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귀현리] '옥천포도의 원산지' 자긍심 커
[옥천읍 귀현리] '옥천포도의 원산지' 자긍심 커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6.01.27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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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현리 전경 사진

옥천읍 귀현리하면 누가 뭐래도 옥천 포도의 원산지 마을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 이곳에서는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그 산증인들이 아직도 그때 일을 어제 일 기억하듯 자세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포도를 심고 마을에 보급시킨 장본인은 이수기(59)씨와 전재희씨. 귀죽리의 오재열씨와 이미 고인이 된 박희준씨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 이수기씨가 포도 도입 초창기의 일화를 잘 들려준다.

이씨는 군에 복무할 당시인 50년대 말 경기도 안양에서 포도를 먹어 보았고, 59년에 제대 후 앞서 언급한 네사람과 함께 포도를 심었단다. 당시만 해도 포도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터라 마을 어른들로부터 '좋은 땅에 나무를 심는다'는 야단을 들어야 했다.

어른들의 야단에도 심은 지 1년만에 몇 송이씩 소 등에 실어 대전으로 출하한 포도는 한 상자만 팔면 보리쌀 한 말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시세가 좋았고 3년째 접어드니 제법 수확이 많았다.  당시로는 한 해 농사지어 3∼4마지기의 논을 살 정도였으니 이윽고 마을 주민들이 포도 심기에 나섰다. 64년과 65년에 걸쳐 마을에는 포도나무가 심어졌고 충북도내에서는 처음으로 마을내 13가구를 중심으로 협업단지가 구성되었다.

봄.가을로 충북도지사가 다녀가고 아직도 74년도 마을작목반 장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옥천 포도 원고장 귀현의 명성을 이때부터 날렸던 것으로 주민들은 기억한다.  지금 귀현에 살고 있는 48가구 중 42가구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면 마을 전체가 온통 포도로 뒤덮인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포도 재배면적만도 6만평에 달하고 시설하우스도 10가구에 6천평에 달한다.

마을의 최근 표정은 포도와 연관 짓지 않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주민들간에 유대가 강하고 농작업도 대부분 주민들의 품앗이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모두 마을 전체가 포도라는 한가지 작목으로 통일되어 있는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20∼30 년씩 같은 작목반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왔던 만큼 주민들간의 유대는 더욱 좋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본래 귀현리가 속해 있는 구일리 아홉 개 마을중 귀현리에는 4개 자연마을이 있다. 방고개, 골살이골, 정골(중골), 쇠보루골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은 본래 이원-동이-옥천으로 이어진 큰 길가 마을이었다.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세산리를 통해 귀현 '질막재'로 사람들의 통행이 끊이질 않았는데 장날이면 소상인들이 마을을 지나며 논을 하도 밟아 놓아 밤새도록 주민들이 조를 편성해 논둑길을 지켰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질막재는 옛 전설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고 적군을 맞아 싸웠다는 얘기가 어렴풋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동이면 평산리에 위치한 쌍봉서원터와 그 뒷산에서 발견되는 씨움터와의 연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구일저수지가 막아진 날등은 '마등산'이라 하여 영낙없는 말등과 말머리 형태를 띠고 있다고 전하는데 어렵게 살고 있던 전 재경향우회장인 주재우 변호사의 고조부가 세상을 떠나자 주민들이 부역을 나서 묘자리를 찾아 나섰고 마침 다른 곳은 눈이 쌓여 있는데 묘하게도 눈이 녹아있는 곳을 골라 묘를 쓰니 그 뒤로 집안이 살아났다는 얘기가 일화처럼 전한다.

산 형세가 좋기로 소문난 마을 뒤 함박산 언저리에는 일제 때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아놓았고 산을 가로질러 백회를 뿌려놓았던 자국이 해방후까지도 남아 있었다는 주민들의 얘기로 보아 함박산의 정기를 끊으려 한 일본인들의 속셈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주민들은 올해부터 포도가 수입되어 큰 타격을 입을 것을 걱정하고 있는 반면 귀현리 토질에는 포도가 적절하다는 자체평가를 하고 있다.

포도작목반(회장 유재선) 운영이 잘 돼 있어 계통.규격출하 체제를 갖춘 작목반은 95년도에도 군 우수작목반으로 선정될 정도였다.  옥천전씨 집성촌이기도 한 귀현리는 현재도 25가구 정도가 살고 있으며, 조영하 지도자와 전진표씨 등이 부모를 모시는 효자로 소문나있다.  마을내 젊은이들의 모임인 친목계(총무 유재영)에서는 지난해 마을에 풍물을 기증했고, 전진표씨는 경로당에 지하수를 파줘 주민들의 칭송을 들었다.

지난해 기존의 경로당을 개조, 할머니방을 별도로 개설한 것은 마을 노인들로부터 크게 환영받고 있으며, 시급한 숙원으로 서대-귀화간 도로의 확포장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 도로는 현재 1차선 노폭으로 현재 군도로 승격되었다고는 하지만 차량통행에 불편을 주고 있어 시급한 확포장이 요구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이 분산되어 있음에 따라 아직도 군데군데 거론되는 주민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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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완하 2009-01-14 13:17:17
어린시절 그 시절로 그냥 빠지고 마는 고향, 말만 들어도 정겹다. 오래전에 취재한 기사가 지금에 와서 읽는 감회가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