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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간장’ 어머니는 얇은 매직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고 계셨다. 빈 콜라병에 어머니가 담근 간장을 붓고 집간장 글씨를 써서 투명 테이프로 붙이고 계셨다. 어느새 간장액이 묻었나 ‘집’ 자가 희끄무리하게 번졌다. 자녀분들이 오기 전에 챙겨줄 것들을 미리 준비해두고 계셨다. “애미가 줄 선물은 건강한 나, 그리고 정성스레 담근 된장, 고추장, 간장이여”60년 넘게 담갔으니 어머니도 셰프님이다. 소고기 미역국에 한 숟가락 주르룩 따라 넣으면 그 맛이 또 별미다. 뭐 특별한 재주는 필요 없다. 그저 60년 넘게 담갔더니 진한 맛이 우러난다고 하시는 어머니. 마치 어머니의 인생처럼. ■ 유복한 유년, 집안의 남자들은 다들 청성면 명티리 탄광 광부들 우리 동네는 한마디로 잘사는 동네였다. 명티리 탄광은 석탄의 질이 좋아서 캐는 족족 돈이 됐다. 우리집은 아버지부터 작은 아버지, 오라버니들까지 다들 명티리 탄광에 다니고 있어서 월급날이면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밥상에 고기가 수북이 쌓였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우리 동네가 잘 살아서 향나무로 만든 집들도 많았다고 한다. 우리집 남자들 월급날이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청산장에 데리고 나가서 자수가 수놓아진 포플린 원피스도 사주셨다. 마치 부잣집 딸이 된 것처럼 마냥 좋았다. 보따리에 먹거리며 잡화들을 가득 담아서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집으로 걸어오던 추억이 생생하다. 호시절도 잠깐 큰 오라버니가 헛바람이 들어 강원도 횡성가서 금광을 한다고 돈을 끌어 모아서 고향을 떠났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쪽박을 찾는지, 거지꼴을 하고 야밤에 기어들어왔다. 아버지는 장남이라는 명분을 주면서 받아들이고 성실한 농부가 되어 살라고 하셨지만 오빠는 이미 헛바람이 불어 또다시 짐을 꾸려 야밤에 도주를 했다. 당연히 장롱 안에 있는 돈 될 만한 것들은 다 들고 나갔다. 밤에 기어들어와 밤에 다시 나간 오라버니. 그 이후로 우리는 그의 행방을 모른다. 아니 찾지 않았다. 아버님의 명령이었다. “정신 줄을 놓은 녀석은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 상록수의 ‘채영신’을 꿈꾸다 얼떨결에 나와 여동생이 희생양이 되었다. 우리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글 읽는 것을 좋아해서 성당에 꽂혀있는 책들을 가져와서 읽었다. 이광수의 ‘사랑’,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또 읽어서 책장이 너덜너덜 해졌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을 흠모하면서 4H 활동도 했다. 중학교 졸업이 전부지만 우리 손녀들도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할머니가 나라고 치켜 세워주니 그러마 하며 그 말을 즐긴다. 아니 그리 살려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래서 가끔씩 “우리 어머니 교수님 같은 말씀하시네” 라는 얘기를 곧잘 듣는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그저 안다는 데 그친다. 피토하는 절규를 하고 인생의 말미에 알게 된 그 만고의 진리는 글 속에 있는 양보다 우리 손끝 발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양이 더 많다. 철학이 뭔지 알기나 하나 그냥 살면서 부아가 치밀면 이렇게 했더니 진정되고 저렇게 생각을 바꿨더니 숙제가 해결되더라. 그리 알뿐이다.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알았지만 이제는 벼락이 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 문밖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나도 두렵지 않다. 살만큼 살았다는 얘기도 될 터이지만 지난 시간 속에서 고단했던 일들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티끌 같다. 그래서 당당하다.■ 자장면, 홍두깨로 빚은 칼국수의 추억을 밀어내다 국민학교 6학년, 서예대회에 학교 대표로 뽑혀 친구 몇 명과 선생님 인솔 하에 청주에서 초등학교에서 열린 서예대회에 참석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2층집에 올라가 보았고 자장면이라는 시커먼 면발을 먹어보았다. 