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추적거리던 비에 바람까지 가세했다. 소리가 제법 요란스럽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길래 봄비 다운 봄비를 기대했는데 저녁이 되면서 기온까지 뚝 떨어졌다. 추위에 떨고 있는 홍매화가 측은지심마저 일으킨다. 부지런한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시나브로 번져오는 봄기운에 들떠있었던 내가 머쓱하다. 빠르게 올라오던 꽃소식도 그 걸음걸이가 더뎌지겠다. 그렇다 해도 이젠 바야흐로 봄이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개나리 진달래는 필 테고 목련도 우아한 자테를 한껏 뽐낼 것이다. 모두가 그렇듯 나 역시 간절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려 왔다. 설레는 마음은 소풍날 받아놓은 아이와 다르지 않다.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이 어디론가 훌훌 날아버릴까 겁이 난다. 묵직한 돌멩이라도 하나 매달아 두어야 할까 보다.지난해 가을, 단지 옆 텃밭을 분양한다는 공고가 아파트 게시판에 나붙었다. 오며가며 눈독 들이던 참이라 한걸음에 달려가서 신청했다. 열 평 남짓한 땅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겨우내 부자가 된 듯 뿌듯했다. 콩밥을 좋아하니 강낭콩 한 두령은 꼭 심어야 할 테고 아욱, 상추, 방울토마토, 부추, 파 등의 채소를 고루고루 심으려 한다. 어릴 적 달짝지근한 옥수수 대궁을 씹던 기억으로 그것도 심어 볼 양으로 한쪽 구석에 자리까지 정해 놓았다. 날이 풀리기도 전에 흙을 고르고 거름까지 해두었다. 이제 씨앗만 넣으면 된다. 호미 한 자루면 충분할 작은 텃밭 가꾸는 일에 ‘농사’라는 말을 붙이니 농부로 살았던 오래 전의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아릿한 추억들은 생각만으로도 눈이 젖는다. 다시는 오지 않을 청춘의 눈부심과 놓쳐버린 것들의 안타까움이 회한으로 남아서인지 모른다. 온 나라를 비탄에 빠지게 했던 외환위기,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그 격랑을 피해 계획에도 없던 산촌생활을 한 적이 있다. 연고도 없는 곳에 농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젊은 우리의 귀농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말도 많았단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시절이 좋아질 때까지 세월이나 낚아보자고 시작한 일이었다. 친구들은 낭만적인 전원생활인 줄알고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하늘 아래 첫 동네라 할 만큼 오지였던 그곳은 당연한 듯 누리던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으로 먹먹한 날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지나갈 일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걸 내려놓으니 세상이 다시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소박한 인심은 상처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마운 사람들 중 유독 더 그리운 분이 계시다. 몇 집 안 되는 마을에 유일한 이웃이었던 은행나무 집 할머니. 특유의 유쾌함으로 조용한 산골마을을 사람 사는 동네로 만드는 재주가 있으신 분, 구구절절 마을의 전설과 집집마다의 살림규모까지 소소한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뼈를 늘려가며 들려주신 이야기들로 잃었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조력자를 자청하시며 마을 사람과 잘 지내는 법까지 넌지시 알려주시던 그분은 부모님만큼 든든했다.오는 걸음이 더뎌서 더욱 반가운 산촌의 봄, 눈 녹인 물로 골짜기가 소란스러워지면 묵언수행 하는 수도승처럼 침묵으로 일관하던 겨울 숲이 파르르 깨어난다. 그곳의 봄은 연둣빛으로 번져가는 산을 오르는 일로부터 시작이다.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 많던 나는 나물하러 산에 가시는 할머니를 꼭 따라붙었다. 