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6,819건)

옥천군 동이면의 신명소인 금강해바라기가 지금 한 창입니다. 늦여름의 계절이라서  약간은  지각생이지만, 요즘 한참 예쁘게 해바라기가 귀여운 얼굴을 쳐들고 있어서, 이 곳을 지나는 이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합니다.옥천에서 10 여분, 금강유원지에서 5분 거리 이내로, 약 2천 여평의 면적인 이곳 동이면 해바라기 단지는, 동이면 적하리 18-4번지의 위치(구 경부고속국도 금강2교 근처)합니다. 동이면행정복지센터와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봄에서부터 여름 내내 땀으로 일구어 낸 모습이, 해바라기의 노란 꽃 잎과 파란 잎새에 깊이 새겨 있음을 직감합니다. 동이면주민자치위원회는 2022년 7월 20일 첫 주민총회에서 동이면 옐로우 로드 조성으로, 올목의 유채꽃밭부터 금강유원지까지 이어지는 강변, 도로와 마을 주변에 노란색과 연관된 꽃과 나무를 파종·식재하자는 "옐로우 로드 안"이 거의 만장일치로 확정하였습니다.2023년 부터 추진합니다마는 벌써 구 금강2교까지, 옐로우로드가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이렇게 아름다운 해바라기 단지를 보면서 옥천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인 정지용 님의 "해바라기씨"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해바라기 씨​해바라기 씨를 심자.담 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해바라기 씨를 심자.​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괭이가 꼬리로 다진다.​우리가 눈감고 한 밤 자고 나면이슬이 내려와 같이 자고 가고.​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햇빛이 입 맞추고 가고.​해바라기는 첫 시약시인데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고개를 아니 든다.​가만히 엿보러 왔다가소리를 깩! 지르고 간 놈이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청개고리 고놈이다.정지용 장수군 뜸봉샘에서 시작되는 금강의  맑은 물은 옥천에서 15회 U자형으로 굽이칩니다.  그 중에 하나인 이 곳 "동이면금강해바라기단지"는 금강의 맑은 물과 철봉산과 어깨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듬뿍 마신 해바라기라 그런지, 유난히도 짙은 노란색을 띠고 있습니다.정성껏 가꾼 해바라기 단지가 노랑물결로 금강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소문을 듣고 옥천, 대전, 청주 등 인근 사진작가들의 명소로 소문이 나서 아침 일찍부터 해바라기 촬영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단지 내의 많은 해바라기들이 넉넉하고 환한 모습으로 주변의 푸른산과 금강물 속에서 유난히 뽐내고 있습니다.아침 햇살을 유난히 좋아하는 해바라기 꽃들이, 잠시 외출나간 구름속에 가려진 햇님이 솟아오르기를, 애타게 긴 목을 쳐들면서 기다립니다.금강유원지로 가다가 지나치는 길에 슬며시 보고 지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차량 속에서 보는 해바라기와 직접 해바라기단지 속으로 파고 들어서 함께하는 느낌은 너무나 다릅니다.어릴적 형제자매와 해바라기 꽃밭에서 숨바꼭질하던 추억이 온몸을 감싸는 향수에 젖을 것입니다.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잠시 해바라기 속에서 함께하기에는  최고입니다. 가족, 연인, 친구 단위로 아기 해바라기와 함께하기도 하고, 때론 홀로 찾아서 유유히 흐르는 금강물을 보면서 물멍에 빠져 들기도 하고, 어깨산 자락을 보면서 산멍에 취하는 낭만을 즐길 수가 있는 곳입니다.올해 여름햇살을 듬뿍 받아서 그런지 노란색과 나뭇잎의 푸른색이 유난히도 곱습니다. 마치 애국조회가 있던 옛 시절에, 어린 초등학생들이 아침조회 시간을 기다리면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합니다.해바라기는 유독 키재기를 잘합니다. 서로 햇님을 보기 위해서 경쟁이 치열하지만, 모두 한 방향으로 마음을 묶어가면서 살아갑니다. 조화로운 경쟁사회를 보 듯 합니다.해바라기 종류도 다양합니다. 색이 연한 노란색인 이탈리안화이트, 해바라기 전체가 붉은색인 붉은색 해바라기, 씨가 크고 빨리 자라는 키다리 해바라기인 자이언트 해바라기, 아주 찐한 노란색에 키가 큰 드워프 골드 해바라기, 보라색을 띠는 보라색 해바라기, 난쟁이 해바라기 등 수없이 많습니다.