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을 잃고 싶지 않았다. 술을 빚는 즐거움도 일상처럼 반복되면 타성에 젖곤 한다. 전통주는 자기만족으로 밀고 올라가는 뚝심이 있어야 지속한다. 처음 술을 빚었던 그때 설레었던 감정을 되살리고 싶었다. 동기 부여는 누가 대신해주기 어렵다. 만족스러운 시골 생활, 그럼에도 안주하지 않는 도전자의 자세가 때론 필요하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 던져본다. 떨어진 자리에 생긴 작은 물결이 파동을 만들고, 그 파동은 단조로운 삶을 바꾸는 활력소가 되어 돌아온다.우리고장에서 향수을전통주교육원을 운영하는 김기엽(59, 군북면 국원리) 소장에게 지난 2022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이웃동네 영동에 있는 유원대학교 와인사이언스학과에 진학해 젊은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며 1학년을 지냈다. 내년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느지막하게 학교에 다니는 만학도로서 하나라도 배워오자는 의지로 학구열을 높였다. 발효주인 와인 특성상 효모를 통해 술이 만들어지는 원리가 우리 전통주와 일맥상통해 참고할 점이 많았다고.김 소장에게는 또 하나 특별한 소식이 있었다. 농림축산식품부 지정 교육기관인 한국가양주연구소가 주관하는 궁중술빚기대회에 출전해 지난해 11월26일 은상을 수상한 것. 우리나라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회에 총 54개팀이 참여한 가운데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의미 있는 결실을 보며 일의 자부심도 찾고 옥천이라는 지역을 전통주 관계자들에게 알렸다. 대회 주제는 누룩을 사용한 ‘곡주’로 맑은 술 2리터(l)와 곡주 제조 시 사용한 누룩 100g 이상을 제출하는 방식이었다.지난해 11월26일 한국가양주연구소가 주관한 궁중술빚기대회에서 향수을전통주교육원 김기엽(가운데) 소장이 은상을 수상했다. 왼쪽은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 오른쪽은 김기엽 소장의 아내 김양희 씨.김기엽 소장이 지난해 궁중술빚기대회 때 받은 상을 들어보이고 있다.■ “대상 탈 때까지 하겠습니다”“지난 4월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숙성 과정을 거쳐 4~5개월 정도 걸렸죠. 지정하는 술이 해마다 달라요. 올해는 곡주, 지난해는 연잎으로 만드는 연엽주, 그전에는 과하주를 했어요. 올해는 누룩으로 만드는 술을 심사했는데요. 부드러울 연, 삼킬 탄의 연탄주(軟呑酒)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서 부드러운 석탄주를 제출했어요. 보통 석탄주라 하면 14~16도 정도 나오지만 제가 만든 술은 10~12 정도로 누룩 향을 최소화해 목 넘김이 굉장히 부드럽게 만들었죠. 호응이 나름 괜찮았어요.”같은 대회에서 재작년에는 최우수상, 지난해는 입상, 올해는 은상까지 성취감을 얻어낸 그였다. 김 소장은 지금 하고 있는 전통주 일에 관한 교류의 장을 넓히면서 전통주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이번 대회에 쏟아냈다. 수상하던 날 “선생님, 3년째 수상하셨네요”라고 격려하던 한국가양주연구소장에게 “대상 탈 때까지 하겠습니다”라고 의지를 내보였던 그다. 이번에 출품한 연탄주는 같은 레시피로 술을 빚어 오는 설 즈음에 판매할 예정이라고 한다.군북면 국원리에 있는 향수을전통주교육원 앞에 대회 수상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5년 전 군북면 국원리에 터를 잡은 김 소장은 고향이 대전이다. 강릉에 있는 공군제18전투비행단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있는 아들, 충남대 약학과에 재학 중인 아들을 둔 김 소장은 자녀들이 독립할 즈음 서울 생활을 접고 옥천에 왔다. 여행사에서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고 그 뒤로 보험 업계에서도 일한 그는 아내 김양희 씨와 상의 끝에 옥천에 오게 됐다. 그는 옥천에 오기 전인 2013년부터 전통주를 본격적으로 다뤘다. 원래 발효나 효소 쪽에 관심이 있어 김치, 된장도 다루다가 전통주에 점점 빠져들었다.■ 전통주 일거수일투족이 담긴 기록물“다 일맥상통해요. 발효라는 게 효모라는 생명체가 움직여주면서 생기는 화학 작용이기 때문에 거의 똑같거든요. 요즘에는 많이 안 하지만 식사할 때도 반주를 해요. 그 정도로 술을 사랑합니다. 시골생활이라는 게 주말이 되면 더 바빠져요. 도시 사람들은 ‘주말 되면 뭐하지?’ 이러잖아요. 우리는 워낙 일이 많다 보니 주말에 집안일도 하고, 가게 일도 하고, 술도 만들고, 더 바쁘죠. 저는 길 막히고 사람 많은 도시생활에 염증이 있었어요. 어느 날 공황이 갑자기 오더라고요. 이제는 알겠데요. 시골과 서울에 차이를요. 좋은 거 먹으면 나쁜 음식, 좋은 음식 알듯이 숨 쉬는 것에서부터 느껴져요. 옥천 생활이 참 좋습니다.”김기엽 소장이 전통주 빚는 과정을 정리한 공책들을 보여주고 있다.그가 운영하는 전통주교육원 안에는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발효실에는 누룩 향 가득한 특색 있는 술들이 저온 숙성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김 소장은 술이 커가는 모습을 아이들 벽에 키 재듯 기록을 남겨놓는다. 시간, 온도, 냄새, 변하는 모습 등등. 그가 애지중지하는 전통주 기록 노트에는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숙성 발효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이 남다른 재미가 있다고. 술이 담긴 이 많은 항아리는 새벽 4~5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물이었다.김 소장이 빚은 전통주를 마시면 사람들 반응이 대개 ‘우와’ 하는 반응이란다. 그만큼 외지에서 전통주교육원을 찾으러 오는 단골들이 생겨났다고 그는 자부한다. 전통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외부 강의도 다녔다. 몇 달 전에는 청주시 오창읍에 있는 농업기술원에서 괴산, 옥천, 보은 등 도민들을 대상으로 자그마치 6시간 특강을 뛰고 왔다. 그때 수강생들에게 보여줬던 발표 자료에 학교서 배운 내용을 요긴하게 써먹었다.좋은 선생 밑에 좋은 제자가 있다던가. 3년 전 옥천군농업기술센터에서도 막걸리, 전통주 교육을 3일간 진행했다. 그때 학교 퇴직한 부부가 동반해 강의를 듣고 갔다. 그분들이 충남 아산에서 진행된 전통주 대회에 나가 동상을 타고 상금 100만원을 받았다. 그 부부가 우리 가게에 찾아왔다며 김 소장은 멋쩍게 이야기한다. 감사 인사를 한다고 떡을 해서 찾아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통주의 맛과 가치를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뻗어나가는 모습에 그는 보람을 느꼈다.향수을전통주교육원 내 발효실에서 삼백주, 과하주 등이 담긴 항아리들이 저장돼 있다. 항아리 뚜껑을 열자 저온숙성으로 발효가 진행되고 있는 전통주가 보인다. ■ 22학번 새내기 만학도, 배움의 길 잇다지난해 수시로 유원대학교에 들어갔다. 시간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늦깎이로 학교에 들어간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결정이었다. 실은 전통주를 배울 수 있는 전문 학교가 많지 않은 가운데 옥천과 가까운 학교에서 술을 이론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이끌렸다고. 배움의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항상 전통주를 빚을 때 어딘가 한계점을 느꼈던 그였다. 깊이에 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학교에 다니면서 수업을 들으니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현장 실무 경험이 있는 교수님 수업을 통해 도움을 얻었다. 오길 정말 잘했구나. 책이나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문적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실험실 데이터 만드는 방법, 효모 개체수 등 학원에서 배울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나라도 더 배우자. 노트로 빨간 글씨로 메모하고 머릿속에 바로바로 입력했다. 감사하게도 전통주 특강을 하자고 학교에서 제안도 왔지만 지금은 마음만 받는 게 도리라고 봤다.김 소장은 전통주마다 밑술과 덧술, 원주거르기 과정이 언제 이뤄졌는지 종이에 적어 구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술을 배우는 학교가 이 대학이 유일할 거예요.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막내아들이 97년생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들어오는 학생들이 2003년생인가 그럴 거예요. 아들보다도 더 어린 친구들이잖아요. 복학생 한 명이 ‘선생님, 형님이라 해도 되나요?’ 그래요. 아유 무슨 형님이야, 그냥 아저씨라 부르던가 원장님이라 불러라 했죠. 학교 교수님은 원장님 이렇게 부르고, 선생님 이렇게 부르는 학생들도 있고, 호칭이 그렇게 돼 버렸죠. 부담이 없지 않아요. 모범이 되어야 하고, 자식뻘 되는 학생들이잖아요. 적어도 꼰대 소리는 듣지 말자는 조심성이 생겨요. 세대간 제가 잘 모르는 영역은 아들하고 상의하고 그런답니다.”김기엽 소장에게 전통주는 활력소, 설렘 같은 존재였다. 술을 담아놓고 3개월, 5개월, 길게는 1년 2년 정도 되는 과정에서 자식처럼 키우는 느낌, 첫 술을 먹었을 때 그 기대감. ‘맛은 어떨까?’ 그런 성취가 크게 다가온다. 그에게 전통주는 죽을 때까지 끌고 가고 싶은 무언가였다. 오죽하면 큰아들에게 퇴직하고 나면 같이하자고 제안도 했을까. 그만큼 애착이 크다. 뒤를 이어 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지만 김 소장은 지금 옥천에서 좋아하는 전통주를 계속한다는 점에 만족하고 있었다.“이번 대회가 사실은 벼르고 벼른 사람만 내는 대회였어요. 그만큼 내공 있는 사람들이 출품하는 대회인데 한 해 마감을 정말 잘했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한편으로는 다행이고요. 저는 전통주 시장이 블루오션이라 생각하거든요. 전통주 문화가 우리 옥천에도 많이 활성화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전통주교육원 옆 카페 '정원'에서 판매되고 있는 전통주.군북면 국원리에 있는 향수을전통주교육원에서는 전통주 관련 체험 프로그램 및 전통주 판매를 진행하고 있다. 찹쌀막걸리는 1리터(l) 9천원. 과하주, 석탄주, 삼백주는 375미리리터(ml) 기준 각 3만원, 2만8천원, 3만5천원이다.문의 : 010-9276-5707 (향수을전통주교육원)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1-04 09:13
