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이 가까운 어머님은 기품 있고 아름다우셨다.‘’나 할 얘기도 없는데“ 유년의 기억부터 조근조근 되짚어 주시는 어머니는 철학자셨다. 기억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추억 하나하나에 그리움을 담아내셨다. 인정 많던 친정 오라버니의 죽음을 말씀 하실 때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다. 가련한 사람들이 너무 많던 세대라 간간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 때문에 지난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가 두렵다고 하셨지만 이제 그리움이 되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고 자조하셨다. 우리 삶의 무게는 평생을 통틀어 본다면 비등비등하지 않을까라고 단언하시며 그래도 인생은 살만하다고 후배들을 격려하시는 어머니.그리 억울해하지도 말며 너무 크게 기뻐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머니께 또 한수를 배웠다.오늘 기쁨이 나를 찾아왔다고 내일도 그러하다는 법이 없으며 오늘 슬픔이 나를 옥죈다 한들 내일도 내 목을 조르라는 법이 없으니 일희일비 하지 말며 나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라고 일침을 놓아주셨다. 나의 영원한 사랑, 어머니■ 가족의 죽음은 비극이 아닌 견뎌내기 힘든 마음의 폐허부잣집은 아니었지만 두 끼는 너끈히 먹고 입성은 초라하지 않았다.나는 소정리에서 7남매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내가 죽향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우리는 4남매로 성장했다. 산에 냉이 뜯으러 갔다가 산불에 치마가 홀랑 타버린 언니는 치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그 불이 붙은 치맛자락을 붙들고 집으로 달려오다가 화상을 입고 어린 나이에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났다. 나는 그날의 언니를 기억한다. 희미하게...선명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린다. 언니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았다면 나는 아마 평생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겨우겨우 살아내야 했을 것이다.언니는 그날 치마만 벗어던졌어도 목숨을 구했을 텐데 그 무명치마가 뭐라고 어머니한테 혼날까봐 그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면서 집으로 달려와 온몸에 불이 붙어 명을 달리했다.나의 가장 오래된 어린기억의 끝에서 본 비극적인 장면이다.다섯 살 쯤 되었나 보다.옥천여중을 다니고 공부를 제법 잘했던 나는 사범학교를 나와서 대전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만학도가 되어 박사를 마치고 대학에 교수가 되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남들 6년 만에 하는 박사과정을 2년 반 만에 마치고 귀국했다. 남편 말로 세 시간씩 자고 페이퍼를 많이 써서 학위를 일찍 받았다고 한다. 남편은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녔다. 내가 일본을 가볼 수가 있나, 남편이 여비가 풍족해 나올 수가 있나, 우리는 대전 천동에 집을 얻어 나는 교사생활을 하면서 우리 5남매를 키웠다.교사월급으로 5남매를 키울 수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오빠 사업을 도왔다. 여장부 기질이 있어서 교직에 대한 미련 없이 사업가로 변신했다. 한창 석재 산업이 호황을 누릴 때 나도 산업현장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여성 사업가였다. 온 가족을 통곡하게 하며 돌아가신 오빠■풍파 없는 인생이 있던가. 때로는 휩쓸리고 때로는 넘어서며 걸어가는 길 교사시절 우리 별난 아들 막내 홍식이는 열 살 쯤 인가. 저녁 무렵이면 같은 시간에 돌아와야 하는 엄마가 안 온다고 가로등 불빛하나 없는 마을길을 쏜살같이 달려오다 논두렁 배수로로 떨어져 죽다 살아났다. 