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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우연이다.인생의 행로가 바뀌는 큰일도 그러하거니와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도 우연에서 비롯된다.물맛 좋기로 소문난 약수터가 우리 동네에 있다. 그곳은 물통을 줄 세워 놓고 그늘에서 땀을 식히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물맛이 거기서 거기지 뭐, 날도 더운데 참 유난스럽다. 그냥 생수 배달해서 먹으면 편할텐데…….”하고 관심조차 없어했다. 그러던 초여름 어느날 그 앞을 지나가다 때 마침 내린 소나기로 한층 더 싱그러워진 숲을 올려다보았다. 자꾸 보면 정이 든다고 했던가. 곁눈질만 하던 곳이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다니던 곳인 양 자연스럽게 발길이 옮겨졌다. 등산로 표시로 달아놓은 붉은 리본이 꽃처럼 고왔다. 조붓한 산길을 조금 올라가니 함초롬한 맥문동 꽃밭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한 듯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짙은 보랏빛 꽃을 손에 꽉 움켜쥐면 보라색 물감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 꽃 몇 줄기 뽑으려고 오르다 시작한 등산이 요즘은 가장 가치있는 일이 되었다.처음 며칠은 삼십 분, 그 다음은 한 시간, 그러다 조금 더 멀리 그렇게 늘려간 거리가 대전시가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정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진득하지 못해서 작심하고 세운 계획도 며칠 못가서 포기하곤 했는데 이번엔 제법이다. 싫증을 내지 않으니 말이다. 집 가까이에 있어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긴 하다. 한여름에도 아름드리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울창한 숲에 들어서면 더위가 싹 가신다.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 건너는 날쌘돌이 청솔모, 차랑차랑한 매미소리, 수풀 사이의 다소곳한 풀꽃들 짝사랑하듯 거친 소나무둥치를 안고 오르는 담쟁이의 순애보, 솔향기, 바람소리 어느 것 하나 이 무더위 속에서도 자연은 묵묵히 자신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울 일인가.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싶어 한다고 한다. 나누고 싶지 않은 비밀의 화원이다. 고즈넉한 숲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시간들이야말로 내 영혼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기억 저편의 시간들과 마주하며 토닥토닥 위로를 주고받는다. 삶의 터전을 통째로 옮긴 터라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기도 하지만 떠밀리듯 단체로 움직이는 여행이나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가다보면 정작 내가 얻고자 했던 소중한 것들을 찾을 수 없다. 숲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없고, 아낌없이 부어주는 눈부신 햇살과도 눈맞춤을 할 수 없다. 남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는 세상살이가 내겐 너무 버겁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그래서 나는 내 마음의 높이까지만 오르려 한다. 소박하지만 결코 남루하지 않은 삶, 안빈낙도를 꿈꾼다. 인생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비단옷을 입었는지 누더기를 걸쳤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설자리 앉을자리 가려가며 나를 다스릴 수 있으면 어설프게 갖춰 입은 비단 옷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지혜가 부족해서 실수의 연속이었던 지난날들에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그 속에서 얻어진 교훈도 있었을 테니 나름의 의미는 있다 하겠다. 흘러간 시간의 깊이를 반추하며 또 어디론가 흘러갈 미완의 여정을 준비한다.대전 둘레길 여러 산중에서 계족산성이 가장 유명하지만 나는 우리 동네 뒷산 갈현성을 자주 간다. 오천년 우리 역사 중에서 가장 소외받은 백제의 전설이 깊이 잠들어있는 듯하다. 눈을 감고 귀를 모으며 호연지기를 꿈꾸었을 백제 장수의 함성과 그를 사모하는 아리따운 여인의 애달픈 노랫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깊이를 잴 수 없는 시간에 갇힌 옛 성 허물어진 돌 틈 사이에 다람쥐 한 쌍이 숨바꼭질 한다. 가을에 숨겨놓았던 도토리가 다 떨어졌는지 등산객이 버린 과일껍질에 눈독을 들이는 것 같다. 작은 몸짓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는데도 나랑 눈이 마주쳤다. 쪼르르 도망가며 작은 돌탑의 돌멩이를 굴려 한낮의 적요를 깨운다.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처서가 지나고 백로가 가까워진 여름 끝자락, 아직도 늦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그늘이 있기는 하나 한낮에 산을 오르는 것은 고행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습관처럼 되어버린 산행에 제법 재미가 붙었다. 그런 내가 대견하고 눈에 띄게 가벼워진 몸이 고맙다. 어제 오늘 그랬듯이 별일 없으면 내일도 등산화 끈을 당겨 매고 집을 나설 것이다. 재촉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가고 오는 계절,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 오늘따라 더 높아보이고, 영글어가는 밤송이도 제법 튼실해 보인다. 