어머니가 홍두깨로 밀어주시던 칼국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인줄 알았던 나에게 자장면은 충격이었다. 입안에 퍼지는 달달하고 짭조름한 맛은 물론이거니와 후루룩 넘겨 입 안을 감아 돌던 그 보드라운 감칠맛은 꿈꾸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 황홀한 맛의 자장면집은 처음 구경하는 2층 집 이었다.시골에서 초가집만 보고 살았던 나에게 2층집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엉성한 나무 계단이었지만 촌 아이들에게는 오르락내리락 할 때 마다 삐거덕거리는 파열음마저 음악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들뜬 마음에 몇 번이나 오르내렸는지 모른다. 난 그날 자장면에, 2층집 그리고 나무 계단에 넋을 잃고 내가 대회장에 갔던 이유마저 잠시 잊어버렸다. 나에게 붓글씨를 직접 가르쳐 주셨던 교장 선생님께서 “옥주야 너는 1등이다”라고 확신을 주셔서인지 내심 내 실력을 과신하고 한껏 자신감에 차 있었다.그날 붓글씨 대회의 발제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였다. 들뜬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고 자신 있게 써내려간 글씨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내심 대회 1등을 확정하고 있었지만 이내 그 대회에서 입선조차 못했다는 실망스런 결과를 듣게 되었다. 어이없는 실수로 ‘걸음’을 ‘거름’으로 썼던 것이다. 자만한 탓도 있었지만 호기심 많았던 내가 그날 난생처음 경험한 문화적 충격으로 대회장에서 이미 넋을 빼놓고 있던 결과물이었다. 증손자 탄생, 시골에 아이울음소리 그친지 오래라 더더욱 기쁜날!■ ‘채영신’의 꿈은 하나씩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더 큰 열매를 얻다스물세 살에 보은 사는 고모님이 중신을 했다. 보은에 참한 총각 있으니 선 한번 보자고. ‘채영신’ 처럼 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남편 정도의 조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버님의 한마디에 꼼짝 못하고 보은 읍내 다방에 선을 보러 나갔다. 그나마 나는 신식으로 선을 보았다.추레한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앉아있는 폼 새가 영락없는 촌놈이었다. 나는 고모님과 같이 다방으로 들어섰고 양단 원피스에 고데기로 말아 올린 머리를 하고 도도하게 앉았다.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한 표정이다. 내 눈에는 반에 반도 안 차는 남자였다. 하지만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그 촌 남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그래서 ‘평강공주 되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봉의 공무원 마누라로 살면서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보은에서 농고를 나온 남편도 내가 바가지를 긁으면서 공부를 시켰다. 남편은 방통대까지 졸업하고 우체국에서 제법 높은 자리까지 올라 퇴직을 했다. 정년퇴직 하는 날 남편이 “다 당신덕분이오”했다.나도 속옷 한번 제대로 사 입어 보지 못했지만 허리띠 졸라매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5남매 성장하는 동안에는 나는 나를 잠시 잊었다. 내가 나를 모른 채 숨겨두었다. 나를 찾고 아이들을 가르칠 여건은 만들 수 없었다. 시집와서 홀시아버지가 아닌 편찮으신 홀시아주버니를 모시느라 마음고생이 많기는 했다. 시집와서 보니 남편의 형님이 강원도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병명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아주버님 모셔 와서 우리가 챙겨드립시다”라고 했다.남편은 내 손을 꼭 잡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가족이란 게 무언가, 어려울 때 돕는 게 가족 아닌가. 물론 너무나 조심스러웠지만 홀로 죽어가는 아주버님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잠시 나이기를 포기하고 아주버님을 10년간 모시고 그 사이 아이들도 성장했다. 내 인생의 10년, 나는 없었지만 돌아보면 나는 그만큼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인생이 도전의 연속이라고 나는 지금도 중국어를 배우고 라인댄스도 배우고 있다. 