그날은 학교에서 회식이 있어 조금 늦었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나와서 그 칠흑 같은 밤에 3미터 아래로 떨어져 죽을 위기를 겨우 모면했다. 엄마 젖에 손을 얹지 않으면 4학년 때 까지 잠을 안자던 막내 녀석이다.마을 어귀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 아무리 깜깜해도 내 새끼는 알아보는 게 엄마다.어린 아이가 기절한 채 쓰러져있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나 우리 홍식이가 아닌가. 얼른 들쳐 업고 집으로 달렸다. 그 밤에 병원에 갈 수도 없어서 한동네 살던 오빠가 군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던 돌팔이 경험으로 우리 아들을 수술했다. 수술이란 말이 가당키나 하나. 그저 터진 살을 꿰매서 철철 흐르는 피를 잠시 멈추어 놓은 것이다. 아들은 정신을 잃고 기절한 상태라 천만다행이었다. 불에 칼을 소독하고 꿰매서 피는 간신히 멈췄다.한참 지나서 병원에 데리고 갔다. 첫 손길이 엉망이었던 터라 다시 병원에서 손을 써도 이마의 흉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네는 각자 자기 삶의 훈장이 있다. 우리 홍식이는 예순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마를 슬쩍 가리고 다니는데 그때 외삼촌이 돌팔이 의사 흉내 내면서 꿰맨 자국이 흉터로 남았다. 엄마 사랑이 유별났던 홍식이의 훈장이다. 볼 때마다 50년 전의 우리 막내가 떠올라 작년에 할아버지가 됐지만 지금도 막내아들 같다. 환갑이 넘은 아들이지만 팔십 중반의 나에게는 여전히 살가운 막내아들이다. 홍식이를 살려준 오빠는 산에 벌초하러 갔다가 피곤한길에 잠시 산소 옆에서 누웠는데 그날 밤 집에 와서 오한에 시달리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사경을 헤맸다.겨우 진정시켜서 다음날 병원에 갔지만 오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들쥐가 옮긴 유행성 출혈로 오빠는 먼저 이승을 떠났다.오빠 상여가 나가던 날은 마음의 지옥을 고스란히 맛본 날이었다.요령잡이의 구슬픈 소리, 어머니의 통곡소리, 아버지의 울음은 소리조차 삼켜버려 신음소리만 가슴을 후벼 팠다. 아버지의 울부짖음을 보면서 나또한 절규했다.아버지는 상여 나가던 날, 아들을 보낸 슬픔을 이길 수 없는 나머지 통곡하시며 주먹으로 흙 담벼락을 치면서 애간장 끊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셨지만 도리가 없었다. 담벼락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고 아버지의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보면서 그 슬픔이 조금은 와 닿았지만 아버지의 깊은 속내까지 헤아릴 수 없었다. 아버지는 오빠 돌아가시고 시름시름 앓다가 1년 후에 선산의 아들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죽은 자식에 대한 그 애통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시고 생을 마감하셨다. 우리 가족 모두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애처로운 죽음이 너무 많던 시절이다. 홍식이는 인정 많은 아이라 자신을 살려준 삼촌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가족의 죽음은 슬픔이라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다.이 모든 일들이 남편이 일본에서 유학중에 벌어진 일이라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 너무 컸다. 편지로 슬픈 사연들을 보내면서 눈물로 편지지를 흠뻑 적시고 또 적셨다.■무탈한 일상은 당연한 것이 아닌 크나큰 감사남편이 돌아와 대학교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우리는 풍족하지 않지만 아이들 육성회비는 밀리지 않고 공부시키면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다. 겉보기에는 교수집이라고 그럴듯해 보여도 사람 사는 이치가 다들 속앓이 하나씩 하면서 사는 거라 나도 풍족하지 않은 삶에 불만은 없었다. 