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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고지도에 표기된 관아건물구읍은 문화재를 비롯한 고택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고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곳이며 고려 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관청이 있던 곳이라 따지고 보면 한발자국 건너 한곳씩 관광보유자원이 풍부한데 지금 우리는 기존에 있는 것조차 끄집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지도를 살펴보면 향청리(상계리, 하계리)에 표기된 관아 건물명과 마성산 옆에 표기된 사직단, 여단, 사장록(활터) 등이 나타나 있다.다행히 사직단은 복원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여단과 활터인 사장록도 발굴 복원하여 관광자원화 하여야 한다고 본다.여기서 사직단은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풍작을 기원하여 올리는 제사를 지내는 단을 말하며, 여단은 예전에 나라에 역병이 돌아서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인 여귀에게 제를 올리는 단을 말한다.필자는 구읍을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2019년도에 추노의 고을 구읍골목 해설집을 발간한 바도 있지만 관광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역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필요하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있는 것은 더욱 돋보이게 하고 미처 발굴하지 못한 것은 새롭게 찾아내어 옥천향교와 옥주사마소 등 많은 문화재가 있는 구읍일대를 좀 더 양반(선비)의 고을로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필자가 발간한 책의 내용을 소개드리면 옥천(구읍)의 역사, 정지용생가, 육영수생가, 옥천향교, 정광제 효자문, 교동리 느티나무보호수, 교동리 비석군, 옥주사마소, 문향헌(춘추민속관), 죽향초등학교 구교사, 옥천 죽향사지 3층석탑, 조선시대 옥천군 관아터 및 옥천장터(저잣거리), 구 옥천여중 교무실, 아리랑, 정구영 거주지, 옛 동성교회, 옛 군수관사, 죽향리 느티나무보호수, 일제강점기 변전실, 2005년경 도난당한 죽향리 돌사자, 옥천을 그리워했던 가수 김현식, 옥천 전통문화체험관, 옥천 구읍 벚꽃 길, 조선시대 과거제도 등을 소개한 바 있다.지금의 상계리, 하계리는 고려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여러 관아건물이 있던 자리임을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건물이 사라진 지 오래된지라 이 일대 전체가 관아건물 터였던 것을 알고 있는 옥천주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1872년(고종 9년) 발간된 고지도에 표기된 관아 건물명과 내용을 설명 드려보면○서역청(書役廳): 관아에서 문서를 다루는 기관/세금을 부과하던 곳 ○동헌(東軒): 고을 사또, 수사 병사가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대청이나 집 ○군사(郡司): 조선시대 각 고을에 있는 호장(戶長 향리직의 우두머리)의 사무소를 이르는 말 ○외삼문(外三門): 관아 입구에 있는 3개의 문으로 보통 2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 아래층은 문으로 사용하고 2층은 루로 되어 있다. 옥천관아의 외삼문은 관성문루이다.