‘물꼬 보러 갈 사람?’ 여름만 되면 아버지가 이른 새벽 4시에 마당에서 부른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6남매 중 막내딸이 자동으로 튀어 나간다. 지금은 수로가 다 돼 있지만 옛날에는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물을 받았다. 저수지에서 내려온 물이 윗논에 차면 아랫논에 물길을 텄다. 논에 물이 너무 많거나 적을 때를 대비해 주변을 살피러 다녔다.아버지와 손 붙잡고 논둑길을 걷던 옛 시절, 어느 순간 그리움이 됐다. 모가 사람 키만큼 자랄 때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풍경. 그 상쾌함은 아침에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고향이 그리웠을까. 정말 오고 싶었다. 고향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돌아왔다. 기나긴 시간이 걸린 만큼 기쁨도 컸다.지난 12월13일부터 18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서 짚풀공예가로 활동하는 이준희(59, 동이면 평산리) 씨 개인전이 열렸다. 주제는 <짚과 풀로 여미다>. 짚풀과 왕골, 사초 등을 이용해 우리 조상들이 일상생활에 쓰던 생활용품을 전통과 창작 사이를 오가며 구현해냈다.지난달 13~18일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서 '짚과 풀을 여미다'는 주제로 짚풀공예 전시가 열렸다. 이번 전시는 짚풀공예가 이준희 씨가 만든 작품들을 선보였다. 짚풀로 만든 바구니, 짚신, 의상 등 다양한 공예품들이 놓여 있다.짚풀로 만든 돗자리, 소입마개, 빗자루, 소품걸이 등이 진열돼 있다.짚풀로 만든 의복부터 짚신, 항아리, 소입마개, 빗자루, 쌀단지, 장구, 소품걸이 등 어르신들에게는 추억거리, 젊은 세대에게는 우리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이준희 씨는 지난해 3월23일부터 5월8일까지 우리고장에서 짚풀공예를 하는 양해용 씨와 함께 전통문화체험관에서 전시한 바 있다.■ 짚풀공예, 손에 놓을 수 없는 것“옛날 생활용품으로 쓰던 물품들이잖아요. 똬리는 집에서 못 만드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여미다’는 말은 정돈했다는 의미예요. 짚과 풀이 막 흩어져 있잖아요. 손으로 직접 새끼를 꼬고 작품을 만들어서 여미다는 단어가 어울리겠다 싶었죠.”이준희 씨는 동이면 평산리가 고향이다. 동이초 36회, 동이중 6회, 옥천여고를 졸업한 그는 타지 생활을 하다 고향에 오고 싶은 마음에 2013년부터 옥천에 올 준비를 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21년 9월 고조, 증조, 할아버지, 아버지가 대대로 살던 평산리 집에 돌아왔다. “정말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에 동심을 간직한 어른의 모습이 보였다.“옥천에 오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구나, 가볼 곳이 참 많구나 싶어요. 어릴 때는 교통이 좋지 않아서 어디를 가볼 수 없잖아요. 이제야 구석구석 가보니까 옥천에 많은 문화재가 있고, 가볼 곳이 많다는 걸 알았죠. 제가 옥천 홍보대사예요. 만나는 분마다 옥천을 많이 알리거든요. 가식적인 게 아니라 우러나온 마음이에요. 요즘 들어 옥천에 태어나서 자랐다는 게 굉장히 좋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네요.”짚풀공예가 이준희 씨가 3개월 간 공들여 제작한 짚풀 재질 의상 옆에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는 평산리 인근에서 벼농사를 지어 나온 짚풀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었다.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에게 옥천만큼이나 짚풀을 향한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짚풀은 절대 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라는 말을 은연중에 자주 꺼냈다. 그는 지인을 통해 짚풀로 계란꾸러미를 만들었던 체험을 계기로 짚풀공예 매력에 빠졌다. 그때가 2016년, 짚풀공예와 연을 이은 지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충남 아산에 있는 이충경 씨를 비롯해 서정희 허윤도 김주원 씨 등 여러 선생님에게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배웠다.■ 갓 지은 밥 향이 추억을 자극하다이번 짚풀공예 전시가 더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그가 평산리에서 직접 농사지어 나온 짚풀을 재료로 썼기 때문. 남편과 함께 벼농사한 지 3~4년차. 짚풀공예하는 사람 중 본인이 직접 농사지은 짚풀을 쓰는 사람이 0.1%도 안 될 거라고 그는 말한다. “한 번 가까이서 냄새를 맡아보세요.” 코를 가까이 대자 공예품에서 밭 냄새, 갓 지은 밥 향이 난다.“제 좌우명이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예요. 저는 재미없는 일은 바로 그만두거든요. 이게 재밌다고 하면 빠져요. 얼마 전 옥천FM공동체라디오에서 아자학교 고갑준 선생님과 인터뷰할 때도 그 얘기 했거든요.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정말 좋아서도 미치고요. 그 일에 저처럼 빠져서 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 생각이 들 정도로요.”이준희 씨가 관람객에게 짚풀로 엮어서 만든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전시 도록을 보면 그의 이름 옆에 ‘명인’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었다. 알고 보니 2021년 한국문화예술명인회에서 짚풀공예 명인 4호로 선정된 것. 명인 1호는 그가 선생님이라 부르며 존경하는 짚풀공예가 이충경 씨다.때론 느슨하게, 때론 힘 있게. 바른 자세로 허리를 펴고 앉아 완급을 조절하며 새끼를 꼬는 게 중요하다는 이준희 씨. 명인이라는 호칭 때문이 아니라 어느 한 분야에 깊게 빠진 한 예술가의 집념과 열정이 하나하나 작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닭 지키라 했더니 친구 집 놀러간 막내딸공예품 하나하나에 짚풀에 담긴 조상들의 삶과 숨결이 느껴진다. 지구온난화, 플라스틱 남용 등 환경 문제가 거론되는 현시대에 짚풀공예가 갖는 가치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전통문화를 좋아해 처음엔 인성·예절 강사를 했다. 여기에 즐거움을 가미할 방법을 찾다 전래놀이를 배우면서 대전놀자학교를 차렸다. 그는 교장으로 있으면서 전래놀이 수업을 했는데 짚풀공예로 관심 분야를 옮겨와 대전 선화동에서 우리전통문화체험원이라는 이름의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현재 옥천작가회의, 옥천향토사연구회 회원으로도 활동하는 이준희 씨. 옥천을 이야기할 때 돌아가신 부모님과 살았던 옛 시절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별 이불을 덮고 잔 소중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아버지 옆에 있으면 유쾌했어요. 저는 막내딸이니까 엄청 예뻐했거든요. 우리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오면 꼭 엄마까지 다 들어오라고 해요. 그러면 ‘팥죽할머니와 호랑이’ 얘기를 해주는 거예요. 그 옛날이야기를요.”아버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정답고 농담도 잘 하는 아버지였는데 혼낼 땐 눈물 쏙 빠지게 혼냈다. 교육적으로 혼내야 할 때, 칭찬해야 할 때를 잘 구분하던 아버지, 우리 6남매 모두가 아버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입을 모은다.“아버지가 점쟁인 줄 알았어요. 막내다 보니 아버지, 어머니, 저 이렇게 잠을 자잖아요. 저녁 되면 아버지가 맥을 짚어요. 짚으면서 네가 하루 동안 뭐 했는지 다 보인데요. 진짜 그런 줄 알았죠. 오늘은 뭐 했고, 뭐 했고, 줄줄 읊으세요. 진짜인가 싶어서 ‘내가 뭐 잘못했나’ 반성도 했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가 고자질한 거예요.”아버지가 부드러운 심성의 사람이라면, 엄마는 반대로 강인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까지 졸업한 엄마는 늘 신문을 보고 계셨다. 그 어렵던 한자, 한글을 엄마에게 다 배웠다. 공부를 하셨다면 엄청 잘하시지 않았을까. 늘 밭에서 일하던 우리 엄마. “너희 집은 딸 부자, 일 부자여.” 동네 아주머니가 한 이야기다. 이 밭 매고, 저 밭 매고, 다시 오면 풀이 또 자라 있고···. 우리 6남매는 모두 일꾼이었다. 조금만 거들면 엄마가 덜 힘들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일했다. 옛 집터 모습을 재현해 모형으로 만들었다. 크기도 색깔도 제각각인 쌀 단지. 이준희 씨는 쌀 단지를 보며 '우리 6남매의 젖줄'이었다고 말했다.“엄마는 꼭 나락(벼)을 널어놓고 닭을 지키라 했어요. 근데 저는 한 번도 끝까지 지켜본 적이 없어요. 나가서 놀아야 했어요. 저녁에 오면 엄마가 부지깽이 들고 저를 보자마자 막 때리려고 쫓아와요. 