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하·권경분 부부
전영하·권경분 부부
함께사는 세상 [102]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3.03.28 00:00
  • 호수 6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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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전영하씨와 그의 아내 권경분씨.

차를 세우고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는 기자의 눈에 얼굴의 반을 가리는 큰 모자를 쓰고 손에는 전지가위를 든 아주머니가 보였다. 미리 연락을 해 두었더니 밭에서 길가로 마중을 나온 참이었다. 별 다른 말 없이 앞서 걷기 시작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시골집 어머니의 모습같아 푸근했다.

3월의 따스한 봄볕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21일 오후였다. 밭에서 만난 전영하씨는 낯선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가지치기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머니도 직접 집에서 수확한 배를 가지고 만들었다는 `배즙' 한 봉지를 건네 주곤 곧바로 포도 넝쿨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모습은 한 시간 넘게 이어진 대화 내내 계속되었고, 전영하씨 부부의 억척스러웠을 삶을 백마디 말보다 더 밀도있게 전해주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권경분'
먼저 전영하씨와 아내 권경분(50)씨의 얘기부터 해야겠다. 이날 전영하(58)씨와 나눈 얘기의 절반은 아내에 대한 얘기였으니 별 도리가 없다.
어린 시절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전씨의 이력은 정말 다양했다. 탄광 광부부터 자전거 수리공, 술도가 공장장, 전기기술자. 그리고 최종적으로 농부까지. 자신의 얘기를 책으로 써도 몇 권은 나올 것이라는 전씨의 말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다양한 이력이었다.
 
전씨가 아내 권경분씨를 만난 곳은 경상북도 상주다. 그 곳에서 자전거 수리공과 술도가 공장장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 연애를 걸었다고 한다.

"처음에 장인어른이 반대도 많이 했죠. 내가 원체 가진 것도 없고, 데리고 가면 딸 고생시킬까봐 그랬겠죠. 나이 차도 있으니까 더 그랬을 꺼구요. 그래서 그냥 옥천으로 데리고 도망 와버렸어요."

"부지런하잖아요. 부모한테도 잘하고, 착하니까 나중에는 아버지도 좋아하셨어요."
 
한 쪽에서 포도가지에 집중하고 있던 권경분씨가 얼른 거들고 나선다. 둘의 결혼이 한쪽의 일방적인 구애에 의한 강압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눈치다. 그리고 그 말속에는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었다. 여하튼 전영하씨는 "저 사람에 덕에 지금까지 살았다"는 말로 함께 한 인생의 전부를 아내 권경분씨에게 바치는데 거리낌이 없다.
 
"중풍 걸려 누워 계신 아버지를 한 10년 간 불평 없이 모셨어요. 고생 많았죠. 얼마나 마음이 착한데요. 지금도 친·인척도 아닌 할머니 한 분에게 가끔 용돈도 주고, 집에서 기른 채소도 가져다 주고 그래요. 저이가<&28137> 덕이 있어요."
 
이처럼 전씨가 살아 온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이유는 불과 몇 년 전 아내 권씨가 6개월이라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헤어짐의 문턱까지 같다가 이승에서의 인연의 끈을 다시 늘렸으니 그 애틋함이야 오죽할까.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제발, 살아달라고 애원을 했어요. 내가 살아오면서 잘못한 것만 생각나지, 잘 한 일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더라구요. 그러다가 가 버리면 내가 빚을 갚을 방법이 없잖아요. 내가 조금 고집이 세고, 성격이 급해서 마누라 말을 잘 안 들었어요. 마누라 말만 들었어도 조금 덜 힘들었을 텐데."
 
"아이구, 그 것 때문에 내가 힘들었어요."
별 참견 없이 묵묵히 전지만 하고 있던 권씨가 `고집 센 남편' 대목에 이르자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인 동의를 표한다. 몸이 아파 고생하는 아내의 얘기, 수술실에 들어갈 때 가슴 졸였던 얘기를 하는 권경분씨의 남편 전영하씨의 표정에는 지금 곁에 함께 있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가득하다.