아껴 쓰고 다툼거리 적은 것으로 감사하면서 살아왔던 인생이다.나는 오빠의 사업을 돕고 있어서 오빠 사후에 일선에서 물러나 큰 아들한테 사업을 맡겼다.오빠가 하던 사업은 석재사업이라 내가 맡아서 하기엔 약간 거친 일이었지만 난 오빠 사업을 잘 꾸려나갔다. 지금 우리 장남 준식이가 석재일을 잘 해내고 있다.지금은 하향사업이지만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조경까지 더불어 내실 있는 사업가로 잘 해내고 있다.남편은 청년시절 일본유학까지 다녀와서 교수로 정년퇴직했지만 이제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지팡이 없이는 혼자 걷지도 못하는 힘없는 노인의 모습을 보노라면 세월이 무심하고 무상하니 참으로 야속하다.나도 거울을 들여다보면 얼굴은 골 깊은 주름으로 가득 찼고 손은 수분이 말라 핸드크림을 발라도 쩍쩍 갈라진다.오빠 석재일을 맡아서 한다고 나도 여장부처럼 일하느라 손등 거칠어지는 걸 보지도 못했다. 나이 드는 것을 마땅히 받아들이지만 청춘은 참으로 짧다. 곱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없어 나는 옛날 흑백 사진을 곧잘 들여다본다.우리 아이들과 찍은 나의 사진, 오래된 흑백 사진이지만 내 마음에 큰 위안이 된다.고무신 신고 소풍 길에 오른 우리 아이들과 찍은 50년 전의 그 사진이 그리움이 되고 추억으로 남았다. 삶은 계란, 칠성사이다, 엉성한 김밥. 모든 것이 어설프고 부족했지만 지금의 황홀한 문명보다 그 때의 흑백 필름이 더 사람다웠다. 아날로그라는 유식한 말을 쓰지 않아도 그때가 그립고 오히려 삶의 진중함도 더 깊었다. 지금은 넓지만 얕은 세상에 살고 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논할 수 없지만 그 옛날의 향수에 젖어들면 더 행복해지는 이유만으로도 추억은 그리움이 된다. 다 갖춰졌을 때의 풍족함은 앙꼬 없는 찐빵처럼 왠지 허전하다. 모자란 듯 어설픈 듯, 하지만 깊이가 있던 그 시절이 간간이 그립다. 대문 밖만 나가면 꽃이 절정이지만 내년도 내가 이 꽃 아래서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소망이라면 거동이 불편한 남편, 그리고 기억이 희미해지는 내가 우리 아이들 마음에 상처주지 않고 말년을 보내다 손잡고 아이들과 웃으면서 굿바이를 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 내가 가장 예뻐하는 쌍겹벚꽃1967년 우리 아이들 소풍 때 함께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 한다면 쌍겹벚꽃이 절정인 날 그 꽃을 눈에 가슴에 가득 담고 아이들과 작별하면서 한 마디 하고 떠나고 싶다.“너희들 덕분에 소풍은 즐거웠어” 라고 햇살이 잘 드는 나무그늘에 수목장을 해주라 미리 언지를 넣어두었다. 한 여름 날 잠시 오수(午睡)를 즐긴 듯 인생이 이리도 성큼 지나올 줄 짐작이나 했을까.먼 길, 돌아돌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 한걸음에 온 듯하다.가슴 아픈 일들, 내 속이 새까맣게 타던 일들이야 있었지만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온 날들이라 마음이 한결 가볍다. 비록 큰 발자취를 남긴 삶은 아니었지만 내 삶의 단상에 그리움을 채집해 올릴 수 있으니 자존심을 지켰다. 여기서 하나를 더 바란다면 그때부터 헛된 욕심이다. 이만하면 족하고 또 족하다. 50년 전 친구들과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3-04-14 10:23
선수 출신이 아니지만 수영을 깊게 들어갔다. 물살을 가로지르는 짜릿함이 여느 운동과 달랐다. 옥천을 대표해 도민체전 수영 선수로 참가했고, 옥천수영장 강사로도 일했다. 취미로 수영을 접했는데 관련 자격증까지 취득해 전문성을 길렀다. 삼양초, 옥천중, 옥천고를 졸업한 조지훈(33, 읍 장야리), 조성훈(32, 읍 장야리) 형제 이야기다. 이들은 학창 시절 충북소년체전 태권도 대회에 참가하는 등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조지훈 씨는 수영 경력 15년차다. 지난해까지 옥천수영장 강사로 일했던 그는 올해 개인 사정으로 그만뒀다. 지훈 씨가 수영을 처음 접한 건 고3 수능 시험이 끝날 무렵이다. 2009년 당시 대전 용운동에 수영장이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옥천 수영 동호회 ‘샤크스’가 만들어졌고, 그때 지인 소개로 동호회에 들어갔다. 2012년 옥천수영장이 생긴 뒤 동호회 이름이 ‘수룡’으로 바뀌었고, 지훈 씨는 지금까지 동호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예전에는 옥천 분들이 수영하러 대전에 나갔거든요. 