제대로 하고 싶어서 개인 레슨 선생님한테 배웠다. 중국어 선생이 너무 야무지고 예뻐서 첫눈에 막내 며느리감 하면 좋겠다 싶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잘 보여서 우리 아들 소개하고 싶었다.결국은 성공! 남자친구 없는 정보를 얻어놨고 “괜찮은 총각 있는데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도 내 소개면 두말할 것도 없단다. 만나고 와서 아들도 선생을 마음에 들어하고, 선생도 그 총각(?)이 마음에 든단다. 선생한테 실토를 하고 중국어 선생은 우리 며느리가 되었다.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내가 중매를 서서 막내며느리를 얻었다. 가족으로 만나는 인연은 운명이다.온 가족이 모여 고구마를 캐는 날도 잔치날이다.■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혀두며 모든 숙제를 마치다 영감 떠난 지 10여년, 영감은 칠순잔치 하고 두 밤 더 잠을 청한 뒤에 심장마비로 떠났다. 다들 너무 놀랐지만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 사람의 생명이 코끝에 달렸으니 어느 순간 숨을 못 쉬면 거기서 그만이다. 그래서 세상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한다. 이기적인 나로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저 남에 의해 내 행불행이 좌우되면 서글프다. 지금은 동네 친구들이 더 살가운 가족이 되었다. 옛말 그른 말이 없다고 이웃사촌이 최고다. 자식들이 나를 간간이 챙겨주면 기적이고 고마운 일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낳고 기른 것으로 내 책임을 다한 것이다. 자녀들도 그들의 삶을 살아야 한다.나는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혀두었다. 장기기증도 해두었다. 이제 숙제가 없다. 영감 곁으로 가면 그리운 사람 만나서 좋고, 이승에 있으면 혼자서 책 읽고 산책하며 가을 하늘 쳐다보는 아름다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친구들과도 정담을 나눌 수 있다. 간간이 울 새끼들 볼 수 있으니 좋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딱 좋은 나이다. 유행가 가사가 사랑하기 딱 좋다더니 살기도, 먼 여행 떠나기도 딱 좋은 나이다. 밖이 시끌시끌 한 것을 보니 동네 친구들이 오는 모양이다. 우리 집은 사랑방이다. 열무김치에 국수나 말아서 먹어야겠다. 아, 들기름 넣어서 비빔국수를 할까. 아니 이제는 다들 나이 들어서 침이 말라 물국수를 찾으니 그래 오늘은 물국수로 하자. 멸치가 어디 있더라?멸치 다시물을 올려놔야지. 이렇게 또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어여 오시게 친구들!<막내며느리 편지>어머니 어머니께 콕 찍혀서 어머니 며느리 되었지만 저도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했답니다.어머니 같은 분이 시어머니라면 하구요.우리의 인연은 정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가봐요.열심히 공부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세상의 선배님으로 많이 배웠습니다.어머니, 자랑스러운 어머니팔순 넘은 어머니와 며느리가 중국어로 얘기할 수 있는 고부지간 너무 행복합니다.어머니 더 건강하셔서 우리 오래도록 모녀처럼 지내기로 해요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저 며느리로 콕 찍어주셔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연우 아빠보다 어머니가 더 좋아요.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저희들과 함께 해요. 사랑합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주민기자 | 김경희 시민기자 | 2022-10-07 16:58

