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적하리 앞여울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적하리 앞여울
두지벌·올목·못골 옛 지명에 면면히 조상의 선견지명이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4.05.08 00:00
  • 호수 72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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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여울 앞 자갈밭에 향수어린 옛 얘기가 넘쳤다. 이 여울을 건너 이원장, 심천장을 건넜고, 분지벌.올목 사람은 옥천을 나다녔다. 왼쪽부터 성수영, 정수병, 박찬성씨.

겨울을 밀어낸 5월의 자연은 이미 초록을 내뿜는 생명들로 가득하다. 앞여울을 눈 앞에 두고 철퍼덕 주저앉은 자갈밭엔 옛 얘기들이 넘실댔다. 앞여울은 철봉산을 끼고 도는 금강 물줄기에 있다. 앞여울은 지금은 식당들이 들어섰지만 옛 용소말이 있어서 마을 앞의 여울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앞여울. 올목재를 넘었던 분지벌과 올목 사람들은 물이 적을 때 여울을 건넜다. 차량 이용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30∼40년 전만 해도 이원·동이 주민들이 주로 다녔던 매우 큰 길이었다.

■올목재 서낭당,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1995년 철봉산에 있다는 쇠말뚝을 찾으러 정수병씨와 더불어 몇몇이 철봉산에 올랐다 분지벌로 넘는 올목재에서 서낭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서낭당 흔적을 기억하며 5일 오전 올목을 찾았다. 오르는 길은 오래 전부터 꽃마리, 개불알풀꽃, 쇠별꽃, 봄맞이꽃 등의 앙증맞은 들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애기똥풀꽃과 산딸기꽃은 바람에 하늘대며 진노란빛 유혹을 던진다.

올목재에 다다랐다. 이상하다. 서낭당을 찾으니 흔적이 없다. 그러나 돌 한 조각 못보겠다. 갑자기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서낭당 돌이 영험하다는 속설에 누가 와서 가져갔나?

허탈한 마음을 안고 터덜터덜 고개를 내려왔다. 속상하다.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실까 하고 시인 홍성규·오리화가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동양화가 박명자씨 집을 찾았다. 부부가 반가워하며 녹차를 내온다. 이왕 왔으니 올목을 오백년 동안 지켰을 소나무에 대해서도 물어봐야겠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예비군 참호를 만드느라 서낭당 돌을 다 썼을 것이라는 심증에 다다르게 되었다. 금강을 건너 블록벽돌과 시멘트를 지고 올라가 참호를 팠다는 사실을 기억한 박명자씨의 기억력 덕분에 참호 시설재로 활용되었을 사라진 서낭당에 대한 아쉬움만 되뇌었다.

삼양리토성이나 서산성터 내부에 파였던 예비군 참호, 관산성 꼭대기에 있던 대공포 진지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 씁쓸하다.
 
■오백년 소나무는 정성으로 크고
홍성규씨 집 위에 우뚝 솟은 소나무는 본래 올목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모셨던 영험한 소나무다. 수령이 오백년 정도 될 것이라는 이 소나무는 지난 3월5일 폭설에 의해 크게 상처를 받을 뻔 했다. 땅에 닿았던 가지의 눈을 털어준 홍씨 부부의 노력 덕분에 소나무는 보전될 수 있었다.

이 소나무는 올목 마을 자체가 폐허화되면서 칡덩굴과 잡풀 등에 의해 거의 고사 직전까지 갔다. 소나무는 8년 전 올목에 정착한 홍성규씨 부부의 노력으로 제모습을 찾게 되었고, 군의 관심 속에 이제 전국에서도 유명한 소나무로 자리잡았다.

80년대 없어졌던 올목 마을은 90년대 들어 한 두 사람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자연마을로서의 명성을 다시 찾고 있다. 식당 간판도 내걸렸으나 홍수기에는 두세 달씩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막히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9가구가 주민등록상 등재되어 있으나 통행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상주하던 2세대가 이미 밖으로 나갔다. 더구나 용담댐이 건설된 후 홍수기에는 통행 단절이 더 오래 지속돼 주민들이 겪는 생활불편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이러다간 다시 또 마을이 폐허화될까 걱정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올목에서 본 금강 풍경은 시원하다. 강과 자갈밭, 강 한복판에 형성된 버드나무 숲과 섬은 어느새 행락객들의 행락지가 되었다.

■앞여울 앞에서 옛 추억 더듬기
“나무하러 다닌 지가 30년이 넘었지. 오랜만에 왔는데 진짜로 많이 변했네. 일제 때 태어나서 6·25전쟁 겪었지, 지금이면 라면이나 삶아먹으라고 하겠지만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에는 어디 그런 게 있었나? 밥만 먹으면 나무를 하러 다녔으니. 요즘같은 봄이면 나물을 끓여대느라고 더 나무가 필요했어.”

