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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했다. 지하철 카드가 정지 되었단다. 한 번 두 번 다른 칸으로 옮겨서 몇 번 어제 저녁에도 통과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요즘엔 직원도 없다. 모두 기계로 하고 있으니 당황해서 앞이 캄캄했다. 기계 앞에서 방방 뛰며 누가 나 좀 도와 달라고 하니 다들 바쁜 아침 출근시간이라 그냥 갔다. 차 시간 놓치면 안 되는데 마음이 더 바빴다. 몇 번을 도와 달라니 오십대 아저씨가 왔다.“우대로 하셔야 되지요.” 아니요 그냥 표만 뽑아주세요. “나도 바쁜데 어르신 해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하는데 어디서 직원이 왔다. 표를 타고 카드를 보여주면서 “이 카드가 왜 정지 되었나 알 수 있어요?” 하니 “아이고 진작 보여주셨어야죠.” 직원이 카드를 대도 안 되었다. “여기로 나가세요.”하며 옆 창구로 나가게 했다. 나를 도와주려던 아저씨는 한 대를 놓치고 기다리고 있었다.차를 못 타셨네요. 고마웠어요. 죄송하고요. 인사를 하고 다음 차를 탔다. 영등포에서 내리니 개찰을 안 해서 못 나간단다. 참 요즘 기계 똑똑하다. 할 수 없이 옆으로 나와서 이 표를 반납해야 되는데 받지를 않는다. 버릴 수도 없고 해서 안내하는 곳에 주었더니 “여기서는 오백원을 못 받으니 저기 가서 하세요.” 기계 가서 하란다. 오백원은 필요 없다고 하며 왔다. 더욱 황당한 것은 교통카드로 하면 되는데 왜 표를 사려고 했는지 더 기가 막혔다. 이렇게 안 돌아가는 머리 가지고 어쩐단 말이냐.요즘 이것뿐이 아니었다. 밖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집에 벗어놓은 코트 주머니에서 나왔다. 복지관에서 식권을 사서 주머니에 넣은 것 같은데 없다. 가방을 샅샅이 뒤지며 찾았는데 없었다. 전에는 다시 사면 되었지만 지금은 한 사람이 한 장 밖에 못 산다. 그냥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지갑을 뒤졌더니 얌전히 접어서 넣어 있었다. 어이없다. 수업 끝나면 식사하러 가야 하는데 무엇하러 지갑에 넣었을까, 넣었으면 왜 생각이 안 났을까? 무슨 습관으로 은연중에 넣었을까 녹슨 기억력이 한심스럽다.나도 내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내 생각이 백프로가 아니라 거짓말이 많다. 싱크대 앞에서 냉장고 문 열고 들여다 보면 왜 왔나 모른다. 이런 것은 다반사다. 기차에 오면서 카드를 자세히 봤다. 서울특별시 시니어패스(어르신 교통카드)였다. 내가 서울시에서 옥천으로 이사 온 지가 벌써 일년 구개월이 되었다. 그런데 몇 번 서울에 가면 그냥 사용하면 되었다.어차피 무료니까 썼는데 2015년 1월 15일로 서울 시민에서 퇴출 되었다. 이제 기계 앞에서 무임승차 하는 것 차분히 배워야겠다. 건망증으로 끝나면 되는데 치매는 아닐까 걱정이 된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백세시대라 하는데 건강하게 백세여야지 누워서나 제정신 아니게 오래 살면 무엇 하겠나 싶다. 어제 아침을 먹으며 손녀딸에게 할머니 꿈이 있다. 전에는 꿈이 없었어. 그래서 할머니는 하나님께 75세까지만 살게 해주세요 했다. 한 삼년 동안 시골에서 흙장난하고 놀다가 조금 더 살으셨으면 좋을텐데 할 때 간다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꿈이 생겼어, 할머니 이름으로 책 한권 나오는 꿈. 참 좋지. 너희들도 할머니 위해서 기도해주렴 했는데 한시간도 안 돼서 황당하게 처신도 못하는 한심스런 노인으로 변했다.그래도 아직은 자신 있었는데 하면 된다고 다짐했는데 한 살 더 먹었다고 그렇게 차이가 난단 말인가. 크는 아이들이야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게 큰다지만 늙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제 점심 끝나고 군서 장령산으로 드라이브 하면서 코에 바람 넣을 때는 참 상쾌했다. 활짝 갠 하늘을 보면서 내일을 꿈꾼다.랑이 다시금 새롭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9-16 14:16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9-02 15:06