분주한 아침이다. 차량으로 유치원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탄 손녀가 뒤 따라 들어가는 할미에게 “할머니, 엄마 냄새가 나~~.” 한다. 안에 들어가니 머리 감고 채 마르기도 전에 급히 나간 여인의 샴푸향이 엘리베이터 안을 상긋하게 했다.엘리베이터는 냄새를 잘 흡수하나 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 배달이었으면 피자 냄새, 자장면 배달이 왔으면 자장면 냄새. 쓰레기 냄새, 담배를 피우고 갔으면 담배 냄새가 지나간 사람마다 난다.엘리베이터 안의 냄새를 맡으며, 내가 살아온 것을 생각해본다. 빛의 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순간 내 살아온 나날이 머릿속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부끄럼 없이 잘 살았나. 철없던 어린 시절부터 육십 오년 동안을...육 남매 중에 유난히 연약했던 나를, 부모님은 늘 걱정을 했다. 언니와 나는 여덟 살 차이가 난다. 언니 위로 둘이 죽고 밑으로 둘이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말씀대로 하나님과 반타작을 했다고 하신다. 예쁜 짓 좀 할 때면 죽었단다.밑으로 남동생을 바로 보아서 젖이 일찍 떨어졌기 때문에 할머니 빈 젖으로 살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참 우량아이 같았는데 아파서 병원 옆으로 타닥하자 말고 집을 사서 이사를 왔는데도 그 동생은 죽고 말았다. 나는 초등학교 삼학년까지 할머니 빈 젖을 먹은 것 같다. 요즘 아이들 공갈 젖꼭지 빨 듯 할머니 젖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학교로 젖 먹이러 오실 정도였다.초등학교 4학년부터 신경통으로 다리가 아팠다. 비가 오려면 미리 일기예보를 했으니 얼마나 걱정이었을까. 시집 보내놓고는 나약한 딸 아파서 시집살이 못하고 쫓겨날까봐 걱정을 했단다. 그래도 탈없이 시부모 남편 사랑 받고 잘 살았다. 어느 날 둘째 아이 오줌을 뉘고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내 나이 때 엄마가 고생한 것이 떠올라 시집 온 지 오 년 만에 울며 편지를 썼다.내 일생 중 제일 고생했을 때다. 아버지의 외도로 가정이 파산 지경이 되었다. 삼대 독자에 아들을 못 낳아 자손을 보기 위한 것이다.엄마는 집을 나가 인천으로 갔다. 돈을 벌어서 나와 언니를 데려다 키우겠다고 나간 것이다. 언니가 중학교를 갈 때 엄마는 예쁜 본견원피스와 언니 옷을 한 번 사서 보냈다. 난 그 옷을 입고 이웃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엄마가 옷 보냈다며 싱글벙글 웃는 모습에 엄마친구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철 없이 좋아하는 것이 불쌍해 보였나 보다. 이런 이야기를 다 써서 장장 다섯 장을 보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것을 다 기억했었냐고 우셨단다. 그 때 내 나이 여섯 살이었다. 그 후로는 무탈하게 산 것 같다.엄마하고는 솔직히 정이 없었다. 엄마 냄새보다는 할머니 냄새를 더 맡고 살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할머니가 자는 우리들 등을 후려치셨다. “이년들아 내가 밤새 잠을 잔줄 아냐. 주리를 틀었지.” 작은 키도 크느라 밤새 할머니를 괴롭혔나 보다.할머니가 손녀딸들을 돌보고, 엄마는 돈을 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보다는 할머니가 더 좋았고, 정도 더 들었다. 엄마는 신발 신을 새도 없이 일을 하셨다. 딸 셋이 먼저 고무신을 신고 나가면 엄마 신은 밑바닥 없는 신만 남았다. 엄마, 죄송합니다. 엄마, 사랑합니다.내 냄새는 어떤 냄새일까? 우리 아들이 알까? 딸도 아닌데, 조심해서 살았지만 보는 눈마다 생각하는 것마다 틀리다. 나름대로 추억 만들어준다고 스케이트장, 수영장, 동물원, 연극 구경, 다 해준다고 했는데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큰 아들이 엄마한테 생일마다 사기를 당했단다. 커서 생각하니 운동화가 떨어지면 당연히 엄마가 사줘야 되는데 꼭 생일 때 맞춰 생일 선물이라며 사주었단다. 아들아 사기라고 생각지 마라. 너도 자식 키우니 이제는 알 것이다.이순의 나이에도 그리운 어머니의 젖가슴 냄새가 아련히 떠오른다. 이제야 철이 드는가 보다. 내일은 어머니 산소에 국화꽃을 한 아름 들고 가겠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10-07 11:32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백난아님의 ‘찔레꽃’이다. 어르신이 즐겨 부르시는 노래, 어르신은 가수 지망생이셨다.어린 시절 동네 가수로 소문날 만큼 흥이 많으셨다고 하시며 찔레꽃을 백난아님 보다 더 간드러지게 불러주셨다. 이원면 1949년 이영숙 ■ 이제 추억이 된 아버지의 포마드 냄새1949년 6남1녀 중 넷째 딸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수였다. 김정구, 현인 선생님처럼 일제강점기 때 유랑극단에서 활동하셨다. 우리 집에는 오르간, 트럼펫, 색소폰,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 각종 악기가 있었다. 호기심 많은 내 눈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던 우리집의 보물들이다. 