이 곳의 해바라기는 키가 작은 왜성해바라기입니다.줄을 맞추어서 골을 타고 씨를 뿌렸기 때문에 사이사이에서 해바라기 감상이 가능합니다. 해바라기들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감상을 해야 합니다.키가 작은 해바라기 속에서도 유난히 노란 꽃잎을 뽐내면서, 키가 큰 모델 해바라기 들이 있습니다. 마치 왕비라도 된 듯 살랑바람에 거들먹 거리기도 하지요. 해바라기는 개성을 중시하면서 저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햇님이 구름에 가리면 가리는 대로, 여유있게 기다리면서 밝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인생의 한 수를 배웁니다.동이면은 봄에는 옥천금강수변에 유채꽃 단지를 조성하여 전국적인 명소로 부상시키고 있습니다마는, 늦여름에는 다시 멋진 해바라기 단지를 금강변에 등장시키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크게 감동입니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옥천군 동이면의 명소인 "금강해바라기 단지"를 한 번식 다녀가세요. 여름 해바라기는 씨앗이 생기기 전인 지금이 최고의 절경입니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8-05 13:34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8-05 13:14

“안녕하세요? 철행이 왔어요. ”하면서 시골 고향에 가면 오십여 가구 사는 동네를 첫 집부터 끝집까지 다 들른다. 인사 잘하는 우리 큰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는 우리 큰 아들은 8개월부터 걷기 시작하는 발발리였다. 동생을 보고는 너무 산만해서 할머니가 데리고 갔는데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녀 할머니가 따라다니다 못해 한 달도 못 있어 쫓겨온 놈이다. 말하면서부터는 엄마 아빠 이름을 묻지 않아도 말하니 동네 애들과 청년들이 재미가 있어 자꾸 물어보았다. 동네 이장 이름은 몰라도 온 동네 사람들이 내 이름은 다 알고 있었다.우리집은 점잖은 양반 그 자체다. 어른이 하룻밤을 출타하셨다 오시면 아들 다섯이 죽 서서 큰 절을 했다. 아버님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는데 미친 사람이 미친 짓 하다가도 우리 아버님 앞에서는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런 집안에서 우리 큰 아들 같은 성격이 나왔으니 저 집은 성격 개조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누구한테나 잘 따라서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손님이 오면 갈 때는 따라 나섰다. 아이 없는 새댁이 있었는데 친정이고 시댁이고 가면 따라다녔다. 남을 잘 따르기 때문에 보아 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돌 때 돌 선물로 세발 자전거를 사주었다. 누가 건드려 보지도 않고 저 혼자서 끌고 다 낡아 버렸다. 일곱 살때 정릉 시고모님 회갑에 아버님이 오셨는데 삼양동에서 정능까지 걸어와서 할아버지를 뵈었으니 할아버지 입이 귀에 걸렸다. 집에 가서 손주 자랑을 하셨단다. 그 나이에 2km 넘는 곳을 혼자 걸어왔으니 똑똑한 손자라고 자랑할 만도 했다. 일학년 때 서투른 글씨로 편지를 써서 할아버지를 감동 시켰다. 아버님은 그 해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조상 성격이 조금씩 나타나더니 청년이 되어서는 지아비와 똑같았다. “철행이가 당신과 똑같아요.” 하면 “난 개 보다는 낫다.” 합니다. 아들한테 너는 느 아버지와 똑같다 하면 나는 아버지보다는 낫다고 합니다. 무엇이 난지 나는 모르겠는데 났단다.내가 무슨 일이 있어 밖에 나가며 아버지 비위좀 잘 맞추고 있으라고 부탁을 하고 나갔다. 들어오면 둘이는 서로 삐쳐서 틀어져있다. 성격이 같으면 안 맞나 보다. 작은 아들한테 부탁하면 아버지 비위를 잘 맞춰 용동까지 챙기는데 말이다. 사춘기 때 뭘 물으면 몰라요 다. 몰라요 하고 제 방에 들어가면 끝이다. 얼마나 내가 답답했으면 큰 돌을 주워다 놓은 게 있는데 그것을 대못으로 두드려 파서 화분을 만들었을까. 남편이 물었다. 그것을 무엇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나는 말 안 하는 남편에 말 안 하는 아들 때문에 말 못하는 돌이나 두드려 팬다고 했다. 자기도 할 말이 없는지 허허 웃었다. 키 작은 것은 나를 닮고 말 안하는 것은 아비를 닮았으니 저도 사춘기 때 이런 일기를 썼다. “나는 흉도 많다. 엄마를 닮아 키가 작다. 아빠를 닮아 말이 없다.” 저도 제 성격이니 어쩔 수 없나 보다. 우리 남편은 뭐가 맘에 안 들면 말을 안 하고 삐쳐 버려 답답해서 울고 있으면 우리 시할머니 말씀이 “에구 말 안 하는 남편에 아들, 이제 손자까지 가서 속을 태운다”며 나를 달래신다. 말 안 하는 것 때문에 우리 집은 삼대가 들썩인다. 열 가지 중에 다 좋은데 말 안 하는 것 때문에 안 살 수도 없고 자문자답 하고 살았다. 그래도 저희들 있는 곳에서 언제나 인정받고 가정생활 사회생활 잘 하고 있으니 더 바랄 것은 없고 고맙다. 손자 손녀가 보고 싶다. 행복하게 잘들 살아라.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8-05 13:11

