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리 사는 육만수씨
오덕리 사는 육만수씨
함께사는 세상 [80]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2.08.08 00:00
  • 호수 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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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7월말이었다. 논과 밭, 산자락이 이어지는 도로 옆으로 드문드문 집들이 보였다. 그 길가에 버려진 지 오래된 콤바인이 놓여 있고 덩굴식물이 반쯤 휘감아 오른 그 콤바인이 차를 세우게 만들었다. 그냥 안타까워서였다. 조금 있으면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에 있어야 할 콤바인이 그렇게 놓여있는 것이.

콤바인에서 잠시 눈을 돌리니 바로 옆에 근사한 대나무 숲이 담을 이룬 집 한 채가 있었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집안에는 언뜻 보아도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돌탑'이 보였다. 그렇게 집안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육만수(70) 할머니가 나타났다. 햇볕에 탄 검은 얼굴에 하얀 웃음을 가득 품고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할머니를 따라 들어간 그 집의 크기는 작았지만 산자락에 의지해 앉아 있는 폼새가 그리 정겨울 수 없었다. 툇마루에 앉아 바라본 집 앞 정경도 탁 트여 건너편 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시원했다.

집안에 있는 돌탑과 집 뒤 커다란 바위, 그 앞에 놓여 있는 타다 만 초, 평범하지 않은 풍경들이 산자락을 밟고 얽혀 있었다. "그냥 자식들 생각해서 기도하느라고... 내 기도터여. 가끔 지나가다 들러서 마음 캥기면 기도해도 되냐구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어. 그러면 그러라구 그러지,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막어."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 음료수까지 한 잔 얻어 마시고 일어섰다. 다음에 꼭 한 번 다시 들르겠다며. 그런 무례를 할머니는 기분 좋게 받아주었다. 다시 오덕리를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지난 2일. 여우비가 내리는 얄궂은 날 아침이었다.

방학을 맞아 외가를 찾아온 손녀들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있던 할머니는 일주일 전에 만난 얼굴을 쉽게 알아보았다. 먹구름이 하늘을 오가며 변덕스럽게 뿌려대는 빗줄기와 함께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풀었다. 대나무 숲과 앞산이 훤히 보이는 툇마루에서.

"내가 조선 천하 안 가본 데가 없어, 바다건너 섬도 다녀보고, 임진강 가에 가서 저 건너 북한 사람들도 보고..." 할머니의 고향은 청성면 지령마을이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12살에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7살에 결혼을 했다. 10년이 넘게 병원을 들락거리던 남편은 결국 속병을 이기지 못하고 할머니가 34살 되던 해에 곁을 떠났다.

할머니 곁에는 큰 딸과 두 아들, 그리고 뱃속에서 자라고 있던 유복자 막내아들이 남겨졌다. 그렇게 시작한 인삼 장사. 여름에는 남의 집일도 거들어주고, 농한기가 되면 금산에서 인삼을 가져다가 발 닿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팔기 시작했다. 자주 있지도 않은 버스나 기차를 타고 내려서 그냥 그렇게 발품을 팔며 다녔다. 머리에는 이고, 등짐을 지고, 한 번 나가면 일주일도 좋고, 보름도 좋았다. 장사고 뭐고 자식들 걱정을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장사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아이고 내가 그때 생각하면 한숨이 동남풍이고, 눈물이 몇 동이여..." 그래도 그 때는 사람들에게 더운 기운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힘들지 않았지 지금 같으면 그런 장사를 어떻게 하느냐고 손사래를 친다.

"사람을 만나면 더운 기운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엔 낯선 사람을 만나면 더운감은 안 생기고 무서운 맘부터 생기잖아. 그 때는 안 그랬거든." 정말 사람이 귀했던 시절이다. 집이 드문드문 벌어져 있는 강원도 산골짜기에 들어가면 `이런 데를 다 오셨다'며 처음 보는 사람을 반겨주는 이웃들이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식사 걱정, 잠자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었다. "먹고사는 것은 지금이 더 좋을지 몰라도 사람 사는 것은 그 때 그 시절이 다시 와야 돼."

힘들지만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다 41살이 되던 해에 속을 끓이던 만성 맹장염이 문제를 일으켰다. "보은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이 잘 못됐는지 그대로 병원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어. 그때 우리 사위가 고생 많이 했는데... 사위 의지하고 살았지. 그렇게 1년여를 고생하던 끝에 집으로 돌아왔지. 마지막 갈 준비하러 들어온 거였어."

동네사람이고 친척들이고 모두들 다시 일어서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한참 정신이 가물  가물하고 이상한 꿈에 시달리면서 언뜻 내다본 마당에서 `사잣밥을 짓는다', `상포 맞추러 간다' 분주하던 사람들의 모습도 기억에 또렷하다. 하지만 육만수씨는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천지운수로 살아났지..."

천지운수 때문인지 아니면 세상에 남겨놓은 인연의 끈이 아직도 많이 남아서인지 그렇게 일어선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말은 했지만 `다 보이더라'는 표현을 했다.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살아온 인생을 얘기하며 할 수 없이 던져 놓은 `다 보이더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유난히 말을 아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할머니는 쉰 셋에 오덕1리 금적산(할머니는 금덕산이라고 했다) 자락에 작은 집을 얻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운동 삼아, 수행 삼아 텃밭에 푸성귀도 심고, 벌도 키우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 마음 아프게 하지마, 자기는 열 배는 더 아파야 갚아지는겨..."

대화를 마치고 일어선 기자에게 육만수 할머니가 다짐하듯 새겨 넣은 말이다. 평소에도 많이 들었던 얘기지만 할머니에게 들은 그날, 유난히 무게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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