○내삼문(內三門): 옥천관아 안쪽 동헌 앞에 있던 세 개의 문 ○객사(客舍): 중앙이나 지방에서 공무로 온 관리들이 숙식하던 집이며, 객사에는 전패와 궐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날 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향망궐배) ○군고(軍庫): 관아 병사의 무기고 ○책실(冊室): 조선시대 고을의 원에 의해 사사로이 임명되어 비서 일을 맡아서 보던 사람 ○장청(將廳): 옥천관아에 딸린 장교가 직무를 처리하던 건물 ○사우(祀宇): 신주(선현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 ○내아(內衙): 조선시대 지방 관아에 있던 안채 내동헌(內東軒) ○읍시(邑市): 고을 관아 밖의 저잣거리 ○홍문(紅門): 홍살문 ○향청(鄕廳): 유향소(留鄕所)라 하며 지방 수령을 자문하던 기구 ○상창(常倉), 대동창(大同倉): 옥천 관아에 항상 보관하던 쌀 창고 ○작청(作廳): 군아에서 아전들이 일을 보는 곳 ○관고(官庫): 관아의 곳간 ○연신재(燕申齋): 잔치를 펼치던 곳 ○포수청(砲手廳): 예전에 총으로 무장한 군사들이 머물던 곳 ○향교(鄕校): 옥천군 국립교육기관(중고등학교)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제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 등이 있다 ○하마비(下馬碑):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비로 문묘, 종묘, 궐문, 향교나 충신문 등의 앞에 세워 놓은 비석이다. 비문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각자되어 있다. ○사장록(射場蔍): 조선시대 활을 쏘던 장소 등이 표기되어 있다. 가까이 고지도 등고선에는 사직단, 여단이 있으며 저 멀리 증약찰방역 관아가 보이고 있기에 전통문화체험관이나 상하계리 주변에 관아건물 등이 나오는 대형 고지도판을 설치하여 주민들이나 관광객들에게 이곳이 과거에 관아가 있던 곳이며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옥천고을임을 홍보해 나가 역사성이 있는 고풍스러운 구읍과 주변 관광지를 만들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그리고 미처 소개하지 못한 교동리 섯바탱이에 있는 백회가마터도 우리나라에 몇 군데 없는 아주 특이한 백회가마터이기에 주변 정비를 한 후 기존관광지 등과 연계하여 홍보해 나간다면 큰돈 들이지 않고 관광자원이 발굴되리라 보며, 또한 충청북도에서 가장먼저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구읍사거리 근방 만세운동 벽보를 붙였던 곳에 상징조형물을 설치하였으면 한다. 구읍사거리에 상징조형물 설치하기가 곤란하면 지용생가 앞 실개천 건너 주차장 공간을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지역 내 인적 역량 활용방안으로는 그 무엇보다도 주민들에게 우리고장의 자랑거리인 역사문화를 가르쳐 주민들을 마을홍보대사로 양성하여야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끝으로 옥천군, 옥천문화원, 옥천향토사연구회, 구읍번영회 등과 협의 계획을 세워 옥천전통문화체험관 등에서 옥천의 역사에 대한 프로그램을 개설 운영하였으면 한다.옥천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이며 관산성 전투로 백제 성왕 전사, 관산성을 비롯한 옥천읍 중심의 산성 분포도 설명, 고려시대(조선시대)에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주요교통로였기에 증약찰방역에서 대전, 보은, 영동까지 관할했던 역과 원의 위치설명, 조선시대에 들어 국난극복에 앞장선 중봉 조헌선생의 후율정사와 각신서당(이지당)에서 인재양성과 무예를 연마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차령전투 승리와 청주성 탈환 공적을 비롯한 금산전투에서 700의병과 아들 조완기, 영규대사 등이 순절한 내용, 대유학자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선생, 단종 복위운동 도모를 한 김문기선생, 근대기에 접어들어 옥천 청산 청성 증약 등지에서의 동학유적지, 정순철선생의 생애, 독립운동가 김규흥, 조동호, 전좌한 선생 생애 등과 이원장터 만세운동 비롯한 우리군의 독립만세운동 전개 상황을 다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대학교수 등 전문강사를 초빙하여 옥천군의 전반적인 향토사에 대한 폭넓은 교육을 실시하여 이야기 거리를 많이 만들어서 알리게 되면 구읍 일원과 주변관광지가 인기 만점의 관광지로 부각되어 지역경제 발전에 시너지 효과가 창출되리라 본다. 지역주민들이 지역학(옥천학)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관광자원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3-01-06 10:23