파·마늘·포도·복숭아·감·땅두릅
전영하씨의 고향은 영동군 양산면이다. 옥천 전씨인 전영하씨는 열 네 살 무렵 옥천에 살고 싶어했던 아버지와 함께  장야리로 이사를 와 40여년간 인연을 맺고 있다. 몸이 불편한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에 살면서 스무 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생업에 뛰어들어야했다. 그러기에 안 해본 일,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지금은 `농부'로 흙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마늘 400여평, 파 2천500여평, 포도 200여평, 복숭아 30주, 배 30주, 새로 산 논에도 올해부터 포도를 심으려 하우스를 설치 중이다. 더 이상 캠벨리어 품종은 경쟁력이 없을 것 같아 일본 품종인 `이두금' 묘목을 기르고 있는 중이다. 이외에도 감나무, 땅두릅, 고구마 등 흙에서 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키우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전씨의 주 종목은 `파'다. 직접 생산부터 판매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스물 아홉 살 무렵 군서면에 있는 신옥천전력소의 건설에 참여해 공사를 하다가 높은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 때 당한 부상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본격적인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 때 선택한 작목이 파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계속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사실 당시 주력 작목은 포도였다. 3천여평의 포도밭을 임대해 농사를 지었지만 별 재미는 없었다. 수확이 끝난 후 인건비를 주고 농협에서 빌린 돈을 갚고 나면 정작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없었다. 그래서 포도농사는 치워버리고 파 농사에 주력을 했다. 그 인연은 쉽게 끝나지 않고 지금도 2천500평 가량의 밭에 파농사를 짓고 있다.
 
"중국산이 밀려오면서 걱정도 많지만, 그래도 우리 것을 찾는 사람들은 우리 것만 찾아요. 신토불이라고 하잖아요. 또 중국산 들어온다고 금새 그만두면 믿고 찾아 주던 소비자들에게 할 도리도 아닌 것 같구요."
 
전씨 부부는 마늘농사도 한 400평 정도 짓고 있다. 중국산 마늘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역시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마늘을 찾는 소비자들 때문이다. 매번 옥천에 오일장이 서면 읍내 가화슈퍼 앞에 자리를 잡고 직접 소비자와 만난다.
 
전씨는 옥천장에서 주부들에게 `장야리 파장사'로 통한다고 한다. 그만큼 `파'와 함께 한 인연이 길다는 반증 일게다. 물론 오일장 전영하씨 부부의 매장에는 `파'만 있지는 않다. 고구마도 가지고 나가고, 마늘도 가지고 나가고, 집에서 농사 짓는 것은 모두 판매대상이다.
 
"얼마 전에도 고구마를 갖고 나갔는데, 인기가 좋았어요. 그러면 기분도 좋고 보람도 느끼죠."
 
장이 서지 않는 날이면 각 작물들이 자라고 있는 밭에 다니며 일을 하고, 오일에 한 번씩은 장에 나가 직접 판매를 한다. 물론 그 곁에는 항상 아내 권경분씨가 함께 하고 있다.

나의 불명은 '도명'
전영하씨 부부는 불교 신자다. 불명은 `도명', 그래서 농장이름도 도명농장이다.
 
"물론, 나 먹고 살만큼은 벌어야 하겠지만, 크게 돈 욕심은 없어요. 많이 벌어봐야 죽을 때 냉장고를 가져가겠어요. 텔레비전을 가져가겠어요. 살만큼 살고 남에게 못 할 일만 하지 않으면 되죠. 누구든 남의 마음 아프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베풀수 있느면 베풀고, 양보할 수 있으면 양보하면서 살아야죠."
 
전영하씨는 어려운 할머니에게 집에서 키운 채소도 가져다 주고, 경로당에서 온 손님들에게는 좀더 많이 주고, 잘 기른 채소를 여기 저기에 나눠주는 재미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전영하씨는 또 지금 `행복하다'고 말했다. 특별히 불행할 일도 없지만 막상 누군가 `행복하냐?'라고 물으면 선뜻 `행복하다'라는 대답이 나오기는 쉽지 않은데 전씨는 망설임 없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직도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이 많은 아내가 어려운 고비를 넘겨 지금 옆에서 같이 포도나무를 손질하고 있고, 몸을 뉘일 조그만 집 한 채도 장야리에 마련했다. 다른 밭이야 모두 남의 땅 빌려 쓰고 있지만 새로운 품종의 포도를 심을 두 마지기 논은 전씨의 땀으로 마련했다. 권경분씨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환한 웃음을 짓는 부부의 모습에서 쉽게 `행복'이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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