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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추적거리던 비에 바람까지 가세했다. 소리가 제법 요란스럽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길래 봄비 다운 봄비를 기대했는데 저녁이 되면서 기온까지 뚝 떨어졌다. 추위에 떨고 있는 홍매화가 측은지심마저 일으킨다. 부지런한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시나브로 번져오는 봄기운에 들떠있었던 내가 머쓱하다. 빠르게 올라오던 꽃소식도 그 걸음걸이가 더뎌지겠다. 그렇다 해도 이젠 바야흐로 봄이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개나리 진달래는 필 테고 목련도 우아한 자테를 한껏 뽐낼 것이다. 모두가 그렇듯 나 역시 간절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려 왔다. 설레는 마음은 소풍날 받아놓은 아이와 다르지 않다.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이 어디론가 훌훌 날아버릴까 겁이 난다. 묵직한 돌멩이라도 하나 매달아 두어야 할까 보다.지난해 가을, 단지 옆 텃밭을 분양한다는 공고가 아파트 게시판에 나붙었다. 오며가며 눈독 들이던 참이라 한걸음에 달려가서 신청했다. 열 평 남짓한 땅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겨우내 부자가 된 듯 뿌듯했다. 콩밥을 좋아하니 강낭콩 한 두령은 꼭 심어야 할 테고 아욱, 상추, 방울토마토, 부추, 파 등의 채소를 고루고루 심으려 한다. 어릴 적 달짝지근한 옥수수 대궁을 씹던 기억으로 그것도 심어 볼 양으로 한쪽 구석에 자리까지 정해 놓았다. 날이 풀리기도 전에 흙을 고르고 거름까지 해두었다. 이제 씨앗만 넣으면 된다. 호미 한 자루면 충분할 작은 텃밭 가꾸는 일에 ‘농사’라는 말을 붙이니 농부로 살았던 오래 전의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아릿한 추억들은 생각만으로도 눈이 젖는다. 다시는 오지 않을 청춘의 눈부심과 놓쳐버린 것들의 안타까움이 회한으로 남아서인지 모른다. 온 나라를 비탄에 빠지게 했던 외환위기,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그 격랑을 피해 계획에도 없던 산촌생활을 한 적이 있다. 연고도 없는 곳에 농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젊은 우리의 귀농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았단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시절이 좋아질 때까지 세월이나 낚아보자고 시작한 일이었다. 친구들은 낭만적인 전원생활인 줄알고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하늘 아래 첫 동네라 할 만큼 오지였던 그곳은 당연한 듯 누리던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으로 먹먹한 날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지나갈 일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걸 내려놓으니 세상이 다시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소박한 인심은 상처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마운 사람들 중 유독 더 그리운 분이 계시다. 몇 집 안 되는 마을에 유일한 이웃이었던 은행나무 집 할머니. 특유의 유쾌함으로 조용한 산골마을을 사람 사는 동네로 만드는 재주가 있으신 분, 구구절절 마을의 전설과 집집마다의 살림규모까지 소소한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뼈를 늘려가며 들려주신 이야기들로 잃었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조력자를 자청하시며 마을 사람과 잘 지내는 법까지 넌지시 알려주시던 그분은 부모님만큼 든든했다.오는 걸음이 더뎌서 더욱 반가운 산촌의 봄, 눈 녹인 물로 골짜기가 소란스러워지면 묵언수행 하는 수도승처럼 침묵으로 일관하던 겨울 숲이 파르르 깨어난다. 그곳의 봄은 연둣빛으로 번져가는 산을 오르는 일로부터 시작이다.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 많던 나는 나물하러 산에 가시는 할머니를 꼭 따라붙었다. 처음 하는 일이 신기해서 위험한 줄도 모르고 나대는 내가 귀찮기도 하셨으련만 취나물과 고사리는 어디에 많고 머윗대는 어느 골짜기 것이 실하다고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혼자만 알고 다니는 곳이라며 두릅과 더덕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기도 하셨다. 그분 덕분에 가짓수 많은 산나물 이름들을 다 외울 수 있었고 먹을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가릴 줄 알게 되었다. 하찮게 여겼던 들꽃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곤충 한 마리의 생명도 귀히 여기게 되었다. 자연과 더불어 지내면서 생각의 깊이가 달라졌다. 서너 번의 봄을 더 보내고 염원하던 도시로의 귀환을 서두르던 날, 진심으로 축하해 주시던 그분과의 인연은 그 후로도 몇 년간 이어졌다. 휴가 때면 찾아가 신세를 지기도 했고 그곳의 농산물을 도시 사람들과 직거래 할 수 있는 다리가 되어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안부조차 모르고 지낸지도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다. 알아보려면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그간의 세월이 있어서 행여라도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게 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사 가던 첫 해 땅을 놀릴 수가 없어서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논농사를 시작했다. 못자리를 하고 모를 내는 등의 큰일은 남에게 맡기면 되지만 여든여덟 번의 손길과 일곱 근의 땀이 들어가야 쌀이 된다는 벼농사는 초보 농군인 우리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언제쯤 비료를 주고, 얼만큼의 논물을 맞춰야 하는지, 논둑의 풀은 왜 그리 빨리 자라는지, 병충해는 왜 또 그렇게 극성을 부리는지……. 그해 가을엔 큰 태풍도 있었다. 