의견 | 옥천신문 | 2022-12-30 10:56

가을은 그 무엇인가를 향한 애틋함에 눈이 맑아지는 계절인 것 같다. 만물은 결실로 충만하다. 결실은 보람이다. 들녘의 감들이 주렁주렁 주홍빛 물감을 토설해 내고 있다.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디면서 자신의 불순물을 스스로 정화한 덕분이다. 부족한 부분을 비와 바람 앞에서 인내하고 절제하면서 성실하게 믿음으로 밀어 올린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좋은 계절에 우리는 손에 보물을 잡고서도 행복을 모르면서 살아간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모순’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병이 든 환자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늘 우리에게 설파를 하신다. 끊임없이 모두가 잠시 인연을 따라서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질 ‘허공 꽃’을 잡으려고 원숭이처럼 분주하게 생각의 티끌을 굴리기에 세상이 시끄럽단다. 이 해가 갈 것 같은데 듣고 나면 또 헤매기 시작한다. 묘한 이치다. 이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칼을 들어 어둠을 상대로 다투지 말고 그저 조용히 내심낙원의 불을 켜 들란다. 오늘은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가을은 혼자 있어도 충만한 계절이다. 처처에서 충만과 감사의 기도가 들려온다. 그 덕택에 온통 자연과 생명이 ‘살아 있음의 축복’으로 가득하다. 그냥 앉아서 하늘만 쳐다봐도 좋다. 이런 날 고구마를 캔다. 나는 그냥 집사람 곁에 있을 뿐, 도움은 안 된다. 새색시 볼처럼 맑은 감들이 빙그레 웃음으로 응원한다.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식품이다. 약방의 감초 격이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생명력은 우리네 민족성과 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유래는 조선 영조(1763년) 때 조임이라는 선비가 대마도에서 들여와 부산에서 재배를 시작했단다.나는 고구마만 보면 눈물이 난다. 아린 추억 덕분이다. 우리 집은 늦가을부터 여름까지 고구마가 주식이었다. 겨울엔 방안에 큰 통가리를 만들어 놓고서 신주단지처럼 모셨다. 깎아도 먹고, 삶아도 먹고, 구워도 먹는다. 쥐새끼들도 통가리 곁으로 모여든다. 함께 자다 보면 어느새 내 발가락을 긁는다. 새끼 쥐들은 귀엽다. 나도 그도 외로워서 친구가 되었나 보다.고구마는 초봄이 되면 심는다. 손바닥 크기의 모종이 땅을 터전 삼아 뿌리를 내리면 왕성한 생육 작용을 한다. 지금은 지구가 오염이 심각해서 농약 없는 농사는 꿈도 못 꾼다. 그러나 고구마는 농약이 필요없다. 그만큼 강한 자생력을 갖춘 식물이다. 조금 자라면 고구마 줄기는 좋은 식자재가 된다. 줄기를 살짝 벗기면 더없는 식품이다. 김치를 담그면 아삭아삭한 식감이 별미다. 기름을 살짝 두르고 볶아도 좋다. 수확 전 고구마 줄기를 따서 삶아 볕에 말리면 겨우내 우거지 버금가는 맛을 자랑한다. 고등어조림도 좋고 갈치조림도 궁합이 맞는다. 잎도 따서 깻잎처럼 장아찌를 담가도 좋다.겨울철의 고구마는 진귀한 보물이다.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 없다. 밥에 넣어도 좋고 샐러드도 좋다. 우리 손주들은 구워서 주면 “할머니 최고!” 엄지 척을 연발한다. 나는 하루에 한 끼는 고구마로 연명한다. 다이어트에도 좋고, 몸의 신진대사를 촉진해서 활력을 충전시켜 주는 것 같다. 작은 손바닥 크기의 식물이 땅의 기운을 먹고서 무주상보시를 시행하는 듯하다.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자연의 적지 않은 은전이다. 이 작은 진실이 자연의 힘인 것 같다.자연은 생명을 보듬는 큰 보고다. 인간은 자연의 덕과 복 아래서, 잠깐동안 노닐다 가는  ‘백년과객’이라는 선조들의 말씀이 가슴을 적신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자연의 본질을 망각하고 산다.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다.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에 현혹되다 보면 본질과 멀어진 삶을 누리게 된다. 