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동정리] 줄무늬 선돌 등 곳곳에 선사유적이 산재
[옥천읍 동정리] 줄무늬 선돌 등 곳곳에 선사유적이 산재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5.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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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정리 전경 사진

말그대로 '물의 북쪽에 있는 마을'인 수북리(水北里)는 금강줄기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통상 마을 위에 복숭아 나무가 많아 봄이면 복숭아꽃이 떨어져 하천 가득히 떠내려간다 하여 명명되었다는 화계(花溪)리와 동정자가 있다하여 명명된 동정(東亭)리를 함께 이르는 명칭이다.

동정리란 명칭이 있게 한 유래는 서쪽에 정자가 있다 하여 서정리란 명칭이 붙었던 바와 마찬가지로 옥천관아의 동쪽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였으나 정자가 어디쯤에 위치했는지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동정리가 크게 변한 계기는 물론 대청댐 건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현재보다는 훨씬 아랫쪽에 위치한 마을로 기름진 논과 밭이 많았었음은 물론이다.  수몰되기 전 보은으로 향하는 37번 국도가 이곳으로 지났음은 이미 과거로 흘러버렸으나 그 과거의 묻혀진 길은 이제 군도로 도로 계획이 되살아났으며 사람들은 이제 관광순환도로로의 기능을 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아무튼 마을이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자 주민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향해 옛날보다는 더욱 높은 위치를 찾게 되었고 현재와 같은 높은 밭자리에 보금자리를 틀게 되었다.  옛날 산비탈 밭이 집단 거주지로 바뀐 것이다. 겉모양으로 보기에 조화있게 맞춰진 집, 집집마다 모양은 같아도 페인트는 제각각 다른 것을 쓴 것을 이르기까지 이곳 주민들은 대청댐 건설과 동정리 거주지 건축에 대해서라면 모두들 할 얘기가 많다.

주민들의 기억은 이주가 거의 마무리될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막바지가 79년 6월이었다.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회분위기에다 무엇이든 국가 권력이 시키는 것이라면 주민들은 억울해도 말못하고 참아야 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한창 장마철이었던 6월2일께 철거반은 지붕을 뜯고 일부 주민들은 울부짖으며 장마비가 오는 가운데 지붕만을 간신히 해놓은 현재의 집터로 이주했다. 새로 이주해 꾸민 집이 24가구. 빨리 서두르는 통에 집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벽에 금이 가고 지붕이 새서 지금도 많은 수의 주민들이 1년에 한 번씩 지붕을 새로 해야 하는 불편을 물론 경제적 부담까지 떠안게 되었다. 오죽하면 기와 지붕을 뜯어내고 스레트로 바꾸겠다는 주민들이 있을까?  집의 구조도 대지의 한가운데에 앉혀 나머지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없게 만들었고 전시행정을 위해서였는지 페인트색까지 주민들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당시 국민주택 자금을 융자받아 건축한 사람들의 사정은 더욱 심했다. 300만원이 원금인데도 논·밭 수몰되어 소득원이 크게 없어진 상태에서 연체되어 2천만원까지 돈을 갚았던 가구수도 많았다.  융자를 받은 15가구 중 아직도 6∼7집이 갚아나가고 있으며, 일찍 갚은 사람들의 경우 농협에서 영농자금을 얻어 국민주택 융자금을 갚는 경우까지 있었다. 

논밭 보상받아 흐지부지 써버린 후 당장 갈아먹고 살 터전이 없어져버린 주민들. 그래도 지금은 형편이 크게 나아졌다며 주민들이 자기위안을 삼는다.  수몰 전 60여호에 달했던 가구수는 수몰되고부터는 34호로 줄었다. 사실 34호 중 본업이었던 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가구수는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벼농사가 3분의 2에 달하고 있으니 주민들은 대부분 직장이나 공장 등에 취업해 농외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주민들로서는 대청댐 수몰 후 또한가지, 짙은 안개 때문에도 피해를 입고 있다. 대청호 주변의 안개 때문에 농작물 수확에 큰 지장을 받고 있다.  이곳은 오대리에 뿌리를 둔 창녕조씨 문중이다. 본래 동정리 등 수북리 일대는 동이면에 속해 석탄이와 인근, 지양리, 남곡리 등지에 널리 퍼진 선사유적이 산재해 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정리에는 특이한 모양을 한 2기의 선돌이 있다. 옛 옥천취수장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선돌과 군동초교 앞 100m 지점에 위치한 선돌이 그것.  흔히 줄무늬 선돌로 불리는 2기의 선돌은 남성형 선돌로 수몰되기 전에는 서로 100m 떨어져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각각 60개, 45개의 줄을 그어놓아 학계로부터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보통의 선돌과는 달이 왜 줄을 새기었을까 하는 것이 연구과제로 대두된다.

마을 앞에 위치한 정윤세의 처 밀양박씨 절부문(節婦門=효열문)은 대대로 효열의 표상으로 전한다. 박씨는 남편의 살인누명을 쓰고 대신 투옥되는가 하면 스무살에 청상과부가 되었음에도 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셔 1723년 경종으로부터 절부문을 하사받았다.  마을에서는 단군계라는 계모임이 조직돼 마을 단합 및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있다.  최현식.최순남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주민들은 진실된 주민상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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