6·25전쟁이 터진 후 아버지는 인민군에 의해 신의주까지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도망 나오셨단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 가족은 피란 내려왔던 대전에 눌러앉았고, 아버지는 당시 대전 외곽 장동 미군부대에서 노래하셨다. 그러면서 오빠들과 예닐곱 살밖에 안 된 나에게 미국식 영어를 가르쳐주셨다. 아버지가 출근 준비하시면서 양복을 쫙 빼입거나 하와이안 셔츠를 입으셨는데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발라서 가르마를 정갈하게 만드셨다. 포마드 기름 냄새가 어찌나 진했는지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하면 코끝에서 포마드 냄새가 난다. 이젠 추억의 향이 되었다. ■ 나의 첫 영어 회화, ‘기브미 껌’, ‘기브미 초코렛’미군들은 우리 꼬마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쌀라 쌀라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키가 크고, 코가 큰 미군들을 거리에서 만나면 무조건 다가가서 ‘기브미 껌’, ‘기브미 초코렛’ 하고 외친 것이 내가 처음 써먹은 영어였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흥이 많은 집안의 피가 흘러서 남자 아이들과 같이 미군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내 또래 여자아이들은 미군들이 무섭다고 집에 숨기도 했는데 나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미군들은 많은 아이들 중 몇 명에게만 줄 수가 없으니 통상 닭 모이 주듯이 껌이며 초콜릿을 던져주었다. 어쩌다가 달려가서 하나라도 주워 먹는 아이는 그날 재수가 좋은 날이었다. 껌은 씹은 후에 집의 벽이나 기둥에 붙여놓고 끈기가 마를 때까지 뗐다 붙였다 여러 날을 씹었다.초콜릿이나 과자 종이는 나무 조각 같은 것으로 다시 포장해서 아이들 있는 곳에 슬그머니 떨구어 놓고 “아니! 여기 웬 과자야!” 하며 친구들을 놀리기도 했다. 사진으로 기록된 6.25 사변 때 미군 트럭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땟국물 졸졸 흐르고 꼬질꼬질한 녀석들이  바로 우리 유년시절의 단면이다. ■ 인생의 나침반, 신식 아버지아버지가 하루종일 집안일만 하는 엄마를 가리키며 “너 엄마처럼 살래?” 물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었더니 “너가 어른이 되면 세상이 달라져서 여자도 능력 있으면 돈 벌고 남자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골라서 시집가는 세상이 온다”고 하셨다.그러려면 공부를 하든지 노래를 하든지 춤을 추던지 너가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조언을 하셨다. 그 시대의 아버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신식아버지셨다.나는 노래하고 춤추는 게 너무 좋아서 공부보다는 전국에서 벌어지는 노래자랑을 찾아다니면서 무대에 서게 된다. 무대에 서면 내가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가수로 이름을 알리는 건 피나는 노력과 운이 따라야 했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운명 같은 결혼, 역마살을 잠재우다 가수가 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중매로 시집을 갈 때 나는 무대에 많이 서다보니 연애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다른 친구들보다 많이 주어졌다.왜관에 공연 갔을 때 영동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충북영동사람이 김천에서 왜관의 부대에 식자재물품을 납품하고 있었다. 부대 위문공연장에서 나를 몇 번 보았는데 지인에게 연통을 넣어 나를 소개해 달라고 하여 우리는 만남을 갖게 되었다.성실하고 근면한 남편은 호쾌한 내 모습이 좋았지만 우리는 전혀 색깔이 달라 결혼하고 부부싸움을 유난히 많이 했다. 하지만 폭풍우도 어느 순간 잠재워지고 남편은 사업이 궤도에 오를 때 아들에게 맡기고 우리 부부는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왔다.영동에서 포도농사를 시작했다가 이원의 포도밭을 사게 되어 이원으로 터전을 옮겼다.서울에서 대전으로 다시 전국을 다니며 노래하고 왜관에서 영동남자를 만나 결혼했다가 인생의 말미는 이원에서 보내게 됐다.흔히 나 같은 사람을 역마살이 꼈다고 한다. 폭풍우 같던 내 인생을 고요하게 만들어준 남편이 지금은 고맙다. 조용한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됐다.