다 지은 농사 망칠까봐 가슴을 졸이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해마다 부모님께서 보내주시던 쌀이 부모님의 땀과 눈물로 얻어진 걸 모르고 받아만 먹었던 게 얼마나 죄송스러웠는지 모른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아직도 그 고마움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론 밥 한 톨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은 첫 농사가 농사를 평생 업으로 삼으시는 분들보다 직황이 좋았다. 수확한 곡식을 지인들과 나누며 흐뭇했던 기억들, 돌아보면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복숭아가 특산물인 고장답게 다랑이 논과 밭, 경사가 심한 산비탈까지 복숭아 나무로 빈틈이 없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수채화를 그린 듯 골짜기마다 흐드러진 복사꽃의 향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했다. 가히 무릉도원이라 할 만 했다. 조팝나무 꽃잎이 눈처럼 날리고, 산 벚꽃이 아련하게 피어오르던 그곳을, 초를 재듯 일정하게 울어대던 뻐꾸기 소리를 난 아직 잊지 못한다. 내 마음의 고향, 그곳에 가고 싶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 사월의 봄에 머물고 싶다. 우리가 심었던 모과나무, 석류나무가 얼마나 자랐는지, 집 앞으로 휘돌던 냇물은 아직 수정같이 맑은지, 여울목에 줄낚시를 띄워놓으면 파라미가 촘촘히 걸리곤 했던,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즐거움을 낭만이라 여겼다. 여름 한철을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던 우리처럼 달콤한 낭만을 찾는 사람이 요즘도 있는지 궁금하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24 13:31

편집자주_5만 명 선이 무너지면서 옥천 인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구가 줄어들면서 세대별 균형이 심각하게 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령화 비율은 30%를 훌쩍 넘어선지 오래고 청년 인구는 갈수록 줄고 있습니다. 이에 사회적기업 고래실은 농림축산식품부, 충북도, 옥천군과 함께 2022년 농촌에서 살아보기를 시작합니다. 지난해 농촌에서 살아보기와 달리 올해는 ‘프로젝트형’으로 젊은 청년을 대상으로 실시합니다. 서울, 김포, 대전 등지에서 온 청년들이 각 지역의 농가를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면서 지역살이의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이 지면을 통해 매주 청년들이 만난 농가와 활동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송영철(36, 서울) 농촌 인턴오늘 새벽 3시 30분 잠에서 깼다. 오늘은 조금 일찍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캔커피를 마시자 정신이 들었다. 샤워를 깔끔하게 하고는 의자에 앉아서 오늘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일정표에는 오전 10시에 옥천 로컬푸드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는 주교종 옥천살림 상임이사님의 강의를 듣기로 적혀 있었다. 오후 1시 30분에는 옥천 라디오 스튜디오1에서 교육 받는 프로그램이 있었다.그리고 이건 장기 계획인데 친구들과의 여행 계획도 파워포인트라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야 했다. 중3때부터 잊고 지내던 친구들이 한 달 후에 오기 때문이다. 다시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씻고나니 오전 4시가 좀 넘었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낚시를 가기로 했다. 몸의 관절을 풀며 준비운동을 했다. 여기서의 취미생활인 낚시를 가기로 마음 먹으니 심신이 바빠졌다. 채비를 하고 5분남짓 거리의 낚시터에 도착했다. 자갈밭이 있는 낚시터다. 이름도 자갈밭 낚시터다. 낚시대를 던져보지만 고기는 안 나왔다.그래도 낚시 초보인 나에게는 던지는 것도 재미있었다. 한 70번 정도 던지고는 오전 7시가 되어서야 안남의 집으로 돌아왔다. 한바탕 놀고나니 쉬고 싶어서 누웠다. 조금만 쉬어야지 했는데 잠들었다. 기지개를 켜며 불이나케 일어나보니 오전 9시 10분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늦었다. 농촌생활체험을 같이하는 동무와 같이 가야 했다.오전 9시 20분에 말이다. 10분 안에 모든 것을 해야했다. 미리 전화하거나 문자로 늦는다고 이야기하려다가 10분안에 할 수 있겠지 하고 준비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는 옷을 입으니 오전 9시 30분이었다. 나가니 동무가 같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는 출발했다. 원래는 약속시간 10분 전에 나와서는 시동을 걸고는 차분하게 준비를 했는데 평소와 다르게 정시에 나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안남면 지수리의 자갈밭 낚시터의 모습이다. 둠벙 근처 저널리즘 스쿨 근처에 동무를 내려주고는 주차를 살포시하고는 둠벙에서 고래실 국장님을 기다렸다. 우리 농촌생활 체험 동무가 나 포함 4명이 다 모였다. 오전 10시가 좀 넘어서야 로컬푸드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는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주교종 상임이사님께 이야기를 듣다보니 세계를 다 보는 눈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농사의 세계 말이다.어떻게 사람이 말하는 것으로 농사의 세계를 볼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몇가지 질문의 시간과 소감을 말하는 시간도 가졌다. 무언가 답을 딱 안 내시는 것이 신기했다. 인생에는 답이 없듯이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멋있고 존경스러웠다. 어느새 오전 11시 50분이 되었다. 우리는 딜리셔스 레터에 관한 아이템 정보를 보았다. 그리고는 옥천로컬푸드에 들려서 산딸기와 우리가 같이 먹을 요거트를 구매하였다.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갈 준비를 하였다. 