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에 속한 옥천과 청산이 충청도 관할로 변경되다
경상도에 속한 옥천과 청산이 충청도 관할로 변경되다
[오늘의 역사 33]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옥천 <9월7일∼9월20일>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3.09.20 00:00
  • 호수 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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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3년(1413년) 9월10일 [경상도 옥주·청산을 충청도로 이속시키다]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때만 해도 경상도에 속해 있던 옥주(沃州·고려 때까지 옥천은 경상도에 속해 있었으며 옥주라고 불렸다)가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처음으로 충청도로 이관되었다. 조선 초 태종 때 여러 번 행정구역이 변경되다 결국은 청산현으로 확정된 청산도 이날 결정에 의해 경상도에서 충청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옥천과 청산을 비롯해 보령·황간·영동도 함께 충청도로 바뀌게 되었다.

◆문종 즉위년(1450년) 9월19일 [의정부에서 봄·가을 1도회에서 염초를 굽도록 하다]
군기감에서 염초(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 질산칼륨을 말하며 흔히 화약을 이른다)를 구워내는데 있어 하는 곳에서만 하다 보니 폐해가 있다 하여 1도회를 두고 번갈아가면서 각 지방에서 구워내도록 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따라 청주가 중심고장이 된 1도회로 묶인 옥천과 청산에서도 염초를 번갈아가며 생산하게 되었다.

◆세조 1년(1455년) 9월11일 [병조에서 각 도의 내지에도 거진을 설치하는 등 국방을 강화]
병조에서 각도의 해안 등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고 방어를 튼튼히 했으나 내륙의 주현(州縣)에서는 진이 설치되지 않아 적이 침략할 경우 이를 방어할 수 없다며 거진(巨鎭·조선시대 때 지방절제사(정3품)와 첨절제사(종3품)이 지휘한 군영으로 세조 때에는 지방군사 진영을 개편하여 각 도에 몇 개씩 설치하여 부근에 있는 고을을 좌·우·중익으로 삼아 관리했다.)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충청도는 청주와 충주 등에 거진을 설치했고 옥천과 청산은 청주의 좌익으로 분류되었다.

◆성종 1년(1470년) 9월19일 [형조에서 죄수들의 죄에 대해 삼복하다]
형조에서 죄인들을 삼복(三覆·고려 때부터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의 심사를 더욱 신중히 하기 위해 시행하던 삼심제도이다. 오늘날의 삼심제와 같은 것이다)하여 죄인들의 죄를 아뢰었다. 이중 옥천의 죄수인 사노비 신용도 포함되었다. 신용은 김의원의 집에 들어가 강도질한 죄를 물었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참부대시(斬不待時·칼로 목을 베어 사형을 집행하는 참형은 부대시참와 대시참으로 나뉘었고 부대시참은 사형 시기로 정해진 추분을 기다리지 않고 사형이 확정되면 바로 시행했고 대시참은 추분에 맞추어 집행했다)에 해당된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임금이 이에 따랐다.

◆중종 4년(1509년) 9월9일 [옥천군수 남조가 사헌부로부터 탄핵받다]
사헌부에서 행실이 올바르지 못한 관리들의 행태를 임금에게 탄핵했다. 사헌부는 옥천군수 남조와 곡성현감 박지겸이 임사홍의 사촌으로 연줄에 따라 벼슬길에 올랐는데 임사홍의 아들로 성종의 사위가 된 임숭재가 경상도 채홍준사로 있을 때 다른 도의 수령으로써 도 경계를 넘어 따라다니며 죄주어야 할 사람은 면해주기를 청하고, 죄를 주지 않을 사람은 죄주기를 청하는 등 방자한 행동을 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이들을 해임할 것을 건의했지만 이들 이외의 이들을 제외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명종 11년(1556년) 9월9일 [청산에 천둥이 쳤다]
함경도 온성에 천둥번개가 크게 치고 우박이 내려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 충청도에서는 청산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천둥이 쳤다.

◆선조 30년(1597년) 9월10일 [옥천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도체찰사 이원익이 창원과 옥천에서 왜적을 물리친 전과를 보고했다. 이 보고에서는 8월28일 별장 이노와 악견산성장 이견, 별장 김시약 등이 창원과 옥천 등지에서 접전해 24명의 왜적을 베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선조 30년(1597년) 9월20일 [청산현감이 용맹을 과시하다]
충청병사 이시언이 장계를 올렸다. 이 내용에는 청주에 주둔했던 왜적이 진천과 충주로 이동했기에 군민을 수습하여 방어사와 함께 그 앞길을 차단하려고 말을 달려 충주에 이르렀다. 이때는 청주에서 왜적에게 패전한 이후였고 각 읍의 수령까지 모두 도망하여 숨었는데 청산현감 이홍재는 정예병 50여명을 뽑아 적진을 뚫고 도우러 왔다는 것이다. 이에 이홍재를 우선 포상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선조 31년(1598년) 9월12일 [선조가 명나라 사신을 맞아 전황을 설명하다]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참전한 명나라 사신 서급사가 도착해 선조가 이를 맞았다. 서급사는 이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울산의 도산전투가 승전인지, 패전인지의 여부를 가리는 조사를 하기 위해 왔다고 밝혔고 선조는 문제되고 있는 장군이 비방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 과정에서 청산전투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선조는 명나라 조정에서 문제가 된 양경리가 직산과 청산에서 왜적의 기세를 꺾었다고 밝혔다.

◆광해 1년(1609년) 9월18일 [청산에 머문 좌찬성 정인홍에게 약품을 보내다]
좌찬성(조선시대 의정부에 속했던 종1품 벼슬. 삼정승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벼슬) 정인홍이 조정에 올라가다 청산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다며 머물게 되었다. 이에 광해군은 "오래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관원을 보내 다시 부르려 했다"라며 "내의로 하여금 의약품을 가지고 말을 달려 간병케 해 꼭 올라오도록 하라"라고 당부했다.

◆광해 7년(1615년) 9월11일 [좌의정 정인홍이 옥천에 머물며 상소하다]
좌의정 정인홍이 발병 때문에 침으로 치료를 하다가 옥천에 이르러 병이 도져 갈 수 없다며 먼저 글을 올려 백성의 형편을 고한다고 밝혔다. 정인홍은 이 상소에서 가뭄 때문에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어 구휼대책을 세워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광해군은 빨리 낫기를 기다린다며 재해를 입은 전답의 면세와 흉년을 구제하는 등의 일을 착실히 거행하라고 지시했다.

◆인조 6년(1628년) 9월16일 [옥천·청산, 이른 서리 내리다]
청산과 옥천을 비롯한 보은, 태안 등 충청도 8개 고을에 이른 서리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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