처음 하는 일이 신기해서 위험한 줄도 모르고 나대는 내가 귀찮기도 하셨으련만 취나물과 고사리는 어디에 많고 머윗대는 어느 골짜기 것이 실하다고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혼자만 알고 다니는 곳이라며 두릅과 더덕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기도 하셨다. 그분 덕분에 가짓수 많은 산나물 이름들을 다 외울 수 있었고 먹을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가릴 줄 알게 되었다. 하찮게 여겼던 들꽃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곤충 한 마리의 생명도 귀히 여기게 되었다. 자연과 더불어 지내면서 생각의 깊이가 달라졌다. 서너 번의 봄을 더 보내고 염원하던 도시로의 귀환을 서두르던 날, 진심으로 축하해 주시던 그분과의 인연은 그 후로도 몇 년간 이어졌다. 휴가 때면 찾아가 신세를 지기도 했고 그곳의 농산물을 도시 사람들과 직거래 할 수 있는 다리가 되어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안부조차 모르고 지낸지도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다. 알아보려면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그간의 세월이 있어서 행여라도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게 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사 가던 첫 해 땅을 놀릴 수가 없어서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논농사를 시작했다. 못자리를 하고 모를 내는 등의 큰일은 남에게 맡기면 되지만 여든여덟 번의 손길과 일곱 근의 땀이 들어가야 쌀이 된다는 벼농사는 초보 농군인 우리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언제쯤 비료를 주고, 얼만큼의 논물을 맞춰야 하는지, 논둑의 풀은 왜 그리 빨리 자라는지, 병충해는 왜 또 그렇게 극성을 부리는지……. 그해 가을엔 큰 태풍도 있었다. 다 지은 농사 망칠까봐 가슴을 졸이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해마다 부모님께서 보내주시던 쌀이 부모님의 땀과 눈물로 얻어진 걸 모르고 받아만 먹었던 게 얼마나 죄송스러웠는지 모른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아직도 그 고마움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론 밥 한 톨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은 첫 농사가 농사를 평생 업으로 삼으시는 분들보다 직황이 좋았다. 수확한 곡식을 지인들과 나누며 흐뭇했던 기억들, 돌아보면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복숭아가 특산물인 고장답게 다랑이 논과 밭, 경사가 심한 산비탈까지 복숭아 나무로 빈틈이 없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수채화를 그린 듯 골짜기마다 흐드러진 복사꽃의 향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했다. 가히 무릉도원이라 할 만 했다. 조팝나무 꽃잎이 눈처럼 날리고, 산 벚꽃이 아련하게 피어오르던 그곳을, 초를 재듯 일정하게 울어대던 뻐꾸기 소리를 난 아직 잊지 못한다. 내 마음의 고향, 그곳에 가고 싶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 사월의 봄에 머물고 싶다. 우리가 심었던 모과나무, 석류나무가 얼마나 자랐는지, 집 앞으로 휘돌던 냇물은 아직 수정같이 맑은지, 여울목에 줄낚시를 띄워놓으면 파라미가 촘촘히 걸리곤 했던,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즐거움을 낭만이라 여겼다. 여름 한철을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던 우리처럼 달콤한 낭만을 찾는 사람이 요즘도 있는지 궁금하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24 13:31
이번 달부터 우리의 일상을 넘어 인생을 괴롭히고 건강한 100세 시대를 위협하는 허리/엉치/골반 통증(이하 허리통증)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1. 허리통증의 증상대부분의 허리통증 환우분들은 다음의 질문에 아래와 같은 증상들을 답하실 겁니다.1) 언제 아프세요? 뭐하실 때 아프세요?-허리를 구부렸다 펼 때, 앉았다 일어날 때, 누웠다 일어날 때, 돌아누울 때, 차에 타고 내릴 때-허리를 구부릴 때, 바닥에 앉아 있을 때, 쪼그려 앉아 있을 때, 장거리 운전할 때2) 어떻게 아프세요?-시큰하다, 뻐근하다, 시다, 맞춘다, 시렵다.