애교 넘치는 어느 가수의 노래마냥 나도 대전 찍고, 영동 찍고, 옥천 찍고, 제천 찍고, 옥천을 마지막으로 찍었다는 어머니. 철도원이던 남편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짐 보따리 몇 번씩 싸보셨다. 그렇게 여든 살을 넘고 인생의 우여곡절과 모진 풍랑을 다 넘었다고... 지난 시간을 회억해보면서 ‘고단했지만 그래도 살만했어’ 라고 방점을 찍어주셨다.■ 증약 사는 나는 내 고향 비래리가 코앞이다. 80년 넘게 멀리도 왔다 싶지만 나는 내 고향 비래동 코앞에 살고 있다. 나는 1940년 비래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비래동이지만 그 옛날에는 비래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옆 동네는 더퍼리라고 지금도 더퍼리는 나이든 우리들에게 향수 같은 이름으로 남았다. 우리 농사짓고 살던 그 터에 지금은 다들 그렇듯이 아파트가 쭉쭉 들어섰다. 나는 3남매 중 막내였다. 언니와는 영자 돌림으로 영분 영자로 이름을 나눠가졌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다. 논농사 밭농사를 주로 지으셨고 나도 유년시절부터 부모님 일손을 도우며 큰 애기로 성장했다. 새참을 광주리에 담아 나르기도 하고 모를 심기도 하면서 시골살이 하는 여느 집 큰 애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10대의 일상을 나도 살았다. 그렇게 큰 애기로 부모님 슬하에서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다. 지금은 스무 살이 되어도 마냥 어리광쟁이들이지만 우리 때는 인생의 기로에 서는 결혼이라는 운명과 만나는 두려운 시기였다. 언니가 시집을 가면서 언니의 결혼은 곧 나의 결혼으로 다시 이어졌다. ■ 형부 왈, “아버님, 영동에 좋은 총각 있으니 처제주세요” 어느 날 문득 형부가 친정아버지에게 “아버님 영동에 좋은 총각 있으니 처제주세요” 라고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다. 여자가 물건도 아닌데 그 시절에는 주니 마니 딸을 달라느니 그런 말들을 거침없이 썼다. 나는 쑥스럽고 부끄럽기만 했다. 형부에 대한 믿음으로 형부가 좋다는 사람이라면 볼 것도 없다며 선도 안보고 결혼을 했다. 내 나이 방년 스무 살. 결혼은 그렇게 성사되어 난 영동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혼례상에서도 쑥스러워서 남편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 여느 새댁들은 궁금한 마음에 몰래 훔쳐보기라도 한다더만 나는 그런 용기도 없었다. 그렇게 쑥스럽고 어색한 혼례를 올리고도 60년을 해로하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해로하는 부부를 천생연분이라고 일컫나 보다. ■ 휴...같이 성장하는 7남매, 넷은 시동생이요 셋은 우리 3형제 비래동에서 태어나 20년을 살고 낯선 땅 영동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철도원이었다. 시집가서 8년을 영동에서 살고 충북 제천에서 20년을 살았다. 철도학교가 있던 영주는 집안이 어려운 청년들에게 철도원이 되는 기회를 주던 산업화의 거점 지역이었다. 남편도 철도학교를 나와 철도원으로의 소박한 삶을 시작한 때였다. 어르신을 모시고 살았지만 시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시어머니 시집살이는 할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어 시어머니의 빈자리를 내가 채워야 하는 짐이 나에게 남겨졌다. 남편은 5남매의 맏이여서 시동생이 6살, 9살, 12살 거기에 17살의 시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인생에 가족으로 찾아온 남편의 동생들,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도 엄마 품을 벗어난 지 오래지 않을 때라 나도 아직은 영글지 못할 때였다. 시동생들은 우리 아이들과 같이 자랐다. 