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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 2006마지막 장면을 볼 수가 없어 해피엔딩을 간절하게 바라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국경의 남쪽>과 최근에 본 <첨밀밀>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관객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비극으로 마침표를 찍는 잔인한 감독들이 있습니다.평범한 인간이 삶의 진실에 다가서게 되면 비극이 생겨나죠. 대한민국 호구 강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구질구질하게 살던 강재도 한 여자의 사랑을 받으면서 가벼웠던 삶의 무게가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평범하게 살던 고2 시절 겨울방학에 저두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우연하게 학교 정독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화근이었습니다.(저희 학교가 1회인지라 전통을 세우기 위해 방학 때두 밤 10시까지 몸부림을 쳐야 했습니다.덕분에 학교는 제게 악몽의 공간이었고 졸업 이후 한번도 가보지 않은 폐쇄된 기억의 유적지입니다.) 형광등 아래에서 미래를 위해 악다구니를 치던 초라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은 젊은 베르테르의 열정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알베르트(로테의 약혼자) 베르테르는 사회에서 금기로 여기는 ‘자살’에 관해 논쟁을 벌이고 있더군요.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더구나 ‘자살’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다니,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시인 기형도의 탄식마냥, ‘나는 살아서 헛것이었다’를 중얼거렸습니다.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그만인데 너무 뜨거운 비밀을 알아버렸습니다. 다들 생존을 강조하는 산업화 시절에는 삶의 진실과 혹은 도덕적 명분과 공정은 사치스러운 가치였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과 성공이 최고의 덕목이었고 과정과 상관없이 화려한 결과를 성취한 캐릭터는 성공의 롤모델이 되었고 때로는 대통령까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 후 책에 눈이 뒤집힌 저는 휴학을 하려고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상담을 했으나 무기력한 대답만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학가서 해라’ 강재는 스스로 인정하듯이 대한민국 대표 호구입니다. 함께 출발했던 동기 용식이는 강재의 보스가 되어 계륵같은 강재가 골치 아플 뿐 입니다. 허름한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경수가 유일한 강재의 똘마니입니다. 자가발전하지 않고 있는 강재를 후배들도 우습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마음이 여린 강재는 일수 받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잘못 들어 왔다가 나가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면서 20년을 지낸 강재입니다. 강재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 들어간 직장이나 현장에서 영혼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성공이 기준이었던 사회에서는 자신의 가치와 진로가 어긋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강재의 꿈이 배 한 척 사서 고향 바다로 돌아가고 싶은 건 그래도 강재가 자신의 원형을 알고 있다는 표시처럼 보입니다.그냥 보스 대신 감옥에 들어갔으면 그만인 것을 생전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죽은 아내(장백지)를 찾으러 갔다가 강재는 마음속의 뜨거움을 경험합니다. 