떡갈나무 잎새도 벌써 누른빛이 감돈다. 녹음 푸르던 숲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그 고운 잎들은 또 소리없이 지고, 여름 철새들 수북한 낙엽을 밟으며 가을 산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섭리에 따라 채워지고 비워지는 아름다운 자연, 하얗게 비워진 숲이 동면에 들어도 나목들은 초연하게 자리를 지킬 것이고 다람쥐도 산꿩도 그곳에서 겨울을 날 것이다. 바람소리 황량한 겨울산을 오를 엄두는 안 나지만 함박눈 내리는 날 하얀 산이 손짓하면 그 유혹은 떨치기 어려울 것같다.우연히 겹치면 연연이라고 한다. 사람과의 인연이든 사물과의 인연이든 살면서 조우하는 많은 것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일 또한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다시 맞는 가을에는 내 안의 나를 성찰하며 더 나은 삶의 지평을 열어가야겠다.우연히 들인 습관 하나가 긍정의 힘을 발휘하여 여름 한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또 어떤 우연이 미지의 세계로 나를 데려다 줄지 그 우연도 자못 기대가 된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3-02-09 22:39

1950년 이순복 군북면 출생 서른여섯 살, 지금 우리 3남매들이 30대 중반이다. 36살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민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식장산 선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데 그 꼬마가 칠십을 넘어 이제는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추소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처로 나와 보겠다고 대전으로 나와 목재소를 시작하면서 내실 있게 사업을 일구고 노년의 시간을 수시로 고향을 오고가며 그리움에 젖곤 한다.어제도 부소담악에 다녀오면서 수몰되기 전 모래사장에서 친구들과 놀던 때를 그리워하고 차를 돌려 나왔다. 겨울의 쓸쓸함 속에 사라진 고향대신 아름다운 비경이 나를 반겨주어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었다.우암 송시열 선생이 경치가 금강산처럼 아름답다고 소금강이라고 불러주었다던 부소담악이 이제 옥천의 명소가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득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고향마을이다.덕분에 고향 같은 어머니도 떠올리며 시름을 잊는 한 나절을 보냈다.외할머니와 어머니■ 열다섯, 열일곱 살의 두 형제-서른여섯 살의 어머니를 잃다복수가 차오를 대로 차오른 어머니는 간밤 내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셨다.마침 방학이라 추소리 집에 와 있던 우리 형제는 급히 외할아버지를 불렀고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발걸음을 쫓아오지 못해 늦게 숨을 헉헉거리며 대문을 들어선 외할머니를 보자 손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불렀다.“어머니 우리 순복이 순철이 잘 키워주시오” 외할머니 귀에 겨울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숨이 끊어져가며 한마디 남기고 돌아가셨다.나는 하늘이 꺼지는 것 같았고 형님은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딸을 잃은 외할머니의 곡소리는 밤새 온 마을을 뒤덮었고 외할아버지는 뒷모습만 보였지만 움찔하는 어깨만으로도 흐느끼고 계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어머니의 초상날, 집 앞에 채알을 치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분주했다.그런데 보이지 않는 단 한 사람.바로 아버지였다. 워낙 호색한이었던 아버지는 하루에 옷을 세 번씩이나 갈아입었는데 여자를 만나러 나갈 때마다 치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파렴치한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판장을 하시며 우리를 돌봐주셨다. 장례 이튿날 아버지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오셨다. 어디선가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숨을 곳도 제대로 찾지 못한 아버지는 죄인마냥 상복을 입고 손님을 맞았다.상여가 나가는 날 요령소리에 묻힌 아버지의 흐느낌을 들었다. 속죄의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말의 양심으로 나는 착각을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묻고 다음날부터 다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둥 여전한 작태를 보였다. 어머니를 선산에 묻고 내려오는 길, 형님과 두 손을 꼭 잡고 우리는 반듯하게 잘 살아보자고 다짐을 했다.우리는 다시 개학 후에 옥천읍으로 돌아가고 삼양리 외갓집으로 짐을 옮겼다. 외할머니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우리 형제는 사람구실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가정을 등한시한 아버지 슬하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외할머니는 친손주 여섯과 같이 살고 계셨는데 외손주인 우리 둘을 받아주시고 학교 갔다 오면 매일 따뜻한 밥을 아랫목에 넣었다가 꺼내주셨다.일찍 세상을 등진 가여운 딸에 대한 그리움을 우리들에게 베푸셨겠지만 우리는 외할머니 덕분에 성장통을 크게 앓지 않고 사람구실 하면서 살 수 있었다.지금도 내 그리움의 원천은 딱 두 분이다.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지만 나이 들어가는 내 얼굴을 잊으셨는지 도무지 나타나지 않으신다.