닭이 다 밖으로 흩어졌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안 잡히죠. 삼십육계 줄행랑. 어디로 가냐 하면 동네에 TV 있는 집이 몇 집 없었어요. TV 있는 친구 집에 가서 한참 보다가 집으로 들어왔죠.”■ 짚풀을 편안히 만지는 공간 있었으면옥천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연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이준희 씨. 일상에서 잠시 잊고 지낸 짚풀을 보고 만지면서 편안하게 즐겼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전했다. 짚풀공예를 전수할 사람이,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도 내심 드러냈다.“옥천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지역이 형성됐잖아요. 그런데 짚풀공예 활성화는 잘 안 돼 있어서 아쉬워요. 논산이나 다른 지역은 훨씬 많거든요. 짚풀공예 강사를 찾느라 애쓰더라고요. 옥천에는 양해용 선생님도 있고, 저도 있고, 두 사람이 있잖아요. 짚풀을 편안히 만질 수 있는 곳이 사실 옥천이면 더 좋죠.”충남 아산에서 열린 짚풀런웨이 때 이준희 씨가 입었던 의상과 모자.짚풀로 만든 조끼와 청자켓이 한데 어우러졌다.그는 충남 아산에서 열린 ‘짚풀런웨이’ 사례를 들어 옥천만의 특색 있는 행사를 열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다. 짚풀런웨이는 짚풀을 소재로 의상과 소품을 직접 만들어 입고 우리 전통의 모습을 승화한 의상쇼를 말한다.“1960~1970년대 지나면서 도시화, 산업화가 일어나고 짚풀공예 자리에 플라스틱이 대체됐잖아요. 몇십 년이 지난 뒤에 보니 플라스틱이 너무 많은 폐해가 있다는 걸 알았죠. 친환경, 탄소중립 이런 이야기가 다 우리 자연을 돌아봐야 한다는 추세에 있는 거잖아요. 동이면 평산리에 옛날 분들이 많으세요. 그분들이 새끼 다 꼬실 줄 알고 다 만들어 쓰던 생활용품이거든요. 아직 실행에 옮기진 못 했지만 저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동네분들을 모시고 짚풀공예를 다 같이 만들고 판매까지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옥천을 특색 있게 만들어가는 것도 옥천사람이 할 일이잖아요.”이준희 씨가 짚풀로 만든 장구를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장구를 쳐도 소리는 안 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1-04 09:10
‘집간장‘ 어머니는 얇은 매직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셨다. 플라스틱 콜라병에 직접 담근 간장을 붓고 ’집간장‘이라고 써서 색깔 없는 테이프로 붙이셨다. 자녀분들에게 준다시며 애미가 줄 선물은 건강한 당신과 정성스레 담근 된장, 고추장, 간장이라시며 옅은 미소를 보이셨다. 당신 스스로 60년을 담갔으니 요새 애들 말로 나도 쉐프라고 하시며 한 마디 더 건네신다. “한 숟가락 또르르 따라 넣어도 국 맛이 달라” 소고기 미역국에 한 숟가락 주르룩 넣으면 그 맛이 또 별미라고 그저 60년을 담았더니 진한 맛이 우러난다고 무심히 말씀하신다. 어머니의 손맛은 바로 사랑이며 자녀들에게는 더없는 추억이다. ■ 돗자리 깔아도 충분한 나이100세 시대라고 말들은 많지만 어디 100세까지 사는 게 쉽나. 나도 곧 89세. 100세 시대의 9할 가까이 살아냈다.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 곡절이 없을 리 만무하니 돗자리 깔아도 될 만큼 인생이 보인다. 내일 모레 아흔인 내가 교복을 입어봤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우리 어머니 교수님 같은 말씀하시네.” 라는 얘기를 곧잘 듣는다. 피 토하는 절규를 하고 인생의 말미에 알게 된 그 만고의 진리는 글 속에 있는 양보다 우리 손끝 발끝에 매달린 양이 더 많다.살면서 부아가 치밀면 이렇게 했더니 진정되고 저렇게 생각을 바꿨더니 숙제가 해결되더라. 그리 알뿐이다.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알았고 이제 벼락이 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 문 밖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나도 두렵지 않다. 살 만큼 살았다는 얘기도 될 터이지만 지난 시간 속에서 고단했던 일들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티끌 같다. 그래서 당당하다.■‘회룡포’ 부르는 김다현이 보다 한두 살 더 먹었던 새색시 하루하루는 고단하고 질기더니 88년은 어느새 빨리도 따라왔다. 어느 날 티브이에서 김다현이라는 예쁘장한 꼬마가 나와서 노래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회령포’를 절절하게 불러댄다. 고것이 인생을 알기나 하나 불러대는 폼이 기가 막힌다.워매! 생각해보니 내 저 아이 만할 때 우리 영감님한테 시집왔으니 참말로 어린 각시는 맞다. 춘향이도 열여섯 살에 이몽룡을 만났단다. 1936년 1월생, 우리나이로 88살이다.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내가 이 나이까지 살 줄은 미처 몰랐다. 수많은 곡절들이 있지만 푸념보다는 방도를 먼저 찾으면서 살아왔기에 파란만장하다는 말은 굳이 안하고 싶다. 영감에게도 내 속을 다 드러낼 수 없었고 더더군다나 내 새끼들은 내 속을 절반이나 알까. ■ 가혹한 일제 강점기, 정신대로 끌려가던 언니들의 뒷모습해방 전에 동네 언니들이 일본군에 끌려가는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끔찍한 일도 겪었다. 같이 새참 나르던 언니들이 어느 날 없어지고 “누가 일본 어디로 갔대” 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아찔한데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던 우리네 언니 또래의 그 할매들을 생각하면 피붙이가 아니어도 내 억장이 무너진다. 그 속을 어찌 달래며 살았을까. 열다섯 여섯에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집에서 다들 서둘러 시집들을 보냈었다. 우리 손주들이 역사책에서나 보았을 일들을 한 동네에서 보고 들으면서 살아온 할매다. 피눈물 삼키는 일들은 부지기수였다.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있으니 녀석들이 우리네 속앓이를 어찌 알 수 있을까. 굳이 버선 속을 보여줄 필요도 없지만 우리 자손들이 정직하고 근면하게 잘 살기를 바랄뿐이다.■결혼, 새로운 인생이 파도처럼 밀려오다내 나이 16살, 6,25 전쟁 후유증으로 힘든 시기에 결혼을 했으니 신혼이라는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나보다 8살 위인 한참 오라버니뻘이어서 내가 16살, 남편은 24살 이었다. 내가 열여섯 살에 시집을 왔으니 남자를 알기를 하나 결혼이 뭔지를 아나 그저 시집가라니 색시가 되었다. 영감님은 나한테 자상했다. 양반이었다. 우리 6남매 낳을 때 마다 한약 한재씩 꼭 들고 와서 산고(産苦)를 잊게 한 남편이었다. 우리 새댁시절 남편들은 다들 무뚝뚝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있어도 마누라한테 그런 정성을 보이기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절 남정네들은 세상사 뜻대로 안 된다고 술 먹고 밥상 둘러업고 주사부리기가 일쑤였는데 우리 영감님은 그런 꼴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영감님한테 더 고마웠다. ■과수원집 마나님, 일꾼처럼 근면하게 일하다 이원은 포도로 유명한 곳이라 포도 과수원이 그림처럼 펼쳐졌던 곳이다. 그림 그리는 이들이 보면 화폭처럼 보이지만 우리네한테는 먹고 살 거리였으며 새끼들 키우는 알토란같은 돈벌이였다. 외양간의 소 한 마리도 애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던 보물단지지만 과수원의 포도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면 부자 된 것 같았다. 잘 영글어 우리 새끼들 공부시키고 우리 먹고 살 거리가 되니 고단 했던 농사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수출도 하고 구판장에 나가서 팔기도 했다. 제법 큰 농사꾼이었다. 억척스럽기보다 열심히 살았던 때다.과수원집 마나님이었지만 일꾼처럼 일했다. 포도가 늘 수확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과실 값이 폭락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잘 꾸려나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몸이 힘든 삶의 무게보다 마음으로 조심스러운 큰일은 바로 시아주버님을 모시는 일이었다.■마음은 애틋하지만 조심스러웠던 시아주버니 모시기 처음 시집와서 작은 오두막살이부터 시작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시집살이는 안했지만 생각지도 않은 시집살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시아주버님을 모시게 됐다. 사실 남편 형님이라 어쩌면 시부모님보다 더 어려운 관계였다. 부모님들은 어른들이라 내가 자식처럼 돌보면 되지만 시아주버님은 잘해도 상 받을 일 없고 못해도 흉이 되는 어려운 관계였다. 처음에 결혼할 때는 시아주버님이 안 계신 걸로 알았는데 물론 남편도 나에게 거짓을 말 한 것이 아니었다. 시아주버님이 젊을 때 돈벌어보겠다고 나가셔서 연락이 안 된 상태로 너무 오래 뜸한 틈에 다들 돌아가셨거나 연락이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없는 형제로 가슴에 묻고 살고 있던 때였다.그런데 우연히 시아주버님이 강원도에 살아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여러 번 다녀오고 속을 끓이고 있을 때 나는 남편에게 “모시고 오세요. 몸도 불편한데 모시고 같이 삽시다” 라고 했다. 내가 어려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저 몸도 불편한 이가 혼자서 강원도에 살고 있다니 당연한 도리로 모셔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숙을 모시고 오니 동네 사람들이 누군가 궁금해하고 말들도 무성했다. 