자연은 늘 참다랗게 우리들 곁에서 베풀지만, 인간의 교만이 세상을 흐리는 것 같다. 자연의 숨결을 가꾸고 보듬는 직업이 농사다. 돈은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땅을 버릴 수 없는 이유다. 고구마를 캐는 날, 많은 것을 흙 속에서 배운다. 새삼 흙의 소중함과 농사의 가치를 실감하는 날이다. 농사도 보람과 자부심으로 긍지를 느끼게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지도자들의 몫이다. 이것이 함께 사는 세상, 사람 사는 맛이 아닐까.가을 금싸라기 같은 볕이 화살처럼 달아나려고 한다. 내 안의 조그만 씨앗들이 조금씩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면 가슴으로 파란 물감이 밀물처럼 밀려들 것 같다. 이 좋은 계절에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는 없을까. 그것은 내 마음의 궁궐을 짓는 방법일터. 결국 마음을 결정하는 것은 ‘나’라는 실체를 지우는 작업이라는데, 나는 언제 그곳을 향하여 마음껏 비행할 것인가.누구나가 내심 낙원을 짓는 행복을 꿈꾸는 가을이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가을이 달아나려고 한다. 조그만 도토리 하나가 발등에 툭 떨어진다. 하늘을 쳐다보니 온 천지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축복의 장이다. ‘마음의 상상’을 마음껏 즐겨보자. 자연이 베푸는 큰 잔치 마당 앞에서. 우리가 모두 주인공이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12-30 10:47

며칠 전 지인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이었는데 개가 비를 맞으며 앞뒤로 낑낑대며 다녔다. 아니 저 녀석이 비는 오는데 왜 집엔 들어가지 않고 저러나 했다. 계속 그래서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많은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별 신경 안 쓰고 잤다. 새벽에 강아지 울음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별 신경을 안 썼다. 한데 개가 제 집엘 들어가지 않고 계속 주변을 맴돌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개집을 들여다 보다가 깜짝 놀랐다.웬 낯선 개가 들어 앉아 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이 금방 난 새끼가 여러 마리 있는 것이었다. 개는 지인을 보고는 놀라 달아나고 새끼가 꼬물꼬물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싶었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다는 말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세어 보니 다섯 마리나 되었다. 달아난 개가 주변에 왔다 갔다 한다. 자리를 피해 주었다. 가까이 가면 다시 달아나 바로 근처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왔다 갔다 한다. 지인은 부드러운 손짓으로 어미를 불렀다. 그 녀석을 최대한 안심시켰다. 그 뒤로는 경계를 하면서도 어미가 도망가지는 않고 새끼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지인은 졸지에 개가 두 마리나 되고 새끼도 다섯 마리나 되는 대식구를 거느리게 되었다.이년 전이다. 지나가던 버스가 서더니 기사가 내려 지인의 집을 향해 소리를 치고 있었다. 개 좀 달아매놓으라고 화를 내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개냐고 지인도 소리를 질렀다. 지인은 그때 개가 없었다. 그런데 두 집밖에 없는 곳 지인의 집 앞에 개가 길바닥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으니 지인의 개인 줄 알고 기사가 화가 난 것이다. 개는 얼마나 굶었는지 탈진해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길바닥에 늘어진 것이었다.지인은 모른 체 할 수도 없어 그 개를 거두었다. 개는 꾀죄죄하기가 말할 수도 없었고 몸에는 진드기가 바글바글 붙어 있었다. 