돌 사진■ 대처에서의 고독을 치열하게 살면서 되갚다옥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에 나와 일가 어르신이 운영하는 목재소에 취업을 하고 형님은 교대에 들어가셔서 교장선생님으로 퇴직을 하셨다. 모두 외할머니 덕분이다.목재소에서 일을 배우면서 나는 십여 명의 직원 중 제일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을 했다. 대패질 하나도 허투루 배우지 않았다.나무에 대한 공부도 따로 하고 집 짓는 곳에는 수시로 따라다니면서 나무를 익혔다.나무는 죽은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의 몸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잘 다루어야 그 값을 하고 쓰임새를 다한다. 대패질을 할 때도 소중한 몸처럼 살살 다루어야 그 결을 살려 본연의 역할을 잘 해낸다.나무 하나만으로도 집안의 분위기가 바뀌고 온기가 느껴지는 것을 우리는 다들 몸소 체험을 했다. 나무가 주는 향기 또한 마찬가지다.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나는 자연의 섭리를 지닌 존재라고 생각했다.일할 때마다 함부로 다루지 않았고 내가 가진 무기는 정직과 성실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나는 그저 하루하루 단 한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외할머니에게 효도하고 싶었다.8만원의 월급을 받아서 7만원을 외할머니에게 드리고 나는 만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 외할머니는 곗돈을 부어주시고 몇 년 후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돈으로 불려놓으셨다.그 돈으로 나는 스물여섯 살에 결혼을 하고 대전에 작은 집도 마련했다.외할머니는 우리 형제에게 생명의 은인이며 인생의 귀인이다. 목재소를 운영하던 일가 어르신이 고령이 되고 누군가 일을 맡아야 해서 어르신이 내가 적임자라고 나에게 목재소를 맡기셨다.물론 일가친척들이 일을 하고 있던 곳이라 가장 촌수가 먼 내가 목재소를 맡으면서 잡음도 있었지만 워낙 성실히 일했던 덕분에 그 잡음은 오래가지 않았다.건설경기가 한창 좋았던 때라 우리도 덩 달아 그 물결을 타고 돈도 모았다.40년간 목재소를 운영하면서 정직과 성실 하나만으로 승부를 걸어서 거래처도 많았고 치열하게 살아낸 덕분에 우리 3남매도 하고 싶은 공부 마음껏 하고 아직은 30대 중반이지만 모두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우리 자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그리고 사업하는 남편 옆에서 마음 졸이고 자녀들 교육과 알뜰한 살림살이를 잘 챙겨준 아내 덕분에 나의 노년이 풍성하다.아직도 젊은 나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자체가 쑥스럽지만 멀리도 왔다.70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보면 얼마나 많은 기억과 추억들이 알알이 맺혔는지.고뇌에 찬 날들도 수두룩했지만 파안대소하면서 인생이 내 것 인양 자축하는 날도 있었고 우리 아이들이 입지를 키워가는 것을 보면서 ‘이 맛에 사는 구나’ 하면서 우리를 내박쳤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그리움으로 되갚기도 했다. 아버지, 당신도 당신 나름의 고뇌가 없었을까 집안을 등한시 하고 여자 품에서 해맨 이유가 있었겠지…. 그리 생각하니 안쓰러운 양반이다.이웃들에게 해마다 설 명절이면 봉사의 마음으로 나누는 떡국거리들■ 안식의 날들치열하게 살면서 얻어내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르고 떠난 아버지가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이다. 형님의 교장 정년 퇴임식 날 우리도 그 자리에서 축하해주었지만 형님과 나는 수십 년 전 어머니를 선산에 묻고 내려오던 그 날처럼 둘이 손을 꼭 잡았다.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아우야 우리 잘 살아왔구나. 앞으로 남은 인생 어머니와 외할머니한테 누가 되지 않게 그리움만 남기고 잘 살자” 형님이 전한 무언의 각오를 나도 알아차리고 그렇게 살고 있다.이제 둘 다 시간 여유가 있어 형님과 같이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찾을 때는 예전 소년처럼 손을 꼭 잡고 산을 오른다.지금의 청년들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모보다 소득이 적고 부모보다 더 먼저 늙는 세대라는 끔찍한 터널을 지나는 청년들.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기막힌 세대의 청년들이 좀 더 힘을 내기를 바란다. ‘우리처럼 어려운 세대도 살아왔는데 너희들은 배부른 소리 한다’ 라고는 말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우리 청년들이 희망은 잃지 않기를 바란다.열심히 살면 답은 어디에든 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곳에서만 답을 구하려 하면 시간이 많이 걸려 지칠 수 있다. 인생은 준비하는 자에게는 항상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때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준비하면서 때를 기다리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나만 잘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이웃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잘 살 때 나의 안위도 같이 보장되는 것이다. 나도 사회의 어른으로 우리 청년들이 희망의 부재에 살고 있는 이때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다면 내 인생이 그리 허허롭지는 않을 것이다.크고 작은 후원을 수십 년 간 하고 숨은 봉사도 내내 해왔던 이유가 바로 나와 형님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성장해야 하는 작은 손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심어주고 싶었던 그 마음 하나다.입춘이 내일 모레다. 자연은 소리 없이 그 때를 여지없이 알아차린다.한파가 지나고 입춘이 찾아와 봄바람을 불어주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춘풍이 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몇 년째 배우고 있는 서예.오늘은 먹을 진하게 갈아서 네 글자를 한 자 한 자 여느 때보다 정성껏 써보련다.바로 입춘대길 (立春大吉)!!! 마음의 고향, 부소담악 