의견 | 옥천신문 | 2022-06-17 11:31
“나 특별한 얘기도 없는데...” 전화기 너머로 말끝을 흐리셨지만 1층까지 마중 나오신 어머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어머니의 반달 같은 눈웃음에 덩달아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스크가 원(怨)이로다.“나 작년까지는 펄펄 날라 다녔는데...” 하루하루 지나는 시간이 너무 귀하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셨다. 노인 일자리활동과 포크 댄스로 건강을 지키시고 실버기자단이라 시간도 유익하게 쓰고 계셨다. 去頭截尾(거두절미), 멋진 어머니...옥천읍 가화리 홍순자, 81세■ 결핍투성이던 유년, 어린 눈에 그 넓던 신작로는 그저 좁은 골목길이더라충북 오송이 고향인 나는 지금을 ‘꿈같은 세상’이라고 줄곧 말한다. 고향마을은 산도 멀어서 나무하거나 나물 뜯으러 가려면 20리를 걸어야했다. 남정네들은 큰 숨을 몰아서 산에 올라 지게에 나뭇짐 얹어서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갈 고통을 감수하면서 산비탈을 내려왔다. 여인네들도 두 말하면 뭐할까, 헌신은 당연한 것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기회가 단절되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다들 악!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그렇게 살아왔다. 오송 강외 초등학교를 나와서 청주여중을 다녔다. 공부하고 싶은 열망은 많았지만 형편이 안 되니 중학교에 다닌 것만도 친정어머니 덕분이었다. 친정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안가셨지만 총명하셔서 글도 읽고 편지도 쓰셨다. 어머니 덕분에 교복이라도 입어보았다. 나를 공부시켜준 우리 어머니는 내 평생 은인이다. 아버지는 뭐가 그리 급하셨나? 내 나이 아홉 살에 돌아가셨다. 없는 살림에 남편의 부재로 어머니가 짊어져야 할 짐은 굳이 말로 드러내기도 가슴이 시리다. 당시만 해도 돌림병이나 홍역이 많아서 동네를 한번 휩쓸고 가면 온 식구가 줄줄이 꽃상여를 타고 선산에 묻히기도 했다. 동네에 곡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시골 산자락에 유난히 애기 무덤이 많았던 슬픈 기억이 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에 그 길을 지나려면 뒷목이 쭈뼛거려 오금이 저렸다.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아 두려움으로 꽉 찼다.어렸을 때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면 할머니께서는 추운 겨울날에도 팬티만 입혀서 부엌 아궁 앞에 세우셨다. 바가지에 굵은 소금을 담아 한줌씩 온 몸에다 뿌려 주시고는 부엌 빗자루로 쓱쓱 쓸어내려 주셨다. 아이고, 쓰리고 아파라.“철모르는 아무개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합니다. 삼신님께서 깨끗이 낫게 해주십시요”주문처럼 말씀하시면 2~3일 후에 언제 낫는 지도 모르게 깨끗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미신 같지만 그 시절엔 믿고 살았다. 눈으로 보았으니까. 학질이나 돌림병에 걸려서 열이 높아 사경을 헤매도 용한 할머니를 모셔 갔다. 마을에 돌림병이 생기면 할머니도 바쁘셨다.이집 저집 불려 다니시며 돌팔이 의사 역할을 하셨다.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할머니는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기도 하셨다. 돌잔치, 백일잔치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돌림병에서 목숨 건졌다고 잔치를 벌였다. 나도 학질이 걸려서 학교도 두 살 더 먹어서 들어갔다. 결핍투성이었던 유년의 기억은 우리 동년배들은 니나 내나 다들 마찬가지다. ■ 몸은 고단했지만 야무진 큰 애기, 순자중학교 졸업하고 엄마랑 동생하고 신탄진 외갓집으로 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막내 동생이 철도국에 다녔는데 신탄읍내서 잘 살았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는 친척동생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살림도 도왔다. 상 할머니가 무서웠지만 어린 마음에도 잘 보이고 싶어 눈치도 빠르고 뭐든 잘했다.