동물병원 가서 진드기 약을 치고 불임수술까지 하느라 돈도 만만찮게 들었다. 멋진 개집까지 사다가 정식으로 입주를 시켰다. 날이 갈수록 개는 인물이 나기 시작했다. 흰 색깔의 그 개는 정말로 귀여웠다. 후덕한 지인의 사랑과 충분한 먹이 급여로 윤이 반질반질 나는 귀부인이 되어 있었다.내가 그 집엘 가면 낯설어 짖으면서도 제 주인을 찾아온 손님이란 걸 아는지 바로 그친다. 나중엔 친해져서 손짓을 하며 다가가면 좋아 죽는다. 털 세도 희고 반질반질한 게 인물이 아주 훤하고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개도 확실히 주인 만나기에 달렸다. 지인이 차를 몰고 집을 나오면 한동안 뛰어 따라오다가 돌아간단다. 바쁜 지인이 밤 늦게 돌아오는 기척이 나면 한참을 집 밖으로 나와 기다리다 차 주위를 뺑뺑 돌며 반가워 죽는단다.이 개의 집을 웬 낯선 개가 나타나 치고 앉아 새끼까지 낳았으니 참 묘한 일이다.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남의 집 차고 든 것도 모자라 아랫목에 새끼까지 다섯 마리나 낳고 늘어져 있으니 졸지에 집을 뺏긴 개는 어쩌란 말인가. 제 집을 순순히 내 준 개도 맘씨 곱기가 천사 아닌가. 생김새 못지 않게 맘씨까지 곱다.비 오는 날 산고를 겪는 낯선 개가 황급히 찾아드니 제 집을 순순히 내주고 저는 그 비를 맞으며 집 주위를 맴돌았던 것이다. 텃세를 부렸으면 낯선 개가 감히 그 집에 들 수는 없었을 것이고 아무 곳에나 새끼를 쏟았을 것이다. 난 그 얘기를 듣고 그 개가 더욱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이 새끼 난 개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그 집에 들어 새끼를 난 녀석은 고생을 해서 몰골이 남루하고 수척했다.그래도 꼬물거리는 새끼를 다섯 마리나 옆에 데리고 또렷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귀여워 한참을 웃었다. 아마 얼마 안 있어 이놈도 후덕한 지인 손에 몰라보게 변할 것이다. 난 지인에게 말했다. 낯선 개를 두 마리나 그것도 새끼까지 거두었으니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한데 지인은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다. 한 마리 있는 것도 불임수술을 했는데 새끼가 다섯 마리이고 어미까지 관리와 처리가 신경 쓰이는 눈치다.요즘 뉴스에 사나운 개에게 물리는 사고가 자주 나온다. 집 나온 개는 또 얼마나 많고. 지금 애완견 키우는 게 열병처럼 번져있다. 반려견이란 이름까지 부여하고 너도 나도 개 들여오는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다. 좀 의아한 것이 자식도 힘들어하면서 개에게 쏟는 정성은 어찌 그리 지극하냐는 하는 것이다. 집에 개가 있으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둘이 사는 경우 같이 며칠 집을 비우려면 애완견 때문에 제약이 많다. 위생문제 등 보통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지인 집에 든 개들이 버림을 받은 것인지 다른 이유로 집을 나오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런 개들이 얼마나 많은가. 유기견을 보면 이해가 안 된다. 유행만 좇을 것이 아니고 사후관리도 철저히 해야 하지 않을까.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2-12-16 11:34

“그랴 거기서 봐”어머니는 막걸리 친구들과 다음날 점심 약속을 하고 계셨다. 아직은 6학년인 새댁들과 읍내에서 셋이 만나 서로 돌아가면서 지갑을 열고 막걸리 한잔으로 심심함을 달래신다고 젊은 아낙들이 나를 끼워줘서 고맙다는 말도 빼놓지 않으셨다.이런 얘기 저런 얘기 쏙쏙 꺼내면서 집 얻으러 다니느라 오밤중에 산 넘고 물 건너 고생한 얘기를 들려주시면서 들숨과 날숨을 연거푸 쉬고 계셨다. 그런데 옛날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었더니 지금까지 잘살아 온 것 같다고 웃음으로 화답을 해주신다.■ 발끝에 밟히던 시체들, 피란길의 충격 6 25때 일곱 여덟 살 이었는데 고향 보은에서 상주까지 피란 가느라 보따리 하나씩 들고 터벅터벅 걸었다. 아후 말을 할 수가 없어. 난리난리 그런 난리가 없어. 겨울에 피란길이 얼마나 추워? 발끝에 밟히던 시체들, 냇물에 둥둥 떠내려가던 돼지사체들. 