우리 아들 셋, 정태 현태 규태. 다들 착해서 삼촌 고모들과도 잘 지냈다. 시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시동생과 시누에게 나는 엄마의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시동생이 우리 아들과 8년 차이다. 형님뻘이지만 그렇게 한 가족으로 성장했다. 같이 크면서 나는 우리 애들보다 시동생한테 더 정성을 들였다. 옷을 사 입혀도 삼촌부터 고모부터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대물림을 했다. 우리 아이들한테 먼저 좋은 옷 입히고 맛있는 것 더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내 배 아파 낳은 아이들이다. 하지만 시집 식구들 먼저 건사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고 우리 아이들도 성장하면서 보채지 않고 삼촌 고모와 어울렁 더울렁 잘 지내줬다. 기특한 녀석들이다. 서로 의지하며 살았지만 아이들과 달리 내 마음속에 불편한 것들이 왜 없었을까. 시집살이 안한 여자가 없듯이 살면서 다 고단한 시간들이 있다. 남의 시선에 내 속내가 보일 리 없다. 나만의 애끓음이 있었다. 고만고만한 시동생들과 우리 아이들이 같이 성장하는데 힘든 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다 잊어야 한다. 나는 다 잊었다. 아픈 기억은 잊고 좋은 추억만 남겨두었다. 그 어려운 시절을 다들 보내고 잘 성장해서 사회인으로 한 몫을 다 해내고 있다. ■ 자식처럼 돌보던 시동생한테 때마다 용돈 받는 형수명절 때마다 시동생이 슬쩍 내미는 용돈에 고단했던 지난 시간이 한순간에 녹아내린다. 용돈을 받아서 맛이 아니다. 그 마음씀씀이에 지난 시간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고 가슴한편이 따뜻해진다. 고마운 시동생이다. 돈 보다 더 귀한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 고마움을 나눌 수 있다는 것, 난 시동생의 그 마음에 내 인생이 귀하고 값있어진다. 때마다 나를 챙겨주는 시동생, 이젠 같이 늙어가며 노년의 친구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 시동생한테 때마다 용돈 받는 형수가 과연 몇이나 될까? 돈의 액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마음을 드러내는 정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인간애의 가치가 있다. 고단한 시간이 인내와 만나면 달콤하고 온기 가득한 시절을 선물하는 인생의 이 아름다운 가르침을 나도 맛보게 되니 마냥 감사하다.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고단한 시간들은 다 잊어야 한다. 마음에 담고 있으면 나만 힘들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살아도 모자란 인생이다. 지금이 찬란한 봄날, 시동생도 감사하지만 우리 며느리 자랑은 두고두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 내 자랑, 자매 같은 우리 며느리들며느리들도 셋이 동기간처럼 우애 있게 지내고 큰 며느리가 역할을 잘하고 있다.딸 없는 우리는 세 며느리를 맞으며 딸을 얻었다. 우리 부부를 아이처럼 챙기며 해외며 국내 구경을 시켜주고 맛집을 앞다투어 데리고 다니느라 다들 손이 바쁘다.휴대폰으로 검색을 하는지 열심히 들여다보고 지들끼리 여기나 좋네 저기가 좋네...우리는 그 모습을 구경하느라 내내 마음이 흡족하다. 여든이 넘어도 이렇게 눈부신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도 못했다. 남편의 얇은 월급봉투로 시동생들 우리 아이들 먹이고 입히고 살림하느라 몰래몰래 한숨도 쉬고 눈물도 짓던 그 시절을 이렇게 보상받다니... 바라지 않았기에 더 감사한 열매들이다.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만 살아왔는데 넘치는 보상으로 오늘을 맞이한다. 대전에 사는 큰아들이 20분 거리 우리 집에 수시로 드나든다. 같이 살자고 하지만 나는 옥천이 좋고 20분이면 대전에 나갈 수 있는 우리 동네가 노년의 나에게 가장 큰 평화를 준다. 물론 건강이 따라줘야 우리 부부 시골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 텐데... 나이 들어 한동네서 만나 가족이 된 이웃들. 누군가 안 보이면 걱정되고 좋은 일은 서로 축하하고 슬픈 일은 아픔을 같이 나눈다. 다시 청춘이 되었다. 아침이면 출근할 수 있는 노인정도 감사하고 더불어 그곳에 같이 모이는 우리 식구들은 더 감사하다. 인생의 찬란한 봄날이 바로 ‘지금’이다. 