그래서 시숙 모시는 건 달리 어려운 게 아니라 잘해도 말거리가 되고, 못해도 흉이 되는 거라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큰 아들이 10년 넘게 큰아버지랑 같이 지내느라 불편했을 텐데도 착한 아들이 큰아버지 봉양하면서 잘 지내주었다.한 20년 모시면서 시아버님 모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내심은 시아버님보다 더 어려운 분이었다. 돌아가시전에는 풍이 와서 목욕까지 다 시켜드리고 나도 큰 아들도 힘들었지만 우리한테 신세진다고 생각했을 시숙도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남한테 그것도 아랫사람한테 신세지는 걸 무심하게 넘길 이가 몇이나 될까. 다들 버거운 마음들을 추스르면서 살아내던 시절이다.난들 아무리 시숙이 환자라고 하더라도 시숙인데 목욕 시키는 일이 수월한 일은 아니다. 남자 목욕을 시키는 일인데 처음에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몸을 어떻게 씻겨야 할지 난감했지만 큰 아들이 옆에서 손길을 보태주니 그렇게 또 안쓰러운 분을 챙길 수 있었다. 우리 큰 아들이 지금도 남들 배려하고 잘 챙기는 건 아마도 태생에 마음밭이 착하지만 큰 아버지 모시면서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몸에 배었을 것 이다. 그래서 세상사는 공짜가 없다고 지금 힘들다고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또 배움이 되기도 한다.■상견례, 신문지에 싸들고 간 300만원큰 아들은 40년 전 당시에 흔치 않던 연초학과에 가느라 충북대학교에 갔다. 그때 전매공사의 본사가 청주에 있었고 연초제조창에 바로 취업이 되는 학과라 청주로 학교에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임용대기중인 아가씨를 만나 임자 나온 길에 결혼을 시키고 싶어서 상견례를 하자고 청주 모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키우던 소를 팔아서 돈을 마련해서 준비를 했다.300만원. 읍내 집이 450만원이었으니 적은 돈이 아니다. 배짱은 그때도 두둑해서 나는 신문지에 돈을 싸서 갖고 갔다. 아이들을 주고 결혼하는데 보태라고 했다. 우리 아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걸 보면서 나도 애미 할 도리를 할 수 있어서 내심은 뿌듯했다. 시골할매가 신문지에 싸들고 간 돈이 우스워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맛에 살았다. 열심히 농사짓고 소도 키우고 아이들 결혼할 때는 돈다발 들고 가서 안기고 땅도 팔아서 나눠주고. 그게 사는 맛이다.■영감 몰래 뒤주 속 쌀 팔아 먹느라 진땀 빼던 날 나는 남편이 외출하면 남편이 저 멀리 가는 발걸음 끝까지 지켜보고 잰걸음으로 뒤주로 갔다. 손에 바가지를 들고 부르면 큰 아들도 눈치 빠르게 리어카를 마당에 갖다 놓고 쌀 포대자루를 들고 왔다. 뭔일인가 싶지만 바로 남편 몰래 쌀 팔아먹는 날이다. 내가 쌀을 퍼서 포대자루에 담고 아들은 그 포대자루를 리어카에 옮겼다. 우리는 대문을 나서며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냅다 달렸다. 영감님한테 들킬세라. 영감님이 애들 용돈 짜게 주니 딸내미가 부족하다고 징징대고 애미가 어쩌겠나. 영감 몰래 쌀이라도 파는 수밖에.아들이 리어카를 5리를 끌고 시장 방앗간에 갔다. 쌀이라서 주면 바로 현금이니 돈으로 바꿔서 다시 또 5리를 리어카를 끌고 온다. 군말안하고 읍내 시장까지 다녀오는 우리 아들.딸 용돈 준다고 영감 몰래 쌀 팔아서 오는 마누라. 다들 시골살이 하면서 웃음 밖에 안 나오는 일이지만 쌀 팔아서 용돈 줬던 딸, 리어카 몰고 시장에 다녀온 던 그 아들도 환갑이 넘었으니 세월은 참으로 무심하다.■이제 동네 사랑방 주인으로 고난 속에서 배움이 없어도 해결해왔고 자식들은 다들 아쉬운 소리 안하면서 잘 살고 있다.시골 할매, 대문 밖만 나가면 길 건너 10호 안팎의 이웃동네 초록 들판밖에 보이지 않으나 두려울 게 무언가! 영감 곁으로 가면 그리운 사람 만나서 좋고, 이승에 있으면 울 새끼들 볼 수 있으니 좋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딱 좋은 나이다. 유행가 가사가 사랑하기 딱 좋다더니 살기도, 먼 여행 떠나기도 딱 좋은 나이다. 밖이 시끌시끌 한 거보니 동네 동생들이 오는 모양이다. 열무김치에 국수나 말아서 먹어야겠다. 아, 들기름 넣어서 비빔국수를 할까 아니 이제는 다들 나이 들어 침이 말라 물국수를 다들 찾으니 그래 물국수로 하자. 멸치가 어디있더라 다싯물을 내야지.이렇게 또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어여오시게 동생들!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작가 | 2022-12-30 10:49
“나 특별한 얘기도 없는데...” 전화기 너머로 말끝을 흐리셨지만 1층까지 마중 나오신 어머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어머니의 반달 같은 눈웃음에 덩달아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스크가 원(怨)이로다.“나 작년까지는 펄펄 날라 다녔는데...” 하루하루 지나는 시간이 너무 귀하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셨다. 노인 일자리활동과 포크 댄스로 건강을 지키시고 실버기자단이라 시간도 유익하게 쓰고 계셨다. 去頭截尾(거두절미), 멋진 어머니... ■ 결핍투성이던 유년, 어린 눈에 그 넓던 신작로는 그저 좁은 골목길이더라충북 오송이 고향인 나는 지금을 ‘꿈같은 세상’이라고 줄곧 말한다. 고향마을은 산도 멀어서 나무하거나 나물 뜯으러 가려면 20리를 걸어야했다. 남정네들은 큰 숨을 몰아서 산에 올라 지게에 나뭇짐 얹어서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갈 고통을 감수하면서 산비탈을 내려왔다. 여인네들도 두 말하면 뭐할까, 헌신은 당연한 것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기회가 단절되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다들 악!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그렇게 살아왔다. 오송 강외 초등학교를 나와서 청주여중을 다녔다. 공부하고 싶은 열망은 많았지만 형편이 안 되니 중학교에 다닌 것만도 친정어머니 덕분이었다. 친정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안가셨지만 총명하셔서 글도 읽고 편지도 쓰셨다. 어머니 덕분에 교복이라도 입어보았다. 나를 공부시켜준 우리 어머니는 내 평생 은인이다. 아버지는 뭐가 그리 급하셨나? 내 나이 아홉 살에 돌아가셨다. 없는 살림에 남편의 부재로 어머니가 짊어져야 할 짐은 굳이 말로 드러내기도 가슴이 시리다. 당시만 해도 돌림병이나 홍역이 많아서 동네를 한번 휩쓸고 가면 온 식구가 줄줄이 꽃상여를 타고 선산에 묻히기도 했다. 동네에 곡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시골 산자락에 유난히 애기 무덤이 많았던 슬픈 기억이 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에 그 길을 지나려면 뒷목이 쭈뼛거려 오금이 저렸다.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아 두려움으로 꽉 찼다.어렸을 때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면 할머니께서는 추운 겨울날에도 팬티만 입혀서 부엌 아궁 앞에 세우셨다. 바가지에 굵은 소금을 담아 한줌씩 온 몸에다 뿌려 주시고는 부엌 빗자루로 쓱쓱 쓸어내려 주셨다. 아이고, 쓰리고 아파라.“철모르는 아무개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합니다. 삼신님께서 깨끗이 낫게 해주십시요”주문처럼 말씀하시면 2~3일 후에 언제 낫는 지도 모르게 깨끗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미신 같지만 그 시절엔 믿고 살았다. 눈으로 보았으니까. 학질이나 돌림병에 걸려서 열이 높아 사경을 헤매도 용한 할머니를 모셔 갔다. 마을에 돌림병이 생기면 할머니도 바쁘셨다. 이집 저집 불려 다니시며 돌팔이 의사 역할을 하셨다.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할머니는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기도 하셨다. 돌잔치, 백일잔치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돌림병에서 목숨 건졌다고 잔치를 벌였다. 나도 학질이 걸려서 학교도 두 살 더 먹어서 들어갔다. 결핍투성이었던 유년의 기억은 우리 동년배들은 니나 내나 다들 마찬가지다.■ 몸은 고단했지만 야무진 큰 애기, 순자중학교 졸업하고 엄마랑 동생하고 신탄진 외갓집으로 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막내 동생이 철도국에 다녔는데 신탄읍내서 잘 살았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는 친척동생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살림도 도왔다. 상 할머니가 무서웠지만 어린 마음에도 잘 보이고 싶어 눈치도 빠르고 뭐든 잘했다. 할머니가 예뻐하셔서 외갓집에서의 생활은 마음은 그리 고달프지 않았다.신탄진역은 노리까에(환승)역이라 기차가 한 시간정도 멈췄다가 갔다. 손님들이 내려서 시장보고 끼니도 채우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이면 많은 빨래를 하느라 방망이로 얼음을 탕탕 깨고 양잿물로 미리 애빨래를 한다. 양잿물은 짚풀을 떼서 만들었는데 비누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얼음물을 깨고 빨래를 하려니 손은 마디마디 아렸고 냉기가 핏줄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애꿎은 빨래 방망이만 연신 두들겨 댔다.■ 원기소 만들던 서울제약의 또순이 외갓집에 기거하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방직회사에 다녔다가 제약회사 채용 공고를 보았다. 