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눈 김귀남 할머니의 한글 배우기
까막눈 김귀남 할머니의 한글 배우기
함께사는 세상 [97]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3.02.07 00:00
  • 호수 6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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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2월 21일. 내나이 칠십에 못배운 한을 이제라도 답답한 눈을 뜨겠다고 다니기도 불편한 오십리길을 다닐때 날씨가 추울때면 인포리 주차장에서 차를 기다릴때 몇번이고 못다니겠다는 생각이 여러번 나지만 그래도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자상하신 가르침에 한자 두자 알게되어 고마운 생각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간판이나 버스번호라도 읽고 알게 되니 용기을 잃지 않고 다니고 있읍니다. 눈이라도 쌓이고 몹시 날씨가 매섭게 차며는 못갈것 갔지만 그래도 더욱 힘을 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학우 형님들이나 아우님들 한테도 항상 고맙게 생각하며 용기을 냅니다. - 아름다운 삶결을 일구는 사람들 <아사달>의 네번째 글 엮음에 수록된 김귀남씨의 글 중에서

'글'이 한동안 특권층의 전유물이던 시대가 있었다. 글을 앎과 모름의 차이가 곧 권력을 쥔 자와 종속된 자를 구별할 정도로 글은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이 사회에서 권력의 변두리에 물러나 있는 계층 혹은 계급은 글을 포함한 다양한 배움으로부터 소외를 당해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현재도 `모든 배움에 만인이 평등한 기회를 갖는다'는 명제를 쉽게 `참'이라 말할 자신은 없다. 지난 3일 안남면 도농리에서 김귀남(70) 할머니를 만나고서 그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할머니 요즘 한글 배우러 다니신다면서요?"
"왜요? 옥천에도 하나 만들게요? 그러면 좋지요. 제가 배우는 책 보여드릴까요?"
 
나의 직업과 방문 목적을 제대로 설명하기도 전에 기자를 마당에 세워둔 채 김귀남 할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공부하고 있는 책을 꺼내왔다. 따뜻한 겨울 햇살이 내리쬐는 마루에 앉은 채 김귀남 할머니의 얘기는 계속됐다.
 
"아이구 안남은 고만두고 옥천에라도 생기면 좋겠어요. 매일 차 두 번씩 갈아타고 보은까지 다니려면 얼마나 힘든데. 그러니까 1년이 지나도 아직 1학년 책 가지고 공부하지. 눈이 오면 여긴 차가 안 들어오거든. 그러면 못가지. 또 바쁜 농사철이면 일거리 쌓아놓고 보은까지 어떻게 가. 그러니까 또 빠지지. 옥천이나 안남에서 배울 수 있으면 좀 수월 할텐데…."
 
옥천군 안남면에 살고 있는 김귀남 할머니는 보은군 보은읍에 있는 `보은한글배움터'로 한글을 배우러 다닌다. 할머니는 새벽에 일어나 새벽밥 지어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인포리까지 나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한글배움터로 간다.
 
연결되는 차시간이나 제대로 맞으면 좋겠는데 왜 꼭 40분씩 기다려야 하는지 야속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때마다 제때 못 배우고 이제야 한글을 배우는 것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너무 추우면 그냥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그래도 오늘 가면 하나라도 더 배울텐데...'하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는다. 옆에 앉아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 황정연(73)씨도 안타까운 마음에 한마디 거든다.
 
"어쩔 때는 화가 난다니까. 그 추운데 버스 정류장에서 발 동동거리며 떠는 걸 생각해봐. 거 뭣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구. 그래도 배우려고 하는 것 보면 대견하기도 하지만. 젊기를 한가. 하여튼 보통 맘먹고는 못하는 거여. 우리 학교 다닐 때 어디 여자가 있었나. 지금도 한글 모르는 사람들 많아. 그러니까 안남이나 옥천에도 한글학교 같은 것 생기면 좋지."
 
할아버지의 걱정대로 얼마 전에는 감기가 호되게 걸려 설 전까지 한글공부를 한참 빼먹고 말았다. 시골살림에 만만치 않은 차비도 배움에 짐이 된다. 하루에 네 번씩 버스를 타면 한 달에 차비만 7만원이다. 그나마 빠지지 않고 계속 다닐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눈이라도 오면 도농리까지 들어오는 버스가 오지 않아 빠지기 일쑤고, 바쁜 농사철이면 일거리를 놔두고 그 먼 곳으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질 않아 또 결석을 한다.
 
