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덕에 오만함 벗고 이해하는 삶 알 것 같아"
"고향 덕에 오만함 벗고 이해하는 삶 알 것 같아"
[내고향 옥천] 이원면 평계리 출신 과학문화사 대표 육종덕씨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2.09.03 00:00
  • 호수 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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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면 평계리 출신 육종덕씨.

“많이 평안해졌어요. 여유도 한결 있고, 스스로도 느끼기에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어느덧 40대 중반에 들어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이제 뒤돌아볼 여유 없이 바쁘게 살았던 인생에 조그만 틈이 생겼다고 했다. 무언가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가짐,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까지 그의 틈을 매우는 것들로 인해 삶이 한층 풍요로워졌다고 했다.

대전 ‘한국과학기술대학(이하 KAIST)’안의 과학문화사 대표 육종덕(44)씨. 그는 활기차 보였다. 이제 자기 주변에 있는 일상들을 맘껏 조율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대성초등학교 22회, 이원중학교 28회 졸업생이에요. 그 때만 해도 생활이 많이 어려웠거든요. 남들 자전거 타고 다닐 때 책보 어깨에 둘러메고 20리를 걸어다녔어요.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쯤 외사촌형이 자전거 줘서 그 때부터 타고 다니기 시작했죠. 어릴 때는 버스 휘발유 냄새가 그렇게 좋아서 막 쫓아 다니구 그랬는데. 그게 알고 보니까 속에 회충이 많으면 그 냄새가 좋아진다고 그러더라구요” 어려웠던 고향을 등지고 대전에서 학교를 마저 마친 후, 울산 미포조선에서 특례보충역으로 6년 동안 군복무를 했단다. 그는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회상했다.
 
“좋았지. 난 일하고 돈벌고 야간에 학교도 다니고 또 친구들과 신나게 어울려 놀았으니까. 그때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논 적도 없었을거야.”  현재 그는 KAIST안의 모든 석박사 학위 논문과 팜플렛, 소식지 등 90%이상의 문서들을 출판하는 ‘과학문화사’의 중심축을 맡고 있다. 대전 인근에서 줄곧 인쇄소 생활을 하다가 95년도에 KAIST안에 들어와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꾸 나이가 들수록 고향이 그리워져요. 수구초심이라고. 지금 평계리에 어머니가 농사짓고 계시는데. 도저히 내가 생각하면 타산이 안 맞거든요. 그냥 쉬시라고 하셔도 어머니는 안 하면 큰 일 나는 줄 아세요. 어머니에게는 흙이 곧 생명이고 농사일이 단순한 일 이상이라는 것을 얼마 전에 느꼈어요.”
 
이제 삶의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은 오만함에서 벗어나 하나씩 깨닫고 이해하는 자세로 삶이 변화되는 것을 느낀단다. 그의 웃음이 평화로와 보였다.  “요즘 주변 사물과 사람에게 많이 배우고 있어요. 13년 동안 했던 갱생보호위원 활동도 내가 그들을 인도하고 안내하는 역할도 있지만, 그것이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사회가 얼마나 냉혹한지.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느끼고 나를 바로 보게 되죠. 상대방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그 친구들을 통해 알았어요.”
 
그는 완벽하고 늘 채우려고 하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조금씩 편안하게 주위와 조화롭게 지내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고향 친구들 지금도 자주 만나요. 보은 의료보험조합에 있는 김천식이, 한성새마을금고에 있는 이원식이, 조흥상회하는 조흥식이 다 내 친구들인걸요. 지금도 대성초등학교 부부동반 동문모임하고 그러거든요. 그 때 친구들 나에 대해 많이 묻는데요. 내가 이래뵈도 전체회장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 친구 뭐하냐구. 판검사할거라고 추측하는 친구 많지만, 헤헤..이렇게 멋지게 살고 있는걸요.”
 
그는 마지막에 자신만의 특별한 일상을 털어놨다. “저 신문 돌려요. 그것도 부부동반으로. 한 1년 반쯤 됐는데, 이제는 그거 안 하면 밥도 잘 안 먹혀요. 돈벌려고 한 건 아니고 단조로운 삶에 무언가 변화를 주고 싶어서. 운동도 되고 참 좋아요.” 그가 전하는 삶의 변주곡은 그 날도 어김없이 활기차게 연주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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