서울 올라 갈 때는 촌티를 안내려고 핑크색 유똥 치마에 저고리 해 입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우선 서울살이는 남의 집 일을 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잘 사는 집도 석탄을 떼서 난방을 하느라 얼굴만 뽀얗고 다들 새카맸다.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자취하고 마침 제약회사 공고가 났다. 당시는 유한양행, 서울제약 (서울 약품 공업사), 삼일제약등 제약회사가 세 곳 이었다. 나는 서울제약(서울 약품 공업사)에 입사를 했다. 서울제약은 그 유명한 원기소, 비오비타, 러미라를 만드는 회사였다. 나는 포장 라인에서 근무했다. 다들 형광들 불빛아래서 밤이면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서 손등이며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졸음을 참아냈다. 가족을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어머니, 아내, 딸, 언니, 누나들이었다. 그녀들의 헌신이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아서 돈을 벌면서 야간에 고등학교에 다녔다. 편물이 유행할 때라 편물도 짜면서 공부를 했다. 20대 나의 관심은 온통 돈이었다. 돈을 벌어서 집안도 일으키고 엄마도 돕고 싶었다.1967년에 남편을 만나 아들 셋을 낳고 1973년도에 옥천으로 내려왔다. 가난 속에서 철이 들어서 나는 더 야무지게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우리 영감님의 할머니께서 남편 어릴 때 팔베개를 해주시면서, “평득아 너는 크면 마누라 덕에 잘 살거다” 라고 줄곧 남편 귀에 대고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말대로 됐는지 우리는 인생의 폭풍우와 거친 파도를 무사히 넘기고 자녀들도 다들 화목하게 잘 살고 있다.큰집은 꼭 챙기라고 할머니가 끼고 가르쳐서 남편이 사촌 시동생한테 쌀 한가마니씩을 나눠줬는데 나중에 시동생 말이 우리 남편이 그 집 마당에 탕! 소리를 내며 무거운 쌀가마니를 내려놓을 때 그렇게 고마웠단다. 사촌 동서는 그 이후로 농사짓고 수확하자마자 쌀, 된장, 고추장, 참깨 볶아서 참기름, 들기름 짜서 바리바리 택배를 보낸다.보은을 한다고 나를 형님이라고 깍듯이 대우를 하는 동서에게 나는 고마워서 돈이라도 보내려면 “형님, 돈 주시려면 우리 인연 끊어요.”라며 단박에 거절한다. 나는 동서의 그 진심에 울컥한다. 요즘이 각박한 세상이라고 한탄하지만 우리 동서를 보면 마음이 그냥 따뜻해진다. 작은 것에 서로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남편은 결혼할 때 나에게 “당신 밥은 안 굶길게” 라더니 그 약속을 지켰다. 아무것도 없어 빈털터리였던 남편은 고철을 취급했다. 서울 신길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전세금 5만원이 없어서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다들 어렵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림이 늘어나는 기쁨을 맛보면서 견고한 세월이 쌓였다. 그 사이 우리 세 아들은 쑥쑥 자랐고 우리 부부의 연륜도 깊어졌다.■ 우리 부부의 용기와 도전이 낳은 희망의 결실들 고철 취급할 때 인천 대한제철에 납품을 했다. 당시는 현찰이 아니라 주로 어음을 발행했다. 보통 6개월에서 1년 내에 돈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결국 부도가 나는 불상사가 생겼다. 꼬물꼬물 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살길이 막막해서 시골에서 다시 도전해보려는 의지로 막내 손만 잡고 중화실업 동네 신대로 와서 은성산업 제사 공장에 다녔다. 그나마 그것도 친척 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은성산업과 중화실업에는 아가씨들이 많았는데 야간근무하고 퇴근하는 아가씨들에게 근방의 청년들이 못된 짓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했다. 남편이 시골을 재건해보려는 마음으로 그 아가씨들과 청년들을 모아 4H를 조직했다. 토끼를 사육해서 팔게 하고 포프라 나무를 울창하게 심어서 산림청장님이 상금을 주고 가는 일도 있었다.다들 협력해서 시골 마을을 살려보자는 의지들이 생겨서 나는 동네 주민들의 아이들을 따로 챙겼다. 농번기 때는 동네 아이들을 은행나무 밑에 앉혀놓고 옷도 똑같이 입혀 율동도 가르쳤다. 주민들이 아이들 걱정 없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어서 탁아소의 전신처럼 시작되었다.그 당시의 청년들은 남편을 지도자님! 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같이 나이 들어 간간이 머리 희끗희끗한 분들이 남편에게 지도자님! 하면서 반가워하면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회억에 젖기도 한다. 우리도 형편이 넉넉해서 했던 일이 아니라서 부족했지만 더 잘살게 될 거라는 믿음하나로 버티면서 다들 함께 했다. 여든이 넘은 우리에게 그런 불같은 청춘이 있었다니!나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나이 들어도 사그라들지 않아서 8비트 컴퓨터 시절부터 컴퓨터를 배웠다. 1980년대인가 수십 년 전이다. 정우산업에서 컴퓨터를 가르쳤는데 무료라 친구들과 가서 배우고 복지관에서 또 배웠다. 유난스러운 할미가 아니라 나이 들어도 더 배워서 유익하게 잘 쓰고 싶은 갈망이 여전했다. 인터넷도 배우고 이메일 주소도 만들면서 뭐든 열심히 배웠다. 처음에는 다 어설펐지만 시간이 쌓이고 연륜이 생기면서 일구어 나갔다. 나이든 우리들이 세월 속에서 쌓은 경륜은 무시할 수 없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한 채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연륜과 지혜는 살아 있는 인문학 책이다.■ 당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신식 할머니 아파트 부녀회장 할 때는 교장선생님들과 학생들 모아놓고 아이들에게 촌수를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은 촌수가 뭔지 모른다.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이는 가엽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키워주는 교육이었다. 나는 복지관에서 동년배 상담을 한다. 독거노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도 묻고 집으로 배달된 반찬에 대한 의견도 듣는다.당근마켓 어플을 깔아서 중고 물품들도 올려서 판매를 한다. 어느 날 장야리에서 젊은 새댁이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물건을 가져갔다. 뒷모습을 보면서 ‘저 새댁도 나처럼 아끼고 열심히 사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녀를 마음 속으로 응원했다. ■ 등 따시고 배부른 지금, 환경의 역습을 걱정하는 ‘어른’나는 3형제를 두었는데 손주가 다섯 명이다. 다들 자기 몫을 하고 잘 살고 있어서 내 노년의 기쁨이며 위안이다. 걱정이라면 환경문제다. 갈수록 쌓이는 환경쓰레기에 이제는 마스크까지 매일 천만장이 넘게 버려지는데 시간이 지난다고 썩을 것도 아니며 보통 걱정이 아닐 수 없다.코로나도 걱정이지만 마스크가 쌓여가는 환경도 더 걱정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더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 자연과 환경들이 우리 삶을 역습하고 있다. 우리 인생은 끝까지 숙제를 안고 간다. 지혜롭게 해결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 더불어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먼저 살아본 우리의 역할이다. 그런 일이라면 앞장설 준비가 됐고 마다할 이유가 없다.궁핍한 시골에서 태어나 고단했지만 내 의지로 삶을 예쁘게 그려왔다. 얼기설기 얽힌 실타래 위의 무명천에 목단 꽃이 곱게 피어났다. 어여쁜 목단 꽃으로 내 인생의 자수를 마감중인 손끝이 오늘따라 더 야무지고 곱다.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2-12-28 14:13
한때 자동차 소유가 꿈인 시절이 있었다. 일명 ‘마이 카(My car)’ 바람이 불어온 건 불과 몇 십년이 채 되지 않는다.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자동차 대중 소비는 급증했고, 오늘날 인구 2명 당 1명 꼴로 자가용을 보유한 모습에서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시내 도로를 활보하는 자동차 풍경이 익숙하다. 그런데 옛날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40년 전 우리고장에 자동차가 딱 아홉 대가 있던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도 아니고 자동차가 아홉 대라니!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자동차는 소위 있는 집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 조동천(74) 대표는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보험업계에서만 40년 넘게 일한 그는 우리고장에서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은 최고참에 속하는 옥천사람이다. 운전자 상해보험, 화재보험, 대상책임 등 자동차 보험에 있어 베테랑 중 베테랑이다.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 조동천 대표가 2004년 옥천신문에 실린 자신의 기사스크랩을 펼쳐 보이고 있다.조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로 자동차보험을 했던 ‘한국자동차보험’에서 일을 시작했다. 독점 형태로 국가에서 운영하던 한국자동차보험은 1978년 지금의 동부(DB)그룹에 팔리면서 다원화가 이뤄졌다. 