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앗거리에서]선물 사오려면 서른일곱개를
[물방앗거리에서]선물 사오려면 서른일곱개를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3.05.16 00:00
  • 호수 6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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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내일 편지지 가져가야 돼. 우리 선생님이 자기가 존경하는 선생님께 편지쓰는 시간 가진대. 그리고 선물 가져오려면 서른 일곱 개 가져오래."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저녁. 서른 일곱 개의 선물을 가져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곧 선물을 준비해오지 말라는 얘기 아닌가. 아이 얘기를 듣고 며칠 동안 고민했던 마음을 접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라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큰 아이는 친구들 몇이서 선생님께 드릴 꽃을 사기로 했단다. 잘 했다고 대답하고는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내일 학교에 가서 쓰는 편지는 다른 선생님께 쓰고 오늘(14일)은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써야겠다'라고 말한다. 열심히 편지를 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답게 가르치려 애쓰는 많은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1964년 서울 휘문고에 다니던 중 스승의 날을 만드는데 앞장섰던 한홍구씨는 스승님께 감사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한 언론에 밝혔다. 당시 윤석중 새싹회 회장이 온 겨레의 스승인 세종대왕의 탄신일로 정하자는 제안을 해 15일이 스승의 날이 되었단다.
 
올해로 22회를 맞은 스승의 날 행태는 어떤가?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과는 상관없이 학부모들은 으레 선생님들에게 선물을 줘야 하는 날로 인식하고 있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학부모들은 어떤 선물을 할 것인지, 또 어느 정도의 가격대에서 선물을 해야 할 지, 과연 선생님은 이 선물을 좋아할 지를 고민하게 된다.
 
선생님이 과연 이 선물을 받을 지를 학부모들이 고민하는 것은 그 크기만큼 현장에 있는 선생님들의 고민도 크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장면이다. 최근들어 본래 취지를 잃고 있는 스승의 날을 학년말인 2월로 옮겨 부담없이 존경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좋다는 얘기들이 제기되고 있다.

좋은 방향으로 취지를 살릴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토론이나 설문조사 결과 등이 발표되고 있다. 교육방송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학부모들이 생각하고 있는 적정 선물가격대가 1∼3만원, 선생님들의 경우 1만원 이하라는 견해가 나왔다고 한다.
 
우리 고장도 이같은 스승의 날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올해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스승의 날을 전후해 학부모들이 구입하는 선물은 적게는 1∼2만원대인 책 선물, 3∼5만원선인 속옷이나 화장품세트, 그 이상의 금액인 백화점 상품권 등이 주종을 이룬단다.

선물이나 촌지 따위를 주고 받는 날로 왜곡돼 있는 스승의 날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2월로 기념일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에 개인적으로 찬성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학부모와 교사들의 압박감과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박영학 교육장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옥천에서 (문제가 될만한) 촌지는 없고 `정성어린 값싼 선물까지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느냐'는 게 박 교육장의 인식이었다. 교육장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지만 `스승의 날 현실에 대한 고민'이 일선 선생님·학부모의 그것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음을 확인할 기회였다. 이 문제라면 교육청과 각 학교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학부모들을 설득하고 계도하며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내 아이가 잘못 보일까봐'라든가, `다른 학부모들은 다 하는데 우리만 안할 수 없다'는 것이 학부모들의 대체적인 인식인 바에야 이런저런 논란과 선생님들의 좌절감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인식전환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교단 사회에서 따돌림을 각오하면서까지 `선물은 받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일부 선생님들의 고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공교육이 허물어지고 학교를 믿지 않는 일부 학부모들이 선물 한 번 준비하는 것으로 교단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다시 가진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의례적인 선물보다는 존경의 편지를 더 받고 싶다'는 한 선생님의 말이 아프게 다가오는 2003년 스승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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