영화는 멜로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하지만 사랑에 눈 뜨면서 동시에 존재의 중심을 찾아가는 성장영화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물론 모든 영화는 성장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파이란>은 다른 영화의 성장 서사보다 더 진하게 강재의 줄탁동시의 혼란스러움을 묘사한 영화입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존재의 무거움이 버거운 강재의 몸뚱아리는 화선지를 눅눅하게 하는 붓이 되어 화면가득 슬픔을 붓질 합니다. 부두에 앉아 파이란이 남긴 편지를 읽으며 통곡하는 장면은 파이란에 대한 슬픔과 아울러 자신의 누추한 삶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을 겁니다.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우연하게 자기를 응시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저를 꼬신 건 베르테르였고 강재는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죽은 아내입니다. 자기를 제대로 응시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때는 너무 서늘한 공포까지 느껴지기도 해서 그냥 둥글게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식대로 살아가기엔 주변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죠.사회화라는 건 완전한 자기라기보다는 남들에게 익숙한 ‘나’입니다. 강재두 한 여자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동안 방치해 두었던 자신을 들여다 봅니다. 여자의 비극이 슬퍼서 그랬지만 망가진 자신의 모습도 함께 겹쳐져 강재는 더 울고 싶었을 겁니다.강재는 비록 개인의 삶을 되짚어 보는 시도가 비극으로 연결되었지만 프로메테우스처럼 공적인 가치를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체게바라는 7개월 동안 남미 여행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국가주의가 지배하는 광기의 시절에 뜨거운 도끼가 되었습니다. 강재는 비록 자기 삶을 응시하면서 마침표를 찍었지만 마침표가 없었다면 사회의 모순을 바꾸기 위해 뛰어드는 또 다른 체게바라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사람들과의 관계는 안전을 보장하기도 하지만 관계가 끊어지면 위험해지거나 고립을 감수하기도 하죠. 뜨거운 눈물로 사신의 삶을 헹구어 낸 강재는 보스 용식의 약속을 거절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존중하는 선택을 합니다. 고향 어촌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영화 후반부 새로운 출발에 들떠 있는 강재와 달리 작은 소도시 뒷골목의 분위기는 싸늘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파이란>의 마지막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파이란 / 2001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3-11 10:43

백운리 류제순 1945년젊은 날에 ‘나’는 없었다. 시집와 농사짓고 소 키우며 시 조카들까지 거두며 살았다. 지금껏 많이도 떼 내주고 살았건만 아직도 ‘내가 없어도 조금씩 떼어내 마냥 주고 싶다’는 어르신.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서는 필자를 위해 복숭아를 깎아 쟁반에 담아 내 오셨다. “이것도 인연이야. 우리 집에 이렇게 들려준 것도 인연인데… 요거 먹고 가 응, 요거 더 먹어” 복숭아를 손수 포크에 찍어 코앞에 내미셨다. 출출하던 차에 얻어먹은 복숭아는 달콤했고 배 속도 든든해졌다. 그것은 비단 복숭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정 많은 여인이 베풀어 온 넉넉한 사랑과 베풂의 기운이 필자의 가슴 속까지 푸근히 들어와서 일 것이다. ■ 경상도 남편, ‘나이 많은 사람한테 가면 호강 받는다’ 더니고향은 충북 보은인데 고모가 중신해 여기 백운리로 시집 왔지. 시댁 일가는 원래 경상도에 살았는데 6.25 지날 무렵에 여기 백운리로 이사와 자리 잡았어. 영감은 일흔다섯에 먼저 돌아가셨어. 영감과는 10살 나이 차이가 있었는데 돌아가신 지 11년 됐지. 