주민기자 | 김경희 시민기자 | 2023-02-03 10:37

터키 감독 누리 빌게 세일란의 4시간짜리 영화 <윈터 슬립>은 관계의 나비효과를 다룬 영화다. <올드보이>도 마찬가지다. 무심코 내 던진 한마디가 주인공 대수를 20년 동안 독방에 가두고 처절한 복수가 펼쳐진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 한마디가 세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정욱 감독의 <좋은 사람>은 ‘나는 붕괴 되었다’라고 중얼거리던 <헤어질 결심> 박해일의 붕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영화다. <헤어질 결심>의 붕괴는 내게는 추상적으로 다가 왔다. 스타일리스트 박찬욱 감독과는 <올드 보이> 이후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정욱 감독의 <좋은 사람>은 우연히 팟캐스트에서 듣게 되어 알게 된 영화다. 물론 영화 잡지에서 잠깐 평점을 살펴 보고 무심코 지나친 기억은 있다. 부산 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의 각본을 제치고 상을 받았다길래 일부러 본 영화다. 씨네 21 평론가들의 평점도 수수한 편이라서 그럭저럭 만든 영화라고 관심 밖으로 치워 둔 영화였다. 별점이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지만 3과 4점 사이의 영화들은 고만고만하게 만든 거라 사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적어도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혹은 자기 프레임도 정리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로 혹은 소재만 가지고 만용을 부리는 감독들이 있다. 미안하지만 관객수로 보답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좋은 영화지만 관객이 지나치는 영화들도 있다. <좋은 사람>은 후자에 해당 된다. 엔딩 크레딧 전의 마지막 씬은 마음을 오랫동안 먹먹하게 하고 실존 캐릭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안부를 궁금해하게 한다.좋은 영화는 영화 속 캐릭터를 좀비가 아닌 존재에 가까운 인물로 복원 시키고 더 나아가 삶의 현장에서 대응할 수 있는 공감능력을 확장하게 해야 한다. 영화는 관객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생존의 현장인 셈이다. 물론 치열한 생존의 냄새를 지우고 상상의 공간을 가게 하는 판타지 기능도 좋은 영화의 범주에 들긴 한다.<좋은 사람>은 작은 사건이 점점 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영화다. 동시에 견고했던 개인의 신념과 태도가 서서히 무너지고, 액션과 리액션이 반응할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영화다. 아주 사소한 의심으로 발화된 사건이 소화 된 사건이라 생각한 순간 잔불처럼 일어나는 편견의 붕괴는 곤경에 처했던 인물의 프리퀄을 다시 마주보게 된다. 주인공 정호의 가족은 붕괴되고 있지만 학교 교사의 역할은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나름 좋은 교사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도난 사건이 나면서 용의자로 지목된 세익을 추궁하면서 점점 더 실타래가 얽히기 시작한다. 동시에 주인공이 판단하고 있는 진실이 에러가 되고 마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다. <좋은 사람>이 확증편향의 씨앗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영화<다우트>는 확증편향이 신념이 되면 얼마나 가혹한 사람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 수녀는 어느 날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한 친구가 결석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학교의 교장이 연관되었다고 생각하고 탐문을 시작한다. 증거는 비어 있지만 알로이시스 수녀의 의심만이 확실한 알리바이면서 교장을 공격하는 수단이 된다.한번은 어느 술자리에서 후배가 에픽하이 멤버 타블로는 거짓말쟁이라고 주억거렸다. 한참 타블로가 버클리 음대를 다니지 않았다고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무죄로 결론이 난 이후였다. 하지만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모임)는 판결을 인정하지 않고 타블로를 공격했다. 그리고 타블로는 결백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확증편향의 서늘함을 다시 경험했다.영화 <헌트>는 유치원교사로 일하던 주인공이 한 소녀를 추행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결국 누명을 벗어난 이후 떠난 사냥터에서 그는 정체불명의 이웃이 자신을 향해 쏜 총에 망연자실해 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안심하지 마라’는 경고 메시지가 담긴 단호한 총알이었다.