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면 만월리] 노인회 솔선수범이 귀감되어 화목이룬 모범마을
[청산면 만월리] 노인회 솔선수범이 귀감되어 화목이룬 모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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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3.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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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월리 전경

한때 청산면 만월리의 가구수는 150호에 가까이 이른 적이 있었다. 군내에서도 토질이 좋아 보리농사가 가장 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리수매장에선 언제나 가장 좋은 등급을 받았다는 곳.

이미 1950년대 6.25 전쟁후 살기가 힘에 겨웠을 무렵 각지에서 만월리가 토질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는 화전을 일궈 살기위해 모여들었다. 그래서 만월리 일대의 토지는 급격히 일구어졌고 시골로서는 보기드물게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런 화전마을에 대한 화전정리가 시작되었던 때는 1960년대. 정부의 화전정리사업에 따라 또다시 많은 수의 가구가 이동을 시작했고 결국 83가구가 사는 마을로 축소되긴 했다. 하지만 83가구란 가구수는 청산면내에서 면소재지 및 소재지 인근마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가구수이다.

505 지방도를 따라가다보면 자동차로는 더이상 갈곳이 없는 외진 곳에 마을이 위치해 있으면서도 이처럼 많은 가구수가 거주하고 있는 데 대해 주민들이 나름대로 내린 분석은 위와 같았다.  83가구 가운데 경주김씨가 가장 많은 40여가구를 차지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최동기 노인회 부회장을 비롯한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15.16대 그러니까 약 450년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이들에 따르면 진주강씨와 전주최씨, 경주김씨 문중 등 3대 성씨가 가장 오랫동안 만월리에 거주해 왔으며 그중 진주강씨가 가장 오래 되었을 것이라고.

자연마을로는 상만월과 하만월로 나뉘는데 상만월엔 10여가구만이 살고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본동인 하만월에 거주한다.  예로부터 만월리는 대전까지 걸어다닌 큰길로 통했다.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청산면 소재지까지는 백운리 뒷산, 만월리 앞산인 셈인 도덕봉 장고백이 고개로 넘어다녔고 대전까지 가기 위해서는 상만월을 거쳐 청성면 망월리 뒷산을 통해 망월리 앞으로 대전을 다녔다.

숱한 사연과 사람들이 오갔을 이 길을 통해 원남을 갔을 경우 거리는 불과 6km여에 불과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 그러나 현재 개설된 지방도를 통해 청산면으로 돌아나갔을 경우 청산면까지만도 8km, 청성면까지는 12km에 달한다. 그러니 국도를 따라 원남까지 가려면 아무래도 20km는 넘는 셈이다.

보은.상주에 사는 사람들까지 넘어다녔던 길인만큼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은 인정받고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이 길을 살려 확포장 할 경우 기존거리보다 훨씬 단축할 수 있는 효과를 노릴 수 있으니 지역상권보호 문제와 더불어 인접군과의 협조문제가 이 도로의 개설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아니겠느냐는 주민들의 설명이다.

만월리로서는 마을어른들의 노인회의 솔선수범이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큰 특징이다. 지난 91년에 최철호 회장 등으로 새롭게 구성된 마을노인회 33명의 회원들을 비롯한 마을 노인들이 면내 여느 마을보다 모범적으로 노인회를 운영, 다른 마을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  노인회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자체적으로 결의를 통해 농한기를 이용한 마을환경 가꾸기에 나서 하천주변의 농약빈병과 폐비닐 등을 수집하는 것은 물론 재활용품을 모아 기금으로 적립하기 시작했다.

매달 주기적으로 모은 노인들의 정성에 재활용품을 쌓여갔고 서너차례 판매를 통해 근 20만원에 달하는 기금도 모아졌다.  마을환경도 깨끗이 하고 기금도 적립하는 두가지 즐거움을 맛본 노인회 회원들은 인근 야산에서 싸리대를 꺾어 손수 다듬고 싸리비를 제작, 지난해와 올해 두차례에 걸쳐 청산면에 기탁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노인들은 마을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젊은 층 및 주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노인들의 이같은 노력에 따라 점차로 인구가 적어지고 삭막해져가는 여타 마을과는 반대로 마을의 단합과 화목을 되찾는 계기가 형성되어가고 있다.  요즘의 여느 마을에서는 거의 유명무실한 청년회이건만 이 마을에서는 김동헌 청년회장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한편 마을을 활성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 좋은 증거이다.

평소 만월리가 505 지방도로부터 3km 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음으로 마을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중 지난 4월29일에는 청년회 기금으로 마을 이정표를 세운 것.  벼농사 이외 옥수수재배가 가장 많아 40여가구에 이른다. 두번까지 재배가 가능하고 일손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노동력이 부족한 이 마을에서 쉽게 선택할 수 있었던 작목이 되었다. 단보당 40만원꼴의 수익이 만월리에 옥수수 재배가 많아지게 한 요인.

이와 함께 20가구에 이르는 인삼재배와 11가구에 이르는 담배농사가 주종을 이루는 작목이다. 마을에 위치한 석회석 광산은 이 인근에서는 유일한 석회석 산지로 그동안 운영권이 여러단계를 거치긴 했으나 또다시 채광할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는 주민들의 관측이다. 

광산과 관련 탄광이 위치해 있을 때는 식수에 불소가 함유되어 있어 40대이상의 주민들에게 치과질환이 많았으나 간이상수도를 설치한 후로는 치과질환이 줄어들었다. 다만 가물 때만 되면 간이상수도의 수량이 부족해 각 가정의 지하수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흠이다.

만원리 본동에서 하만월에 이르는 1.5km의 진입로는 평소에도 도로의 상태가 좋지 않아 숙원사업으로 지적되는 곳. 이밖에 비가 와도 바깥에서 안심하고 시내버스를 기다릴 수 있도록 주민들은 시내버스 승강장을 설치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고향을 떠나 있으면서도 김기철(청주)씨, 김광용(서울)씨, 김복환(보은)씨, 최용호(진해)씨 등이 고향 주민들에게 많은 애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김치환(안양시청근무), 최치훈(부산)씨, 강수일(서울)씨 등이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 구판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10여년간 부녀회장을 역임한 바도 있는 김평사씨는 마을 일에 헌신적으로 나서는 한편 경로당 가꾸기는 물론 청소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마을 일꾼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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