옛날에는 부부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사람이 많았어. 나이 많은 사람한테 시집가면 귀여움 받는다고 아버지가 늘 말했었어. 고모도 나이 많은 사람한테 가면 호강한다고 나를 채근하더라고. 그런데 영감은 경상도 남자라 툭툭하기만 하더라. 옛날에야 뭐 다 그렇지. 지금 남편들처럼 조근조근 한 건 없지만, 그래도 다툼 안 하고 산 것만도 행복한 거지. 술 먹고 때려 부수고 그런 남편들이 부지기수였거든. 다들 사는 게 팍팍하니 애꿎은 마누라만 괴롭히는 거지 다 안쓰러운 형국이었어.나는 10남매 중 둘째였어. 시집올 때는 형제가 다섯이었는데, 시집오고도 엄마가 동생을 낳았어. 옛날에는 집집마다 줄줄이 사탕처럼 형제들이 많았어. 얼마 전에 동생 하나가 뭐가 급했나 예순 일곱인데 아파서 서울 대학병원 갔다 오더니 먼저 머나먼 그 강을 건너갔어. 형제 아홉이 똘똘 뭉쳐 살다가 하나가 먼저 가니 애간장이 끊어졌어. 마음에 부침이 커서 견뎌내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지. ■ 깨 농사지어 송아지 한 마리 사…열다섯 마리까지시집와 논농사, 벼농사했는데, 봄에는 보리 심고, 여름에 모심어 이모작 했지. 쉴 틈이 없이 그렇게 살았어. 참깨 농사지어 육만 원인가 주고 송아지 한 마리를 샀는데 그게 새끼 낳고 또 낳고 하여 열다섯 마리까지 늘었어. 송아지가 집안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어. 다 옛날 얘기야.소 키우는 헛간이 저기 집 위에 하나, 아래에 하나 해서 두 개야. 여물 먹이고 볏짚 먹이고 산에 풀 베다 먹였어. 남편은 매일같이 풀을 많이도 베야 했어. 소를 먹이면 소 마구에 볏짚을 깔아 퇴비가 되니 논에 내어 땅도 기름졌어. 소 팔아 아들 집도 사줄 수 있었어.옛날에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소에게 먹였어. 우리 집은 우물이 멀어서 물지게로 지어다 날랐는데 겨울에 바케쓰에 물 담아 나르다가, 물이 떨어져 옷이 젖으니 얼어버려. 언 옷을 입은 채 물을 길어 날랐지. 소 한 마리에 한 바케쓰 씩 물 줬어. 딩기(등겨의 방언) 주고, 사료 주고, 여물 주고, 나락 농사지으니 딩기를 주었지. 소는 많지, 해만 떨어지면 물 길어 날라야 해. 소죽도 끓여야 됐고.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세상 말도 못 하게 좋아졌지. 지금은 수도에 호스 연결해서 꼭지 틀면 바로 소 물 주더라. 일과가 소 아침 주고, 점심 주고, 저녁 주는 게 일이었어. 소 팔아 땅도 좀 샀지. 나중에 대구로 이사 가면서는 아들 집도 사줬지. 소 먹이는 게 힘은 들었어도 큰살림 밑천 이었어. ■ 시집오니 조카들이 오 종종… 정성껏 키워 줬어.남편은 5남매 중 넷째야. 시집오니 시아주버님이 돌아가신 지 3년 됐다 해. 그 손주 아들 둘, 딸 하나 세 명을 시어머니가 키우고 있어. 형님동서는 돈 벌러 멀리 갔고. 그러니 나도 내 자식처럼 키워야지 어떡하겠어. 나도 여러 형제 중에 컸잖아, 그러니 그런 마음이 생기데. 조카들이 중학교 갈 때까지 같이 살며 돌봤지. 속 섞인 건 별로 없어. 조카들이 내 말이면 끔찍이도 여겨. 조카들이 나가서 싸우고 오면 남편은 “맞고는 들어오지 마라. 절대로. 치료비 물어주더라도 되니 기죽지 말고 살아라”라며 아비 없이 자라는 조카들이 마음이 아파서 더 엄하게 했지. 저희 엄마도 곁에 없으니 나는 감싸주고 싶었어. 시어머니는 그런 손주들 야단치고 했어. 형편이 그러니 속 안 끓인다는 것은 거짓말이지. 옛날에는 다들 시동생도 키우고 그리 살았어. 그걸 고생이라 생각 안 해. 한 집 건너면 다들 비슷한 모양새로 그 시절을 살고 있었으니까. 내가 서른 살 무렵, 대구 향촌동에 형님 동서가 식당을 하게 돼서 우리 부부가 도와주러 가서 3년 같이 살았어. 혼자 계시는 형수가 안쓰러워 애들 셋 공부 가르치라고 돈도 좀 해줬어.나는 김천에 사는 쉰아홉 된 아들이 하나 있어. 대전서 공무원 하는데 며느리는 중학교 선생이고 남매를 두고 있어. 손주가 갓난아기 때는 내가 옥천에서 키워주었어. 나중에는 내가 김천에 가서 일곱 살까지 키워주었지. 손주가 일곱 살 되더니 대견하게도 ‘할아버지 외로우시니 이제 집에 가셔도 된다’고 해 옥천에 돌아왔어. 요새 여자들은 편하게 살면서도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지. 자기들 하는 일들을 가만히 놔 둬야 하지. 우리 며느리는 나한테 참 잘해. 얼마 전에는 내 보약도 사 보냈어. 나를 생각하면서 보약을 짓는 그 마음이 고마운 거지. ■ 욕심내면 뭐해, 없어도 조금씩 떼어내 줄려고 해. 그이는 약주도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했어. 