당시 조 대표는 삼성화재 전신인 안국화재로 이직해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다.■ ‘사고 없는 하루 되게 해주세요’경주에서 일하다 안국화재 옥천대리점 개인사업체를 내고 고향에 온 게 1982년이다. 그때가 서른 중반 접어들 때다. 고향에서 일하고 싶어 돌아왔지만 사무실을 구하는 것부터 큰 숙제였다. 읍내 중앙주유소 옆 오토바이센터에서 대리점을 낸 걸 시작으로 현재 있는 사무실까지 다다랐다.읍내 옥천농협 맞은편 건물 2층에 있는 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은 파란만장한 40년 역사를 거쳐 많은 이들에게 보험 혜택을 제공했다. 고향에 돌아온 해 우리나라는 9월1일부터 의무적으로 자동차, 오토바이 책임보험을 등록하게 유도했다. 그때 2년치 보험료는 9천120원. 수중에 떨어지는 수수료는 한 대당 1천원 꼴이었다. 그게 모이고 모여 한 달 월급이 초창기에 1만1천원이었다.지금도 만나는 고객들은 최소 20년이 넘었다. 그 정도로 고객과 신뢰가 두텁다고 자부한다. 옥천교회 장로로서 출근하고 퇴근할 적에 항상 기도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일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고객이 오늘 기쁘고 든든한 하루 보내게 해주시고 사고 없는 하루가 되게 해주십시오, 보험 한 건도 없더라도 건강을 지켜주십시오.’옥천에서 자동차보험업계에 일하는 사람이 현재 100여명이 넘는다. 처음 대리점을 열 때만 해도 옥천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사고가 나더라도 보상을 못 받던 일이 허다했다. 갖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억울한 피해가 없도록 돕고 싶었다. 뺑소니 차로 불의의 사고를 겪은 가족에게 연락이 오면 보상할 방법을 찾았다. 서류 준비부터 통장에 입금되는 날까지 일일이 확인했다.조동천 대표가 사무실에서 보험 관련 전화를 받고 있다. 40년이 넘는 경력 때문인지 고객 목소리만 듣고도 무엇을 원하는지 대번에 안다고 그는 말한다.고객 한 명 유치하려고 온몸으로 성의를 보였다. 옥천에 현대자동차만 있고, 영동에 기아자동차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기아자동차 한 대가 판매되면 영동에서 출고증을 갖고 경기도 시흥, 울산을 거쳐 청주까지 차를 끌고 가 보험 등록 절차를 밟았다. 종합보험 하나 가입시키기 위한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몇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들, 공과 사 지켜삼양초 17회, 옥천중 14회, 옥천실고 17회 졸업한 옥천 토박이다. 보험 일을 하면서 고향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커다란 보람을 얻었다. 어떨 때는 가을이 되면 쌀 한 말 갖고 사무실에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분은 강가에서 잉어 큰 거 하나 잡았다고 두고 가기도 했다. 시골은 그런 인심이 살아있다.조 대표는 1987년 12월1일 주민의 억울하고 어려운 고정을 상담 해결했다는 공을 인정 받아 충북도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사무실 안에 그가 받은 각종 감사패와 공로패가 진열돼 있다.읍내 혜성식당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거기서 6년 동안 삼양초등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입학할 무렵 아버지 고향이자 할아버지 집이 있는 안내면 장계리로 이사했다. 장계리에서 자전거 타고 새벽 5~6시에 출발해 중학교, 고등학교에 등교했다. 수업 시작 1분 전 또는 10~20분 조금 늦게 도착했어도 학창시절 6년을 꼬박 개근했다.지금은 수몰된 안내면 장계리 주막말에서 나고자랐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닌 사람이 마을마다 1~2명 뿐이었다. 못한 예로 주막마을에서 부잣집 손자였다. 할아버지 집이 기와집이라 기와집 손자라고 불렸다.집안에서는 보험업계에 일하는 걸 반대했다. 이 업계에 있으면서 사이 좋던 친구들 몇몇은 관계가 소원해져 금세 실감했다. 어디 동창회나 모임에 가면 쌍소리를 듣곤 했다. ‘내가 너한테 보험을 들어줬는데 말이야.’ 그래서 항시 공과 사를 지키려 노력했다. 다니는 교회에서도 보험 한다는 소리 일절 하지 않았다.조동천 대표는 보험업계에 종사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믿고 맡겨준 고객 덕분에 지금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꼈다.■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돌아온 보답은 컸다보험을 오래 하다 보니 이런 일도 생겼다. 자기 아들이 보험을 하는데도 아버지 되는 사람은 ‘너한테 보험 안 넣고 여기다 넣는다’며 우리 사무실에 찾아온 적도 있었다. 아들보다 더 믿는다고 하니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보통 자동차보험을 가입하고 이달 말 만기가 되면 보름 전 연락을 준다.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안부 차 연락을 드리면 간혹 안 받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연락이 닿으면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가 있다 어디 요양원에 가 계시거나, 아니면 돌아가시거나. 세월이 벌써 흘렀다는 허탈감을 느낀다.옥천은 여전히 인정이 살아있다. 가을에 농사지어서 어떤 사람은 누런 호박을 가져오고, 어떤 사람은 쌀을 찧어서 갖고 오고, 배추도 갖고 오고, 복숭아 한 박스를 가져온다. 그럴 때 깨닫는다. 아, 재산이라는 게 돈이나 물질이 다가 아니구나.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편하게 점심도 먹고 대화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청산 가면 생선국수 같이 먹자고 할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을 사귀는 게 진정한 재산이구나.지나고 보면 정말이지 생고생을 다 했다. 보험 가입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고객 한 명, 딱 한 명 보려고 무작정 청산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청산에 자동차 한 대가 있다는 정보만 보고 달려갔다. 가서 보험 가입하라는 소리도 안 했다. 이러이러한 혜택이 있다는 설명만 하고 돌아왔다.2004년 옥천신문에 실릴 당시에도 그는 옥천에서 삼성화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조 대표가 옥천서 보험 대리점을 운영했던 초기에 몰고 다녔던 자동차 '브리샤'.국궁을 내려놓은 지 6~7년이 지났지만 도민체전 옥천 대표로 나갔을 만큼 국궁에 몰두했다. 그는 군서면 월전리 국궁장 창설요원이기도 했다. 사진은 2001년 3월10일 국궁장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 ■ 고생한 세월, 그럼에도 감사할 따름항상 일주일 계획을 짰다. 월요일 오전에는 청산, 오후에는 청성, 화요일은 안내·안남, 그 다음 날은 이원·동이, 그리고 군서·군북에 다녀왔다. 한겨울 가풍리에 가는데 하도 추워 얼굴이 얼얼했다. 난로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추위를 녹였던 세월을 버티고 버텨 여까지 왔다. 생각해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고생한 일도 많았다.지금까지 현역으로 뛴다는 점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인들과 편하게 커피 한잔하며 대화도 나누고, 어디 가서 굽신굽신 할 필요 없이 떳떳하게 일할 수 있는 내 직장이 있어 자랑스럽다. 앞으로 힘닿는 데까지 사업장을 이끌고 싶다.“옥천신문에서 이렇게 10년 주기마다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옥천군민 한 사람으로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험혜택 못 받은 사람에게, 제가 갖고 있는 지식으로 혜택을 줬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특별히 한 일도 없고, 군민으로서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여나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 저와 상의하면 좋은 방향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싶습니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12-22 19:32