고래실 국장님의 차를 타고 가는 길은 더웠다. 오늘은 찜통 더위였다. 옥이네 식당에 도착해서는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동무들과 같이 밥을 먹으니 밥이 꿀맛이었다. 분식 비슷한 메뉴가 나왔는데 그 기본적인 메뉴에서 나오는 맛은 감탄사가 나왔다. 이제 조금 쉬어볼까 하니 벌써 오후1시 30분이 거짐 다 되어갔다. 옥천FM에 도착해서는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강의라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실습 위주의 수업이어서 강의 내용은 진심 알이 꽉 찼다. 안진수 오카이브 대표님이 보이는 라디오에 관련된 수업을 진행해주셨다.옥천FM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받게 되었다.우리가 오디오인터페이스를 다루는 기술도 알려주셨다. 새롭지는 않은 기계였지만 자세히 가르쳐 주셔서 좋았다. 직접 녹음하는 것도 했는데 동영상으로도 촬영해주셨다. 내용은 우리가 자유롭게 기획안을 계획하고 적어서 대본을 간략하게 쓰는 것이었다.안진수 대표님 포함 5명이 방송을 했는데 한번에 녹음이 끝나서 기분이 좋았다. 수업이 기분 좋게 마무리 되었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안남에 사는 동무 1명이 본가에 간다고 하여서 차로 옥천역에 바래다주고는 안남 집으로 출발했다.열심히 달려서 익숙한 도로를 운전해서 도착했다. 집에 말이다. 익숙한 안남 엄마와 사무국장님이 보였다. 정겹고 반가웠다. 엄마는 분리수거를 하고 계셨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렸다. 이 더운 날씨에 쓰레기를 정리하시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아팠다. 안남 엄마는 나에게 점심밥을 먹었냐고 물어보셨다.역시 안남 엄마다. 너무 정겨운 마음에 나도 덩달아서 점심 드셨냐고 물어보았다. 잘 드셨다고 했다. 배바우 권역 사무국장님이 부탁하신 무선마이크 고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방에 들어왔다. 조금 시일이 걸려도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 하루의 태양도 저물어간다. 곧 밤이 오겠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24 11:35

 “나 특별한 얘기도 없는데...” 전화기 너머로 말끝을 흐리셨지만 1층까지 마중 나오신 어머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어머니의 반달 같은 눈웃음에 덩달아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스크가 원(怨)이로다.“나 작년까지는 펄펄 날라 다녔는데...” 하루하루 지나는 시간이 너무 귀하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셨다. 노인 일자리활동과 포크 댄스로 건강을 지키시고 실버기자단이라 시간도 유익하게 쓰고 계셨다. 去頭截尾(거두절미), 멋진 어머니...옥천읍 가화리 홍순자, 81세■ 결핍투성이던 유년, 어린 눈에 그 넓던 신작로는 그저 좁은 골목길이더라충북 오송이 고향인 나는 지금을 ‘꿈같은 세상’이라고 줄곧 말한다. 고향마을은 산도 멀어서 나무하거나 나물 뜯으러 가려면 20리를 걸어야했다. 남정네들은 큰 숨을 몰아서 산에 올라 지게에 나뭇짐 얹어서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갈 고통을 감수하면서 산비탈을 내려왔다. 여인네들도 두 말하면 뭐할까, 헌신은 당연한 것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기회가 단절되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다들 악!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그렇게 살아왔다. 오송 강외 초등학교를 나와서 청주여중을 다녔다. 공부하고 싶은 열망은 많았지만 형편이 안 되니 중학교에 다닌 것만도 친정어머니 덕분이었다. 친정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안가셨지만 총명하셔서 글도 읽고 편지도 쓰셨다. 어머니 덕분에 교복이라도 입어보았다. 나를 공부시켜준 우리 어머니는 내 평생 은인이다. 아버지는 뭐가 그리 급하셨나? 내 나이 아홉 살에 돌아가셨다. 없는 살림에 남편의 부재로 어머니가 짊어져야 할 짐은 굳이 말로 드러내기도 가슴이 시리다. 당시만 해도 돌림병이나 홍역이 많아서 동네를 한번 휩쓸고 가면 온 식구가 줄줄이 꽃상여를 타고 선산에 묻히기도 했다. 동네에 곡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시골 산자락에 유난히 애기 무덤이 많았던 슬픈 기억이 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에 그 길을 지나려면 뒷목이 쭈뼛거려 오금이 저렸다.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아 두려움으로 꽉 찼다.어렸을 때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면 할머니께서는 추운 겨울날에도 팬티만 입혀서 부엌 아궁 앞에 세우셨다. 바가지에 굵은 소금을 담아 한줌씩 온 몸에다 뿌려 주시고는 부엌 빗자루로 쓱쓱 쓸어내려 주셨다. 아이고, 쓰리고 아파라.“철모르는 아무개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합니다. 삼신님께서 깨끗이 낫게 해주십시요”주문처럼 말씀하시면 2~3일 후에 언제 낫는 지도 모르게 깨끗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미신 같지만 그 시절엔 믿고 살았다. 눈으로 보았으니까. 학질이나 돌림병에 걸려서 열이 높아 사경을 헤매도 용한 할머니를 모셔 갔다. 마을에 돌림병이 생기면 할머니도 바쁘셨다.이집 저집 불려 다니시며 돌팔이 의사 역할을 하셨다.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할머니는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기도 하셨다. 돌잔치, 백일잔치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돌림병에서 목숨 건졌다고 잔치를 벌였다. 나도 학질이 걸려서 학교도 두 살 더 먹어서 들어갔다. 결핍투성이었던 유년의 기억은 우리 동년배들은 니나 내나 다들 마찬가지다. ■ 몸은 고단했지만 야무진 큰 애기, 순자중학교 졸업하고 엄마랑 동생하고 신탄진 외갓집으로 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막내 동생이 철도국에 다녔는데 신탄읍내서 잘 살았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는 친척동생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살림도 도왔다. 