매화가 지지도 않았는데 벚꽃이 꽃잎도 내밀지 못했는데 어이 그리 급하게 가시는가. 먼 산에 춘설이 타고 내려 유년시절로 돌아간 듯 보기도 아까워 눈을 감고 바라본 것이 엊그제인데…… 자네는 그때 정든 가족 뒤에 놓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이승의 마지막 열차를 타기 위해 어둡고 외로운 플랫폼으로 나가고 있었군. 얼마나 외로웠나. 아무도 동행할 수 없는 길을 가야 했을 친구를 생각하니 어찌 이리 가슴이 시려오는지 한겨울 삭풍을 가슴에 담는 기분일세. 부디 잘 가게. 그곳에 가서도 그리 술을 사랑하려는가. 하긴 우린 한동네서 같은 공기를 숨 쉬며 태어난 소꿉친구이자 술을 말로 먹던 친구가 아니었던가.지난 가을 단짝친구들 다섯 명이 한 친구의 칠순 술을 마시러 대청호를 돌고 돌아 달디 단 소주잔에 파묻혔던 생각이 떠오르네. 그때만 해도 우리들은 자네가 그렇게 서둘러 떠날지는 생각도 못했다네. 그 기억이 사라지기도 전에 자네는 어찌 그리 서둘러 가야 했는가. 잘생긴 얼굴에, 잘 빠진 체격에 연예인을 해도 모자랄 멋진 모습이었던 자네를 이제 어디에서 보겠는가. 한데 이 사람아, 내가 친구를 찾아가더라도 이제 같이 맞먹지는 말게. 오뉴월 하룻별이 어딘데 형님을 몰라보면 되겠는가. 한동네 동갑이지만 내가 생일이 다섯 달이나 빠르지 아니한가. 다섯 달 차이로 세상에 나온 친구와 나는 아름다운 금강과 순백의 모래밭에서 물오리처럼 물장구치며 컸지. 아마 우리들은 아름다운 금강 맑은 물처럼 너무도 해맑게 자랐는지도 몰라. 보리밥에 고추장을 반찬으로 담은 양은 ‘벤또’를 같이 싼 책보를 어깨에 메고선 학교에 간다고 조그만 다리로 십리나 되는 산길을 갔네. 그때 친구와 나는 또래들 중에 키가 제일 컸지. 고개를 넘고 강가 험한 길을 따라 힘들어 하며 걸었었네. 땀을 배시시 흘리며 육년을 함께 다니지 않았던가. 여름날 뙤약볕에 험한 고개를 넘자면 얼굴은 홍시처럼 달아오르고 목은 마른 논처럼 타들어 갔었네. 그 고개가 어찌도 그리 높았던가. 밑에서 위를 쳐다보면 까마득히 보이지를 아니했네. 어디 하나 물먹을 데도 없었고 어디 하나 편하게 앉아 쉴 데가 없었네.그래도 강가 길을 걸을 때는 얼굴을 담그고 맛난 강물을 마음껏 들이킬 수가 있었고 발가벗은 몸뚱이를 내놓고는 물오리들처럼 왁자지껄 헤엄을 즐겼지. 우리들은 영락없는 물오리들이었고 소금쟁이보다도 더 물 위를 잘 떠다녔지. 물 위에 뜨는 걸 땅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자유자재로 했지 아니한가. 우리 중에 유명 수영선수라는 건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을 걸세.지금도 난 햇빛에 반짝거리던 순백의 모래를 잊지 못하고 있네. 맑은 유리알처럼 깨끗한 강물을 지나다 목이 마르면 그냥 엎드려 얼굴을 박고선 벌떡벌떡 들이켰지. 아무리 좁아터진 산골도 강가 모래밭만큼은 드넓었지. 우리는 매일 그곳을 강아지처럼 내 달리지 않았던가. 하늘만 빠끔한 산골에서, 휘도는 강물만 보고 자란 우리는 어쩌면 복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아련한 산골의 생활이 우리의 가슴엔 더없이 싱그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던가.자네는 공기업에서 좋은 시절을 보냈었지. 두주(斗酒)를 불사(不辭)하는 자네가 먹은 술의 양도 강물 같았을 걸세. 아마도 그게 자네가 우리 앞에 서둘러 가야 할 이유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는 일일세. 자네뿐인가. 우리 동네서 같이 큰 우리 친구 녀석들이 전부 술고래들이었으니 아마 우리가 국가에 지불한 주세도 어마어마할 걸세. 이제 책보 걸머지고 다니던 여섯 명이 전부 늙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각지에 흩어져 살다니 이제 친구꺼정 둘이나 떠나고 네 명이 남았네. 