어린 나이에 죽음의 현장을 여과 없이 코앞에서 직면하는 살얼음판 같던 시절, 그 시절도 견뎌낸 성장통 덕분인지 우리는 살면서 고단한 통과의례를 잘도 버텨냈다. 여든이 넘으니 인생길에서 문리(文理)가 트여 우리 노인네들은 세상의 진리를 학교 공부와 상관없이 터득했다. ■ 열여덟 살, 백화점 물 좀 먹었지작은 아버지가 나를 데려다가 공부시켜준다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 집으로 갔다. 작은 집은 잘사는 집이라 나는 초등학교때 부터 밥값 하느라 그 집 애기도 보고 집안일도 거들면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청주여중에 다니다가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백화점에 들어갔다. 그래도 여중 다니던 기억이 머릿속에 있으니 큰 추억이다. 백화점에 있을 때 보따리 장사 보부상 할매들이 나한테만 와서 물건을 주섬주섬 갖다놓고  “아가씨 이것 좀 끼어 넣고 팔아줘” 하더라고 내가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때라 순진해보여서 그랬을거야. 나는 우리 엄마가 가난해서 보부상 할매들도 가난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엄마 생각이 나서 슬쩍 슬쩍 물건을 끼워서 진열해주기도 했어. 동변상련이라고 그 마음을 알겠더라고. 먹고 살겠다고 애쓰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 눈치껏 할매들 물건을 끼워서 팔아줬지. 순전히 우리 엄마 생각해서 그랬던거야.■ 시댁으로 호적을 옮기다, 뒷모습 둔둑했던 남편 스물한 살에 총각네 잘산다고 해서 시집와 봤더니 다 팔아 잡숫고 빈털터리였다. 시댁 동네에서 김주사댁이라고 하면 부잣집으로 소문났지만 옛말이더라고. 처음 선을 본 날은 우리 영감이 양복입고 왔는데 뒷모습이 둔둑하고 듬직해보였다. 살아보니 천하의 양반이야. 스물한 살에 첫눈에 보면서 듬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60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생전 말수가 없고 나 하자는 대로 하는 분이었다. 군청 산림과에 다녔는데 그 때는 산림과면 최고 끗발이 좋은 과였다. 결혼할 때는 면서기로 시작했다. 나는 21살, 남편은 24살, 신랑 각시가 되고 시집 와서 종종 걸음으로 살림을 배우기 시작할 때 어머니가 “새아가 너가 밥해먹어라” 하시며 됫박을 나한테 맡기셨다. ■ 조카들까지 돌보던 새댁, 보따리 장사로 살림을 보태다남편은 끗발 좋은 산림과에 있었지만 교과서 같은 양반이라 술 사주면 술 받아먹는 정도는 했지만 눈먼 돈 한번 챙겨온 적이 없었다. 그 시절은 낭구(나무)하는 게 돈 벌이였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감독하는 남편한테 막걸리를 잔뜩 먹여서 남편이 자전거타고 오다 저수지에 빠져서 우리 영감님이 물귀신에 끌려가다가 겨우 살아난 일들도 있었다. 휴... 십 년 감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잘 참고 성실하게 근무해서 정년퇴직까지 깨끗하게 공무원으로 마감했다. 내가 장사를 하게 된 건 시부모님 두 분에 우리 애들, 거기에 조카들을 키울 수밖에 없던 안쓰러운 사연이 있었다. 우리 친정 올케가 일찍 세상 떠나고 친정엄마도 일찍 돌아가셔서 그 집 조카들을 다 키울 수가 없어서 둘을 우리가 보살피게 되었다. 애들을 고아원에는 보낼 수 없어서 둘은 다른 집에 보내고 둘을 데리고 왔다. 시어머니께 “어머니 조카들이 불쌍해서 어째요”말씀드리니 어머님이 두말 않고 “데려와라”하셔서 같이 살게 되었다. 참으로 인정 많은 양반이셨다. 어찌나 고마운지 어머니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점잖은 분들이셨고 돌아가실 때 선산에 모시러 상여 뒤를 따를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었다. 요령소리에 묻혀서 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없는 살림에 인품 지키던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을 알기에 떠나보내는 길이 애처롭고 가슴이 저렸다. 열 식구가 살려니 내가 보따리 장사라도 시작했어야 했다. 남편 월급봉투만 보고 살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쓰던 가계부가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여 50년 묵은 가보가 되었다. 