언론의 잘못된 판단으로 신문 기사에 실린 후 여론 재판의 도마에 올랐다가 마구 난도질 당한 뒤 어떤 이들은 잠적하거나 죽음을 각오하거나 혹은 후유증을 감수하고 살아간다. (타진요 사건 이후 타블로의 아버지는 암으로 형은 직장을 포기한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 펜이 진실의 칼이 아니라 망나니의 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과 관계하다보면 무수히 오가는 설왕설래에 일일이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 까닭에 곳곳에서 말이 뭉쳐서 벌어지는 눈사태가 발생한다. 현실에서도 자신의 판단이 진실이라고 고집부리는 아스팔트 부대들이 존재하고 결국 그 편향성은 유튜브 매체를 통해 견고하게 강철대오를 유지하고 있다.영화 <좋은 사람>은 모든 엔트로피가 정리되었다 싶은 순간에 어퍼컷을 치고 빠지는 영화다. 온갖 혐의의 똥물을 뒤집어 썼다가 빠져 나온 세익이 다시 교실에 들어와 앉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세익은 고개를 숙이고 있고 친구들은 평온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도난 사건으로 부각 된 세익의 존재감은 다시 지워지기 시작했고 삶은 계속 되고 있었지만 왠지 불온했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3-02-03 10:27

의견 | 옥천신문 | 2023-01-13 11:27

“음….”추억에 잠기시며 먼 산 바라보시는 박 선생님일흔이 훌쩍 넘었는데도 어머니 생각만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서 참을 수가 없다는 선생님  말씀에 마음으로 같이 울었다.공무원 첫 직장이 이원면사무소, 아내와는 같은 사무실에서 앞뒤로 앉아 매일 보면서 정이 들어 결혼까지 하시고 사모님도 10여 년 전에 퇴직을 하셨다.병원 가까운 곳에 있어야 돼서 평일에는 대전 집, 주말에는 옥천 집을 다니시는 두 분이 시작하는 노년도 아름다웠다. 겨울을 더 아름답게 그려주는 눈처럼 살고 계신 박 선생님.동이면 박성수(1952년 생)■ 열다섯 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동이면 평산리에서 태어난 나는 외할머니께서 고향을 잊지 말라고 아명을 평산으로 지어주셨다.“평산아 평산아” 불러주셔서 나는 지금도 뿌리를 잊지 않고 있다.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사업할 기회가 생겨서 대전으로 나왔지만 내 고향 평산리는 내 마음의 안식처이며 어머니 품이다.어머니께서는 몸이 너무 허약하셔서 3남매밖에 낳지 못하셨다.내 유년의 기억 속에 담긴 어머니의 모습은 내내 기침하시던 상기된 얼굴이다.어머니, 아픈 기억만 남고 그리운 추억은 떠올리기 어려워서 간간이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만 나타나주시지 않으니 마음만 간절하다.초등학교 4학년 무렵인가 어머니께서 “평산아 용각산 사다다오” 하시며 구겨진 종이돈 300원을 주셨는데 철이 없던 나는 그 300원으로 기억도 안 나는 과자를 몇 봉지 사들고 와서 누님과 형과 같이 먹었다. 새우깡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그 300원이 어머니의 생명줄이었음을 알게 되고 통곡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어머니는 폐암 말기셨는데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단계라 그저 집에서 용각산으로 버티고 계셨다. 기침이 쏟아질 때는 용각산을 큰 숟가락으로 떠서 입안에 넣으시고 오히려 숨을 제대로 못 쉬셨다. 기침이 잦아들기는 했지만 숨을 못 쉬는 형국이니 그 고통을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마루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보고 대문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먼발치에서 보아도 어머니의 죽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누님이 와서 어머니를 안은 채 통곡을 하고 밭일 나갔다 돌아오신 아버님의 절규가 이어졌다.나는 털썩 주저앉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밤마다 경기를 하면서 앓았다.용각산…. 그 용각산으로 과자를 사 먹었던 철없는 나에 대한 채찍질!밥도 먹지 않았고 내내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밖으로만 돌던 아버님 대신에 외할머니께서 나를 돌봐주셔서 다시 뿌리를 잊어버리지 않는 평산이로 돌려주셨다.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집으로 오시고 이복동생들이 태어났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을 귀동냥으로 들어야 했다. 결국 외할머니의 고군분투가 우리 3남매를 키웠다.누님은 일찌감치 방직공장에 가서 일을 하시고 야간고등학교까지 마치셨다. 철도공무원을 만나 결혼하시고 지금은 영동에서 잘살고 계신다. 형님은 교대를 가셔서 학교 교장으로 퇴직하셨다. 나도 대학진학은 형님 몫으로 돌리고 공무원이 돼서 밥벌이를 하겠다는 생각이 나의 스무 살 때 결정이었다. 면 서기로 근무하면서 아내를 만나고 고마운 아내 덕분에 40대에 퇴직하고 작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게 되었다.우리 3남매는 부모님의 부재 속에서 성장했지만 외할머니께서 고향마을의 든든한 느티나무처럼 건재해주셔서 우리는 성장통을 크게 앓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진정 ‘어른’ 이셨던 우리 외할머니, 김순임 어른. 생각만 해도 사무치는 그리움을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 이름 안에는 오숙자라는 나의 어머니의 이름까지 덧입혀져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다.■ 새 삶으로 도약, 공무원에서 사업가로 잘 살고 싶다는 성취욕구가 커서 한창 박봉이던 시절의 공무원 생활이 감옥 같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업을 시작했다. 대전에서 조명기기 사업을 하는 작은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면서 관급공사를 하던 작은아버지의 사업수완을 터득해나갔다. 