우리가 어려서 수염이 허연 어른들을 보면 까마득했는데 이제 우리가 거기에 와있네 그려.몇 개월에 한번씩 만나서 술을 퍼마시며 지줄 재줄 대던 다섯 친구들이 참 좋았는데 이제 친구가 빠진 허전한 자리를 누가 메워주려는지. 아니 친구 자리는 허전한 대로 늘 비워놓고 있겠네. 친구는 영원히 우리 옆에 있는 거야 어떤 땐 형제보다도 가깝고 누구하고도 하지 못할 이야기도 우리 다섯이 모이면 거침없이 쏟아냈지. 나이를 먹으면 친구가 많을수록 좋다 하더군. 지금 바깥은 깜깜한 밤이야. 새벽에 뒤척이다 세시 반에 일어나서 이 글을 적고 있네. 친구가 간 곳은 저 바깥처럼 어두워서는 안 되네. 사철 꽃피고 언제나 따뜻한 곳이어야 하네. 아플 것도 없고 슬픈 것도 없는 곳이어야 하네. 우리가 어려서 뛰놀던 그런 하얀 백사장, 하얀 물만 있는 곳이어야 하고 진달래 피고 꽃다지 피던 따뜻하고 양지바른 곳이어야 하네.이제 줄이네. 동쪽이 곧 밝아올 것 같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8-26 14:18

■ 가족주의의 이면을 담은 <미스틱 리버>와 <폭력의 역사>이름만 들어도 권위가 느껴지는 연기파 배우들이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는 숀 펜과 <데드맨 워킹>의 감독 팀 로빈스와 <일급 살인>의 케빈 베이컨. 이들이 한 영화에 모였습니다.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입니다. 영화는 어릴 적 세 친구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합니다.이들은 밖에서 야구 얘기를 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 로빈스가 연기한 ‘데이브’만이, 자기를 경찰이라 밝힌 어른들에게 비행을 저질렀다며 끌려갔습니다. 경찰이란 말은 거짓이었고, 그들은 데이브를 성폭행했습니다. 그날 이후 세 친구의 사이는 멀어지고, 25년 뒤 숀 펜이 연기한 ‘지미’의 딸 케이티가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그 순간부터입니다.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가족주의는 튼튼한 성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감독은 성채에 트로이의 목마를 집어넣습니다. 가족 안에서는 위대한 아버지와 어머니지만, 이웃에게는 억압자로서의 모습도 드러나는데요. 영화에서 이와 가장 흡사한 건 ‘지미’의 행적이겠지만, 세 인물 모두 그 안에서 묶여있다고도 느껴집니다.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와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가정적이고 친절한 남자 ‘톰’은 어느 날 자기 가게에 들이닥친 강도를 죽이고 사람을 구한 일로 마을의 영웅이 됩니다. 그런데 갱단의 두목 ‘포가티’가 찾아와 그에게 ‘당신은 ‘톰’이 아니라, 나의 적이자 킬러인 ‘조이’다’라고 밝힙니다.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두 영화는 가족 관계 속에서 균열을 내며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 울타리는 정말 튼튼하고, 울타리 안은 안온한가요? 라고요. 그리고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놀랄 만큼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정반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미스틱 리버>는 전혀 다른 영화로 다가올 것입니다.오아시스님과 함께 영화의 은밀한 매력을 알아보는 시간. 다음 주에는 같은 방송이 송출됩니다. 104.9mhz와 옥천FM 앱, 유튜브 OBN 다시보기로 만나보세요. 옥천FM공동체라디오 오픈채팅방과 OBN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으로 출연 신청도 받고 있습니다. 