상 할머니가 무서웠지만 어린 마음에도 잘 보이고 싶어 눈치도 빠르고 뭐든 잘했다.할머니가 예뻐하셔서 외갓집에서의 생활은 마음은 그리 고달프지 않았다. 신탄진역은 노리까에(환승)역이라 기차가 한 시간정도 멈췄다가 갔다. 손님들이 내려서 시장보고 끼니도 채우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이면 많은 빨래를 하느라 방망이로 얼음을 탕탕 깨고 양잿물로 미리 애빨래를 한다. 양잿물은 짚풀을 떼서 만들었는데 비누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얼음물을 깨고 빨래를 하려니 손은 마디마디 아렸고 냉기가 핏줄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애꿎은 빨래 방망이만 연신 두들겨 댔다. 서울제약 근무 시절■ 원기소 만들던 서울제약의 또순이 외갓집에 기거하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방직회사에 다녔다가 제약회사 채용 공고를 보았다. 서울 올라 갈 때는 촌티를 안내려고 핑크색 유똥 치마에 저고리 해 입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우선 서울살이는 남의 집 일을 해주면서 시작되었다.잘 사는 집도 석탄을 떼서 난방을 하느라 얼굴만 뽀얗고 다들 새카맸다.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자취하고 마침 제약회사 공고가 났다. 당시는 유한양행, 서울제약 (서울 약품 공업사), 삼일제약등 제약회사가 세 곳 이었다. 나는 서울제약(서울 약품 공업사)에 입사를 했다. 서울제약은 그 유명한 원기소, 비오비타, 러미라를 만드는 회사였다. 나는 포장 라인에서 근무했다. 다들 형광들 불빛아래서 밤이면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서 손등이며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졸음을 참아냈다. 가족을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어머니, 아내, 딸, 언니, 누나들이었다.그녀들의 헌신이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아서 돈을 벌면서 야간에 고등학교에 다녔다. 편물이 유행할 때라 편물도 짜면서 공부를 했다. 20대 나의 관심은 온통 돈이었다. 돈을 벌어서 집안도 일으키고 엄마도 돕고 싶었다.1967년에 남편을 만나 아들 셋을 낳고 1973년도에 옥천으로 내려왔다. 가난 속에서 철이 들어서 나는 더 야무지게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우리 영감님의 할머니께서 남편 어릴 때 팔베개를 해주시면서, “평득아 너는 크면 마누라 덕에 잘 살거다” 라고 줄곧 남편 귀에 대고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말대로 됐는지 우리는 인생의 폭풍우와 거친 파도를 무사히 넘기고 자녀들도 다들 화목하게 잘 살고 있다.큰집은 꼭 챙기라고 할머니가 끼고 가르쳐서 남편이 사촌 시동생한테 쌀 한가마니씩을 나눠줬는데 나중에 시동생 말이 우리 남편이 그 집 마당에 탕! 소리를 내며 무거운 쌀가마니를 내려놓을 때 그렇게 고마웠단다. 사촌 동서는 그 이후로 농사짓고 수확하자마자 쌀, 된장, 고추장, 참깨 볶아서 참기름, 들기름 짜서 바리바리 택배를 보낸다.보은을 한다고 나를 형님이라고 깍듯이 대우를 하는 동서에게 나는 고마워서 돈이라도 보내려면 “형님, 돈 주시려면 우리 인연 끊어요.”라며 단박에 거절한다. 나는 동서의 그 진심에 울컥한다. 요즘이 각박한 세상이라고 한탄하지만 우리 동서를 보면 마음이 그냥 따뜻해진다. 작은 것에 서로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남편은 결혼할 때 나에게 “당신 밥은 안 굶길게” 라더니 그 약속을 지켰다. 아무것도 없어 빈털터리였던 남편은 고철을 취급했다. 서울 신길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전세금 5만원이 없어서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다들 어렵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림이 늘어나는 기쁨을 맛보면서 견고한 세월이 쌓였다. 그 사이 우리 세 아들은 쑥쑥 자랐고 우리 부부의 연륜도 깊어졌다.남편은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마을 재건에 앞장서서 새마을 지도자상을 받았다.■ 우리 부부의 용기와 도전이 낳은 희망의 결실들 고철 취급할 때 인천 대한제철에 납품을 했다. 당시는 현찰이 아니라 주로 어음을 발행했다. 보통 6개월에서 1년 내에 돈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결국 부도가 나는 불상사가 생겼다. 꼬물꼬물 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살길이 막막해서 시골에서 다시 도전해보려는 의지로 막내 손만 잡고 중화실업 동네 신대로 와서 은성산업 제사 공장에 다녔다. 그나마 그것도 친척 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은성산업과 중화실업에는 아가씨들이 많았는데 야간근무하고 퇴근하는 아가씨들에게 근방의 청년들이 못된 짓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했다. 남편이 시골을 재건해보려는 마음으로 그 아가씨들과 청년들을 모아 4H를 조직했다. 토끼를 사육해서 팔게 하고 포프라 나무를 울창하게 심어서 산림청장님이 상금을 주고 가는 일도 있었다.다들 협력해서 시골 마을을 살려보자는 의지들이 생겨서 나는 동네 주민들의 아이들을 따로 챙겼다. 농번기 때는 동네 아이들을 은행나무 밑에 앉혀놓고 옷도 똑같이 입혀 율동도 가르쳤다. 주민들이 아이들 걱정 없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어서 탁아소의 전신처럼 시작되었다.그 당시의 청년들은 남편을 지도자님! 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같이 나이 들어 간간이 머리 희끗희끗한 분들이 남편에게 지도자님! 하면서 반가워하면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회억에 젖기도 한다. 우리도 형편이 넉넉해서 했던 일이 아니라서 부족했지만 더 잘살게 될 거라는 믿음하나로 버티면서 다들 함께 했다. 여든이 넘은 우리에게 그런 불같은 청춘이 있었다니!나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나이 들어도 사그라들지 않아서 8비트 컴퓨터 시절부터 컴퓨터를 배웠다. 1980년대인가 수십 년 전이다. 정우산업에서 컴퓨터를 가르쳤는데 무료라 친구들과 가서 배우고 복지관에서 또 배웠다.