향토사학자 정수병씨와 함께 여울의 추억을 더듬기로 한 박찬성(69·동이면 적하리 학사골)씨와 성수영(74·적하리 학사골)씨는 앞여울 앞 자갈밭에 앉아 흔적조차 없어진 여울을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탓했다. 역시 여울을 얘기하려면 나무하러 다니던 추억을 빼놓을 수가 없나보다.

얇게 얼었던 얼음이 깨져 걷어부친 다리에 났던 상처 경험은 기본이고, 배가 너무 고파 강변에 나오면 집에서 고구마를 찌는 냄새가 풍기는 듯하던 그 시절 얘기가 자연스럽다. 보릿고개가 한창이던 시절 5월이면 대부분의 가정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다. 그때까지 고구마 퉁가리에 고구마가 남아 있는 집은 운이 좋은 행복한(?) 경우였다.

“그때 보리도 채 익지 않은 상황에서 노릇해지기만 하면 베어 콩하고 갈아서 죽을 끓여 먹었지. 남자들은 나무하고, 여자들은 나물 뜯으러 들로, 산으로 다니고.”

“콩이 어디 있었나요?” 콩이 봄철인 5월에 날 리가 없으련만 어리석은 질문에 “씨 하려고 남겨두었던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세 명의 여울 길동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보릿고개 얘기로 추억을 쓸어 담느라 바쁘다. 이 곳이 앞여울로 불려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원래 용죽리 자연마을의 하나인 용소말이 식당이 모여 있는 죽촌 옆에 위치했는데 이때 여울 이름이 마을 앞에 있다고 해서 앞여울이라고 했다는 것이 정수병씨의 설명.

지금은 하천 둔치로 변해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지역에 용소가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용소말로 마을 이름을 정했는데 언젠가 홍수로 인해 현재 용소말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기사천 전숙의 전설은 여울에 깃들고
앞여울에는 옥천전씨의 중시조 고려말 조선초의 전숙 선생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고려가 망하면서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전숙 선생이 내려와 자리를 잡은 곳이 적하리였고, 전숙 선생은 시간만 나면 낚시를 드리우고 여울에 앉았다. 낚시를 하면서도 근처에서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은 데려다 훈계를 했다. 훈계를 들은 사람들은 전숙 선생의 훌륭한 인품에 감동해 착한 사람이 되었다 해서 근동에서는 훌륭한 노인선비로 칭송을 듣게 되었고, 지사천(기사천(耆士川)에서 유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기사천이 기사내, 지시래라고 변형되면서 이 지역을 ‘지시러라고 부르게 되었다. 111살까지 살았던 전숙 선생의 별명에서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여울에는 행락객의 수상스키 모터 소리만
여름이면 앞여울 근방은 행락지가 돼 버린다. 5일 오후에도 수상스키를 타는 행락객이 모는 모터보트 소리가 요란하다. 가족 단위로 놀러온 자동차가 자갈밭에 옹기종기 모여 고기를 굽고, 몇몇은 세월교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다.

골재채취와 세월교 가설 등의 요인으로 여울 흔적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들의 발길만이 어지럽다.

올목은 오리목, 두지벌은 뒤집어진 자갈밭

금강변에 위치한 올목 마을 위로 올라가면 경관이 그만이다. 아스라이 강이 휘돌고, 자갈밭 사이로 마을로 들어오는 세월교가 보인다. 정수병씨에 따르면 올목은 옛 지명이 ‘오리목’이었다. 강건너에서 바라보면 영낙없이 오리의 목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마을이 있는 자리가 오리의 목 자리이다. 특히 전팽령 선생의 아들인 전엽 선생이 오리목 지형 중 오리부리 앞에 해당하는 쌍바위에서 낚시로 고기를 잡아 아버지를 봉양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쌍바위 앞에는 항상 고기가 많았고, 전엽 선생은 그래서 쌍암이라는 호를 얻었단다. 그러던 중 오리부리 중간 쯤에 지난해 선형이 개량된 서울-부산간 고속도로의 터널이 생겼다. 이는 영낙없이 오리부리에 난 코같이 보인다. 동이 사람들은 오리 모양을 완성시켜주는 지형이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올목 마을로 들어가는 넓은 둔치의 자갈밭은 원래 모래가 좋았던 곳이다. ‘두지벌’이라고 불리는 이 곳은 일제 때에는 사금을 캐느라 자갈밭이 뒤집어졌고, 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는 엄청난 양의 골재가 채취돼 다시 밭이 뒤집어졌다는 얘기를 낳고 있다. 두지벌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는 얘기다. 이런 지명은 또 있다. 못골이라는 곳에는 농사용 소류지가 있다. 용죽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는 이 연못은 못골이라는 지명이 있어 생긴 것이라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앞을 미리 내다본 조상들의 선견지명이 투영된 지명 아니겠느냐는 게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말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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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완하 2019-02-12 16:53:36
전숙 할아버님의 후손으로서
지시래가 왜? 지시래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