이안경원 사장님이 ‘샤크스’를 추천해서 들어갔고요. 처음 제의를 받은 건 대회에 나가보라는 거였어요. 그때 영동에서 레인보우 수영대회가 첫 회 열렸거든요. 영동대학교(현 유원대) 안에 부설 수영장이 있었는데 젊은 네가 나가보라고 해서 합류했죠. 마침 집에 보일러가 고장 나서 따뜻한 물이 안 나왔던 시기라 샤워도 할 겸 운동하자는 생각으로 수영을 배웠어요.”■ 수영이라는 관심사로 하나 된 형제지난달 16일 옥천에 있는 한 카페에서 수영을 좋아하는 청년 조성훈(왼쪽), 조지훈(오른쪽) 형제를 만났다. 두 사람은 생활체육으로 수영을 접해 충북도민체전 수영 선수로 활약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충남대 수학과, 스포츠과학과를 전공한 지훈 씨는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대덕테크노밸리에서 인공지능 프로그램 개발자로 일했고 학원 강사, 학교밖 청소년들을 만나는 방과후강사 활동도 했다. 또한, 생활스포츠지도사 자격증, 전문스포츠지도사 자격증, 생존수영강사 자격증 등 수영과 연관된 국가 자격증 6~7개를 취득해 전문성을 인정받아 대전시수영연맹 심판, 청주시수영연맹 이사로 일했다. 그는 동생 성훈 씨와 함께 충남경찰서 해경 수상구조사 소속으로 있다.“대학을 제가 12년 가까이 다녔는데요. 일을 하나만 한 적이 없었거든요. 지금은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관련 일을 하는데 언젠가 수영 쪽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겠죠. 수영강사가 전국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제의도 몇 번 왔고요. 수영은 준비물이 목욕바구니랑 수건, 수영복이 다예요. 운동하고 나서 깔끔하게 씻을 수 있고, 날씨와 관계없이 실내에서 즐길 수 있거든요. 혹시나 모를 안전 문제에도 대처할 수 있는 게 수영이 가진 장점이죠.”수영 경력 8년차인 조성훈 씨는 2019년 세종에서 수영강사를 시작으로 2021년부터 옥천수영장 강사로 활동 중이다. 성훈 씨가 수영을 배운 계기는 형 지훈 씨의 권유 덕이었다. 당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뒤라 안전 문제에 사회적 공감대가 생기면서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한 것. 당시 대학을 휴학하고 대전서 일했던 성훈 씨는 새벽 출근길에 옥천수영장, 퇴근길에 대전 용운동 수영장에 들러 수영을 배웠다.수영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조성훈(왼쪽), 조지훈(오른쪽) 씨. (사진제공: 조지훈)“형한테 배우면서 수영장에 다녔죠. 새벽에 수영하고, 대전서 퇴근하면 저녁 9시까지 수영하고 집에 왔어요. 한 6개월을 했을 거예요. 제가 수영강사까지 한 건 취미가 도를 지나친 거죠. 수영강사 자격증도 형이 따러 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딴 거고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많이 했어요. 운동을 하나 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거든요.”전북대 독어독문학과, 경제학과를 전공한 성훈 씨는 원래 금융권 취업을 염두에 뒀다. 운동을 업으로 삼는 건 생각도 못 했다. 취업준비생 때 국민은행 서포터즈 활동도 하고, 서울보증보험 계약직으로 6개월 일했던 그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고, 마침 세종에 수영강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지금까지 수영강사로 일하고 있다. 성훈 씨는 현재 옥천수영장에서 오후 조를 맡아 12시 전에 출근해 밤 9시에 퇴근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직장이랑 집이 가까운 걸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세종에 다닐 때도 옥천에서 차를 타고 갔는데 거리가 너무 머니까 직장을 옮겼던 거죠. 옥천도 그렇고 다른 지역도 수영 강사가 부족해요. 