하루도 허투루 살 수 없던 때였다. ■ 우리 부부 夫唱婦隨(부창부수)이야기 한 소절여러 식구가 살아야 하다 보니 세 얻기도 쉽지 않았다. 셋 방 3만원을 얻으려고 곗돈을 부었다. 전세 3만원, 그때 남편월급이 4,500원이었다. 그때 곗돈이 500원인가? 곗돈을 타서 우리 영감님 보고 “그 돈 가져다가 방 얻어요”하면서 계약하라고 돈을 줬다. 그런데 아 글쎄 다음날 기막힌 일이 있었다. 남편이 방 얻을 곗돈을 쓰리를 맞았다. 소매치기를 그때는 쓰리꾼이라고 불렀다. 내가 남편보고 “여보 계약 했어요? ”했더니 남편이 말을 안하고 양복 주머니를 보여주었는데 아이고 주머니에 쭉 그어놓은 칼자국이 있잖아. 나도 그 꼴을 보고 기가 막혔지만 어쩌겠어.“아이고 쓰리 맞았네” 라고 지나가듯이 한마디 던졌다. 남편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 것인가. 나보다 몇 갑절이나. 거기에 내가 불난데 부채질 하듯이 쏘아댄들 사라진 돈이 돌아올 것도 아니며 남편도 더 속이 상하고 나도 부아가 더 치밀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저 무심한 듯 쓰리 맞았네 하고 말았더니 우리 부부는 그날의 일을 잊었다. ■ 휴...문패에 남편 이름을 달기까지전세로 살다가 우리 집을 가질 마땅한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갑자기 돈이 있어야지. 할 수없이 친척들 신세를 져야 되서 막내 작은 아버지에게 부탁하려고 길을 나섰다. 그때 교장선생님으로 계셨는데 그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묘금리 어디쯤인데 겨울 동짓달이라 캄캄하더라고. 날은 왜 그리 추운지...우리 막내가 젖 먹을 때라 젖을 물려야 하는데 젖이 퉁퉁 불었어. 날은 춥고 초행길이라 울적하긴 했지. 그런데 그때는 그런 마음도 사치야. 빨리 작은 아버지를 뵙고 집 살 돈을 빌리는 게 내 살길이었어.동네에서 여기저기 해매는 데 초롱불이 반짝이는 집이 보여서 찾아들어갔지. 할아버지랑 손자로 보이는 두 이가 가마니를 짜고 있었어. 이 00동네 교장선생님 사택 찾는다고 했더니 “이 아줌마 모시고 그 집 찾아드려라” 하시는거야. 청년이 호롱불을 들고 첩첩산중을 넘어 작은 아버지 집을 찾아갔어. 그런데 세상에 가도가도 얼마나 산이 깊은지 말도 못해 겨우겨우 산 넘고 작은집을 찾았어.작은 아버님이 술을 좋아하셔서 거기 구판장에 들러서 막걸리 한 병 들고 작은 아버지 댁으로 갔지. 작은 아버지가 그 밤에 내가 왔으니 깜짝 놀라서 “아니 아가야 이 밤중에 웬일이냐”그래서 저간의 사정 이야기를 했지. 그랬더니 작은 어머니보고 융통해오라고 하셔서 작은 어머니가 돈 5천원을 빌려주셨어. 그 밤에 불쑥 찾아가서 돈을 빌릴 수도 있고 은인이지.나는 빨리 갚는다고 성급히 말하기보다 곗돈 부어서 갚겠다고 1-2년 후가 될 수도 있다고 딱 부러지게 솔직히 말씀드렸어. 약속을 못 지키면 작은 아버지께 불손한 상황을 만드는 거라 확실하게 말하는 게 필요했지. 내 성격이었어. 작은 아버지가 “나 같으면 안 받아도 되는데 작은 엄니 때문에 어쩔 수 없다”빌려주시는 것만도 황송한데 무슨 말씀이신지...나는 돌아오는 길 너무 좋아서 그 칠흑 같은 밤도 두렵지 않았다. 글쎄, 여느 아낙 같으면 그 고생을 하고 젖이 퉁퉁 부운채로 돈을 빌려나오는 발걸음이 서글플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저 고맙고 신났다. 힘들게 어렵사리 돈을 얻었지만 그 돈으로 집을 사고 우리 식구들 눈치안보고 살 수 있다. 젊은데 뭘 해서든 돈은 갚으면 된다. 뭐가 걱정인가. 열심히 살면 되지...너무 좋았다. 그때는 마음이 힘든 것 보다 퉁퉁 불은 젖몸살이 더 아팠다.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님이 밤새 막내를 돌보느라 보리쌀 뜨물에 사카린 타서 밤새 먹이셨다. 인품 좋은 어머니는 “갓난쟁이를 두고 젖 짜는데 얼마나 고생했니 시집 잘 못 와서 고생해서 어쩌니.”어머니의 그 말씀 한마디에 고단했던 발걸음이 다 녹아내렸다. 우리는 곧장 그 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한 집에서 둘째가 “할머니 응가는 어디서 해?”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우리 새끼 아무데나 눠도 돼. 니 맘대로 눠”하시면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셨다. 