안내면 1937년 이관종인포리 관골, 생경한 지명이 새겨진 돌이정표를 끼고 마을에 들어섰다. 굳이 네비게이션의 도움 없이도 좁은 골목 끄트머리 집이 어르신 댁이라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관종 정순애 큰 며느리 서기관 승진’이라고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산비탈 길에 지어진 작은 집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흐뭇하셨을 어르신들,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열심히 살았을 자녀분을 생각하니 맥락 없이 뭉클해졌다. 순둥이 같은 누렁이가 어슬렁거리는 한적한 시골집, 누렁이는 낯선 사람을 봐도 짖지도 않은 것을 보니 밥값은 제대로 못하지만 노부부의 성정을 닮은 것 같다. 사랑받고 자란 녀석이라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나보다. 한낮의 햇살이 보약처럼 온몸에 내리 쬐었다. 인기척을 듣고 문이 열리더니 강골인 어르신이 우리를 반긴다.주름이 그려낸 미소, 왕년의 유명했던 영화배우 율 브리너를 연상시키는 어르신. 소사, 히로시마, 수몰지구, 등사기, 먹지. 어르신이 살아온 이야기 틈틈이 꺼내시는 단어들만으로도 어르신은 이미 살아 움직이는 역사 교과서셨다.88세 아직도 짱짱하신 우리 이관종 아버님의 인생 이야기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땅속 깊은 곳에서 파낸 우엉, 속이 꽉 찬 노란 배추를 챙겨주시던 어르신. 튼실한 수확물을 내는 농부였지만 뒷모습은 성자 같았다. ■ 버섯구름폭탄이 피어오른 히로시마에서 온 미아무라깡내 고향은 히로시마 구미정이다. 1937년생으로 히로시마에 버섯구름폭탄이 터지던 날 나는 바닷가 마을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채 옥천 안내면으로 살아서 왔다. 때는 초등학교 4학년 1948년. 당시 내 이름은 미아무라깡. 순식간에 일본에서 온 촌놈이 되었다.아버님은 그 당시 청주농고를 나오신 인텔리였고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가셨었는데 해방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되셨다.아버님은 일본 철공장에 서무계로 들어가서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일본사람들 하숙도 치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히로시마 바닷가 끄트머리에 살고 있어서 원자폭탄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살아서 아버님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아내 염색은 내 몫이다.원자폭탄 터지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땅에 묻혀야 된다고 서둘러 나왔다. 군북면 항곡리에 우리 윗대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아버지는 살림을 꾸려갈 마땅한 여건이 안되서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되셨다. 우리는 그때부터 가난과 맞서 싸우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어린 나는 시대의 풍랑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성장통을 앓았다. 그것도 바닥부터 시작하는 부모의 인생에 덩달아 얹혀서 초근목피 생활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왔으니 갓 열 살 무렵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가혹했다. ■ 1인 8역은 너끈히 하던 학교 소사로 30여년청년시절에 대전 문화동 병기창, 현 충남대병원 맞은편에서 군속으로 원료창고에서 근무했다. 몇 년 근무하다가 부조리가 너무 심한 현장을 목도하면서 이러다 징역가겠다 싶어 할아버지께서 권유하던 안내중학교에서 소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소사는 사회적인 입지도 약할뿐더러 학교의 모든 허드렛일을 맡아야 하는 직업이라 꺼리는 직종의 하나였다. 나는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학교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있으니 일거리가 적지만 예전의 소사는 정말 학교의 모든 잡무를 다 하는 기능직이었다. 40년 전 안내는 지금처럼 고요한 마을이 아닌 사람들로 북적이던 활기 찬 동네였다. 당연히 안내중학교도 학생이 1천500명이 넘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 때는 시험도 왜 그렇게 많이 보던지 중간고사, 월말고사 시험 때 마다 눈코 뜰 새가 없었다.시험 때 등사기 롤러 밀어대느라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겨울에는 난로 떼는 일부터 은행 업무등 모든 일이 손품 발품을 팔아야 되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입금 시키고 돈 빼오려면 자전거타고 비포장 도로 털털거리면서 하루 두 세 번씩 올라 댕기고 고생은 말도 못했지만 뒤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 보면 하루도 허투루 살 수 없던 때였다.아침이면 4시30분에 일어나 농사짓는 밭도 돌보고 출근을 했다. 학교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쉬는 시간 틈틈이 공부해서 한문을 많이 익혔다. 국어 선생님이 한 날은 나에게 봉투를 내밀며“아저씨 00좀 써 주실래요?”선생님이 실력이 모자라 나한테 물은 것이 아님을 안다.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이 있다. 소사일 보면서도 틈틈이 한문 공부 하는 걸 엿보았는지 나에게 부탁해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지. 국어 선생이 한문 써 달라고 했으니 내가 배운 건 없어도 얼마나 노력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연습한 만큼 써주고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구순이 되어가도 당당한 나로 설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배우는 건 즐거웠고 손을 쉬게 하는 것이 죄짓는 것 같던 시절이었다. 내가 악착같이 일하니 우리 집사람도 똑같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고단했다. 애들 공부시킬때 열무 한 보따리씩 짚으로 묶어서 장에 내가 팔았다. 꼬기작꼬기작 전대에 채워진 돈으로 애들 차비를 만들어줬다.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도망도 안가도 지금까지 곁을 지키는 걸 보니 신랑이 예뻤던 모양이여.■ 부부가 아닌 전우(戰友)였던 나 그리고 아내 사는 게 전쟁 같던 시기, 우리 부부는 서로 전우(戰友)였다. 시할머니까지 돌보고 열 식구 불 떼서 먹이고 샘에 가서 물질해오느라 골병들은 우리 마누라…. 겨울이면 동네는 온통 하얀눈으로 덮여 길은 보이지 않고 그 길에서 샘까지 다녀오는 아내 나의 전우였다. 나도 지독하다는 말 듣고 살았고 우리 마누라도 지독하다는 소리 매번 들었다.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그렇게 살았더니 철마다 수확하고 나눠먹고 돈 꾸러 다닐 일 없고 주고 싶은 거 있으면 품에 가득 담아서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예전에 너무 어려울 땐 아이들 키우느라 이웃집에 신세도 졌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없이 사니 뭘 믿고 빌려주겠나. 피고름 짜는 날들이 모였으니 우리 부부 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들도 다들 어려운 시기를 잘 겪어냈다. 아내가 시집올 때 우리 집은 관골에서 제일 못살던 집이다. 밭 한 뙈기 없던 집인데 이제 4천 평 땅에 부러울 게 없는 노인이 되었다. 다 아내덕분이다. 허리띠 꽉 졸라매고 열무심어서 머리에 이고 장에 들고 나가서 팔고 소사 월급 2만원이던 시절에 한 푼 두 푼 저축해서 돈 모으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가끔씩 내가 원자폭탄 떨어진 데서도 살아왔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큰소리를 친다.그 폭탄 아래서도 살아났는데 못 할 게 무언가 사나이가 말이야!그런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아내, 천생연분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은인이다.우리 자손들도 부모 속을 썩이지 않아서 우리가 살림 불리는 데만 신경 쓰면서 살 수 있었다. 배불리 먹이고 좋은 옷 입히지 못했지만 지들 알아서 공부하고 자기자리 찾아가 준 기특한 자손들이다.■ 인생 말미의 훈장, 내리쬐는 건 따뜻한 햇살이요 근심이 없네남아선호사상 때 딸만 셋 낳으니까 우리 마누라 쫓겨 날 판인데 규화가 태어나면서 우리 집사람을 구했다. 그래도 없는 살림에 고생만 하는데도 도망안가도 지금까지 곁을 지켜주는 우리 집사람 정순애 여사, 고맙소!1979년 안내중학교가 수몰되고 지금 자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벽돌 한 장 한 장 전부 내 손으로 쌓았다. 나중에 교장이 훈장을 줘야 된다고 추천해서 정말 국무총리 훈장을 받았다.규순 규만이 규화 규동 규상이 키울 때 아침 먹으면 점심이고 뒤돌아서면 돈 들어갈 투성이였지만 농사도 저축도 옹골차게 했다. 이제 땅도 농토도 사놓고 쌀 방아 찧어서 40가마니를 자손들과 나눴다. 차 트렁크에 이것저것 실어보낼 때 내 인생에도 이런 해뜰날이 왔구나 싶어 멀리 사라져가는 아이들 차 뒤꽁무니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너무 좋아서.시골마을에 이제 사람이 없다. 우리가 떠나면 이 동네는 적막강산이겠지.애기 울음소리 들어본 게 언제인지. 우리 아이들 한창 클 때 동네 골목 앞에서 아이들 친구들이 모여서 가방 둘러매고 학교 가던 그때가 고생스러웠어도 지금 생각하니 추억거리다.세월은 무심해서 하루하루는 고단하기 짝이 없었는데 88년의 세월은 어느새 이리 성큼 다가왔는지 알 수가 없다.유난히 햇살이 잘 부서지는 우리 집. 어느 날 집사람이 끓여준 된장찌개에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창가로 모여드는 햇살에 졸음이 찾아오면 지그시 눈을 감고 아득히 멀리 와 버린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그 꿈속에서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면 그 또한 최고의 훈장이다. 수확을 끝내고 가벼워진 손, 며느리들이 잔뜩 준비해놓은 술안주로 막걸리 한잔씩 들이키는 이 맛을 어디에 비할까. 이 또한 내가 받는 훈장이다. 열심히 살아왔더니 막걸리 한 잔 만큼 인생이 짜릿하다. 캬! 오늘따라 술 맛이 기가 막히다. 지난 추억이 안주가 되니 이 아니 기쁠 소냐!아들편지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부모님 생각하니 겨울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구들장 같습니다.정말 고생 많으셨던 부모님.부모님 고생하시는 거 보면서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던 거 같습니다.생각해보니 저도 어릴 때 쌀밥도 배불리 못 먹었습니다.효도 한 번 제대로 못했는데 부모님 가까이에서 생활하면서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어릴 때는 학교 소사하시는 아버님이 자랑스럽지 못한 철없던 때가 있었습니다.지금은 이 세상 누구 보다 아버지 어머니를 존경합니다.두 분의 사랑과 고단한 시간들 덕분에 저희들이 존재합니다.고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직도 막걸리 들이키시면서 건강하게 텃밭 일구시는 아버지 보면 감사하고무릎아파하시는 어머니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아버지 어머니 아프신데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바로 말씀해주세요저희가 바로 고쳐드릴게요.두 분이 계셔서 저희들이 있습니다.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규화 올림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2-12-09 12:19
