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문정1리] 전업농가는 일부, 대다수가 상업에 종사
[옥천읍 문정1리] 전업농가는 일부, 대다수가 상업에 종사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6.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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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1리 사진전경

지금까지 밝혀진 각종 문헌자료나 전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오는 군내 마을의 대략적인 평균 역사는 얼마나 될까? 그 답을 명확히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사실로 고증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를 터이다.

어찌되었든 이와 관련해 오래된 마을 찾기 작업은 우리의 뿌리를 캔다는 의미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전해오는 바로는 문정리가 역사적으로 오래된 마을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문정리란 지명은 그리 오래된 지명은 아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국권이 침탈된 후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해 읍내면 저전리라 불렀던 지명을 문정리와 죽향리로 나누었던 것이다.  이 마을을 문정리라 부르게 된 것은 당시만 해도 행정관청이 구읍지역에 있었던 탓에 마을에 들어오는 길목이 관아에 들어오는 문(門)과 같은 마을이라 한 데서 유래된 입문동(入門洞)이라는 말과 마을에 아주 좋은 샘이 있다 하여 붙여진 '샘거리'를 합해 문정리라고 했다.

옥천향지의 기록과는 별도로 마을에서는 입문동이라는 지명을 '의문거리'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유옥길 노인회장이 말하는 의문거리도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이 마을이 샘거리라고 불렸던 것에 대해 마을에 좋은 샘이 많았던 것으로 얘기하고 있으며, 이중 특히 이봉래(74)씨 집에 있는 샘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옛날 샘거리의 유일한 샘으로 지나가던 나그네들이 목을 축이는 곳으로도 유명했다는 설명을 남긴다.

이 마을이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현재의 금송가든 뒤에 위치한 자연마을 '무시랭이'이다. 무시랭이의 명칭 유래를 옛날 신라시대 관직의 명칭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시랑이란 관직이 있었고 이 자연마을에서만 9명의 시랑 벼슬아치가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문정리 전체적으로 볼 때도 오랜 마을의 역사를 알려주는 얘깃거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행정관청이 있어 사람들이 북적댔던 마을 중의 하나인 문정리는 지금 구읍지역 다른 마을과 같이 상대적인 주민들의 소외감이 적지 않다.

현재 가구수는 124가구이며 400여명의 인구가 거주하는데 들쭉날쭉하는 경우가 잦아 정확한 인구파악이 쉽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 주민들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직장인들이거나 상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농촌인 군내 실정으로 보아 전업적으로 농사를 짓는 경우는 불과 10가구 미만이다. 

그나마 몇 가구 안되는 농민들의 경우에도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을 뿐 별다른 특용작물이 없다. 마을의 행정적인 경계는 시내권 마을치고는 제법 넓은 편이다. 고속도로를 경계로 해서 옥천상고와 농촌지도소, 농지개량조합 등이 문정1리 구역이고 역시 시내권에서는 넓은 들인 '문정들'도 마을의 경계안에 있다.

삼양리 네거리까지의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가든명가까지가 경계이고 주택가가 있는 쪽으로 따지면 구읍 네거리를 경계로 옥천읍내 4분의 1이 마을이다.  마을에는 현재 주민들의 단합과 화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소중한 모임이 구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마을의 중앙에 만들어 놓은 원두막을 중심으로 서로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경로효친 정신도 높이도록 하는 계모임 '원두막회'(회장 손용길 이장)가 그것으로, 손 이장이 이장을 맡은 지난 94년에 결성되어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회원들의 부모들에 대한 경로관광을 지난해 9월말에 실시해 큰 호응을 얻었다. 

매달 2천원의 적은 회비를 모아 버스 한 대에 탈 수 있는 45명의 주민들이 부모관광을 시켜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지금은 회원으로 가입하려는 주민들이 몰릴 정도로 신청자가 몰리고 있다. 마을에서는 이 모임을 좀더 확대해 주민들의 단합이 더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마을이 오랜 역사를 지닌 관계로 도로 재정비 등 크고 작은 숙원이 제기되고 있다. 이중 마을 주택가와 죽향초교 사이의 조그만 마을 안길에 개설되어 있는 하수구 복개가 현재로선 가장 큰 숙원으로 꼽히고 있다.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으며 다른 차는 교행이 안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통학로이기 때문에 공간을 더 확보해 사고 위험성 등을 줄여보자는 게 주민들의 생각이다.  또 하나 마을 도로변에 있는 흉가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라 있다. 부녀자들이나 학생들의 경우 밤에는 흉가 앞을 지나기가 두렵다고 얘기한다.  더불어 주차공간이 없는 마을 형편상 마을 옆에 나 있는 개천을 복개해 주차장으로 활용해 주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

지난해 부녀회(회장 박옥화)가 새로 구성된 이후 활성화 되고 있는 부녀회의 활동도 눈여겨 볼만하다. 매달 11월이면 이들 회원들은 어김없이 모여 노인 모시기 등의 사안을 상의해오고 있는데 지난해 처음 경로잔치를 치른 데 이어 올해는 범위를 어려운 이웃에까지 넓혀 연말 이웃돕기를 계획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3반 반장을 맡고 있는 전정자씨가 효부로 꼽히고 있으며, 3공화국 시절 국회의장을 지낸 바 있는 정구영씨의 출생지도 이곳이다. 이곳을 고향으로 둔 출향인들 가운데는 이지영(대전매일신문 사장)씨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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