할머니가 예뻐하셔서 외갓집에서의 생활은 마음은 그리 고달프지 않았다. 신탄진역은 노리까에(환승)역이라 기차가 한 시간정도 멈췄다가 갔다. 손님들이 내려서 시장보고 끼니도 채우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이면 많은 빨래를 하느라 방망이로 얼음을 탕탕 깨고 양잿물로 미리 애빨래를 한다. 양잿물은 짚풀을 떼서 만들었는데 비누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얼음물을 깨고 빨래를 하려니 손은 마디마디 아렸고 냉기가 핏줄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애꿎은 빨래 방망이만 연신 두들겨 댔다. 서울제약 근무 시절■ 원기소 만들던 서울제약의 또순이 외갓집에 기거하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방직회사에 다녔다가 제약회사 채용 공고를 보았다. 서울 올라 갈 때는 촌티를 안내려고 핑크색 유똥 치마에 저고리 해 입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우선 서울살이는 남의 집 일을 해주면서 시작되었다.잘 사는 집도 석탄을 떼서 난방을 하느라 얼굴만 뽀얗고 다들 새카맸다.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자취하고 마침 제약회사 공고가 났다. 당시는 유한양행, 서울제약 (서울 약품 공업사), 삼일제약등 제약회사가 세 곳 이었다. 나는 서울제약(서울 약품 공업사)에 입사를 했다. 서울제약은 그 유명한 원기소, 비오비타, 러미라를 만드는 회사였다. 나는 포장 라인에서 근무했다. 다들 형광들 불빛아래서 밤이면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서 손등이며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졸음을 참아냈다. 가족을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어머니, 아내, 딸, 언니, 누나들이었다.그녀들의 헌신이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아서 돈을 벌면서 야간에 고등학교에 다녔다. 편물이 유행할 때라 편물도 짜면서 공부를 했다. 20대 나의 관심은 온통 돈이었다. 돈을 벌어서 집안도 일으키고 엄마도 돕고 싶었다.1967년에 남편을 만나 아들 셋을 낳고 1973년도에 옥천으로 내려왔다. 가난 속에서 철이 들어서 나는 더 야무지게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우리 영감님의 할머니께서 남편 어릴 때 팔베개를 해주시면서, “평득아 너는 크면 마누라 덕에 잘 살거다” 라고 줄곧 남편 귀에 대고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말대로 됐는지 우리는 인생의 폭풍우와 거친 파도를 무사히 넘기고 자녀들도 다들 화목하게 잘 살고 있다.큰집은 꼭 챙기라고 할머니가 끼고 가르쳐서 남편이 사촌 시동생한테 쌀 한가마니씩을 나눠줬는데 나중에 시동생 말이 우리 남편이 그 집 마당에 탕! 소리를 내며 무거운 쌀가마니를 내려놓을 때 그렇게 고마웠단다. 사촌 동서는 그 이후로 농사짓고 수확하자마자 쌀, 된장, 고추장, 참깨 볶아서 참기름, 들기름 짜서 바리바리 택배를 보낸다.보은을 한다고 나를 형님이라고 깍듯이 대우를 하는 동서에게 나는 고마워서 돈이라도 보내려면 “형님, 돈 주시려면 우리 인연 끊어요.”라며 단박에 거절한다. 나는 동서의 그 진심에 울컥한다. 요즘이 각박한 세상이라고 한탄하지만 우리 동서를 보면 마음이 그냥 따뜻해진다. 작은 것에 서로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남편은 결혼할 때 나에게 “당신 밥은 안 굶길게” 라더니 그 약속을 지켰다. 아무것도 없어 빈털터리였던 남편은 고철을 취급했다. 서울 신길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전세금 5만원이 없어서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다들 어렵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림이 늘어나는 기쁨을 맛보면서 견고한 세월이 쌓였다. 그 사이 우리 세 아들은 쑥쑥 자랐고 우리 부부의 연륜도 깊어졌다.남편은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마을 재건에 앞장서서 새마을 지도자상을 받았다.■ 우리 부부의 용기와 도전이 낳은 희망의 결실들 고철 취급할 때 인천 대한제철에 납품을 했다. 당시는 현찰이 아니라 주로 어음을 발행했다. 보통 6개월에서 1년 내에 돈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결국 부도가 나는 불상사가 생겼다. 