주민기자 | 김재희 작가 | 2022-07-29 14:02

떠들썩했던 울창한 나뭇잎들이 조금은 조용해진 느낌이다. 이제 곧 무지개 같이 찬란한 모습으로 변해갈 낙엽들, 바람 불어 아무렇게나 둥글고 있는 낙엽들 바람 불어 아무렇게나 둥글고 있는 낙엽들과 동무삼아 놀아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재미있는 가을 여행으로 추억을 많이 만들어 놓아야겠다.“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란 이채의 시처럼 살아야겠다. 벌써부터 가을 소녀가 문을 열고 급하게 들어 왔다. 덜커덩 세월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높고 맑은 가을하늘이 나를 보고 웃으니 문득 싱그러운 봄날에 엄마하고 이원 묘목 축제장에 갔던 일들이 생각이 난다. 행복했던 그 봄날이 지금 내 앞에 와 있다. 길가에 피어있는 꽃들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을 정도로 축제장 가는 길목들이 참 예쁘다. 집집마다 대문 앞 그리고 작은 정원에 갖가지 묘목 나무들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전 세계 각국에서 모여드는 외국인들을 보면서 내가 사는 이곳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축제장에 도착해 휠체어에 엄마를 태우고 공연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조금 언덕배기에 있었다. 언덕배 기에 휠체어를 밀고 올라가는 일은 중노동 하는 것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보고 어느 건장한 청년이 도와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공연장에 도착하니 온통 자갈밭이었다. 산을 넘으니 더 큰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휠체어가 굴러가지 않는다. 휠체어를 한쪽에 세워놓고 엄마를 껴안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서 가게로 들어왔다.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리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공연장 무대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화려한 모습이 저절로 신이 났다. 반가운 사람들과 만나서 기쁨을 나누는 모습도 정겹다. 우리가 앉은 가게에서 사람들이 음식 먹는 소리보다 국수 끊는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들린다. 커다란 솥단지 안에 국수가 춤을 추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득한 옛날이 보인다. 옥천장날이 되면 외갓집 가족들이 장을 보고 점심을 먹기 위해 우리 집으로 모여든다. 나는 재빨리 밀가루를 몇 바가지 푹푹 퍼내서 반죽을 한다. 길다란 국수 밀대로 힘껏 밀은 다음 마른 밀가루를 술술 뿌려가며 여러 번 반복해서 밀어낸다. 한석봉이 어머니가 눈을 감고 반듯하게 썰어놓은 떡보다 내가 썰어놓은 국수가 더 정확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 만큼 잘 썰었다. 펄펄 끓는 솥단지 안에 국수와 애호박 썰은 것만 넣어 커다란 주걱으로 한 번씩 저어가며 끓여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춘 다음 열무김치와 함께 둥그런 상에 내놓으면 어르신들이 말없이 한 그릇 두 그릇씩 비워내는 모습에 나는 힘든 줄 몰랐다. 다 드시고 난 다음 잘라 놓은 국수 꼬랑이를 불에 구워먹는 맛이 지금의 피자 맛에 비교하지 못할 만큼 맛이 있었다.내가 만든 국수를 맛있게 드시던 어르신들이 이젠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리다. 아니 내가 만든 국수를 먹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다. 묘목 축제장 가게에서 국수가 춤추던 솥단지를 보고 나는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오래된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과거와 오늘을 왕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와 나는 국수와 부침을 시켜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먹었다. 오늘의 여유가 몇 십년 만에 놀러 나간 기분이었다.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먼 길을 돌아 구부러진 길로 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동요를 부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멀리 있는 산 능선을 바라보니 나의 인생을 그려 놓은 것 같아 눈을 떼지 못했다. 아직도 커다란 솥단지 안에서 춤추는 국수 소리가 능선을 타고 봄의 교향곡처럼 내 가슴을 열고 들어오고 있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7-29 11:35

