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면 장위리] 군내 마을 단위 쌀 생산량 최고
[청산면 장위리] 군내 마을 단위 쌀 생산량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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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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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위리 전경

청산면 장위리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수는 모두 2백28명이다. 가구의 수는 86호. 면 소재지가 아닌 마을로 따지면 큰 규모이다.  이 가운데 연령별 인구 분포를 손인석 이장이 집계해 놓은 통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70세 이상의 노인층은 남자가 18명, 여자가 28명으로 모두 46명에 달한다. 마을 전체 인구의 20.2%가 70세 연령별 분포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70세 이상의 연령층과 함께 노인층으로 분류되는 65세이상 69세까지는 남자 12명, 여자 13명으로 모두 25명. 상대적으로 이 연령층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대목.

다른 연령층의 통계가 통상 10세에서 15세까지의 인구수를 뽑은 것인데 비해 이 연령층은 5세 단위로 연령을 산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마을의 65세이상 총인구는 71명이며 총인구의 31.1%에 달하는 비율을 보이고 있다. 연령별 분포로 보아 틀림없는 장수마을이지만 반면에 노동력의 노령화 현상이 크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55세에서 64세까지는 남자 22명, 여자 27명으로 모두 49명에 이른다. 40세에서 54세까지는 32명, 25세에서 39세까지는 13명으로 연령대별 인구수에 있어서는 가장 적은 수를 보인다. 현재 장위리에는 12명의 초등학생이 있다.  숫자상으로는 다른 마을에 비하면 아직 많은 수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유아의 수가 8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학생수의 감소는 불보듯 뻔한 일이 되었다.

86호에 2백28명의 인구이니 호당 평균 2.7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셈이다.  이 마을의 경우 군내 어느 마을보다도 쌀 생산량이 많다는 점에서 이 같은 인구 통계는 자뭇 주목할 만하다. 통일벼가 한창 재배될 당시에는 이 마을 한군데에서만 7천2백개의 벼(40kg 기준)가 나와 웬만한 면단위 보다도 생산량이 많다고 했었다.  사정은 달라졌지만 흉년이 들었던 지난해만 해도 3천3백12개를 수매했던 마을에서 올해는 풍년 등의 영향으로 수매량이 4천개를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미 농협 미곡처리장으로 수매한 양만도 1천9백개에 달한다. 장위리가 군내 최대의 쌀 생산 마을이란 사실은 경작면적으로 살펴도 가늠할 수 있다. 현재 마을에서 경작하는 논이 23만3천여평(77.7ha), 밭이 8만4천여평(28ha)에 이르는 등 논밭을 포함하면 1백5ha가 넘는다.  호당 경작면적이 우리나라 평균을 넘어서는 1.2ha에 달한다. 마을 구역의 경지정리율이 1백%에 가까운 99%에 달한다는 사실이 이 마을의 대단위 쌀 생산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따라서 이 많은 농토를 경작하기 위한 농기계만 해도 엄청나다. 현재 마을에서 보유하고 있는 농기계는 콤바인이 9대, 트랙터가 15대에 이른다. 쌀농사를 짓기 위해 구입해야 하는 농기계 자금 등 부채가 이 마을 경제를 주름지게 하는 요인이다.  다른 작목에 비해 소득이 상대적으로 낮은 쌀농사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쌀농사 이외에 마을에서 소득작목으로 경작되고 있는 작목은 인삼과 담배 등이다. 현재 인삼은 10여가구, 담배는 6가구 정도다.

이 마을의 지명이 장위리(長位里)라고 불리기 이전에 장사래(長沙來)라고 불리웠다는 말이 전한다. 이는 장사래라는 지명에서도 느낄 수 있듯 한곡리에서 부터 마을에 이르기까지 하천을 따라 모래가 깔려 있었다는 얘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이 얘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을에 위치한 농경지를 조금만 파들어가도 자갈로 이루어진 땅으로 물을 얻기가 쉽다는 것은 주민이면 누구나가 인정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양지말, 음지말, 영싱이 등 3개로 이루어진 각각의 자연마을마다 각기 다른 성씨가 주로 모여사는 대성촌을 이루었다. 양지말에는 전주유씨가, 음지말에는 경주김씨가, 영싱이에는 밀양손씨가 주로 모여 살았다.  안산김씨가 처음으로 마을에 들어와 터전을 잡았다고는 전하나 현재는 1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은 경주김씨가 16호 정도로 가장 많고, 전주유씨 7∼8호, 밀양손씨 6∼7 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일벼 재배시 다수확 마을로 선정된 바도 있는 마을은 결국은 그 상금을 기반으로 마을회관을 건축했다.

영싱이 윗쪽에는 옛날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때 양식의 큰 절터가 있다.  지금은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는 이곳의 절의 규모는 출토되는 탑부재 등으로 보아 제법 큰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민들이 발견해 보존하던 돌부터를 어느 해인가 잃어버려 지금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영싱이라는 자연지명으로 보아 이 절의 명칭은 영신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마을에서는 장위천 석축쌓기와 아직도 포장이 되지 않은 마을 안길포장 등의 숙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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