음악은 친구처럼 일상에서 마주한다. 어디 카페나 식당, 옷 가게에 가면 귓가에 음악이 들려온다. TV를 켜면 재밌는 음악 프로가 얼마나 많은가. 트로트부터 합창, 케이팝, 록, 클래식 등 장르도 무궁무진하다. 음악이란 무엇일까? 워낙 친숙해서 설명하는 것조차 어색하다.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정서적인 안정을 찾거나 메마른 일상에 한 줄기 생기를 얻곤 한다.실은 음악 전공자가 아니면 음악을 ‘보고’ ‘듣는’ 것에 더 익숙하다. 방송에서는 각종 오디션 음악 프로를 열어 관심을 끈다. 참가자들의 순위를 매기고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언제부턴가 경쟁의 치열함만 남고 음악을 ‘하는’ 즐거움은 잊혀졌다. 오랜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음악 하기’는 문화와 종족이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언어로 활용됐다. 아주 먼 과거를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고장에서 노래교실, 직장인 밴드, 합창단에서 즐겁게 활동하는 분들을 보면 음악을 한다는 건 서로 안에 감정을 나누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살면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라도 있으면 어떨까? 목적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음악을 즐기는 시간이 하루에 10분이라도 있다면 일상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여러 악기가 있지만 오케스트라의 꽃이자 최고 음역을 자랑하는 목관악기 ‘플룻’을 접할 기회가 흔치 않다. 서론이 길었다. 플룻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면 이분에게 문의하면 좋을 듯하다. 옥천, 대전, 대구에서 개인 레슨을 하는 플루티스트 장유진(23, 대전 중구)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무대 압박 견디며 내공 쌓은 플루티스트“플룻 수업을 21살 때부터 했어요. 처음에 충남 홍성이랑 태안에 가서 교회 단체 레슨을 했어요. 그때 계기로 개인 레슨도 시작했죠. 개인 레슨생이 지금 여섯 분 있는데요. 옥천에도 만나는 중학생이 한 명 있어서 매주 오고 있어요. 플룻을 처음부터 배우는 분들은 기초 운지법부터 알려드리고요. 악보를 못 읽으셔도 박자 감각이나 기본적인 음악 이론도 다 알려드려요. 옥천에 계신 다른 분들도 플룻을 통해 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인터뷰에 응했어요.”대전이 고향인 장유진 씨는 대전예술고를 졸업하고 목원대학교를 수석 입학해 관현악을 전공했다. 대학교 3학년이 되던 올해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에 편입한 그는 제15회 서울 오케스트라 콩쿨 2위, 제38회 가톨릭 콩쿨 관악부분 금상, 제28회 한국음악협회 대전광역시지부 전국 학생 음악 경연대회 3위, 제22회 전북대학교 전국 음악경연대회 전체 1위 등 여러 수상 이력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플룻을 접한 유진 씨는 이제 경력으로 10년이 넘었다.옥천에 플룻을 가르치고 있는 학생을 계기로 옥천을 더 알아가고 있는 플루티스트 장유진 씨를 만났다. 2년 전부터 플룻 개인 지도를 하고 있는 그는 대전예술고를 졸업하고 목원대학교에 수석 입학한 뒤 현재 계명대학교에 편입해 관현악을 전공하고 있다.음악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건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전부터 취미로 피아노와 플룻을 접했지만 음악을 업으로 삼는 것에 집안의 반대가 있었다. 처음에 미술을 하고 싶었던 유진 씨도 음악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하던 유진 씨 어머니가 무의식 중에 딸이 플룻을 부는 모습을 보고 권유한 게 계기가 됐다. 기타,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와 달리 플룻은 유진 씨에게 잘 맞는 악기였다.“제 나이대에 비해 경력을 많이 쌓은 편이에요. 어떤 오케스트라나 앙상블을 가더라도 퍼스트(first, 첫 번째)가 누구인지 따지거든요. 목원대에서 장학금을 타려고 했던 것도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래야 제 자리가 있으니까요. 특히나 고등학교 땐 압박이 심했어요. 콩쿨 준비할 때 매사에 긴장감이 있어도 티를 내면 안 됐어요. 그날 컨디션이나 온도, 홀의 울림 등등 모든 걸 생각해야 해서 예민해질 때가 많았죠.”■ 취미로 즐기는 플룻 추천합니다유진 씨에게 플룻은 애증의 관계이자 몸과 같은 존재다. 예술고에 진학한 뒤 부모님의 지원으로 음악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학창시절 내내 콩쿨 시즌과 연주, 실기 시험이 기다렸다. 어디 놀러갈 틈도 없었다. 연습실에 밤늦게까지 있거나, 학교에서 자더라도 새벽 일찍 등교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연주 하나만 바라보고 살던 삶, 정말 간절함 하나로 성장한 시기였다. 음악을 흐르듯 느꼈던 유진 씨도 플룻이 지겨웠던 적은 없었을까?“플룻을 가르치면서 지겨웠던 적은 없어요. 다만 제가 느꼈던 매너리즘은 있죠. 무대에서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잖아요. 음악은 혼자 모든 걸 견뎌야 하는 게 심해요. 플룻을 연주하는 것도 나고, 그 상황을 만든 것도 나잖아요. 외롭죠. 그렇지만 저처럼 전공이 아닌 취미로 악기를 접하는 건 정말 좋아요. 플룻은 양손을 다 활용해서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되고요. 잘 부르면 어르신분들도 좋아하세요. 저도 실력이 느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죠.”시험과 무대 연주의 압박에서 벗어나 플룻을 가르친다는 보람이 컸다. 매주 옥천과 대전, 대구를 오가는 힘든 일정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다. 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그분들에게 배우는 점이 많았다.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했다. 연주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데 그치지 않고 듀엣곡도 같이 한다. 그래야 박자감각이 는다. 수강생이 원하는 곡이 있으면 악보를 찾아드린다. 어떤 분은 남자친구를 위한 곡을 불러주고 싶다는 요청에 악보를 하나 읽어드리고 왔다.■ 옥천에 온 건 정말 행운이에요개인 레슨으로 처음 만났던 분이 이제 2년이 지나 중급 단계까지 올라갔다. 처음에 악기 구하는 것부터 해서 악보 읽는 법을 알려드렸다. 만날 때마다 새로웠다. 그분은 피아노학원에 다닐 때 악보를 못 읽어 손가락으로 외웠다고 한다. 그런데 플룻은 외울 수가 없다. 기초부터 박자, 운지법을 차근차근 알려드렸다. 플룻은 연주 자세나 호흡법 등 1년간 기본을 익혀야 오래할 수 있다. 입문자들은 신품 45만원, 중고 20~25만원 선에서 플룻 악기를 구할 수 있다.“플룻은 음색이 정말 아름다워요. 오케스트라에서 목관악기에 솔로를 줄 때 플룻이 긴 파트를 갖고요. 음색이 제일 높아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요. 이 아름다운 음색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같이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레슨은 보통 집으로 찾아가고요. 여의치 않으면 근처 연습실을 찾아요. 일주일에 한 번 1시간 수업이니까 평소 연습을 하셔야 해요. 그래서 취미로 하는 분들은 하루에 10분만 불어도 실력이 는다고 말씀드려요. 그만큼 지속성이 중요하죠.”인생의 절반 이상을 플룻과 가까이 한 유진 씨, 나만의 음악을 펼치고 싶고 음악적 한계는 어디인지 알고 싶은 청년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여러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는 그가 앞으로 어떤 진로를 정할지 궁금해진다. 마지막으로 개인 레슨을 통해 옥천에 온 소감을 물었다.“학생을 만나 옥천에 온 게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옥천 정말 좋은 거 같아요. 자주 오고 싶어요. 개인 레슨은 연령대나 난이도에 관계없이 맞춰드리고요. 플룻이라는 악기를 해본 적이 있거나, 아니면 해보고 싶거나, 배우고 싶은 분들은 편하게 연락해주세요. 비용적인 면은 제가 조율해드릴 테니까 열심히 가르쳐 드릴게요. 혹여나 옥천에 플룻 연주가 필요한 무대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주세요.”문의: 010-2472-7840 (장유진)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12-09 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