■ 파도는 가라앉고 잔잔한 물결만 남다나는 기분이 좋을 때도, 마음이 공허할 때도, 언짢을 때도 무조건 노래로 마음을 달랜다. 어느새 평정을 찾는 나를 보면서 노래를 사랑하는 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노래는 내 인생의 숨통 같은 존재다. 남편이 한창 미스트롯이 열풍일 때“당신 최고령자로 한번 나가보면 어때?”라고 한마디 던졌는데 하여튼 남편이 내 노래 솜씨를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이제는 밖에서 노래 부를 일이 없지만 아니 안 하지만 남편은 내 노래를 즐긴다. 그래 대중이 아니면 어떤가, 단 한사람이라도 내 노래를 즐거워하는 이가 있으면 족하는 것이지... 70년의 하루하루는 행복하고 때론 고단하기도 했지만 70년은 순식간에 지나왔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저 희로애락이 내 곁에 머무를 때는 노래를 부르련다. 밤하늘의 별 같은 존재보다 시골 마을의 할매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따로 있다. 이 작은 행복에 젖어보니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순간이 한 여름 밤의 꿈같다. 오늘은 깊은 가을밤의 고즈넉함에 흠뻑 취하는 날이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9-30 14:43

사목재 고개 위 하늘이 참 맑다. 며칠간 미세먼지로 흐렸던 뒤라 그런지 더욱 청명해졌다. 황사도 주춤해서 모처럼 따듯한 봄날이다. 운동을 하러 체육공원에 올랐다. 겨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을 보며 꽃망울이 금방 터질 것만 같은 개나리와 벚나무 순이 반겨주었다. 서울 삶을 정리하고 고향 옥천으로 이사 온 지가 십 개월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나중에 육십이 넘으면 시골가서 흙장난을 하고 산다고 늘 노래했다. 그런데 고향에 온지 십개월 동안 숨 가쁘게 살았다. 오늘은 한가한 마음으로 먼 산을 돌아본다. 저곳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 시험이 끝나고 남 여 세반이 모여 토끼몰이를 갔던 곳이구나.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앗! 저기 저 산길이 이렇게 가깝게 보이다니. 64년 전 6.25전쟁 때 피난을 가던 그 길이다. 그때 우리 집은 닭을 잡아 온 식구가 푸짐하게 먹은 후 짐보따리를 싸고 야단법석이었다. “엄마 우리 이사가?” “그래” “와! 좋다! 나는 무얼 가지고 가요?”라며 조르니 가방에 미숫가루, 놋수저, 빨래비누 2개를 넣어 메어주셨다. 철부지였던 나는 그저 신났다. 우리 집도 이사 간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그건 이사가 아니라 피난길이었다. 아버지는 누가 오라는데 있냐며 솔 고개 사는 작은 고모님 댁에 짐을 내려놓았다. 엄마와 고모가 저녁을 준비하는데 군인들이 와서 빨리 부산으로 내려가란다. 사목재를 넘지 못하고 산 중턱에 짐을 풀고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새벽에 남겨 놓고 온 보리쌀과 이불을 가지고 오겠다고 엄마와 고모가 집으로 간 사이 군인과 미군이 와서 총으로 위협을 하며 산으로는 가지 말랬다.피난 행렬은 줄지어 가는데 우리는 엄마와 고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섭다고 빨리 가자고 울며 조르기만 했다. 언니는 저 산을 넘으면 개울이 있다, 개울을 건너지 말고 길 옆에서 기다리면 엄마랑 가겠다고 했다. 나는 무서워 울며 가방을 메고 혼자 고개를 넘어갔다. 넘어가 보니 개울을 건너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길을 만들어 어느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겁먹은 나는 울며 아래위로 올라 다녔지만 알 수가 없어 작은 바위 위에서 울고 있었다. 마침 신대 친척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어째 혼자 가냐고 하셨다.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나흘만에 식구들을 만났다. 늦은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져 고개를 넘지 못하고 산 속으로 고생하며 나흘만에 천만다행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아가 되지 않고 살았다.피난 생활은 그렇게 고생만은 아니었다. 인심 좋은 주인은 고추, 호박, 가지를 따다 주기도 했다. 