유난스러운 할미가 아니라 나이 들어도 더 배워서 유익하게 잘 쓰고 싶은 갈망이 여전했다. 인터넷도 배우고 이메일 주소도 만들면서 뭐든 열심히 배웠다. 처음에는 다 어설펐지만 시간이 쌓이고 연륜이 생기면서 일구어 나갔다. 나이든 우리들이 세월 속에서 쌓은 경륜은 무시할 수 없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한 채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연륜과 지혜는 살아 있는 인문학 책이다. ■ 당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신식 할머니 아파트 부녀회장 할 때는 교장선생님들과 학생들 모아놓고 아이들에게 촌수를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은 촌수가 뭔지 모른다.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이는 가엽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키워주는 교육이었다.나는 복지관에서 동년배 상담을 한다. 독거노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도 묻고 집으로 배달된 반찬에 대한 의견도 듣는다. 당근마켓 어플을 깔아서 중고 물품들도 올려서 판매를 한다. 어느 날 장야리에서 젊은 새댁이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물건을 가져갔다. 뒷모습을 보면서 ‘저 새댁도 나처럼 아끼고 열심히 사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녀를 마음 속으로 응원했다.    ■ 등 따시고 배부른 지금, 환경의 역습을 걱정하는 ‘어른’나는 3형제를 두었는데 손주가 다섯 명이다. 다들 자기 몫을 하고 잘 살고 있어서 내 노년의 기쁨이며 위안이다. 걱정이라면 환경문제다. 갈수록 쌓이는 환경쓰레기에 이제는 마스크까지 매일 천만장이 넘게 버려지는데 시간이 지난다고 썩을 것도 아니며 보통 걱정이 아닐 수 없다.코로나도 걱정이지만 마스크가 쌓여가는 환경도 더 걱정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더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 자연과 환경들이 우리 삶을 역습하고 있다. 우리 인생은 끝까지 숙제를 안고 간다. 지혜롭게 해결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 더불어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먼저 살아본 우리의 역할이다.그런 일이라면 앞장설 준비가 됐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궁핍한 시골에서 태어나 고단했지만 내 의지로 삶을 예쁘게 그려왔다. 얼기설기 얽힌 실타래 위의 무명천에 목단 꽃이 곱게 피어났다. 어여쁜 목단 꽃으로 내 인생의 자수를 마감중인 손끝이 오늘따라 더 야무지고 곱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주민기자 | 김경희 시민기자 | 2022-06-17 11:26

모두가 갈망하는 전원생활을 접고, 아파트 생활을 하니 일장일단이 있다. 전원생활은 여름철엔 새벽 자명종이 뻐꾸기 소리다. 산새 소리에 기상을 하고 두견이 울음에 취하며, 별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며 잠이 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호시절을 뒤로하고 닭장 같은 집을 빠져나와 아침 운동을 나간다. 걸음걸음 새소리, 물소리 대신 자동차 경적을 벗하며 간다. 잘 정돈된 공설운동장이 산뜻한 얼굴로 반긴다.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묵은 찌꺼기를 배설하고, 새로운 기력을 회복하는 고난의 작업이다. 한 바퀴 돌고 나면 활력이 솟는다. 땀도 비 오듯 흐른다. 돌아와 샤워하면 소소한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든다.이 맛이 운동의 묘미다. 병든 몸일수록 움직여야 그나마 하루가 보전된다.이 기분으로 창가로 가서 붓에 먹물을 흠뻑 묻힌다. 대청 창가로 펼쳐진 삼성산과 식장산의 웅장한 자태가 나를 위안해 주는 유일한 벗이다. 이렇듯 자연이 인간의 영원한 모태인 것은, 모든 것을 품되 ‘침묵의 언어’로 한결같이 자신을 주장하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는 목숨을 바쳐서 목숨을 얻은 사람이라고.”창문으로 스며드는 청렬한 기운을 머금고 붓을 잡는다. 나의 하루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사경, 병풍 작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금강경』은 병풍으로 제작하면 21폭의 대작이다. 장장 5,000자가 넘는 대광설의 설법이다. 『금강경』은 행초서로 쓰고 『반야심경』은 예서체로 쓴다. 쓰면서 심오한 뜻을 아로새기면, 가슴으로 일렁이는 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열 앞에, 삼가 머리를 숙여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힘든 사경을 하는 연유는, 일종의 내 나름의 기도의 방편이다. 기도는 나를 일신시키는 작업이며, 내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순간을 아낌없이 소진하려는 지순한 내면 성찰의 길이다. 이 복이 작은 청복일까. 이 ‘소소한 행복’이 나를 지탱했기에, 엄동설한 휘몰아치는 혹한을 감내했으리. 아니 헐벗은 자의 체온을 감지했고, 나를 감쌌던 미운털 벗을 수 있었으리. 그 쓰린 상처가 아물어 아주 단단한 꽃과 향기를 밀어낼 수 있었으리.땅바닥에 내던져진 저 물고기 신세가 되기 전에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지만 정녕히 관하면 미묘한 그놈, ‘마음자리’가 밝고 밝은 빈방같이, 잃어버린 나를 찾아오는 날이 있다고, 이 말과 문자를 넘는 향기가 바로,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듯 우리는 스스로가 걸머진 말 못 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오늘도 방황의 연속선을 벗어날 줄 모른다. 이 삶의 괴로움을 안기는 육신과 재물, 명예와 영화는 마음의 풍선이 허망한 꽃을 쫓다 괴멸하는 불꽃놀이다. 그놈을 한 움큼 쥐었다 해도, 결코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을 놈. 새벽이슬이 햇살에 녹듯, 시절 인연이 다하면 그놈들도 번개처럼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는 법. 이렇듯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간다.