그래서 옥천에 왔을 때 세종에서 일했던 선생님들 몇 분을 모셔 왔거든요. 제가 소개한 분이 오시고, 그분이 여기 좋다고 해서 연결 연결로 오신 분도 있어요.”조성훈 씨가 수영대회에 참가한 모습. (사진제공: 조성훈)■ 생존수영 이론수업, 수영시설 보강 필요해해마다 도민체전이 열리면 옥천을 대표해 선수로 참가했던 두 사람은 각자 위치에서 아쉬운 점을 전했다. 지훈 씨는 본업이 따로 있는 선수들이 대회를 준비할 여건이 부족하다는 점을 말했고, 성훈 씨는 옥천수영장에 다니는 강습생들을 생각한다면 선수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청주나 다른 지역에서는 선수 출신들을 데려오거든요. 옥천은 수영을 취미로 하는 직장인들이 나오시니까 경쟁이 안 되죠. 그런데도 열심히 준비해서 나오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지원이 조금 아쉽죠. 수영장 레인을 선수들이 훈련할 수 있게끔 빌려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눈치가 보여요. 선수들도 자기 시간을 내서 옥천군을 위해 뛰는데 수영장 이용하는 분들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상황이죠.” (조지훈 씨)지난해 8월 옥천에서 열린 제61회 충북도민체육대회에 옥천을 대표한 수영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조지훈)“저는 강사 입장이라 회원들 생각도 중요해요. 레인을 빼주면 선수들 입장에서는 좋죠. 그런데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이 좁은 수영장이 더 좁아지거든요. 레인은 6개인데 사람마다 수영 실력의 편차가 있잖아요. 잘하는 사람, 중간 사람, 못하는 사람이 뒤섞이면 수영장 정체현상이 생겨서 그룹별로 나누는 게 좋거든요. 여기에 도민체전 선수들에게 레인을 따로 빼주면 그만큼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조성훈 씨)옥천뿐만 아니라 타지에서 수영계 일에 관여했던 지훈 씨는 옥천에 수영 시설이나 수업 면에서 보강이 필요하다고 봤다. 실전으로 익히는 수영도 중요하지만 생존수영을 이론으로 가르치는 수업이 뒷받침해야 한다고 봤다. 또한, 기록 스포츠인 수영 종목에서 스타트가 중요한데 스타트대를 설치하기 어려운 옥천수영장의 한계점 또한 짚었다.“스타트를 하려면 스타트대가 있어야 하거든요. 스타트대에서 뛰려면 깊이가 있어야 해요. 근데 너무 낮아요. 위험해서 설치를 못 해요. 시설을 한 번 하면 바꾸기 쉽지 않을 거예요. 만약 새로운 시설이 생기면 깊이가 깊어졌으면 좋겠어요. 선수들도 여기서 경기를 뛰면 깜짝깜짝 놀라요. 너무 낮으니까요. 그래서 수영장 깊이가 깊어졌으면 좋겠어요. 어떤 운동이든 스타트가 중요하잖아요.” (조지훈 씨)2019년 9월에 열린 제4회 옥천군연맹회장기 수영대회 모습. (사진제공: 조성훈)■ 어려운 여건 속 옥천 수영계의 버팀목성훈 씨는 달리고 뛰고 기부하는 ‘달땜크루’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달땜크루는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회원들이 모여 달리기를 하면 각자 뛴 거리만큼 기부금을 모아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하는 전국 모임이다. 가령 1km에 200원씩 기부금을 모으면 장애인거주시설, 미혼모시설, 보육원에 물품을 전달하거나 연말에 연탄봉사를 할 때 쓴다. 성훈 씨는 지난해 6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우리고장에 있는 영실애육원에 찾아가 화장지 등 생필품들을 기부하며 선행을 베풀고 있다.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수영강사 다음 일을 차차 계획한다는 성훈 씨. 이유가 있었다. 체온보다 차가운 물속에 오래 머무르는 수영강사 직업 특성상 체력적인 한계로 일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이란다. 나중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운동은 계속 할 거라는 성훈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조성훈 씨는 지난해 6월부터 정기적으로 영실애육원에 찾아가 기부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조성훈)“회원들은 수영을 더 배우고 싶고, 강사들은 더 잘 가르치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레인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 있고, 강사 한 명이 여러 명을 가르치면서 생기는 서운함이 있을 거예요. 