고종 사촌 오빠들은 피난 갈 때 약빠르게 잘 갔다고 고기 잡으로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고기 잡으로 갔다가 거머리가 얼마나 많이 다리에 붙었는지 떼지 못하고 모래밭에 뒹굴러 모래로 비벼서 떼어냈다. 그건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는 추억이다.또 복명관에서 키우던 송아지만한 후지개또라는 개를 사서 큰고모와 둘만 먹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같이 즐겨 먹지를 않았나보다. 육포 해놓고 즐겨 먹다가 체해서 죽을 고생을 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온 몸이 퉁퉁 부어서 무엇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이 부어 있었다. 들마루에 앉아 있는데 고모가 엄마에게 “언니 쟤 먹고싶은 거 먹여 보내야겠어요” 엄마는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팥밥”했다. 찹쌀에 팥을 넣고 찰밥을 해서 주었다.이상하게 그 밥을 먹고 체한 게 내려가 나았다. 그 다음부터는 고기 냄새만 맡아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했다. 쟤 먹고싶은 거 먹여 보내야겠어요, 한 뜻을 지금은 알 수 있다. 내가 성인이 되어 신대아주머니한테 생명의 은인이라고 장에서 만나면 술과 식사를 대접해 드렸다.오늘은 사목재 고개가 그립다. 부모님 얼굴이 겹쳐서 보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봄은 다시 오건만 이제 그 시간은 내 기억 속에서 살아있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홀로 고향에서 바라본 그 고개는 어쩌면 오랜 세월을 지켜낸 나의 모습같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9-30 14:04

35회 지용제가 지난 22일부터 25일까지 진행됐다. (사)청암송건호기념사업회도 23일부터 25일까지 3일 간 라온커피동아리, 사회적협동조합꿈꾸는배낭, 옥천기록공동체, 옥천행복교육네트워크와 함께 5가지 테마의 부스를 운영했다. 각각 핸드드립 커피 판매, 음료 판매 및 미션퀴즈, 릴레이 소설쓰기, 청소년·교육 정책 제안, 그리고 지용제 특집방송으로 꾸려진 고향방송국 운영이 주된 테마다.주민 참여형 축제를 표방하는 지용제에는 그간 아쉬운 점이 있었다. 청소년 및 청년 참여 부족이다. 특히 청소년의 경우 행사 참여 외에 운영 주체로 결합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역 청소년·청년들의 관심도는 중장년층에 비해 낮을 수 밖에 없었다.이번 청청지용일지에서 중점이 된 부분은 청소년이 스스로 기획하고 고민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참여자와 운영자 모두 재미있는 테마를 구상하는 것이었다. 기획 단계부터 지용제에 참여하고 싶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한다면 무엇으로 참여할지 함께 고민했다.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부스를 운영하는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방법’과 ‘미션에 참여하는 참가자일 때 재미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두 가지 부분을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 동네에서 진행되는 큰 축제에서 무엇인가 해보고 싶어서 반짝거리는 청소년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기획부터 실행까지, 함께 성장하는 과정처음으로 준비하는 행사라 어렵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참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참여 단체별로 부스를 준비하는 것이지만 청청지용일지를 연결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필요했고 릴레이 미션을 통해 정지용을 완성하자는 제안이 채택됐다. 직접 소품을 나눠주거나 도장을 찍자는 아이디어로 의견이 모였고, 귀여운 디자인의 정지용을 완성하는 일러스트 스탬프 엽서가 제작됐다. 어느 한 사람의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생각에 생각이 더해지며 완성된 결과물이었다.포토존과 미션 준비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하던 청소년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그렇게 완성된 미션은 누구나 손쉽게 즐길 수 있는 방식이라 만족도가 높았다. 