장자도 「응제왕」 에서 소소한 행복을 이렇게 설명하신다..“이름의 시체가 되지 말며(무위명시, 無爲名尸), 술지의 창고가 되지 말라(무위모부, 無爲謀府). 시비를 짓는 세상일을 맡지 말며(무위사임, 無爲事任). 지식을 파는 스승이 되지 말라(무위지주, 無爲知主).”하늘이 주신 목숨에 항시 감사할 뿐, 강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헐떡거리는 원숭이처럼 되지 말란다. 항시 마음을 거울과 같이 쓰는 법을 새기란다(용심약경, 用心若鏡). 세상사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맞이하란다. 그렇게 살 때 오롯하게 자신을 상처 없이 지키는 비법이란다. 이렇듯 집착은 그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묘한 마음이 짓는 허망한 꽃들의 반란이란다.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너무도 극명하게 가른다. 분별하는 짓거리가 우리네 삶의 일상다반사다. 아니 권모술수가 선량한 장삼이사를 능멸하는 인간사 말세다. 문 대통령이 여생을 한적한 사저에서 보내려고 귀향했다. 물론 그도 인간인 지라 완벽한 대통령직을 수행하진 못했다. 그러나 나름 국민의 존경을 받은 분이다. 그러나 일부 세력은 사력을 다해서 증오를 일삼고 있다. 그가 간첩이면 대한민국의 반은 간첩 방조자다. 하는 짓거리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점입가경의 천박한 자태를 서슴없이 범하고 있다. 간첩은 남의 주장은 갈아엎고 제 주장만 옳다고 하는 짓이 아닐까. 국론을 증오로 몰아가는 파렴치들이 진짜 간첩이 아닐까. 이 몰상식한 방법으론 분열만 가중할 뿐이다. 귀향하는 전직 대통령의 소소한 행복을 증오하려는 작태는 국민의 이름으로 응당 응징함이, 대한민국의 국격이다. 증오를 증오로 푸는 것은 사람의 짓거리가 아니다. 부처님은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 이르러 길상초를 깔고 앉았다. 깊은 선정에 들기 전에 이렇게 결심하셨다. ‘내가 정각을 달성할 수 없다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때 하늘의 악마가 석가모니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이것을 감지하고도 석가모니는 추호의 미동도 없었다. 마침내 악마는 사력을 다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비호같이 날아가 갑옷이라도 뚫을 듯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런데 화살이 석가모니의 근처에 이르자, 모두가 꽃비로 바뀌고 말았다.오늘날 우리네 모습은 갈수록 깊이를 잴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아는 만큼 보듬고 어깨동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증오의 강물이 깊어져만 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걷고 있는 꽃처럼 만발한 첨단 문명 세상이 낳은 말세 중생의 현주소다. 증오와 시기로 쏜 화살이 그대로 나의 가슴에 꽂히면, 그것은 화살을 당긴 상대의 잘못도 있지만, 세상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당신의 어리석은 화살도 당신을 몰락시키는 일등 공신일 것이다.세상의 주인공은 나다. 내가 있기에 하늘의 뜻에 따라 빛과 생명으로 존재하고자 노력하는 것 아닐까. 주인공은 남을 탓하지 않는다. 세상의 ‘복’과 ‘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복 속에 화가 있을 수도 있고, 재앙 속에 복이 얼마든지 내재해 있을 수 있는 것이 하늘의 섭리다. 물은 컵에 담긴다고 컵을 원망하지 않고 찻잔 속에 담긴다고 고마워할 줄 모른다.길은 내가 가는 길만 길이 아니다. 피는 꽃만 이쁘다고 호들갑 떨지 말자. 인생사 새옹지마요, 일장춘몽 아니던가. 사람만 공해를 일으킨다. 자연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하늘의 도리는 하나다. 잣대로 재고 까불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사람뿐이다.일상의 소소한 행복은, 높은 곳에 있을까. 아닐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부끄럼이 아니다. 단지 불편할 뿐, 실망과 좌절하지 말자. 불굴의 노력으로 성심을 다하고, 주어진 오늘을 더욱 좋은 생각과 보람찬 모습으로 일신, 일신하면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선한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인간사 참 주인공으로 사는 길이 아닐까.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16 22:06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16 21:49

배우의 얼굴이 영화의 시퀀스를 지배하는 영화가 있다. 내공이 약한 감독은 함부로 섭외했다가는 배우한테 주도권을 뺏기기 십상이다. 그래서 때로는 감독의 허접한 연출을 배우가 감당하는 영화들이 있다. 때로는 알프레도 히치콕이나 오즈 야스지로처럼 배우를 미장센의 일부나 소품처럼 다루는 감독들도 있다. 순수한 편집과 미장센을 통해 서사를 만드는 히치콕이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어쩌면 영화의 정체성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배우의 폭발하는 연기와 아우라에 의존하는 영화들은 연극 장르의 이종교배의 산물처럼 보일 수 있다. 송강호나 최민식 그리고 호아퀸 피닉스나 케이트 블란쳇과 함께 하는 감독들은 허술하게 합작을 했다가는 무너지기 쉽다.<테이크 쉘터>는 마이클 쉐넌의 얼굴 하나만으로도 족한 영화다. 불안을 표현하는 데 아주 최적화 된 얼굴이다. 폭풍 토네이도가 올 거 같은 예감에 휩싸인 아버지 마이클은 밤마다 가위눌림을 당한다. 급기야는 빚을 내어 장비를 사고 집 마당에 방공호를 판다. 더구나 믿음직스러움을 보여주는 큰키는 아무런 방어막이 안되고 역설적으로 마이클 쉐넌의 큰 몸집을 껴안아주는 건 가녀린 체구의 쉐넌의 아내다. 몸집이 사람을 압도하게 하지만 반면에 마음의 내공이 사람을 크게 확장하기도 한다. ‘작은 거인’은 이런 상황에 잘 어울리는 수식어다. 케이트 블란쳇의 <블루 자스민>은 갑작스런 몰락에 충격을 받아 혼자 중얼거리는 중년여인의 혼란을 잘 묘사한 블랙코미디다. 우디 앨런은 여인의 허영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잔인하게 몰락으로 내몰면서도 애도보다는 유머를 선택한다. 