주민기자 | 김재석 PD | 2022-08-19 14:02

편집자주_5만 명 선이 무너지면서 옥천 인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구가 줄어들면서 세대별 균형이 심각하게 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령화 비율은 30%를 훌쩍 넘어선지 오래고 청년 인구는 갈수록 줄고 있습니다. 이에 사회적기업 고래실은 농림축산식품부, 충북도, 옥천군과 함께 2022년 농촌에서 살아보기를 시작합니다. 지난해 농촌에서 살아보기와 달리 올해는 ‘프로젝트형’으로 젊은 청년을 대상으로 실시합니다. 서울, 김포, 대전 등지에서 온 청년들이 각 지역의 농가를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면서 지역살이의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이 지면을 통해 매주 청년들이 만난 농가와 활동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해는 뜬다. 그리고 진다오늘이 되니 어제의 일이 생각난다. 진벌마을에 가서 새 모이통 만들기를 하였다. 접시에 구멍을 뚫어서는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게 하는 접시를 만들었다. 모이통인 투명병에는 예쁜 새 그림을 배바우 작은 도서관 관장님의 부인이 주신 도안으로 붙여 넣었다. 너무 예뻤다. 그리고 손광만 이장님이 만드신 인두로 플라스틱 병을 지져서 모이 구멍을 내었다. 적당히 쏟아내릴 수 있게 말이다. 어제의 일은 어제 그렇게 끝났다. 오늘도 날이 밝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늘 하던 샤워를 하고는 몸단장을 하고 나갔다. 안남 음식점에 가서는 오늘의 백반메뉴인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먹고는 자판기 커피는 필수였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여기 저기 운동을 다녔다. 오늘은 아주 더웠다. 34도에 육박했다.그런데 배바우장터가 열리는 자리에서 한 외국인 부인이 옥수수와 샤인머스켓 포도를 팔고 계셨다. 그 부인의 아내와 남편도 그곳에 누워있었는데 부채가 없어서 종이로 부채질을 하고 계셨다. 그래서 배바우 권역의 내 숙소 방에 와서는 펴고 접는 예쁘고 활용도 좋은 종이가 붙여진 부채를 드렸다. 아주 해맑게 웃으시며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다. 맛있었다. 같이 먹어서 말이다.돌아오다가 슈퍼에 들렀다. 주인 사장님이 그림이 떨어져서 붙이고 싶어하셨다. 그리고 커텐봉을 달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권역 집에 가서는 공구를 전부 챙겨와서는 고쳐드렸다. 우선 시멘트 벽을 특수 드릴로 뚫어서는 깊이를 만들고 그곳에다가 6mm 드릴로 뚫었다. 그 구멍에 망치로 플라스틱 앙카를 박고 커텐봉을 튼튼하게 박아드렸다. 5년 이상은 쓰지 않을까 싶었다. 무서운 커텐이어도 될 것이었다. 이모는 아주 좋아하시면서 나에게 코카콜라 캔을 주셨다. 그리고 복숭아를 맛나게 잘라주셨다. 너무 고마웠다. 이것이 정 아니겠는가 싶다.저녁이 되니 배가 고팠다. 그래서 나가서 안남 엄마와 같이 파스타를 각자 한 그릇씩 우이당에서 먹었다. 역시나 같이 먹으니 이야기도 하며 맛이 한껏 좋았다. 그리고는 아이스 초코라떼를 마시고는 돌아왔다.권역에 자전거를 타고 스르륵 도착하니 민박 오신 분들이 가득했다. 그래서 수영장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족구장도 어두우니 불을 켜두었다. 이제 지금이 되었다. 민박 오신분들에게 수영장에 물 받아놓았고 족구장도 사용해도 된다고 말하러 가야겠다.오늘 하루는 배도 부르고 걱정없는 하루였다.미리 예상했지만 말이다.오늘은 너무나 좋다.너무 행복하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8-19 13:48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8-19 13:34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8-19 11:26

푸렁골은 옛 이름 그대로이다. 1941년에 청동(靑桐)이라고 한자화 되었지만 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은 푸렁골이라고 부른다. 참 아름다운 이름이다. 푸른 산 저 너머에 깊숙이 숨어 있는 인간 세상과는 격이 다른 선경같은 느낌을 준다.내가 이곳에 근무할 때는 푸렁골에서 세 아이가 학교에 다녔는데 모두 한 집에 사는 오누이였다. 학교에 오려면 산 고개 두 개를 넘어야 했는데 옷은 어느 도시아이보다도 단정하게 입었는데 신은 언제나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에 검정 고무신이었다. 시장에 나가도 고무신 장수를 찾기가 쉽지 않고 옥천에서만 해도 알록달록한 운동화만 신고 다녔던 때였다. 급변하는 세대를 살면서 문명의 혜택에서 멀어진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렸다. 6.25때 내가 신고 다녔던 검정 고무신이 지금까지 존재한다니 세월의 흐름을 잊은 것 같았다. 교실 옆 골마루에 놓인 신장을 본다.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가 검정 고무신이다. 고무신 바닥이 다 닳아서 구멍이 나도 그냥 신고 다닌다. 흙모래와 풀이슬이 범벅이 되어 고무신 바닥에 굳어있다. 가끔 운동화가 신발장에 한두켤레 보일 때도 있지만 삼일 이내에 다시 고무신으로 바뀐다. 이슬에 젖은 운동화는 빨아야 하고 고무신만큼 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푸렁골 아이들은 공부도 잘하고 우애도 남달랐다. 