친아들보다 나를 더 성실하게 보았던 작은 아버지께서 사업을 물려주셨다.작은아버지의 친아들인 사촌형님과의 갈등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나도 고민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사촌 형님은, 조카인 나에게 사업을 물려주시는 작은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고 작은아버지는 그 파열음을 단 한마디로 일축하셨다.“성수는 가게에서 손을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첫날부터 출근하면 가만히 놓인 조명들부터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다. 돈만 세는 일은 누구나 한다.” 나의 성실함을 인정해주시면서 형님과의 불협화음도 풀어주셨다. 우리 인생은 한 고비 한 고비 넘길 때마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일을 벌이고 크게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 우리 4남매한테 늘 강조하는 덕목이다. 욕심을 부린 만큼 감당해 낼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인생이 그리 만만치 않으니 작은 일부터 세심하게 진행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우리 4남매도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열심히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자기 몫을 잘 해내고 있다. 부모가 열심히 살아온 뒷모습을 우리 아이들이 존중해주고 저들의 삶에 좌표로 삼아주니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추억속의 은인 ‘노벨 평화상’ 반장님조명사업은 건설현장과 불가분의 관계다. 건축현장에도 당연히 우리 직원들이 투입 돼서 전체적인 그림을 같이 그리게 된다. 30년 전 인연을 맺고 그 때부터 우리 공사 현장에서 일했던 반장님이 한 분 계신다. 나보다 세 살 위인 누님뻘 되시는 분이다.현장에서 아침 6시에 집합이면 5시30분에 그 분이 소집한 분들 다섯 명을 데리고 가장 먼저 와 계신다. 겨울이면 따뜻한 차, 과일 등을 꼭 준비해오시고 함바집에서 부족한 간식들은 꼭 챙겨 오신다. 성실하게 일하는 건 당연하고 사이가 서먹한 사람들은 반드시 화해를 시켜서 일하는 현장의 평화주의자였다. 그래서 농담으로 자주하던 말이 “우리 반장님 노벨 평화상 줘야 한다”고 하면 형님같이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맞다. 여장부시라 누님보다 형님 같은 분이었다.지금은 조명과 건축 일을 우리 큰아들이 하고 있는데 큰아들 사업의 현장까지 아직도 건재하게 다니신다. 여든이 가까운 분의 열정과 성실함은 존경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 겨울의 백미는 ‘하얀 눈’아직은 70대라 할아버지도 아니고 아저씨도 아닌 애매한 나이다.지금 음악도 듣고, 읽고 싶던 책도 마음껏 읽고 마라톤도 살살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열심히 살았던 50년의 결실이 달콤하고 튼튼하다.아흔 넘은 대선배님들이 보시기엔 나도 아들 같지만 그래도 6.25전쟁 후 천막교실에서 코 질질 흘리며 공부도 해보고 고속도로 위를 달리며 청춘을 바쳤다. 열심히 일한 우리세대다.후배들에게도 “너희들에게 물려준 이 나라를 잘 지키고 바로 세워나가야 한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싶다.평일에 살고 있는 대전의 아파트에도 갈수록 아이들이 줄고 주말에 오는 옥천의 동네에서는 눈을 어디에 둬도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 어두운 짐작을 할 수밖에 없어서 안타깝지만 나부터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련다.사회의 선배로 굳건하게 나를 지키는 것이 우리 후배들, 우리 자녀들을 지키는 길이다.나도 곧 인생의 겨울을 맞겠지만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설경은 너무나 아름답다.그 눈이 없다면 겨울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찾을까. 찬바람만 불어 살을 시리게 한다면 겨울은 그저 앙상할 뿐이다. 그래, 나이 든 우리가 존재해야 세상이 굴러가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한겨울의 눈 같은 존재로 남은 여생 살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윗대 어른들의 전유물 인줄 알았던 ‘여한이 없겠다’ 라는 이 말을 나도 쓰는 것을 보니 나도 나이가 든 것은 어쩔 수 없구나.그렇다면 또 나이든 값을 하면 되지.이러면 이래서 좋고 저러면 저래서 좋은 자유로운 때라고 위로하련다. 가장 좋은 때는 언제나 ‘지금’이다. 주어진 날들을 값지게 쓰는 하루하루가 우리 인생을 윤기 나게 할 것은 자명하다.‘내일’보다 ‘오늘’을 더 아껴주는 날들이 모여지기를! 우리 집 소나무에 내려앉은 눈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설경이 이리 어여쁜지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한겨울의 눈처럼 인생의 백미 같은 날인 ‘오늘’을 온전히 품는 하루를 시작해본다. 아들편지 아버님께 아버님의 손때 묻은 사업현장을 맡아서 직접 일을 해보니 아버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지 더 깊이 알게 됐습니다.만나시는 분들마다 아버님과의 추억을 귀하게 말씀해주셔서 너무 자랑스럽습니다.아버님이 제 아버님인 것이요. 은퇴하셔도 여전히 건강하시고 마라톤까지...아버님은 정말 남자가 봐도 멋있는 남자입니다.제가 그 절반이라도 따를 수 있을까요.제 인생의 롤모델이신 아버님.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사업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큰 아들로 손색이 없도록 정진하겠습니다.아버님 감사합니다.건강 꼭 지켜주시고 봄날에 아버님과 마라톤 같이 동행하겠습니다.사랑합니다.큰 아들 유석올림.