꼬물꼬물 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살길이 막막해서 시골에서 다시 도전해보려는 의지로 막내 손만 잡고 중화실업 동네 신대로 와서 은성산업 제사 공장에 다녔다. 그나마 그것도 친척 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은성산업과 중화실업에는 아가씨들이 많았는데 야간근무하고 퇴근하는 아가씨들에게 근방의 청년들이 못된 짓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했다. 남편이 시골을 재건해보려는 마음으로 그 아가씨들과 청년들을 모아 4H를 조직했다. 토끼를 사육해서 팔게 하고 포프라 나무를 울창하게 심어서 산림청장님이 상금을 주고 가는 일도 있었다.다들 협력해서 시골 마을을 살려보자는 의지들이 생겨서 나는 동네 주민들의 아이들을 따로 챙겼다. 농번기 때는 동네 아이들을 은행나무 밑에 앉혀놓고 옷도 똑같이 입혀 율동도 가르쳤다. 주민들이 아이들 걱정 없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어서 탁아소의 전신처럼 시작되었다.그 당시의 청년들은 남편을 지도자님! 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같이 나이 들어 간간이 머리 희끗희끗한 분들이 남편에게 지도자님! 하면서 반가워하면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회억에 젖기도 한다. 우리도 형편이 넉넉해서 했던 일이 아니라서 부족했지만 더 잘살게 될 거라는 믿음하나로 버티면서 다들 함께 했다. 여든이 넘은 우리에게 그런 불같은 청춘이 있었다니!나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나이 들어도 사그라들지 않아서 8비트 컴퓨터 시절부터 컴퓨터를 배웠다. 1980년대인가 수십 년 전이다. 정우산업에서 컴퓨터를 가르쳤는데 무료라 친구들과 가서 배우고 복지관에서 또 배웠다.유난스러운 할미가 아니라 나이 들어도 더 배워서 유익하게 잘 쓰고 싶은 갈망이 여전했다. 인터넷도 배우고 이메일 주소도 만들면서 뭐든 열심히 배웠다. 처음에는 다 어설펐지만 시간이 쌓이고 연륜이 생기면서 일구어 나갔다. 나이든 우리들이 세월 속에서 쌓은 경륜은 무시할 수 없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한 채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연륜과 지혜는 살아 있는 인문학 책이다. ■ 당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신식 할머니 아파트 부녀회장 할 때는 교장선생님들과 학생들 모아놓고 아이들에게 촌수를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은 촌수가 뭔지 모른다.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이는 가엽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키워주는 교육이었다.나는 복지관에서 동년배 상담을 한다. 독거노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도 묻고 집으로 배달된 반찬에 대한 의견도 듣는다. 당근마켓 어플을 깔아서 중고 물품들도 올려서 판매를 한다. 어느 날 장야리에서 젊은 새댁이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물건을 가져갔다. 뒷모습을 보면서 ‘저 새댁도 나처럼 아끼고 열심히 사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녀를 마음 속으로 응원했다. ■ 등 따시고 배부른 지금, 환경의 역습을 걱정하는 ‘어른’나는 3형제를 두었는데 손주가 다섯 명이다. 다들 자기 몫을 하고 잘 살고 있어서 내 노년의 기쁨이며 위안이다. 걱정이라면 환경문제다. 갈수록 쌓이는 환경쓰레기에 이제는 마스크까지 매일 천만장이 넘게 버려지는데 시간이 지난다고 썩을 것도 아니며 보통 걱정이 아닐 수 없다.코로나도 걱정이지만 마스크가 쌓여가는 환경도 더 걱정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더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 자연과 환경들이 우리 삶을 역습하고 있다. 우리 인생은 끝까지 숙제를 안고 간다. 지혜롭게 해결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 더불어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먼저 살아본 우리의 역할이다.그런 일이라면 앞장설 준비가 됐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궁핍한 시골에서 태어나 고단했지만 내 의지로 삶을 예쁘게 그려왔다. 얼기설기 얽힌 실타래 위의 무명천에 목단 꽃이 곱게 피어났다. 어여쁜 목단 꽃으로 내 인생의 자수를 마감중인 손끝이 오늘따라 더 야무지고 곱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주민기자 | 김경희 시민기자 | 2022-06-17 11:26
