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의 어제와 오늘
옥천군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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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89.09.30 00:00
  • 호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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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은 충청북도내 10개군의 하나로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단은 청산면 명티리로 동경 127˚53´서단은 군서면 사양리로 동경 127˚28´남단은 이원면 평계리로 북위 36˚10´그리고 북단은 안내면 월외리로 36˚27´의 경위도상에 속해 있다. 한편 행정구역상으로는 동은 경상북도 상주군 서는 대전직할시 남은 충청북도 영동군과 충청남도 금산군 그리고 북은 충청북도 보은군에 접해 있다.

옥천군은 본래 옥천과 청산을 합한 곳으로 신라의 고시산군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관성군이라 고쳤고 고려 현종 때 경산부 관할로 했다가 인종때 현이 되어 현령을 두어 다스렸다. 그후 명종 12년 이민이 현령 홍언을 잡아 옥에 가두고 민란을 일으켜 군이 폐지되었으나 충선왕 5년 주로 다시 승격, 지명을 옥주라 칭하고 주지사를 두어 관할하게 하였다.

한편 경산부 성주 소속이던 이원·안읍·양산의 3현을 분리하여 옥주로 소속시키고 군서면 금천성 시구미에 있던 관청을 읍내면 향청리(옥천읍 상계리)로 이전 하였다.

조선 태종13년에 옥천이라 고치고 경상도 관할이었던 것을 충청도로 변경하였으며 세조 12년, 관제를 개편하여 군수라 하고 연정열을 초대 군수로 삼았다. 고종 32년 도를 폐지, 부를 설치하여 본군은 충주부에 속하게 되었고 옥천군의 초대 지군사에 이감이 임명되었다.

한일합방 후인 1914년에는 청산현을 본 군에 합하고 학산면 용화면 양산면을 영동군에 이관하여 11개 면으로 편성되었다. 을사년(1905) 일본인들이 경부선 철도를 건설할 때 읍내 유림들의 반대로 읍내에 기차 정류장을 세우지 못하고 현 금구리에 세우게 되었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행정·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기미년(1919)에 구군청이 퇴락 붕괴함으로 삼양리222번지에 동양 목조 2층 신축사옥을 건축하고 이전하게 되자 각종 기관 또한 이전하게 되고, 구읍내는 쇠퇴하게 되었다. 기사년(1929)에 현재의 동이면 평산 세산 적하리등 3개리를 포함하는 이내 이남 두면을 합병하여 이원면으로 하고 청서 청남 두개 면을 청성면으로 하여 전체 9면으로 개편하였다.

1949년 대통령령 제156호로 옥천면이 옥천읍으로 승격되어 1읍8면이 되었고 그후 1978년11월4일 군청사가 복잡하여 삼양리174번지에 신청사를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집단이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가다 보면 그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타지역의 주민과 구별되는 특성을 지니게 되는 바, 옥천 군민도 전형적인 충청북도인의 기질 외에 또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옥천지역은 백제시대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소외되고 배척되어 온 곳으로 거의 언제나 백안시되어 온 애사의 일선에서 그 주민의 성격은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진취적이고 자유로움보다는 순종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온건함이 면면히 이어 내려왔다.

따라서 청풍명월의 시적인 정취가 군민으 성격속에서 뿌리 내리고 있는 반면 조선조 시대 이후의 사대부적이고 관료적인 기질을 지향하던 습속이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속에서 옥천 군민은 변혁의 방관자가 아니라 새시대의 주역으로서 잘못된 성격은 과감히 고쳐 나가고 장점은 최대한 살려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자랑스런 군민으로 성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급속도로 전개되는 문명의 발전은 우리들에게 정적인 생활의 감각마저도 찾지 못할 정도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살펴보면 발전의 양상이 도시 중심으로 편중화 되어 인구의 밀집도나 생활 구조의 변화가 도시는 빠르고 농촌은 갈수록 둔화되고 소외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여건에서 볼때 그래도 옥천은 미비하나마 발전의 추세에 발맞춰 나가고 있다는 것에 다소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옥천의 모습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업화로 변화하는 옥천의 모습이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와 은성실업 등 두 세개의 공장에 불과하던 것이 동이 농공단지의 조성 및 동안리의 옥천 농공단지의 확정, 청산 판수리의 특별농공지구 조성으로 공업 옥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들 농공단지의 특징은 각종 세제와 융자에 있어 정부로부터 재정적 혜택을 누림으로써 입주업체가 의욕적이고 능률적인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 농공단지 주변의 주민이나 관계자들은 이들 업체의 유치가 농가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견해에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농촌에서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숙련공이 있을 수 없으며, 단순 노동이라 하더라도 터무니 없는 저임금으로 차라리 노동판을 찾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말해서 저임금의 유휴 노동력을 농촌에서 찾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획기적 사실은 한국 조폐공사 옥천조폐창의 건설이다. 88년 4월 1일자로 현 위치인 옥천읍 서대리23-1에 이전된 옥천조폐창은 6만5천평의 대지위에 1만평의 건평으로 종업원 수만도 1천4백명을 훨씬 넘고 있으며 1일 3교대로 주야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 차가 대전으로 운행하고 있어 우리 지역에 어떠한 이로움을 주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을 표하는 의견이 다수를 지배하고 있다.

지난 68년 한국농기로 출발한 국제종합기계와 마암리의 한국전매공사 옥천담배원료공장, 은성실업, 동성실업 등은 옥천 공업화의 주역들이다. 공업화에 못지않게 사회문화의 발전 또한 주목할만하다. 문화의 불모지라는 불명예를 씻고 야산을 개발하여 군민회관을 건설하고 군민의 휴식공간으로 체육공원을 마련하여 문화도시로의 발돋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군민회관에 대한 불평이 문화계에서 일고 있다. 문화계 모 인사는 『모양은 좋으나 전시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청소년의 휴식공간과 군민의 공원으로 그 역할을 다해 줄 것으로 기대됐던 체육공원은 아직도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인구 8만의 옥천군은 충북남부의 거점 도시로서 시 승격의 전망이 매우 밝은 편이다. 앞으로 옥천-대전간 국도 4차선 확·포장 완공으로 15∼25분 정도로 단축하게 되는데 주변의 면은 자연히 근교농업 지대로 활성화 되어 농가소득이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대도시의 인접 군으로 급속한 소비향락 풍조의 유입과 거대 상권에 의한 약속상인의 피해등 오히려 우려되는 점 또한 없지 아니하나 우리의 경제체제가 자유시장 경쟁체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부정적 시각에 머물 것이 아니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지난 7월 실시된 본사의 주민 설문조사에 의하여 옥천군의 내일을 위해 가장 시급히 해결 되어야 할 문제점을 알아 보았는데 주민의 한결같은 여론은 시외버스 주차장 문제였다. 공간은 비좁고 복잡하며, 시설은 낡고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이용주민들은 여간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을 지나는 외부인들이 화장실이라도 들러 본다면 이만저만 민망한 일이 아니다.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이 점차 퇴색되고 도시화 현상이 발생, 타율적인 성향과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게 되면 이지역 발전에 장애 요인으로만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민은 민주의식의 함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으며 군민 모두는 서로 아끼고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기의 3대 실천사항을 통해 대동단결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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