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가풍리] 돌틈사이 가재가 노니는 맑은 물 자랑
[옥천읍 가풍리] 돌틈사이 가재가 노니는 맑은 물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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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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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풍리 전경 사진

옥천읍 가풍리에 거주하는 가구수는 100여호. 마을 경계로는 삼청리가 가장 남단이지만 실제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위치로 볼 때는 옥천읍에서 가장 남단에 있는 마을인 가풍리는 장령산을 배경으로 포근하게 자리잡고 있다.

주민들은 포도와 복숭아를 비롯한 과수 재배를 통해 주요 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히 이 마을에 과수가 주요 생산품으로 자리잡게 된 데는 마을의 비교적 젊은층에서 하우스 시설재배를 도입해 단위당 소득을 높인데 있다.

이 마을에 포도가 들어온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0년 가까이 되었다. 현재 마을의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강봉학씨를 비롯해 김봉식, 이교영, 김의봉, 신남구씨 등 6명이 처음으로 포도 재배를 시작하면서부터. 주민들은 이제 하우스 포도를 위주로 재배하기 시작해 지금은 전체 포도면적의 50~60%에 이를 정도로 하우스 시설재배가 많아졌다.

현재는 마을 농가 가운데 48농가가 포도조합(회장 박래훈)을 구성해 서로간의 공동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현재는 포도가 너무 많이 식재돼 주민들의 걱정이 앞서지만 주민들은 살길을 찾느라 골몰한다.  복숭아 재배도 많다. 20가구 정도가 복숭아 재배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 또한 복숭아 농사를 지어서 재미를 보는 경우도 많아졌다. 박희남씨 같은 주민은 복숭아만으로도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 주민 가운데 '포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 바로 포도 재배 기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하귀섭(65)씨. 중령 출신으로 군대에서 예편한 후 하씨는 비가림, 무공해 포도, 박피 기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  하씨의 포도는 일반적으로 출하되는 포도보다 항상 좋은 값을 받는다.

대전의 상인들이 '하귀섭 포도'라고 하씨의 포도 품질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씨의 포도는 일류 호텔 등 고급용으로 주로 출하된단다. 그래서 웬만한 장사꾼들은 엄두도 못낸단다. 품질 인정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증면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을에서도 하씨의 농사기술은 인정 받는다.

포도 재배를 비롯해 농사꾼으로 뿐만 아니라 마을 내에서 유일하게 4대가 한 집에 모여 사는 박래훈(59) 새마을지도자의 경우 마을에서 인정받고 있는 일꾼. 4대 가족 9명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물론 이집의 소득은 마을내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꼽힌다. 한순용씨는 벼농사를 1만6천평 정도를 지어 수매하는 양만 해도 400여개에 이른다는 것이 주민들의 대략적인 얘기.

마을 안길 등은 거미줄같이 뻗어 있지만 주민들은 인길을 포장할 당시 주민들의 힘으로 서로가 합심해 했다는 점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다. 앞서 말한 하귀섭씨가 안길 포장시인 10여년전 75만원을 희사해 솔선했고, 강 석씨도 시멘트 200포대를 기증하는 등 주민들의 단합된 힘은 마을을 더욱 알차게 이끄는 동기가 되었다.

마을에 소득작물이 있고 일거리가 많아 50대까지의 비교적 젊은 층이 아직까지는 많은 편이다. 이러한 여건이 마을 발전을 위해 주민들이 좀더 일찍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들었다.  안대희 이장이 이끌어온 마을은 별다른 일없이 단합으로 이끌어진다. 안 이장의 마을 이끌기가 주민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것은 그의 이장경력이 오래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확인된다.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가풍리는 원래 가재골에서 시작되었다 전한다.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에 마을을 형성했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는데 진주하씨가 가장 먼저 가풍리에 정착했고 그후에 들어온 청주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뿌리를 내렸다. 지금도 가풍리에는 전 가구의 30%가량이 한씨이다. 처음 정착했던 하씨는 지금 거의 떠나고 단 3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원래 마을이 처음 형성되었던 가재골은 장령산 줄기 아래에 형성된 골짜기로 차차로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확산되었다 하며 가재골에서는 지금도 가재가 잡힐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임을 자랑한다. 본래 가재골이란 지명은 옛부터 신령스런 산이라고 믿어왔던 장령산에서 뻗어나온 작은 솔티의 산줄기 형상이 가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하며 가재라는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후에 가척으로 변천되었다.

가풍은 가척의 '가'자와 지풍의'풍'자를 따서 만들었는데 '지풍'이란 논이 기름지고 물이 좋아 풍년이 드는 땅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지명 역시 일제 때 행정의 편의만을 고려해 만들었다는 지적을 받지 않을 길이 없다. 가풍리를 설명하는데 있어 앞쪽에 버티고 있는 도덕봉을 빼놓을 수는 없다.  해발이 408m로 알려진 도덕봉은 동이면과 이원면, 옥천읍의 경계 역활을 하고 있거니와 가풍리 앞으로 통하는 길은 지금으로 말하면 국도만큼 중요성을 지니는 교통의 요충지.

그런데 이 도덕봉의 산줄기를 넘어 이원으로 통하는 고개는 대낮에도 솔숲이 우거져 어둠 침침했고 은신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마을 노인들이 전하는 바로는 이 고개 부근에서는 사람이 은실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이 나오고 먹고 있기도 한데 도둑샘이라 불리는 이곳은 그 옛날 도둑들이 은바가지로 물을 떠먹다가 빠뜨려 지금도 쇳소리가 난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철로가 통과하는 터널이 상하행으로 두개가 있고 폐터널이 하나 있는데 그 굴을 이용해 마을의 어른들은 장을 보러 이원을 다녀오거나 죽향초교보다 가까운 이원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릴적 추억도 간직되어 있다. 지금은 버섯을 재배하다 그만두어 그냥 방치되고 있다. 

노인들은 또 장령산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승조골(승지골)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얘기도 한다. 장찬리 저수지가 생기기 전까지는 가뭄이 들면 마을에서 돼지를 잡아 기우제를 올렸고 기우제를 지내면 용하게도 조금의 비라도 뿌렸다는 얘기를 알고 있는 것도 역시 마을의 내력이다. 뿐만 아니라 밭곡식이 가뭄 들 때도 역시 기우제는 올려졌다.

정아건축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강경구씨가 이 마을 출신이고, 한기범(군 경제가스계장)씨와 성환 종축원장을 지낸 강만석씨, 대령으로 군대를 예편한 하영섭씨, 서울에서 초등교장을 퇴직한 김현기씨 등이 알려진 출향인.  이곳이 고향인 윤점식(구읍 고향가든 운영)씨는 95년에 이어 96년까지 노인회원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20만원씩의 성금을 기탁해오는 등 미담을 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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