그리고 블란쳇의 얼굴은 머피의 법칙처럼 인생이 엉크러질 때마다 얼굴은 점점 더 붉은 빛을 띠어간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초기의 따뜻한 블랙 유머에서 후기로 갈수록 날카롭고 차가운 블랙 유머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똥파리>는 이성복의 싯구를 생각나게 하는 영화다. ‘아버지, 당신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이 씹새끼야-’ 권위만 있고 자비가 없는 아버지를 가부장으로 모셨던 4-50대 이상이라면 공감할 만한 문장이다. 더구나 정권마저도 근본없는 아버지들이 권력을 잡고 시민들을 의붓자식처럼 학대하곤 했다. 기존의 가부장제에 대한 이해가 전제 되지 않으면 영화 <똥파리>에서 자주 보게 되는 학대 받는 아버지 장면은 불편해 보인다. 더구나 주인공이 아버지를 학대하는 이유도 친절하게 알려주질 않는다. 관객은 단지 추측할 뿐이다. 관객을 설득하지 못하면 영화는 패륜을 조장하는 영화로 끝났을 텐데 다행히 감독 양익준의 얼굴이 관객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영화 포스터에 주인공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과거에 대한 알리바이가 필요없이 공정하지 못하고 따뜻하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자비 없이 밀고 나갈테니 관객들은 감안하고 관람하라는 예고다. 배우의 얼굴은 선전포고이면서 영화의 프리퀄 역할을 한다.  호아퀸 피닉스는 마음을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특히 <더 마스터>는 불가해한 인간의 내면을 가진 부조리한 인간을 묘사하는 영화의 주제에 호아퀸 피닉스의 얼굴이 잘 어울린다. 영화 <조커>에서도 호아퀸은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의 얼굴을 내면을 표현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남자>는 시종 무거운 얼굴로 영화를 끌고 나간다. 하지만 <그녀>의 호아퀸은 반전이다. 표정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배우의 얼굴은 사라지고 말랑말랑한 훈남으로 바뀌었다. 영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는 개봉하고 난 후 1년 뒤에 보게 된 영화다. 일단 제목이 지나치게 거칠고 직설적이어서 피했던 영화였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영화에 대한 소문은 내 선입관과 달랐다. 영화 포스터는 여자 주인공이 맨 앞에 있고 베니치오 델토로는 뒤에 자리 잡고 있다. 포스터와 인물 구도와 달리 영화는 뒤에 있던 베니치오 델토로가 마지막에는 앞으로 나오게 되는 영화다. 늑대들이 판치는 약육강식의 도시를 묘사한 영화는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관객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영화다. 베니치오 델토로의 깊은 주름은 늑대들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어 수단처럼 보인다. 송강호는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두 개의 클로즈업으로 존재감을 과시 했다. 박해일의 멱살을 잡고 ‘밥은 먹고 다니냐’ 대사를 하던 얼굴은 깊은 연민과 분노가 겹쳐진 감정을 표현했다면 마지막 클로즈업 장면은 무기력한 공권력의 공백으로 전개된 연쇄살인의 공포와 허망함 그리고 풀잎처럼 쓰러져간 희생자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특히 크기가 일정하지 않는 짝눈마저 비장한 미장센을 구현하는 데 한몫한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10 11:50

코로나 장기화로 인한 세계 각국의 돈 풀기 영향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분쟁 때문에 휘발유 및 경유 가격폭등부터 시작하여 각종 원재료 가격이 폭등하는 인플레이션 현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특히나 우크라이나발 밀 가격 폭등을 보면서 식량안보에 관하여 뜨거운 관심이 쏟아진다. 사실 밀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작물은 콩이다. 콩(대두)의 경우 중국에서 돼지사료로 주로 쓰인다. 이 때문에 콩가격의 상승은 돼지고기 가격인상에도 영향을 많이 끼치며 서민물가를 폭등시킬 수 있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비록 우리나라 콩 가격이 세계 시장가격에 영향을 많이 끼치지는 않는다만 우리는 자국 농산물을 보호할 의무, 신뢰 있고 건강한 농산물을 섭취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생산해야 한다.  콩과 관련하여 현재 우리나라 콩 자급률은 7%대로 나머지 93%는 수입이다. 2027년까지 37%를 목표로 자급률을 끌어올린다는 정책이 있기는 하지만 수입산과의 가격차이 때문에 과연 정부가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 자급률을 끌어 올려줄지는 의문이다. 콩을 적극적으로 재배하면 큰 보조금을 준다는 역대 정부를 봐왔지만 결국에 보조는 없었다. 최근 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다른 이유는 대체육 시장 때문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대체육 시장규모는 약 53억 달러 이상 규모로 추산된다고 한다. 현재 육류시장을 보면 사육사가 사용하는 사료나 건초 등이 달라 고기마다 육질, 맛이 다르며 소나 돼지가 내뿜는 메탄가스는 환경오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채식주의자 수의 비약적인 증가 추세 등의 이유로 대체육 시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가고 있다. 대체육은 일정한 맛품질을 보장하고 환경오염의 원인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콩농사의 미래는 스마트팜을 이용한 저노동, 대량생산을 통해 값싼 콩을 많이 만들어 대체육이란 고부가 가치상품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 미래 농업의 중심에 서있을 콩은 경제적인 이익 뿐만 아니라 농업인구수 및 중산층의 증가 효과를 가져다 주는 매력적인 농작물이 될 것이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10 11:44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10 11:36