다 같이 잘하게끔 지도하고 있으니 너무 서운해하지 않으면서 수영을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조성훈 씨)정든 옥천을 떠나 해외로 나갈 계획이 있는 지훈 씨는 향후 인공지능을 이용한 스마트팩토리 사업을 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는 흙을 제조하는 아버지 일을 살려 사회적기업으로 나아가 지역 내 장애인, 청년들을 채용하는 제조업을 이끌고 싶은 꿈이 있었다. 지훈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도민체전에 나갈 선수를 구하는 게 항상 어려웠거든요. 직장을 다니며 운동하는 게 어렵잖아요. 그럼에도 도민체전에 참여하는 선수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저희 옥천군수영연맹 류복현 회장님이 선수단 감독을 겸하거든요. 수영복도 사주시고, 수영장과 협의해 레인도 빌려주시고, 어려운 여건에서 사비를 털어 물심양면으로 챙겨주셨거든요. 옥천 수영발전을 위해 일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조지훈 씨)조지훈, 조성훈 씨가 도민체전에 출전한 옥천군 소속 선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조성훈)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4-13 09:25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똑같은 일상은 없다. 사물도 그렇다.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사물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자태를 드러낸다. 관심을 두지 않아 모를 뿐이다. 보는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인다. 정지된 시간의 기록을 남기고 들여다보길 반복한다. 사물의 본질과 존재를 묻고 가치를 찾는다.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때론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어떤 순간이 그대로 멈춘 사진 속에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린다.이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한 줌 먼지와도 같다. 싱싱한 야채든, 시든 야채든 존재의 가치를 주고 싶었다. 익을 대로 익어 나무에 걸려있던 석류. 잠깐 보거나 먹고 끝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속이 알알이 나온 석류를 보며 여성, 태아 그리고 자궁을 떠올렸다. 모과, 레몬, 피망, 토마토···. 가만 놔두면 점점 익어간다. 꺼뭇꺼뭇 곰팡이가 끼거나 말라비틀어지기도 한다. 그 모습이 예뻐 보였다. 너무 헛되게 바라보지 않았으면. 시선과 인식은 그렇게 확장한다.옥천사람 서상숙(53) 작가가 지난 2월 한 달간 옥천에서 세 번째 사진전을 구읍 교동갤러리카페에서 열었다. 옥천교육도서관 맞은편에 ‘사진카페 2월’을 운영하는 서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과일, 꽃, 유리병 등을 독특한 시선으로 담아내 사진 작품 50여점을 내걸었다. 전시 주제는 ‘오브제(Objet)’. 오브제는 물건이나 사물을 뜻하지만, 사진으로 남겼을 때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회화적 언어이기도 하다.■ ‘허투루 말고 자세히 바라보세요’“사진은 눈으로 보고 마음이 움직여 머리로 찍는 행위예요. 머리는 프레임(Frame, 대상을 바라보는 틀)으로 어디를 넣고 뺄 건가를 판단하는 거고요. 눈에 들어왔을 때 찍을까 말까 결정하는 건 내 마음이 울려야 하는 일이죠. 저는 멋진 풍경이 아니어도 휴대폰으로 매일 찍어요. 아침에 집에서 도립대를 지나 사진카페 2월에 오잖아요. 이 골목에 들어오는 시간이 10시10분, 10시5분, 10시15분 조금씩 다르거든요.