등굣길엔 항상 6학년 누나가 앞장서고 2학년 막내가 가운데 서고 4학년 작은 누나가 뒤따랐다. 안전을 위한 엄마의 배려였다.집에 갈 때도 셋이 같이 갔다. 수업이 끝난 막내는 6학년 누나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교에서 놀았다. 야외 학습장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포충망을 들고 곤충채집을 하기도 했다. 가끔 누나네 교실 창 너머로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누나네 선생님과 마주치면 얼른 피하곤 했다. 누나 공부하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공부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었다.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 학교에 오지만 맑고 깨끗한 아이들이었다. 제일 먼저 학교에 도착한 오누이는 샘가에서 발 씻고 교실로 가서 창문을 열고 골마루에 찍혀있는 자기 발자국을 열심히 닦아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푸렁골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앞에도 뒤에도 모두가 산인데 무슨 산 냄새가 저리도 좋을까?칡 향기 그윽한 푸렁골의 마음이 저런 것이 아닐까? 푸렁골을 잊고 산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너무도 급변하는 세상이어서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사람 냄새 진하게 번지는 아름다움을 기억해 내기엔 너무도 때 묻은 가슴을 탓해야 할 것 같다. 지금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잘 살고 있겠지?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8-19 11:26

박영임 사회복지사는 말한다.“웃는데 돈 들어가나요?” 바가지에 물을 담듯 내 영혼에 사랑을 담아, 그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었지!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은 모래를 양손에 쥐는 것과 같아요. 움켜잡으려고 하면 손이 아프고 손을 펴면 모래처럼 쏟아져 버립니다. 그래서 나는 베풀면서 살기로 했어요.꽃집 사장님, 웃음 치료사, 기타강사, 사회복지사, 이 모두가 그녀의 직업이다. 한 가지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녀는 말한다. “남의 행복을 구하면 나는 더 행복해 진답니다.”■ 웃음 꽃방에서올해로 20년째 꽃집을 운영하고 있다. 꽃집이지만 쉼터이고 사랑방이다. 우리 꽃방의 꽃으로 수많은 분들이 서로 주고받았을 기쁨과 감동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따뜻해진다. 돌아보면 꽃집을 운영해 오면서 돈을 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적은 금액의 화분이라도, 아무리 먼 거리를 왕복해야 할지라도 고객이 원하면 배달을 해 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가게가 비어있을 때 방문하는 고객은 전화로 상담해 주었고 현금으로 지불하기를 원하면 전화기 밑에 돈을 놓고 가시라고 했다. 서울 사는 손녀딸이 할머니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한 꽃 화분을 가지고 굽이굽이 좁은 길을 운전하고 가다가 바퀴가 길 밖으로 빠진 적이 있다. 애써서 도착한 돌담 집에서 나오신 할머니가 화분을 받아 들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 미소를 지으셨다. 그날은 옥천 장에 내서 팔려고 잡아서 모아 놓았다는 함지박 가득히 담겨있던 올갱이를 몽땅 사가지고 가게로 돌아 왔다. 배달을 나갈 때면 여행을 다녀온다는 마음으로 출발한다. 꽃다발을 선물하러 갔다가 나는 더 많은 행복 보따리를 받아 가지고 오는 셈이다. 초등학교 때 가족 사진 앞줄 가운데 모자쓴 아이....■ 아낌없이 사랑 주셨던 아버지, 이웃들은 “참 아까운 사람이었는데...”청산에서 나고자란 나는 밀가루 신자(생활이 어렵던 이웃들에게 성당에서 밀가루를 나눠주고 고마운 마음에 성당에 다니며 신자가 된 분들)였던 어머니의 고생도, 아버지의 고단한 삶도 모두 알아차리는 건 언니 몫이라 유년시절에는 아버지의 사랑만 듬뿍 받고 자랐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얼마 후에 우연히 이웃 동네 어르신들께 “참 아까운 사람이 일찍 갔어”라는 말을 들었다. 나의 바른 인사성은 다 아버지 덕분이었다. 어린 아이 때부터 골목길을 뛰어 다니며 놀다가 어른을 보면 무조건 인사부터 했다. 아버지는 자주 말씀하셨다. “인사하는데 돈 드는 것 아니잖니?” 어린 아들 하나를 잃고 그 뒤에 태어난 나를 아버지는 끔찍이 사랑해 주셨다. 5살 때쯤에 옷에 달린 방울을 마이크 삼아 잡고 아버지 앞에서 노래하면서 귀여움 받았던 뭉클한 추억이 있다. 엄마도 시장에서 난전도 펼치시고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우리 집은 따뜻했다.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전에 나가서 롯데리아(매드리아)에서 한 달 일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부모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아버지는 “영임아 집에 가자”하시며 내 손을 꽉 잡으셨고 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말없이 따라 왔다. 