사람이 일반 동물과 크게 다른 점은 곳곳이 서서 두발로 걷는 기능에 있다고 일류 학자들은 말한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사람들은 자동차에 너무 의존하면서 직립보행(直立步行)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내 자신의 경우만 하더라도 먼 길을 오고갈 때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타기 때문에 시간상으로 걷는 것 보다 타는 일이 더 많다. 그 때마다 내 몸이 퇴화하는 듯한 느낌이다. 자동차로 인해 행동반경은 넓혀졌지만 내 다리로 땅을 딛고 걸을 때의 그 든든함과 중심 잡힘이 소멸되어 가는 듯싶다.의사마다 건강비결로써 두 가지를 들고 있다. 많이 걷고 생수를 많이 마시라는 것 옳은 말이다. 그 어떤 운동보다도 많이 걸음으로써 신체가 조율되어 활기차고 생수를 많이 마셔 진진대사를 활발히 함으로써 건강할 수 있다. “디비드르 브르통”은 2의 산문집(걷기예찬)의 첫머리에 말한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은 것이라고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걷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걷기예찬에는 걷기의 중요성만을 강조하지 않고 걷기의 즐거움을 표현한 루소, 스리브슨, 바쇼, 니코스 카잔차키스, 며소로우 등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어 독자들은 즐겁게 따라 나설 수 있다.17세기 일본의 방랑시인 바쇼는 그의 여행기에서 구름조각이 바람의 유혹에 못이기듯 나는 끊임없이 떠도는 생각들에 부대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다기슭을 떠돌았는데 이윽고 지난해 가을에는 강변에 있는 내 오두막에서 해 묵은 거미줄들을 쓸어 낼 때였다. 이내 한해가 가고 봄이 돌아오자 가벼운 안개 속을 지나 “사라가”와의 울타리 정신을 흔들고 나그네 신들이 부르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진 나머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해진 바지를 꿰매고 갓끈을 손보는 즉시 벌써부터 “마스시마”의 달에 마음을 맡긴 채 다른 사람에게 내 거처를 넘겨주었다. 옛 사람의 티 없는 그 바람기가 한없이 부럽다. 나그네의 가슴 한 구석에는 이런 바람이 늘 불고 있을 것이다. 도보로 걷는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반드시 혼자여야 한다고 하나같이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유, 그 내재적 속성 때문이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끊임 없이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순례자란 무엇보다 먼저 발로 걷는 사람, 나그네를 뜻한다. 순례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털어낸다. 이 산하대지는 자동차의 타이어를 위해서보다는 우리의 두 발을 위해서 예부터 있어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연 속에는 미묘한 자력이 있어 우리가 무심히 거기에 몸을 맡기면 그 자력이 올바른 길을 인도해 준다고 옛 수행자들은 믿었다.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두 발로 뚜벅뚜벅 걷는 사람만이 그 오묘한 자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7-22 13:30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7-22 13:29

안내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가 지난 17일 저소득층 노인 84가구에 커피와 커피포트 등 생필품을 전달하고 있다.안내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공동위원장 김해동·조군호, 이하 지사협)가 저소득층 노인들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고자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 17일, 안내면 지사협이 저소득층 노인 84가구에 100만원 상당의 커피, 전기포트 등 생필품을 전달했다. 2022년도 지역특성화 사업 340만원의 예산 중 일부를 활용한 것. 지역맞춤형복지를 위한 지사협의 나눔 실천이 지역사회 진정한 복지에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 저소득층 84가구는 지사협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선정됐다. 안내면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위원장들의 노력으로 선정한 것. 소외되는 이웃 없는 공정한 선정을 위한 지사협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물품 전달에도 지사협이 솔선수범했다. 각 마을을 담당하는 위원장들이 직접 가정을 방문해 균등한 생필품을 전달했다. 한편, 안내면 지사협의 저소득층 노인 지원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지난 6월1일부터는 미용 쿠폰 지원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미용사가 경로당을 직접 방문해 커트 등 미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해당 서비스에 노인들의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안내면 맞춤형복지팀 박기동 팀장은 “생필품 지원에 어르신들이 매월 물품을 달라고 하실 만큼 반응이 좋다”며 “앞으로도 어르신들의 지원을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안내면 지사협 조군호 위원장은 “저희 지사협은 매주 2일마다 정기적으로 꼭 만나고 있다”며 “방문할 때 마다 노인분들이 너무 좋아해 주셔서 더 못 챙겨 드리는 게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안내면에 있는 많은 기업들도 아낌없이 지원해주고 있다”며 “앞으로도 저소득층 어르신들의 지원을 위해 솔선수범하겠다”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주민기자 | 주찬식 인턴기자 | 2022-07-14 22:47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발사였습니다. 미국의 어느 조그마한 소읍. 