모두가 갈망하는 전원생활을 접고, 아파트 생활을 하니 일장일단이 있다. 전원생활은 여름철엔 새벽 자명종이 뻐꾸기 소리다. 산새 소리에 기상을 하고 두견이 울음에 취하며, 별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며 잠이 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호시절을 뒤로하고 닭장 같은 집을 빠져나와 아침 운동을 나간다. 걸음걸음 새소리, 물소리 대신 자동차 경적을 벗하며 간다. 잘 정돈된 공설운동장이 산뜻한 얼굴로 반긴다.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묵은 찌꺼기를 배설하고, 새로운 기력을 회복하는 고난의 작업이다. 한 바퀴 돌고 나면 활력이 솟는다. 땀도 비 오듯 흐른다. 돌아와 샤워하면 소소한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든다.이 맛이 운동의 묘미다. 병든 몸일수록 움직여야 그나마 하루가 보전된다.이 기분으로 창가로 가서 붓에 먹물을 흠뻑 묻힌다. 대청 창가로 펼쳐진 삼성산과 식장산의 웅장한 자태가 나를 위안해 주는 유일한 벗이다. 이렇듯 자연이 인간의 영원한 모태인 것은, 모든 것을 품되 ‘침묵의 언어’로 한결같이 자신을 주장하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는 목숨을 바쳐서 목숨을 얻은 사람이라고.”창문으로 스며드는 청렬한 기운을 머금고 붓을 잡는다. 나의 하루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사경, 병풍 작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금강경』은 병풍으로 제작하면 21폭의 대작이다. 장장 5,000자가 넘는 대광설의 설법이다. 『금강경』은 행초서로 쓰고 『반야심경』은 예서체로 쓴다. 쓰면서 심오한 뜻을 아로새기면, 가슴으로 일렁이는 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열 앞에, 삼가 머리를 숙여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힘든 사경을 하는 연유는, 일종의 내 나름의 기도의 방편이다. 기도는 나를 일신시키는 작업이며, 내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순간을 아낌없이 소진하려는 지순한 내면 성찰의 길이다. 이 복이 작은 청복일까. 이 ‘소소한 행복’이 나를 지탱했기에, 엄동설한 휘몰아치는 혹한을 감내했으리. 아니 헐벗은 자의 체온을 감지했고, 나를 감쌌던 미운털 벗을 수 있었으리. 그 쓰린 상처가 아물어 아주 단단한 꽃과 향기를 밀어낼 수 있었으리.땅바닥에 내던져진 저 물고기 신세가 되기 전에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지만 정녕히 관하면 미묘한 그놈, ‘마음자리’가 밝고 밝은 빈방같이, 잃어버린 나를 찾아오는 날이 있다고, 이 말과 문자를 넘는 향기가 바로,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듯 우리는 스스로가 걸머진 말 못 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오늘도 방황의 연속선을 벗어날 줄 모른다. 이 삶의 괴로움을 안기는 육신과 재물, 명예와 영화는 마음의 풍선이 허망한 꽃을 쫓다 괴멸하는 불꽃놀이다. 그놈을 한 움큼 쥐었다 해도, 결코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을 놈. 새벽이슬이 햇살에 녹듯, 시절 인연이 다하면 그놈들도 번개처럼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는 법. 이렇듯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간다.장자도 「응제왕」 에서 소소한 행복을 이렇게 설명하신다..“이름의 시체가 되지 말며(무위명시, 無爲名尸), 술지의 창고가 되지 말라(무위모부, 無爲謀府). 시비를 짓는 세상일을 맡지 말며(무위사임, 無爲事任). 지식을 파는 스승이 되지 말라(무위지주, 無爲知主).”하늘이 주신 목숨에 항시 감사할 뿐, 강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헐떡거리는 원숭이처럼 되지 말란다. 항시 마음을 거울과 같이 쓰는 법을 새기란다(용심약경, 用心若鏡). 