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그림자 위치나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죠.”서상숙 작가는 지난 2월 한달간 구읍 교동갤러리카페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전시 주제는 '오브제(objet)'. 서 작가가 운영하는 사진카페 2월에서 그를 만나 전시 이야기와 어렸을 적 카메라를 접한 과정을 들었다. 서상숙 작가는 사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인 포토아카데미 ‘동그라미’에서 수강료 없이 사진 수업을 하고 있다. 사진을 이야기하고 공부하는 ‘동그라미’ 회원 중에는 철학을 전공하거나 공업 디자인에 일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있다. 서 작가는 모임 때마다 기술적인 면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는 차원에서 과제를 내주고 있다. ‘허투루 보지 마세요, 자세히 바라보세요.’ 그가 회원들에게 강조하는 메시지다.처음 사진을 접한 계기는 우연이었다. 어렸을 때 집에 있던 농 위에 필름 카메라를 발견하면서부터다. 그때 농 위를 왜 뒤졌을까. 그 카메라를 못 봤다면 사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 이게 뭐야?’ 물어보니 부산 이모가 줬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버지도, 그 이전에 할아버지도 젊었을 때 카메라를 만졌다는 걸 고모에게 전해 들었다. 대학 전공으로 사진 한다고 했을 때 할머니 말씀하시길. ‘저 상숙이 저거 차~암 피는 못 속이네.’필름현상 같은 개념도 몰랐다. 그땐 설렘 하나였다. 옥천여중 인근에 있던 사진관에 들락날락하며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했다. 중학교 때부터 사진을 취미로 삼았다. 무용하는 친구 데리고 학교 강당에서 찍어도 보고, 이론 책도 찾아봤다. 고3이 되자 유아교육, 사진 중 후자로 마음이 기울었다. 무작정 들이댔다. 지망하는 대학교 사진학과 사무실에 편지를 보냈다. 고3 여름방학 때 대학교 조교를 만나 재학생 언니를 소개받고 입시 준비하는 꿀팁을 들었다. 결국, 재수를 선택했지만.집 근처 나무에서 열린 석류를 보며 서 작가는 여성, 태아, 자궁을 떠올렸다.싹이 난 감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람 얼굴이 보인다는데..곰팡이가 피고, 말라 비틀어졌다 할지라도..■ 세 딸을 키우면서 놓지 않았던 꿈재수할 때가 되어서야 대전에 사진학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았지만 그땐 간절했다. 옥천과 대전을 오가며 한 달 15만원 사진 강의를 들었다. 딱 한 달 수강료만 내고 학원 조교로 있으면서 잔심부름하며 입시반 수업을 들었다. 취미 사진과 입시를 목표로 한 사진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대학 때보다 재수할 때 더 많이 찍었을 정도였다. 현상과 인화의 과정이 늘 기다려졌다. 그만큼 절실했다. 경일대 사진학과에 합격했다.광고기획사에 가고 싶었지만 인연이 닿진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재수할 때 다녔던 사진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리고 서울에 한 홍보대행사에 다녔는데 그때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고향 옥천에 돌아왔다. 큰애가 7살, 둘째가 6살 때 막내가 태어났다. 셋째를 가졌을 때 여자의 삶이 이대로 끝나나 싶었다. 아이들도 잘 키우고 싶고, 유아교육도 해보고 싶었다. 보육교사 1년 공부한 게 자산이 됐다. 당시 문정아파트 1층 두 개 방을 얻어 살림집을 오가며 어린이집을 8년 했다.몇 년간 사진의 공백이 생겼다. 다시 카메라를 잡은 건 어린이집 그만두고 카페 ‘카푸치노’를 할 무렵이었다. 옥천군영상미디어센터에서 사진 강사로 3~4년 일하고, 문화예술교육사 공부를 병행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원 없이 했다. 그만큼 갈등이 따라왔다. 그동안 잘 챙겨주지 못 한 남편이 눈에 밟혔다. 미안한 마음이 불어났다. 끼니도 챙길 겸 남편 사무실 옆에 ‘샘쓰키친’ 가게를 차려 도시락을 팔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다시 갈증이 생겼다. 