정책제안을 위해 모이는 자리가 다소 어렵게 느껴지던 사람들 역시 축제장에서 메모지에 각자의 생각을 남겼다. 평소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라며 고민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생소한 일들을 벌이기는 청년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시간 조율이 어려워 줌으로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는 등 의견을 조율을 위한 방법을 지속적으로 고민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물을 준비하고, 청소년들이 실현하고 싶은 아이디어를 최대한 구현할 수 있도록 고민하며 청년 활동가 역시 함께 성장해나갔다.■ “동네 사람들 만나며 지역을 알아가요”축제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지용제에 참여하며 지역을 만나기도 했다. 특히 옥천FM방송국의 청소년 방송활동가들은 지용제가 진행되는 구읍에서 사전인터뷰를 진행하고, 현장리포터로 활동하며 다양한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방송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옥천의 구읍과 정지용이라는 인물을 알아보는 시간이 됐다.사전질문을 준비하고 인터뷰를 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한 청소년들은 하나같이 "어려운데 재미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예정과 달리 3일 내내 출석한 청소년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쭈뼛쭈뼛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어려웠지만, 3일차가 되는 날에는 카메라와 녹음기를 챙겨 본인들끼리 자신 있게 인터뷰하는 모습도 보였다.청소년 리포터의 인터뷰에 응한 주민들 역시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산모루 식당을 운영하는 윤춘자씨는 “너무 이쁘고,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며 애정을 담은 이야기를 건넸다. 향수정원에서 인터뷰에 응한 이근문씨(67세, 포항)는 “취지도 참 좋고 뜻 깊은 시간이 되었다. 성황리에 마치길 바란다”는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다양한 주체가 어우러진 고향방송국청청지용일지 전반을 청소년들과 함께 만들었다면, 옥천FM공동체라디오의 고향방송국은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방송으로 꾸며졌다. 구읍에서 방송을 진행하는 만큼 실개천마을학교의 어린이들이 <오늘도 우리는 돌봄> 프로그램을 통해 참여했고, 정순철짝짜꿍어린이합창단원들이 <동요로 만나는 세상>에 출연해 직접 노래를 부르고 관객과 어우러졌다.지역 문화예술인들은 <골든뮤직>에 출연해 공연을 진행했으며, 지용제인 만큼 시낭송협회 회원들이 진행하는 <오후의 시 한 스푼>, 그리고 사연과 신청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랑실은 멜로디> 역시 고향방송국을 알찬 이야기로 꾸몄다. 사전에 녹화한 <아자쌤과 놀다보면> 역시 지용제 특집으로 방송됐다.특히 <자립이야기>의 경우 광주나눔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정성주소장을 게스트로 모시고 수어통역을 병행한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광주장애인나눔자립생활센터와의 교류, 휠체어 및 비장애인 여러 명이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차량, 축제장을 둘러보며 느낀 소감 등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수어를 배웁시다> 프로그램은 코다(CODA)인 박채율 진행자가 현장에 있는 다양한 주민과 자신의 이름을 수어로 함께 배워보는 시간을 나눴다.3일 간의 축제, 그리고 그 축제를 만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함께 참여한 사람들에게도 색다른 경험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주체들은 앞으로도 이번 축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갈 것이다.  

주민기자 | 이해수 PD | 2022-09-30 14:03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09-16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