남편이 백운리 1반, 2반 반장을 했거든. 그 시절 동네 사람끼리 나이가 많든 적든 서로 이해해주고 재밌게 살았어. 보리밥 해서 같이 나눠 먹고. 그때 우리 부부가 주도해 동네 사람들 다 같이 관광버스 빌려 음식 준비해 같이 여행도 했지. 그 시절에는 1년에 한 번은 여행했어. 서울 롯데월드, 부산 오륙도, 강원도 강릉…. 당시에는 내가 제일 젊기도 했고 우리 부부는 재미나서 신나게 그런 일을 했지. 인생 살아보니 좋다가 그만 끝나는 거지. 세상이 많이 좋아졌는데 아저씨가 더 살았으면 좋았지. 지금은 친정 형제들끼리 만나는 게 제일 좋아. 옛날에는 동네에 친구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하나둘 요양 병원으로 찾아 들어가니 마음이 허허롭네.요즘은 집에서 먹고 노는 게 일이야, 저쪽에 이사 온 사람이 ‘운동 갑시다’ 하고 찾아오면 같이 다니고. 새 친구가 생긴 거지. 서로 토닥토닥 해주면서 같이 늙어가는 거지, 저녁 운동 가서 여덟 시 반이면 돌아와. 시간을 놓쳐 드라마도 못 봐. 좀 더 잘 살았으면 베풀면서 더 후하게 살았을 텐데. 더 못 줘 마음 아프지. 그게 아쉬움으로 남아. 갈 때는 빈손으로 갈 거잖아. 농사지으면 자식, 조카들, 손자까지 다 나눠 줘. 욕심내면 뭐해 갈 때 싸갈 것도 아닌 데. 없어도 조금씩 떼어내 줄려고 해. 그동안 마음 아픈 일, 서러운 일 쌓인 것은 절에 다니며 스님께 위로받으며 살아냈어. 지나고 나니 인생이 허무해. 그래도 세월이 약이라고 그 고단하고 힘겹던 시간들이 아득하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3-04 14:36

지난달 28일 국제로타리 3740지구(총재 지용민) 소속의 옥천로타리클럽(회장 전인호)과 청담로타리클럽(회장 박봉화)이 코로나19의 여파로 부족해진 혈액 수급을 지원하기 위해 헌혈 캠페인을 열었다.옥천·청담로타리클럽이 주최한 헌혈 캠페인은 28일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4시까지 읍사무소 앞에 헌혈버스를 마련하고 헌혈 캠페인을 진행했다. 이날 헌혈봉사에는 두 로타리클럽을 비롯해 읍사무소, 자원봉사센터, 등 4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옥천고등학교 2학년, 4명의 학생들도 헌혈버스를 찾았다.‘봉사로 삶이 변한다’는 슬로건과 함께 힘든 이웃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진행된 헌혈 캠페인.옥천로타리클럽 전인호 회장은 “두 로타리클럽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함께 참여를 해주셨다”며 코로나19라는 상황 속에서도 헐혈에 참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헌혈버스를 찾아주신 로타리클럽 회원들을 비롯한 주민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청담로타리클럽 박봉화 회장은 “로타리클럽에서 주최한 헌혈 캠페인인이 올해로 2번째였다”라며 “1년마다 크게 진행하고 있는 행사이자 우리 이웃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행사인 헌혈 캠페인을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이번 행사에 함께 참여해 로타리클럽 회원들을 격려한 국제로타리 3740지구 지용민 총재는 “올해가 로타리클럽 창립 117주년이다”라며 “코로나19로 인해 이 시기가 혈액 수급이 가장 어려운 시기인데, 이러한 시기에 우리 로타리클립이 ‘봉사로 삶이 변한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힘든 시기에 이웃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이번 헌혈 캠페인에 담았다”고 전했다. 헌혈 봉사를 통해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는 4명의 옥천고 2학년 학생들.이날 헌헐 캠페인에 힘을 보태기 위해 헌혈버스를 찾은 박병주(옥천고2)학생은 “선생님께서 추천을 해주셔서 헐액이 부족하다는 요즘 시기에 친구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재훈(옥천고2)학생은 “친구들과 함께 참여하기에 더 의미가 있었고 저희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헌혈 캠페인에 참여하겠다”고 말했다.이날 캠페인에는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되어 40여명의 로타리클럽 회원들을 비롯한 마을주민들이 참여했다.읍사무소 앞에 마련된 캠페인 진행 부스. 