사진 작업실을 해보고 싶었다.유리병 표면에 묻은 물기까지 담아냈다.유리병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사진 수업만으로는 타산이 안 맞으니 카페를 같이 생각했다. 마침 시내 한자리에 임대가 붙어 있었다. 오랜 시간 비어 있던 공간인데 그날따라 달리 보였다. 그날 저녁 전화해서 다음 날 공간을 둘러봤다. 여기는 암실, 저기는 이야기 나눌 공간, 여기는 교육하는 공간. 그림이 딱딱 그려졌다. 계약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2020년 2월 ‘사진카페 2월’이 열렸고,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사진 전공하는 막내딸과 함께사진카페 2월도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 흑백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작업을 하려고 들어왔건만 첫해만 잠깐 했다. 갈증이 생기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걸 이제는 안다. 현상한 작품을 얼마나 흔드느냐, 약품을 어떤 배율로 하느냐에 따라 사진의 농도, 깊이가 달라진다. 그 손맛을 느껴본 사람들은 안다. 흑백 작업을 향한 갈망은 남아있지만 지금도 좋다.“손님들이 계속 오는 게 고맙죠. 학생들이 가끔 ‘사장님, 여기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하니까 감사하고요. 근데 우리 딸들이 그래요. 오는 학생들한테 제발 말 좀 걸지 말래요(웃음). 애들이 부담스러워한다고요. 근데 학생들이 너무 대견하고 예쁜 거예요. 쉬는 날에 공부하러 오면 계란 삶은 거나 빵 하나라도 주거든요. 저라면 공부 안 하고 누워서 TV 보고 있을 텐데 말이죠. 학생들이 건네는 말 한마디가 저한테는 보약이 되더라고요.”큰딸, 둘째 딸, 막내딸, 원투쓰리는 다 개성이 뚜렷하다. 그중 막내(옥유경 씨)가 성격 면에서 빼닮았다. 돌아보면 나도 남편도 맞벌이 하는 상황에서 막내딸을 잘 보살피진 못 했다. 물질적인 건 부족함 없이 챙기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진에 관심을 둔 막내에게 카메라를 주고 마음껏 찍게 했다. 중학교 올라가서는 자기가 필름 카메라에 컬러필름 끼우고 사진 스캔도 알아서 척척 했다. 내심 내가 못다 한 꿈을 이뤄주길 바랐다. 막내도 같은 대학 사진영상학과에 다니고 있다. 지난해 11월 옥천에 열린 시니어모델 패션쇼 ‘농촌 속 오래된 미래’에 막내와 사진 촬영을 같이했다.“이날 샌드위치랑 샐러드 단체 예약이 있었는데 그걸 다 취소하고 딸이랑 같이 갔죠. 언젠가 딸이랑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게 꿈이었거든요. 주문한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날 몇 십만원 어치 매출을 포기했죠. 근데 사진을 고를 때 딸이랑 관점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같이 사진을 해도 서로 다르게 보는 거죠. 포토샵으로 보정하는데 ‘엄마, 반반 하자?’ 이러더라고요(웃음). 그래도 딸이랑 사진 작업을 같이 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 같아요.”존재와 시간을 사진에 담아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서상숙 작가. 그는 일상의 흔한 대상, 하찮은 사물에도 관심을 두고 사물의 본질과 존재에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지난 2월에 열린 사진전은 이미 끝났지만, 서 작가는 오는 10월 포항에서 사진전을 계획 중이다. 또한, ‘동그라미’ 회원들과 함께 조만간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서 사진전을 열 계획이다. 옥천에 정 붙이며 사는 그의 사진을 향한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이번 전시 포스터는 경산에 있는 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는 서상숙 작가의 막내딸이 제작했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3-31 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