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오대리] 대청댐 수몰후 육지속의 섬, 90년 옥천읍으로 편입
[옥천읍 오대리] 대청댐 수몰후 육지속의 섬, 90년 옥천읍으로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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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4.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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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리 전경 사진

"사공이 뭐하는 거여. 대낮부터"  낮이면 아직도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2시께. 배를 기다리던 참에 건너편 마을 앞에 있던 배에서 느닷없이 장난기 어린 큰소리가 물을 건너온다. 마을 주민 한 명이 읍내에 볼 일을 보기 위해 배를 타야 하겠는데 사공이 살짝 낮잠이 들어 있었다는 얘기.

이윽고 엔진을 켜는 소리가 들리고 배는 2분여를 걸려서 강을 건너왔다. 이날의 사공은 조재만 새마을지도자. 한 주민이 오후 1시30분에 읍에 나간다고 하기에 30분 먼저 나왔다가 깜빡 잠이 들었단다.  일단 소풀을 가득 실은 경운기가 배에 올라타고 어른 세사람과 어린아이 셋 등 여섯명이 오대리로 들어가는 2시 배의 모든 승객이다. 서로 웃음과 재담이 오가는 사이 오대리 앞에 배는 미끄러지듯 닿았다. 

"사공이 별도로 없어요. 하루에 한집씩 돌아가며 사공 역할을 해요." 
현재 고향에 남아있는 주민수가 적다 보니 자연스레 일어난 현상. 사공을 돌아가며 맡고 있는 가구수는 현재 11가구. 주민등록상 열 다섯 가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배를 움직이는 기름값은 그날 당번을 맡은 집에서 담당한다. 요즘같이 수위가 낮아진 때에는 상대적으로 기름값 부담이 적다.  그래서 오대리 사람들은 키만 있으면 부녀자건, 노인이건 대부분이 배를 움직일 수 있다.

'낙동강 강바람에 치맛폭을 날리며 노를 젓는 처녀 뱃사공'는 아니지만 오대리 아낙네들의 손길이 묻은 이 배는 주민이 유일한 발이다. 요즘 같으면 마을 사람들은 다리품 팔기가 조금은 고단해졌다. 대청호가 만수위에 가까울수록 주민들이 걷는 거리가 짧아지기 때문이다. 물이 차오르면 석탄교 바로 언저리에서도 탈 수 있는 배를 비가 안와 수위가 낮아진 올해에는 수북리 버스정류장에서 2km 남짓 걸어서 옛 취수탑을 지나야 탈수 있다.

마을에서도 배타러 나올 때도 역시 마찬가지. 이렇듯 모든 주민들의 손으로 움직이는 배는 하루에 왕복 8회, 마을과 수북리를 연결해준다. 마지막 배는 오후 5시30분. 막 배 시간 때문에 마을 남정네들은 옥천읍에서 밤늦게까지 거나하게 술마실 여유조차 없다. 아예 옥천에서 밤을 새고 들어간다면 몰라도.  이러한 풍경은 80년 대청댐이 건설되고 난 후의 풍경이다. 대청댐이 오대리를 육로로는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섬으로 만든 원인 제공자이다.

이 섬에도 불과 10여년 전에는 제법 많은 주민이 모여 살았다. 지금은 주민등록상 15가구로 군내에서도 한 두 손가락 안의 작은 마을이지만 한 때 오대리는 150가구에 달하는 큰 마을이었다.  수몰 당시만 해도 100여호에 달할만큼 큰 마을이었다. 오티리, 보내, 버들개, 양로골, 터골 등 5개 자연마을에 주민들이 흩어져 산다해서 오대리라고 불렀다고 하나 기록에는 오류티리와 터골, 즉 대곡(大谷)의 대자를 합해 오대라 했다고 전한다.

현재 전체 주민들은 오티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보내에 1가구가 남아 있으나 지병으로 병원에 있어 실질적으로 다섯개 마을 중 오티리에만 주민들이 거주한다. 터골, 버들개, 양로골은 수몰로 인해 마을 전체가 잠겼다.  수몰전 오대리는 보리의 주생산지였다. 오대리 보리하면 수매장에서 항상 1등급을 독차지했다. 이제 수몰된 농지 덕분에 물이 차 들어오는 시기가 되기 전에 수확할 수 있는 단옥수수를 심는다.

올해 수위가 낮아져 '혹시나' 하던 주민들은 수몰선 훨씬 밑에까지 들깨를 갈았다. 평소 같으면 십중 팔구는 못먹겠지만 올해는 먹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작용했다.  고추는 이 마을 주작목으로 통한다. 특히 마을 여건 때문에 건조실이 들어올 수 없었던 반면 건조실이 없는 점이 요즘 들어서는 주민소득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건조실이 없어 햇볕에 말린 '태양초'가 대전 등지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것. 하나 둘 소문을 듣고 대전 신동아아파트 등지에서 직접 오대리를 찾는다. 

한양조씨와 창녕조씨는 이 마을에서 가장 많이 거주하는 성씨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젊은이는 많은 편이다. 이중 후계자만도 3명. 조백행 이장을 비롯, 조병족씨와 김병관씨 등이 그들이다.  마을 전체적으로 소득이 낮은 대신 축산소득으로 이를 보충한다. 댐 건설로 인한 수몰은 옥천읍 장천리 숯골에 20여가구, 동이면 남곡리에 15가구 가량의 집단 이주촌을 형성했지만 아직 출향인들과의 연계는 특별한 것이 없다.


3공 시절 주장 출신으로 농림수산부 장관을 지낸 조시형씨와 소장 출신인 조천성씨 등이 이곳에서 배출한 인물.  주민들 중 거의 절반이 강건너 남곡리, 석탄리 등지에 농경지를 갖고 있는 현실에서 선착장 해결 및 교통 불편 해소는 가장 큰 숙원이지만 어려운만큼 주민들끼리의 유대감은 더욱 좋아진다. 숙제는 또하나 있다. 마을의 유일한 총각인 조성택씨 장가 보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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