주민기자 | 김경희 시민기자 | 2023-01-13 11:18

역사는 현실의 거울이다. 역사의 교훈을 거부하는 민족이 번영을 희구하는 것은 뜬구름 잡기다. 역사의 교훈은 그래서 위대한 반면교사다. 첨단시대를 걷고 있다고 자부하는 금세기의 알량한 위정자들에게도 그래서 유효하다.다음은 사마천의 『사기』, 「오기열전」의 내용이다.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병법(兵法) 하면 ‘손자(孫子)’와 ‘오기(吳起)’를 꼽는다. 그 「오기열전」을 따라가 보자. 오기는 장수가 되자 천한 신분의 병사들과 같은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침상도 물론 같은 것을 사용했다. 한 병사가 종기가 생겼다. 그때 오기가 그 병사의 고름을 빨아 주었다. 병사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는 소리 내 울었다. 어떤 사람이 그리 슬피 우는 연유를 물었다.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예전엔 오공(吳公)께서 그 애의 아버지 종기를 빨아 주더니, 남편은 자신은 돌보지 않고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었다. 오공이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니, 이 아이도 아버지처럼 죽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서럽게 우는 것이다.”위(魏)나라 문후(文侯)는 오기가 병법뿐 아니라 청렴하고 공정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고, 서하(西河) 태수로 삼아 진(秦)나라와 한(韓)나라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문후가 죽은 뒤에 오기는 그의 아들 무후(武侯)를 섬겼다. 무후가 배를 타고 서하를 내려가다가, 중간 지점에서 오기를 돌아보며 말했다.“아름답구나, 산천의 견고함이여! 이는 나라의 보배로구나!”이에 오기는 말했다. “하나라 걸왕(桀王)이 살던 곳은 황하와 제수(濟水)를 왼쪽에 끼고, 태산과 화산(華山)이 오른쪽에 있으며, 남쪽에는 용문산(龍門山)이 있고 양장이 북쪽에 있지만, 어진 정치를 베풀지 않아 은나라의 탕(湯) 임금에게 내쫓겼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것은 임금의 덕이지, 험난한 지형이 아닙니다.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적이 될 것입니다.”그렇다. 나라의 보배는 천하 명산과 풍광 좋은 호수가 아니다. 임금이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정치, 이것이 바로 위정자의 덕행이다. 오기가 왜 병사의 곪은 종기를 빨아 주었을까. 조조는 또 왜, 관우를 위해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의리를 아끼지 않았을까.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회남자』에는 ‘해불양수(海不讓水)’란 글이 있다. 바다가 바다인 연유는 썩은 물, 맑은 물 가리지 않고 포용함에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누리는 최첨단 문명 시대와 역행하는 말씀을 하신다.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이 세상의 모든 왕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리려 한다. 그러면서 권력자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하려 한다. 그러나 너희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 예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이것이 하늘의 가르침이요, 위정자들이 추구해야 할 치도의 길이다. 국민 위에 오르고자 할 때는 반드시 말로써 자신을 낮추고, 국민 앞에 서고자 할 때는 반드시 몸을 뒤에 두라고 말씀하셨다. 옛 군왕들이 자신을 가리켜 과인(寡人)이라 부른 연유다.다음은 『장자』의 「인간세」편,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우화이다. 거백옥이 말했다. “당신은 사마귀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화가 치밀어 팔뚝을 휘두르며 수레와 맞섰답니다. 제 힘으로 맞설 수 없음을 몰랐던 게지요. 이는 저만 잘난 줄 알았다. 조심하고 경계해야 함에도 제 자랑만 늘어놓고, 제 잘난 맛에 세상을 향해 팔뚝을 걷어붙이고, 제 힘 자랑을 했다.”공자가 군자라 칭했던 위나라 대부 거백옥이 안합이라는 노나라의 현인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위나라 영공의 태자는 천품이 박덕하고 남의 허물만 알고 자기 허물은 모르는 위인이다. 그가 하는 대로 버려두면 나라가 위태롭고, 법대로 보필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런 태자를 보좌하러 가면서 거백옥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거백옥은 안합에게 사마귀 이야기를 하였다. 