주민기자 | 김기연 기자 | 2022-03-04 14:26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3-04 13:55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3-04 13:50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2-25 11:31

산하대지가 하루가 다르게 초록 물결을 이룬다. 바라보는 눈길이 마냥 정겹기만 하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요,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시절 인연이 찬란한 빛을 발하니 일일이 시호일이다. ‘뜻 밖의 재앙,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지만 우리는 전 세계가 주시하듯 선제적 대응과 성숙한 시민의식의 결집으로 국난극복의 험로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수많은 왜란과 호란을 극복하고, 불굴의 의지력으로 다른 나라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과정을 100년이라는 짧은 과정에서 보라는 듯이 성숙시킨 민족이 아니던가. 그 뒷받침을 누가 했던가. 위정자들은 혼돈과 권력 암투로 일관했지만, 민초들은 우직스럽게 고난과 좌절을 불굴의 정신으로 국정의 동력을 추동했던 민족이다.대한민국의 정부 수립도 70여 성상을 넘겼다. 뒤돌아보면 가슴 시린 통사(痛史)요, 피로 쓴 혈사라 아니할 수 없다. 국민은 주인이 아닌, 죽지 못해 삶을 연명한, 질긴 목숨의 수난사였다. 친일 매국노들은 시대를 도용할 줄 아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달인들이었다. 그들은 호의호식으로 영달을 누렸지만, 독립운동가들은 멸족의 비운을 맞이한 것이 우리 민족 현대사의 민낯이다. 그 뒤집힌 현실이 우리 민족 현대사의 출발점이었다. 타의에 의한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 이승만 정권의 ‘독선과 아집’으로 일관된 현대사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4.19정신’을 도화선으로 하여 민중의 횃불에 자극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승만 정권의 태동은 출발부터가 비극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아니 될 인물이었다.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에 의해 탄핵을 당했던, 미국을 향해서 “조선인은 자치를 할 수 있는 민족역량이 부족하기에, 미국의 지배 하에서 신탁통치를 받아야만 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시대의 ‘독버섯’같은 존재였다. 강대국엔 비굴하리만치 아부를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른 인물이다. 친일 매국노들을 전방위로 포섭을 해 정권의 방위망을 구축한 비열한 ‘패륜의 정치인’이다. 그런 위인을 ‘국부’라 칭하는 썩어빠진 위정자들이 현재도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승만이 있었기에 박정희가 총부리로 5.16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고, 전두환의 칼끝이 국민을 유린한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은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옹벽이었고, 친일매국노들의 죄과를 방어하기 위한 ‘분신’에 불과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했던가. 정치도 예외일 수는 없다. 권력의 맛을 본 자가 이성을 잃으면 자신은 물론이요,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 있을 수가 없다. 그 실례를 이승만이 여실히 입증한 것이다. 권력의 마(魔)는 마실수록 취하고, 취할수록 빨려 들어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맛에 취하기 시작하면 헌정 유린은 서막에 불과할 뿐이다.1960년 3월15일 실시된 선거는 이승만의 무덤을 자초했다. 정권이 유린한 부정선거는 결국 4월 혁명에 도화선이 됐다. 칼로 주인을 협박하고 짓밟는 정부는 가장 비열한, 앞날이 예고된 미친 패륜 집단이다. 가녀린 학생들의 가슴에 총구멍을 들이대는 정부와, 일만 터지면 돌려치기 전법을 앞세워 공산주의로 몰아가는 이승만 정권의 행태에 탄핵은 이미 예고된 밥상이었다. 57년 뒤 박근혜 정권이 이 바통을 이어받았듯이.민중은 ‘맹물이며, 풀’과 같다. 맹물은 만물을 먹여 살리면서도 말이 없다. 민초들의 삶과 흡사하다. 물은 결코 자신의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다. 이 정신이 시대를 초월한 인류구원의 마지막 보루다. ‘아상(我相)’이 없다. 둥근 그릇 모난 그릇 고집하지 않는다. 막히면 돌아서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번 뒤틀리면 잡을 수 없는 둑이 터진다.바람은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연약하고 힘없는 풀을 쉽게 제압할 수 있지만, 풀은 결코 절망할 줄 모른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이것은 가볍지 않은 진리다. 1960년 4월 19일의 혁명은, 동학혁명 숨결의 연장이며, 3.1 운동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우리 민족의 면면한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5천년 역사의 유구한 흐름 속에서, 피지배 민중이 지배자를 타도한 최초의 성공한 혁명이다.김삼웅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황토현에서 찢기고 처참하게 짓밟힌 민주의 혼이, 탑골 공원에서 발화된 독립 의지가 4.19에 접목되어 벽혈(碧血)로 발휘된, 선조들의 불멸의 정신이다.”4.19 정신은 반공정신으로 투철하게 무장된 기백으로, 남북대화의 물결을 주도하는 민족통일 정신의 숨결이다. 면면히 계승된, 오늘의 우리가 잊어서는 결코 아니 될 민족 대단결의 정신이며 세계 일등 민주복지국가로 향하는 첩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2-25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