애들 데리고 셋방살이 할 때 아이들이 똥오줌 누는 것도 눈치 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둘째가 할머니한테 똥 어디서 누냐고 물을 때 우리 어머니 억장이 무너졌나보다. 어휴 그 말을 다 어디다 해.  나는 장사하고 남편이 봉급 타오면 곗돈 넣고 시골이라 나가면 채소며 고추도 주고 인심이 좋을 때라 허리띠 꽉 졸라매면 돈이 차곡차곡 모였다. 그래서 가계부를 50년째 쓰고 있다.내 속옷 한번 제대로 사 입지 못하고 빨랫줄에 널린 축 늘어진 남편 메리야스 중에 하나는 내가 입던 것 이었다. 그래도 아침마다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은 먹이고 입히는 거 소홀히 할 수 없어서 나를 잠시 잊기로 했다. 돈을 모을 때는 집 짓는 것 같았다. 맞지. 집 살돈 빌려온 돈이라 집 짓는 거랑 다름없었다. 고단해도 힘이 나던 때다.  ■ 다시 청춘인 시골할매의 하루 영감님을 3년 전에 보내고 처음에는 적적하고 쓸쓸하데. 그래도 애들이 수시로 와서 나를 챙겨주면서 위로가 됐어. 그런데 어차피 인생이 둘이 살다 하나가 먼저 가는 건 자연의 이치라 이제는 혼자서도 잘 지내고 동네 동상들이랑 막걸리 한잔 씩 하면서 유유자적이네.100세 시대라니 여든이 넘은 나는 인생의 8할을 넘게 살았다. 겨울이라고 한들 아니라고 손사래를 저을 수도 없다. 하루하루는 고단하고 길었는데 우찌 80년은 후루룩 지나왔다.엊그제 여중 다니던 계집아이였는데 문패에 나란히 같이 섰던 남편이름은 먼저 가고 나만 남았다. 덧없어 보여도 지난 세월 속에서 사랑하며 행복에 젖고 슬픔에도 잠겨보았다. 수많은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골 깊은 주름은 훈장처럼 보이고 아직도 영민한 눈매, 입가의 미소는 여전하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랄까. 거울 앞에선 내가 부끄럽지 않다. 햇살에 반짝거리던 단풍잎들이 한 바탕 비를 맞더니 오히려 곱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낙엽 되기 전 절정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도 한 겨울이 아닌 만추의 한 가운데 섰다고 자부하련다. 어쩌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에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많은 때, 바로 지금이다.  어머님전 상서집 뒤뜰에 가보면 언제나 장독대에 놓여진 정안수를 보면 울컥해집니다. 자나 깨나 자식들 잘 되라고 정안수 떠놓고 기도하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사랑을 어디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기도 덕분에 저는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기고 지금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군대에서 행군하다 절벽에서 미끄러져서 낭떠러지로 떨어졌는데 천운으로 통나무가 가로질러 놓여져 있어서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천운도 만났습니다. 3년 전 대장암 수술 받고 지금도 회복중 이지만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병, 모두 놀랐지만잘 치료 받고 현재 건강하게 잘 살아있는 것도 어머님이 간절히 기도드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명의 위기가 왔을 때 구해주신 분은 어머니라고 믿고 있습니다.뒤뜰의 정안수가 저를 살리고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언제부턴가 어머니 얼굴에 주름이 자꾸 깊어져서 제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 있어주신다면 바랄게 없습니다. 아픈데 있으면 숨기지 말고 얼른 말씀만 해 주세요. 저희들이 바로 고쳐드릴게요. 어머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2022년 깊은 가을날, 둘째아들 올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주민기자 | 김경희 시민기자 | 2022-11-18 1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