세상사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맞이하란다. 그렇게 살 때 오롯하게 자신을 상처 없이 지키는 비법이란다. 이렇듯 집착은 그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묘한 마음이 짓는 허망한 꽃들의 반란이란다.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너무도 극명하게 가른다. 분별하는 짓거리가 우리네 삶의 일상다반사다. 아니 권모술수가 선량한 장삼이사를 능멸하는 인간사 말세다. 문 대통령이 여생을 한적한 사저에서 보내려고 귀향했다. 물론 그도 인간인 지라 완벽한 대통령직을 수행하진 못했다. 그러나 나름 국민의 존경을 받은 분이다. 그러나 일부 세력은 사력을 다해서 증오를 일삼고 있다. 그가 간첩이면 대한민국의 반은 간첩 방조자다. 하는 짓거리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점입가경의 천박한 자태를 서슴없이 범하고 있다. 간첩은 남의 주장은 갈아엎고 제 주장만 옳다고 하는 짓이 아닐까. 국론을 증오로 몰아가는 파렴치들이 진짜 간첩이 아닐까. 이 몰상식한 방법으론 분열만 가중할 뿐이다. 귀향하는 전직 대통령의 소소한 행복을 증오하려는 작태는 국민의 이름으로 응당 응징함이, 대한민국의 국격이다. 증오를 증오로 푸는 것은 사람의 짓거리가 아니다. 부처님은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 이르러 길상초를 깔고 앉았다. 깊은 선정에 들기 전에 이렇게 결심하셨다. ‘내가 정각을 달성할 수 없다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때 하늘의 악마가 석가모니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이것을 감지하고도 석가모니는 추호의 미동도 없었다. 마침내 악마는 사력을 다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비호같이 날아가 갑옷이라도 뚫을 듯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런데 화살이 석가모니의 근처에 이르자, 모두가 꽃비로 바뀌고 말았다.오늘날 우리네 모습은 갈수록 깊이를 잴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아는 만큼 보듬고 어깨동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증오의 강물이 깊어져만 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걷고 있는 꽃처럼 만발한 첨단 문명 세상이 낳은 말세 중생의 현주소다. 증오와 시기로 쏜 화살이 그대로 나의 가슴에 꽂히면, 그것은 화살을 당긴 상대의 잘못도 있지만, 세상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당신의 어리석은 화살도 당신을 몰락시키는 일등 공신일 것이다.세상의 주인공은 나다. 내가 있기에 하늘의 뜻에 따라 빛과 생명으로 존재하고자 노력하는 것 아닐까. 주인공은 남을 탓하지 않는다. 세상의 ‘복’과 ‘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복 속에 화가 있을 수도 있고, 재앙 속에 복이 얼마든지 내재해 있을 수 있는 것이 하늘의 섭리다. 물은 컵에 담긴다고 컵을 원망하지 않고 찻잔 속에 담긴다고 고마워할 줄 모른다.길은 내가 가는 길만 길이 아니다. 피는 꽃만 이쁘다고 호들갑 떨지 말자. 인생사 새옹지마요, 일장춘몽 아니던가. 사람만 공해를 일으킨다. 자연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하늘의 도리는 하나다. 잣대로 재고 까불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사람뿐이다.일상의 소소한 행복은, 높은 곳에 있을까. 아닐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부끄럼이 아니다. 단지 불편할 뿐, 실망과 좌절하지 말자. 불굴의 노력으로 성심을 다하고, 주어진 오늘을 더욱 좋은 생각과 보람찬 모습으로 일신, 일신하면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선한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인간사 참 주인공으로 사는 길이 아닐까.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16 22:06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16 21:49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6-10 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