그는 아내가 있고 처남이 운영하는 이발소에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얼굴이 예쁜 아내는 소읍의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으며 백화점의 사장과는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발사입니다.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김춘수의 ‘꽃’처럼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몸부림만 떠오를 뿐입니다.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웬만하지 않으면 기억 속의 그들은 선생님, 세일즈맨 아님 곱슬머리 혹은 아! 조인성 닮은 그 애입니다. 이름은 날아가고 신체적 특징이나 그들이 종사하는 직업만 남아 있습니다. (더러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 이름이나 성이 제멋대로입니다.) 이름에 대해 혹자들은 존재가 아닌 소유식 관계로 치부하여 이름의 무의미함을 역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연결 안되면 그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집니다. 들판의 이름 모를 꽃들도 이름이 접목되어야 기억의 한켠에 자리를 틉니다. 이름은 존재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기억의 금 밖에서도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코엔 형제의 작품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는 우리가 이처럼 기억의 금 밖에서 살고 있는 주인공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얼굴 / 1999시골 소읍은 시간이 느리게 갑니다. (신승수 감독의 <얼굴>은 소읍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완만한 시간에 갇힌 그들에게 정치적인 이슈나 개인의 가치적인 성향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는 코엔 형제 작품 중에서 가장 내향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기존의 작품은 블랙코미디거나 다소 풍자적인 성향이 짙었는데 이번 작품은 존재론까지 파고 들어가는 묵직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주연배우 빌리 밥 손튼의 무표정한 연기는 변두리 읍내에서 희망없이 숙맥처럼 순하게 사는 이발사의 생활을 잘 표현했습니다. 사실 무표정 연기가 쉬운 것 같지만 쉽지는 않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탈론 같은  근육질이나 대사연기나 안되는 배우들에게나 통하는 연기지만 기능적인 연기나 다름 없습니다.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의 톰 행크스는 무표정과 침묵의 조화를 가장 잘 표현해낸 배우입니다. 뭉뚱그러진 슬픔이랄까. 두 작품에는 그런 슬픔이 짙게 베어납니다.영화 속 주인공은 그의 내면에 갇혀 있는 자기를 끄집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기존 영화에서처럼 자기 인식에 대한 거창한 몸부림이나 일탈에 대한 시도는 없습니다. 시도래봤자. 작은 가게를 마련하는 꿈이거나 그 소읍의 어린 처녀를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키우는 겁니다.이렇게 의사표현이 없는 그의 행동이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는 모릅니다. 그는 단지 이발사이고 휴화산 같은 내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데 그는 대비책도 없습니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보통명사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교풀 같은 희망, 되풀이되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 그 속에서 우리는 일찌감치 거세해버린 욕망을 스스로 자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 2002느와르 적인 배경에 완만한 진행이지만 긴장을 유지케하는 알 수 없는 속도감, 캐릭터들의 명암을 살려내는 흑백화면 등은 코엔 형제의 재능을 엿보게 합니다. 평단에서는 코엔 형제의 최고작이라고 하는데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단!! <노인의 나라는 없다> 전까지) 종전의 작품이 풍자에 주력하다보니 의미 전달에는 미흡했는데 이번 작품은 유머에 대한 재능을 발휘하면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 보여주는 숙련된 작품을 보여줍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헐리우드 영화는 판타스틱이거나 블록버스터 아님 유치찬란한 희망을 보여주던 영웅주의류 작품이나 무리한 해피엔딩으로 분류 해놓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나 '매그놀리아' '아메리칸 뷰티'같은 작품들을 보면 다소 당황스럽습니다. 아! 이들도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긴 하는구나! 다들 사는 것 똑같겠지만 그늘이 없어 보이는 패권주의 미국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건 어쩔 수가... 마음의 삐딱함입니다. 암튼 코엔 형제나 마틴 스콜세지 같은 반골 기질의 작가들이 있기에 헐리우드에는 아직도 희망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7-14 22:44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스치니 가을이 조금씩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 있는 친구의 목소리도 듣고 싶고 지인들과 멋있는 카페에서 차도 한잔 마시고 싶다.