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앗거리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언론개혁운동
[물방앗거리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언론개혁운동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3.04.11 00:00
  • 호수 6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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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는 일본군 중위 한 명이 한 장사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장사는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복수한다고 선언한 스물 한 살의 김 구 선생이었다. 일본군 중위를 죽인 후 김 구 선생은 자신이 해주에 사는 김창수(당시 이름)며 `국모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왜놈을 죽인 것'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해주의 집으로 돌아온다. 

2개월 후 붙잡힌 김 구 선생은 법정에서 신문하는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와 있던 와타나베라는 일본인 경찰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라고 호통을 친다. 시퍼런 서슬에 놀라 와타나베는 대청 뒤쪽으로 도망가 숨어 재판을 지켜보았다.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일지라도 사람을 죽였다 하여 사형을 선고받은 김 구 선생은 감옥을 탈옥한다. 탈옥한 후 황해도 일대에서 교육운동에 헌신한 김 구 선생은 황해도 일대를 돌며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지는 1905년과 경술국치를 당하는 1910년 즈음에도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주민들을 교육한다.

나라를 잃은 상황 속에서 1911년 소위 안악사건에 연루돼 갖은 고문 끝에 15년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했고 1915년 가출옥한 후 1919년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중국에 있는 동포들의 집을 전전해 가면서 얻어먹는 참담한 삶을 살면서도 독립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당당한 목소리를 냈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에는 `독립정부가 조직되면 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는 평소 소원을 말해 청사를 지키는 경무국장으로 출발했다.

김 구 선생의 일생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으나 평생을 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이니 우리는 김 구 선생을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여긴다.
  
지난 3월17일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조선일보 윤전기를 철거하겠다는 독립기념관 이사회의 결정이 내려졌다.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었던 조선일보의 윤전기는 일제말 조선일보가 일본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으며 정신대 가기를 강요하고 선전했던 친일논조를 일삼던 때의 윤전기이다. 이 윤전기가 만세운동을 벌인 후 순국한 김순구 선생을 고문했던 큰 대못을 비롯, 독립정신의 상징을 모아놓은 독립기념관에 함께 전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선일보의 친일행위를 알리고, 이를 반성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한편 새로운 언론으로 거듭나라고 요구했던 시민단체들은 독립기념관 측에 조선일보 윤전기의 철거를 수차례에 걸쳐 요구했고 시위까지 벌였다.

이사회에서 윤전기 철거결정을 내린 다음날 조선일보는 `권력은 역사도 철거하는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일제 암흑기에 유일하게 한글로 된 신문이었고 1940년 8월11일 폐간호를 찍었던 윤전기가 독립기념관에서 철거된다니 부끄럽다라고 밝혔다. 일제에 빌붙어 일본왕을 숭배하게 하고 일본어를 국어라고 한 코너를 만들어 가르쳤으며 조선일보 제호 위에 버젓이 일장기를 박아냈던 그 역사는 감추고 `우리 역사를 철거'한다고 항의한 것이다. 한나라당도 조선일보 윤전기 철거결정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를 애써 외면한 채 권력의 특정언론 죽이기 의혹이라는 논평을 냈다. 

마침 해외연수에서 돌아오는 날이라서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심규철 국회의원도 국내에 있었더라면 독립기념관 이사 자격으로 이 이사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심 의원에게 만약 이사회에 참석했다면 어떤 의견을 냈었겠느냐고 물었다. 이미 몇 차례 우리 신문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조선일보의 일제하 친일행위를 비판하고 민족 앞에 사과하라는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어 쉽게 의견을 들을 수 있겠거니 했는데 대답이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일제하 암흑기에 강압에 의해 어쩔수 없이 행해졌는지, 아니면 자발적인 친일행위였는지 구체적인 연구를 해봐야 하겠다는 애매한 답변이 돌아왔다. 살기 위한 인간본성의 약함의 발로였다면 국민 앞에 용서를 빌면 될텐데 안하고 있으니 `답답하다'는 나름대로의 심정도 밝혔다.

정치인 입장에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신문이고 한나라당과 거의 같은 정치적 입장을 자주 보인 신문이니 입장 곤란한 면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측면에서라도 좀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밝혀주길 적어도 나는 기대했다.

조선일보의 친일행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실천적인 반대운동의 방법으로 구독중지운동을 펼치기 시작한 곳은 우리 고장이다. 좋은 상품인지, 나쁜 상품인지를 가려 소비자들이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전정표씨와 김계명씨 등 두 명의 조선일보 바로보기운동 독립군이 우리 고장에서 생산된 `진달래', `민들레'라는 쌀을 일명 안티조선쌀이라는 브랜드로 개발해 전국을 돌며 언론개혁운동을 펼치기 위해 떠났다.

일제 때 조선일보의 친일행위를 `당시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상황논리라거나, `당신 아버지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느냐', `그 유명한 시인 정지용도 창씨개명을 했다'라는 논리로 변명하려 한다면 우리 후손들에게 정의와 애국정신, 민족정신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김 구 선생은 일생을 빌어(?) 먹어가면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김순구 선생을 비롯한 우리 고장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삼일운동 당시 만세를 부르다 현장에서 순국하거나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 앞에서 철저한 반성조차도 없는 친일언론들의 반역사적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민족적 죄악이다.

언론의 영향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언론개혁은 과거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때문에 이 두 명의 전국순회 언론개혁운동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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