"2학년 책까지는 배워야 맘대로 읽고 쓸 수 있다는데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옥천이나 안남에도 한글배움터가 생기길 희망하는 김귀남 할머니와 황정연 할아버지의 바람은 그만큼 절실했다. 할머니가 용기를 내어 한글공부에 도전한 것은 청주에 살고 있는 딸의 힘이 컸다. 지난해 청주에 무료로 한글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안 딸이 어머니인 김귀남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고, 청주를 찾아간 할머니는 몇 군데를 더 돌아다녀 보은군에도 `살림을 난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차하면 청주까지 다닐 각오가 되어 있을 만큼 절실했는데 그나마 보은군에 학교가 있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가 되었다. 그렇게 처음 찾아간 보은한글배움터에서 한글을 배운지 1년이 되었다. 학교로 치자면 이제 2학년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빠진 날이 많고 배운 것을 자꾸 잊어버려 아직도 1학년 책을 떼지 못했다고 김귀남 할머니는 설명한다.
 
"그래도 까막눈이었다가 이렇게 배워서 버스 번호도 읽고, 버스 앞에 써 붙인 것(행선지)도 읽고, 내 이름자도 쓰고 읽을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한글 배우기 전에 어디서 쪽지라도 날라 오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 얼마나 답답했는데. 또 은행 같은 데서 비밀번호만 알아 가지고 돈을 맘대로 넣었다, 뺏다 하는 걸 봐도 그렇게 부러웠구. 이번 설에 서울 아들네로 설을 쇠러 갔는데, 내가 손자들 책을 들여다보니까 손자녀석이 `할머니! 그렇게 많이 배우셨어요?' 그러더라구. 설전에는 선생님하고 같이 청주에서 가서 상도 받아왔어.(웃음)"
 
보은한글배움터에서는 한글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과 함께 선·후배들과의 생활이 할머니에게 큰 즐거움을 주고 있다. 같은 목표, 그 것도 절실한 목표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위로는 일흔 넷, 일흔 셋, 일흔 둘의 형님이 있고 아래로는 10여명의 학교 친구들이 있어 서로 형님 동생이라 부르며 생활하는 것도 재미있어. 다들 동기간 같지. 선생님들은 또 오죽 고마워. 맨날 물어보면 잊어버렸다고 그러기 일쑤인데도 그렇게 친절하게 또 가르쳐주니 고마울 따름이지."
 
김귀남 할머니의 성에 차려면 아직 한참을 더 배워야 하지만 글을 하나 둘 배워가면서 느끼는 그 기쁨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 살 두 살 늘어가는 나이가 야속하고, 갓 결혼했을 때 배우지 못한 것이 더욱 한이 된다.
 
"처음 결혼해서 새댁일 때 아저씨(황정연씨)가 가르쳐 준다고 해서 들여다봤는데 잘 못하면 아저씨가 혼내니까.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 다음부터는 알려달라고 말을 못하겠더라구. 더군다나 농삿집에 시집을 왔는데 애들 키워야지. 농사지어야지 제대로 배울 수나 있었겠어."
 
보은군 회북면에서 21살에 시집을 온 김귀남 할머니가 황정연 할아버지와 함께 산지 이제 50년이 넘었다. 결혼하고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와 반 백년의 삶을 살아왔지만 할머니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한 것은 이번 한글배움이 처음인 것 같다는 김귀남 할머니. 그렇기에 할머니의 인생에서 한글을 배우는 일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의미 그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전념하는 모습을 보면 좋지. 어쩔 때는 한 나절씩 책을 보고 있을 때도 있어. 그러면 내가 못하게 하지. 너무 오래하면 머리 아프거든."(황정연 할아버지)
 
바쁜 철에야 책 들여다 볼 시간도 제대로 없겠지만 한가할 때면 할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한글공부를 하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그 행복한 기운이 가득 전해졌다.

안남면 주민자치센터 '한글교실' 준비

김귀남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면서 심심찮게 목격되는 한 장면이 떠 올랐다. 손에 휴지며, 미역 등을 들고 종종걸음을 걷는 노인들의 모습. 끊임없이 민원이 제기되지만 아직도 쉽게 해결이 되지 않는 속칭 `약장사 문제'다.
 
이 시대의 새 풍속도로 등장한 이 문제, 지금 우리의 노인복지 수준을 여지없이 보여 주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할 근원적인 방법은 일방적인 `단속'이 아닌 `대안제시'일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김귀남씨와 같은 분들이 먼 보은군까지 한글을 배우러 다닌다는 사실은 현재 우리군의 노인복지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풍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글을 배우고 있는 김귀남 할머니를 만나고 난 후 안남면에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는 점이다. 지난해 꾸려진 안남면주민자치센터에서 `한글교실'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안남면 홍완표 담당자는 "현재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한글교실을 해볼 계획을 갖고 있으며 조만간 주민들을 상대로 수강 신청서를 받아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계획대로 프로그램이 추진된다면 김귀남 할머니를 비롯해 생각이 있으면서 여건이 안 돼 배움의 길을 포기한 많은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글교실의 개설이 잘 준비돼 노인복지와 주민복지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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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3-26 14:17:41
글의 도입이 아주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