내가 언제부터 이런 여유를 부렸나 그냥 웃음이 나왔다. 쫒기는 세월을 보내느라 제대로 함께 놀아본 계절이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을 누려보고 싶다.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자는 말이다. 지난 금요일 저녁엔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숲속의 아름다운 곳에서 가까운 지인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빨간색 국물이 펄펄끓고 있는 양푼이 동태찌개가 우리들의 우정을 더욱 진국으로 만들어 주었다 맛이 일품이다.우리는 맛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내면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자기 남편은 결혼기념일과 생일에는 꼭 기억을 하고 멋있는 곳에서 근사한 이벤트를 해준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을 했다. 그 이야기에 아차 내 생일이 9월이구나 라고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생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나는 행복합니다” 얼굴에 쓰여있는 동생의 모습이 우리들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동안 내 생일이 언제인지 잊고 살았다. 매년 생일이 돌아오지만 우리 남편은 나에게 한 번도 밥을 사준 적이 없다. 밥이 아니라 자장면도 무적이나 좋아하는데 그저 바램뿐이었다.나는 큰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상함과 따뜻한 마음을 바라는 것이다. 생일이 특별한 건 아니지만 나도 친구들에게 조금 부풀려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내 인생의 가장 황금기였던 젊은 날 친구들은 생일날 아주 비싼 목걸이와 반지 그리고 예쁜 장미 꽃다발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나는 부러워서 은근히 속이 부글부글 끓고 마음이 흐린 날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인 것 같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운 적이 있다. 그해 생일날 아침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탕탕 그릇을 부딫치면서 설거지를 했다. 속상한 마음을 풀기 위해 아무런 잘못이 없는 그릇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잠시 후에 남편이 부뚜막 위에 슬그머니 만원 한 장을 놓고 갔다. 아마도 내 생일 때문에 내가 화가 나고 있는 것을 알았나보다. 나는 더 크게 그릇을 부딪치면서 설거지를 하는 바람에 큰 접시 하나가 땡그렁하고 깨져버렸다. 남편은 신경이 쓰였는지 또 다시 만원 한 장을 슬그머니 놓고 갔다.나는 속으로 내가 하는 행동에 남편이 먹혀 들어가는 것 같아서 화가 좀 풀렸다. 낙엽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이 가을에 그때 그날의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내 마음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들었다. 이제 일주일이 지나면 내 생일이 돌아온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나에게 선물을 주지 않아도 밥을 사주지 않아도 남편이 아무런 이유없이 얼굴만 보아도 사랑스럽다. 내 옆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내 생일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을 위해 정성껏 만든 밥상에 환한 미소로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하면서 밥을 먹을 것이다. 그것이 최고의 행복인 것을 오랜 세월을 건너서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장점만 지닌 완벽한 사람도 업고 단점만 지니고 있는 미숙한 사람도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크게 얻은 지혜는 건강한 마음과 몸으로 함께 살아 있음에 행복하다.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똑같이 일찍이 남편과 밥상을 마주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며칠 있으면 당신 생일이지? 하면서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남편은 힘 있는 목소리로 봉투를 열어보라고 했다. 그 안엔 오만원짜리 지폐가 두 장 들어있었다.갑자기 받아본 봉투에 나는 말을 더듬으면서 웬일로…… 하면서 말을 흐렸다. 내심 좋으면서 봉투를 잡은 손은 떨고 있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가슴이 벅차면서도 고민이 많았다. 다 떨어져 가는 화장품을 살까 아니면 지인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자랑을 할까도 생각했다. 예쁜 스카프 목에 두르고 영화 한편도 보고싶다. 내가 좋아하는 수필집도 사고싶다. 생각만으로도 행복이 넘쳐난다. 오늘은 하루 종일 맛있는 반찬 만들어서 남편과 함께 기쁨을 누려야겠다. 지친 일상에 단비가 내린 것 같다. 나는 지금 십 만원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7-14 2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