지금의 나는 그날 아버지의 결단 덕분이었다, 학교 행정실에 취업을 하고 업무로 연결돼 있던 건실한 청년, 남편이 우연히 던진 “첫눈 오는 날에 만납시다”라는 말이 첫 데이트가 되면서 결혼에 골인했다. 남편 재직시절에 우리 가족이 함께 갔던 연수원에서 열여섯 명의 인원이 함께 모여 기타로 연주 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었다. 기타를 배우고 싶어하는 나에게 남편이 자기 친구의 기타 하나를 가져다 주었고 그 후로 나의 기타 사랑은 시작되었다. 좋아하다 보니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이제는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쁘게 가르쳐 주고 있다. ■ 웃는데 돈 들어가나요?하하! 하하하! 하하하하!웃음은 전염력이 폭발적이다. 무슨 일이든지 잘하려면 연습이 필요하듯이 웃음도 그렇다. 웃음연습을 하지 않아서 웃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웃는데 돈 들어 갑니까” 라는 말을 웃음치료 모토로 삼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밑져야 본전이다. 손해를 볼 일이 없으니 당장이라도 시도해볼 만한 것이다. 웃을 일이 생길 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인생이란 한자를 풀어보면 알 수 있듯이 소가 네 개의 발로 좁은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먼저 웃음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진정으로 웃을 수 있는 현실이 내 앞에 펼쳐진다. 나는 웃음치료 강의를 해오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대로 펼쳐진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우울한 감정 속에서 빠져 나오기를 원한다면 그 도구로 웃음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웃음연습을 할 때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다. 웃음연습을 하고 난 후에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즐겨야 한다. 그 생각과 그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잘 다루어야 한다. 감정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분노, 두려움, 외로움 같은 감정들도 그대로 받아들여서 내 안에서 용서와 평안으로 순화시키는 연습을 해야 한다. 웃음, 좋은 감정, 연습으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사명감으로, 아동센터에서“너는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야! 너는 잘 될 거야! 너를 믿는단다!”한 아동에게 계속해서 해 주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내 마음속에 갖고 있던 생각이기도 했다. 6개월이 지난 후에는 그 아이의 부모님과 심리상담 선생님의 염려와는 다르게 아이가 바르고 예쁘게 성장해 있었다. 작은 것일지라도 그 아이에게서 장점이 보이면 나는 아낌없이 칭찬을 해 준다. 칭찬과 격려를 먹고 성장하는 아이들이 맺는 열매는 단단하고 예쁘다. 청산지역아동센터가 개원했을 때 29명의 아이들이 모집되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직원은 단 두 명뿐이었다. 우리는 기초자료가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일을 해야 했고 업무 외적으로 센터운영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함께 해 나가야 했다. 때로는 힘에 겨웠지만 센터에 등원하는 해맑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다시 힘이 났다. 이제는 설립 된지 만 2년째가 되면서 한 가지씩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청산면 내 어르신들이 급식과 청소를 맡아서 해 주신다. 때로는 부산스럽기도 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르신들의 눈에 사랑이 넘쳐흐른다. 손주들을 바라보듯이 따뜻하고 정겹게 대해주신다. 한 가지 시급한 문제는 보호자가 늦게까지 일을 하기 때문에 퇴근 시까지 공백이 생기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책 차원에서의 보완이 하루 속히 필요한 부분이다.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라져가는 시골마을에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센터로 만들고 싶다. 아이들을 보면서 풀 자체로 자라나서 그 틈에서 꽃을 피우는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 주는 작고 순수한 아름다움과 마주한다. 하늘화랑에서는 흰 구름이 시시각각 변화하면서 예쁘고 신기한 그림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이 따뜻한 마음을 아이들과 나누면서 나도 다시 ‘아이 같은 마음’의 어른으로 한 발 더 내딛으며 아이들에게 또 배운다. 

주민기자 | 이태경 작가 | 2022-08-19 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