누구나 꽃 같은 시절이 있다. 정지용문학관에 들렀더니 생가의 낮은 담장 밑으로 키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낮 달맞이 꽃, 이름도 어여쁘고 자태도 얌전하다. 품고 있는 색도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한 분홍빛을 띠고 있어서 더 고와 보인다. 정화순 어머니도 그런 분이셨다.■ 거짓말, 저 열아홉 살이에요“열아홉 살이에요”시집가서 이웃 형님들이 몇 살이냐 물으면 열아홉 살 이라고 거짓말을 줄곧 했다.열다섯 살에 시집왔다고 말하기가 너무 창피했다. 입하나 덜겠다고 오라버니가 보낸 시집이라 더군다나 키 작은 내가 열다섯 살 때는 언뜻 보면 열 살짜리 계집아이로 밖에 안 보였다. 그런데 시집을 간다니 더군다나 신랑은 덩치가 산만했다. 초례상에서 나는 창피하기만 해서 눈을 들 수가 없었다.첫날밤에는 신랑이 옆에만 오면 엉엉 울어대느라 새 신랑도 어이가 없어서 우리는 첫날밤도 결혼하고 여섯 밤을 지난 후에 치렀다. 남편이 점잖은 양반이라 나를 애기처럼 생각하고 존중해주었다. 군대 생활 중 휴가 나와서 결혼식을 하게 되어 휴가 마지막 날 나는 남편의 여자가 되었다.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데면데면 하다가 남편이 군대로 복귀 하는 날 어찌나 서운한지 마을 어귀까지 쫓아가면서 울고 또 울었다.남편을 보내는 마음이 아니라 내 울타리가 되어줄 큰 오라버니가 떠나는 마음이었다.경기도 연천으로 군복무를 하러 간 남편을 보내고 나는 시집에 홀로 남았다.■ 아 가여워라, 가련한 생태계에 갇힌 여자들 이제는 헛웃음만 나오는 시집살이 또 시집살이.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가 더 얄밉다고 했나. 고추보다 더 매운 건 시누이 시집살이였다. 남편은 위로 누나가 셋, 아래로 여동생이 둘이었다. 같은 여자인데 어쩌면 그리도 매정한지...내 등에 누에를 넣는 건 예삿일이고 얼음 깨고 빨래해서 널어놓으면 숮검댕이를 마른 옷에 묻혀놓기가 다반사였다.옆 동네로 시집간 시누이는 본인도 시집살이를 하면서 나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였다.앙갚음을 나에게 하듯이...우리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대물림하고, 다시 시어머니가 우리에게 시집살이를 대물림하는 가련한 생태계에서 여자들은 살아왔다. 밭농사와 잠실을 하던 시댁이라 일거리가 너무 많았다.잠자고 있으면 등 뒤에서 뭔가 꼬물꼬물 엉겨 붙는 느낌이 든다. 누에가 기어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까무라치게 놀랐지만 나중에는 귀여운 녀석을 손에 살며시 잡고 놓아주었다. ■ 고단한 삶속에 한줄기 빛, 다정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하루 종일 새벽부터 집안 살림에 막내 시누 업고 우물물 길어오고 밭농사에 누에까지..작은 몸으로 무쇠처럼 일만 했다. 삶이 뭔지 인생이 뭔지 한순간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내 삶에 유일한 희망은 시할머니였다. 시할머니도 나와 같은 고단한 시절을 분명히 보냈던 분인데 나를 예뻐하시고 귀하게 대접해주셨다.항상 ‘우리 예쁜 아가야’ 라고 불러주셨다. 밥상에서 김치 한 젓가락이라도 꼭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셨다. 그게 할머니의 마음이었다. 시할머니가 저승으로 떠나시던 날, 새벽 4시면 일어나시던 할머니가 기척이 없어서 방에 들어가 보니 주무시면서 이승을 떠나셨다.유일한 나의 희망이던 할머니 상여 뒤를 따르면서 피를 토하듯이 울었다. 다시 남편이 제대를 하고 나의 희망이 되었다. 듬직한 사람이라 식구들 몰래몰래 나를 안아주고 손을 잡아 주었다. 고단하고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던 건 남편이 꼭 잡아준 그 손이었다. 내가 그렇게 힘을 얻어서 나는 사람들을 부를 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꼭 존댓말을 하고 손을 꼭 잡아준다. 스무 살 나를 붙잡아준 그 힘을 누군가에게 꼭 전하고 싶다.6남매를 낳고 허리띠 졸라매면서 여느 여자들과 비슷한 인생길을 걸었다. 살림은 넉넉지 않았지만 듬직한 남편 만나서 마음만은 호강했다. 남편은 농사를 나에게 맡기고 청주로 나가 인쇄업을 했다. 나는 이원에 살고 남편만 청주로 나가서 먼저 자리를 잡았다. 요즘 여자들이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말 부부 아니 월말 부부를 나는 50년 전부터 했다고 며느리들에게 웃으면서 얘기하곤 한다.없이 살아도 정이 좋아야 한다. 여자들은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눈빛 하나면 고단한 일상을 다 잊을 수 있다. 어디 여자뿐일까, 남자도 마찬가지다. ■ 인생에 정답은 없다우리들은 80년 세월 속에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것들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서로 아껴주는 마음만 있다면 뭐든 헤쳐 나갈 수 있다. 우리 부부가 아무리 다정해도 우리 6남매 중 일류대 나오고 가장 넉넉한 아들이 이혼을 했다. 처음에는 청천벽력 같아서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고 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니 아들도 큰 사업 하면서 사회활동 하느라 집안 건사 안하고 오히려 며느리를 존중하지 않았다. 며느리도 사람인지라 20년 동안 외로웠고 남은 시간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우리는 둘의 의견을 존중했고 지금은 서로 각자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인생에 정답이 없어서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다. 숙제를 잘 풀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인생과 타협하는 방법이다. 나이드니 몸은 기력이 없어졌지만 길이 보인다. 간간이 30여년 써온 일기장을 넘겨보면 그 안에 이미 길이 나 있었다. 눈이 침침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 기쁨이 있다. 나이를 먹어야 볼 수 있는 그것! 그래서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든다. 남은 여생은 그저 자애로운 할머니로만 살 것이다. 뜻대로 되어야 할텐데...

주민기자 | 김재희 작가 | 2022-06-03 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