15일이었다. 분리 이유는 당연히 같은 행정구역 안의 마을로는 관리하기가 어려웠던 데에 있다.  실제로 윤정리가 큰 마을이었고, 5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어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소정리는 윤정리와 2km 가까이 떨어진 마을로 역대 이장들은 물론 이원면에서도 상당한 불편을 겪었던 지역이었다.  분리 11년을 맞은 32가구 97명의 소정리 주민들은 자신들만이 이끌어나가는 마을공동체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며 '우리 마을'이란 인식 아래 화합된 마을을 가꾸려는 공동체 의식으로 묶어져 있다.

그래서 이들 주민들은 마을이 분리되자마자 곧바로 체계 갖추기에 들어갔고 그 첫 사업으로 시행하여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순수한 주민들만의 힘으로 만들어진 소정리 경로당이다.  이원-양산간 지방도변에 만들어진 이 경로당이야말로 주민 의지의 산물이며 단합의 공든 탑이다. 분리 후 곧바로 가구마다 3천원씩을 거출해 부녀회를 조직했고, 집집마다 돌며 물건을 팔아 이익금을 적립했다.

이러한 부녀회의 활동은 마을 전체의 활성화를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3∼4년에 걸친 노력으로 주민들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 주민들은 마을기금과 부녀회가 모은 기금을 포함, 자력으로 공사를 시작했고 마을 내의 인력을 활용해 마침내 도로변에 아담한 경로당을 가질 수 있게 되어다.  어려움 속에 건립한 회관인 만큼 주민들의 경로당에 대한 애착은 크다.

요즘같이 농한기에 할머니, 할아버지 등 20여명의 노인들은 주로 낮에 이용하고 부녀회원들이나 마을 젊은이들은 저녁이나 밤에 이 공간을 활용, 마을 현안에 대한 협의를 하는 것은 물론, 친목을 도모하는 시간도 가진다.  주민들의 땀과 노력이 밴 경로당은 이제 명실공히 주민들의 모임장소로 자리잡은 것이다.

1985년 이전까지 소정리가 한 마을을 이루었던 윤정리는 본래 윤동리(潤洞里)와 소정리 지명에서 각각 한자씩을 딴 것이다.  이 마을을 소정리라고 부른 것은 이 길목이 이원을 통해 양산, 학산, 무주로 통했었고 길 초입에 작은 정자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정자도 정자려니와 이곳에는 예로부터 주막이 있어 멀리 무주 등지의 장사꾼들은 물론 소 장사꾼들이 꼭 쉬어가곤 했던 그런 장소였다. 각 곳에서 모여든 장사꾼들의 살아 숨쉬는 정감있는 목소리가 계속되던 터였던 것이다.

그런 이곳에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잘 모르나 마을 내에 샘을 자꾸 파면 안좋다는 말에 따라 개인 샘이 만들어진 것은 불과 30∼40년전에 불과하다. 이전까지는 현재 마을로부터 500m 가량 떨어진 일명 '봄끗샘'에서 길어다 먹었다.  마을 내의 모든 주민들이 이 샘물을 마셨는데 샘은 조그만해도 물은 많이 나왔던 곳으로 특히 주민들이 아들은 낳기 위해 빌었던 곳이었다.  이 샘은 경지정리가 될 당시 메워졌는데 이와 관련해 논 임자 집안은 그리 좋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한다.

마을의 가장 큰 소득원은 역시 복숭아와 묘목이다. 복숭아에 대한 소정리 주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서울로 출하되면 타지의 복숭아보다 우선해 경매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15kg 한 상자당 값도 1천5백원에서 2천원까지 더 받으니 그런 자랑을 할만도 하다.  현재 21가구가 작목반(회장 이천호) 회원으로 재배 역사만 해도 50여년이다. 고인이 된 송기성씨가 복숭아를 처음으로 재배한 것을 시작으로 마을에는 지금도 30년 이상 넘은 복숭아밭이 많다.

복숭아 이외의 주요 소득원으로는 묘목을 들 수 있다. 주민들 중 절반이 배.복숭아.호두 등 묘목을 재배하고 있는데 이중 송순예(소정농원 경영), 김상근(상근농원 경영)씨 등 2명의 농가가 독농가로 꼽힌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포도 묘목을 많이 했던 주민들은 이제 대다수를 뽑아내야 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이곳이 묘목 재배적지라는 점은 일제때부터 이곳에 감나무 묘목 시범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벼농사는 그저 주민들이 먹을 정도만 한다. 농협에 가봐도 부채를 가장 먼저 갚는 부지런한 마을로 손꼽히는 소정리.  마을에서는 조임순(96) 할머니가 최고령이며 경로당 이외에 별도의 마을회관을 마련하고 싶다는 주민바람이 있다.  가구수가 적어서인지 어느 마을보다 탄탄한 단합심과 인심을 자랑하는 소정리에 주민들의 웃음이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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