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목사 유중만씨
농부 목사 유중만씨
함께사는 세상 [84]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2.09.02 00:00
  • 호수 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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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들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유중만 목사.

안남면 도농리에 있는 침례교회 유중만(42) 목사를 찾았다.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새롭게 지은 저온저장창고가 보였고 창고 뒤로 삐죽이 솟아 오른 십자가가 그 곳에 교회가 있음을 알린다.
 
교회 앞을 지나 유 목사가 살고 있는 집까지 길쭉하게 난 마당의 풍경이 발걸음을 늦추게 만든다. 길과 접한 곳에는 벽돌 담 대신 배나무가 길에 심어졌다. 담장용 식물로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과수원 한가운데 들어선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 아래로는 낮은 토끼장이 놓여 있었고, 하얀 털빛과 빨간 눈을 가진 토끼가 낯선 사람의 등장에 몸을 움츠린다. 마당 한가운데 평상은 강아지의 몫이었다.
 
안 쪽으로 검은 승용차 대신 4륜구동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현관문 앞에는 풀 깎는 기계부터 장화, 밭에 뿌릴 비료까지 여느 농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교회의 목사가 거주하는 관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모습이었고 그 모습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유 목사의 살아가는 모습을 조금이나마 짐작케 해 주었다. 문을 두드리자 유 목사의 둘째 아들인 하람(안남초 5)이가 문을 열어주며 공손히 인사한다.
 
배 밭에 소독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막 끝낸 유 목사가 검게 그을린 얼굴에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았다. 유 목사를 만나기 전에 그에 관해 들은 얘기라곤 `마을 주민들과 어우러져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조금은 다른(?) 목사' 정도였다. "저 같은 사람이 무슨 기사거리가 된다고... 그냥 남들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저 말고 훌륭하신 분들 많잖아요." 마주 앉은 유 목사는 기자의 방문이 부담스럽다는 얘기부터 꺼냈다.

유 목사의 고향은 옥천읍 수북리다. 죽향초등학교와 옥천중학교를 다닌 후 옥천공고를 졸업했다. 그리고 2년 후인 82년에 침례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 4학년 때 대전 대흥동에 있었던 대흥침례교회에 실습전도사 생활을 했거든요. 그 때 `소야'가 고향인 교인을 만났어요. 그 분한테 시골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뜻을 얘기하니까 이 곳을 소개해 주어서 들어오게 됐어요."
 
그렇게 맺은 인연이었다. 88년 겨울, 누에를 키우던 잠실을 30만원에 사서 300만원을 들여 수리해 교회를 지었다. 그 곳이 유 목사가 처음으로 목회활동을 펼친 곳이다. 물론 지금은 마을 아래로 조금 내려와 교회를 새로 지었다. 10명 남짓한 신도들이 수요일과 일요일 신앙생활을 하는 곳이다. 간혹 명절이나 주말에 고향을 찾는 신자들도 들르곤 한다.

처음 전도를 하면서 젊은 혈기에 문화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사문제'에 접근을 했다가 주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고 유 목사는 설명한다. 앞에 선 목사가 맨 뒤의 신도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의 큰 교회는 아니지만 간혹 교회의 주선으로 마을을 찾는 의료봉사팀들이 주민들을 진료하는 곳으로도 쓰인다.
 
"제 의지만은 아니었어요. 의지만 갖고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겁니다. 누구나 나은 여건을 좋아하겠지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인간의 욕구를 초월할 수 있게 해 주었죠."
 
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유 목사와 주민들 사이에 있던 공간도 훨씬 빠르게 메워졌다. 그 과정에서 이사를 오면서 가지고 온 경운기가 큰 몫을 해 주었다. 당시만 해도 마을에 경운기가 2∼3대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 목사의 경운기는 꽤 쓸모가 있었다. 그렇게 주민들과 삶을 같이하며 제일 먼저 손댄 것이 `흑염소'다. 조그맣게 시작한 흑염소 사육이 꽤 괜찮아 크게 확장했는데 그것이 그만 빚으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주요 소득 작목이 된 것은 `배'다. 3년 전쯤 마을에서 배 과수원을 하던 분이 돌아가시면서 주위에서 유 목사에게 배 농사를 지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이를 받아 들여 배를 키우기 시작했다. 배 밭은 총 3천 평쯤으로 작은 규모는 아니다. "처음 배 농사를 시작했을 때는 농사도 그렇고 배 값도 워낙 싸서 임대료를 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퍽 좋아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 목사는 농사를 계속 지을 생각이라고 한다. 그 이유도 간단했다.
 
"배 먹으려면 농사를 지어야죠. 염소 키우면서 진 빚도 갚아야 하구요. 빚 보증 선 것 때문에 대신 떠 맡은 빚도 해결 해야죠." 유 목사의 입에서는 농촌 어디를 가든 들을 수 있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매년 농사자금 대출 받아 가을걷이 끝나면 그 것 갚기 빠듯하고 빚 보증 선 것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굴비 엮듯 마을 전체가 줄줄이 쓰러지는 현실. 유 목사 자신도 빚 보증에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젊은 사람이 살아보겠다는데 어떡해요. 보증 서줘야지. 살겠다는데…."  분명 내용적으로는 암울한 얘기를 꺼내면서도 유 목사의 덥수룩한 수염 속에 묻혀 있는 작은 입에서는 사람 좋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유 목사에게는 작은 꿈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농촌에 들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고 땅도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닌 주민들과 함께 삶을 꾸려가면서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런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유 목사의 버리지 못할 꿈이었다. 성직자이면서 농부인 유중만 목사를 필름에 담기 위해 다시 마당에 나왔다.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기자를 불러 세우더니 담장 구실을 하고 있는 배나무에서 잘 익은 배 하나를 뚝 떼어 준다.
 
"원황인데요. 맛이 들었어요. 씻어서 깎아 드세요."  원황 배 하나에 유 목사의 건강한 삶과 넉넉한 마음을 가득 담아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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