수레는 세상사 국민의 마음이다. 사마귀는 제 생각이 옳다면 국민에게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강요하는 위정자의 군상이다. 제 알량한 힘만 믿고 백성들 알기를 개, 돼지 취급을 하면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삿대질하는 위인이다. 군왕이라고 자기 뜻대로 세상사를 요리하겠다는 생각은 편협된 인간이 낳은 오만함의 극치다.겸허할 줄 모르는 사마귀라는 군상이 수레 앞에 대항한 결과는 자명한 일이다. 고로 진정한 마음으로 국민을 대하는 위정자는, 항시 살얼음판을 걷는 자세로 행동해야 한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다가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사마귀 신세가 되지 말라고, 지금 비틀고 비틀어서 장자는 후세의 위정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네 살림살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장자의 우화다.새로운 통치자가 부임했다. 어언 10여 개월이 지났다. 일찍이 노자는 말했다. “문밖을 나가지 않고 천하를 알며, 창문으로 엿보지 않고 하늘의 가르침은 알 수 있느니라.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그 아는 바는 점점 적어진다.”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방증의 말씀으로 나는 이해를 한다. 묘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고 벌어진다. 그분의 뜻대로 움직였고 국민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과거와 현대사의 흔적이 오롯하게 보존된 민족의 전당이요, 숨결이 간직된 현대 정치사의 전당은 하루아침에 놀이터로 전락하였다.전 국민의 귀를 우롱하는 웃지 못할 촌극도 비일비재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우기는 비서진의 작태는 눈꼴사나운, 국민을 기만하는 광대들의 사기극이었다. 이것이 현 정권이 국민을 대하는 눈높이다. 옛 절대군주의 통치하에서도 벌어지지 않던 일들이 벌어지는 형국이다. 곁에서 곡학아세로 아부를 일삼는 ‘십상시’들의 행태는 불쌍하다 못해 가증스럽다.또다시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보라,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국민을 대하는지를 똑똑히 목도했지 않았는가. 이젠 정부에 그 무엇을 바랄 필요가 있을까. 국민 알기를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 정부의 앞날은 논할 가치도 없다. 좋다. 정부와 지자체, 그 어느 위정자에게도 책임은 없다. 누굴 원망할 필요도 없다.“우리 애들이 도심 한복판을 걷다가 그냥 깔려 죽었다. 길을 가다가 그냥 죽은 것이다…….” 이것이 찾아가는 복지강국을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의 현 주소다. 진정성 없는 사과는 두 번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요, 죽이는 작태다. 그러하거늘 그것을 굳이 애걸할 필요가 있을까. 가라. 각자도생하는 길이 현 정권에서 생존하는 비결이요,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다. “장관님, 훌륭하십니다. 그 좋은 직 오래오래 유지하시고, 토끼 같은 자식들하고 백년해로하시길….”폐부를 찌르는 이 함성이, 현 정권을 향한 정확한 민심이다. 이 소리가 필자의 환청임을 믿고 싶은 날이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3-01-13 10:54

정지용이 태어난 옥천에서 문학 활동을 한다는 것은 선택받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랑할 것을 찾는 지역사회가 눈을 부릅뜨는 지금, 정지용이란 걸출한 시인을 안고 사는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정지용만큼은 못 되더라도 닮아가려고 노력만 해도 어느 정도는 이루지 않을까.옥천에도 문학동아리들이 많다. 옥천문인협회 말고도 나는 문정문학회라는 문학 공부하는 모임에도 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문학의 열정을 마음껏 불타오르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후발주자여서 그런지 내가 이걸 취미활동 쯤으로 마음을 갖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때가 많다.어느 것에건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위에 얘기와 반대로 진정 미치지는 못 하고 있다. 첫째는 나이가 문제이고, 둘째는 아는 게 없다는 것이고, 셋째는 그릇이 작다는 것이다. 이 모든 걸 뛰어넘자니 남보다 배는 힘들다. 둘째 번 아는 게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올해 육년 째 문학회에서 글 쓰는 공부를 하고 있다. 아마 나는 글쓰기를 놓을 때까지 이 노력은 계속할 것 같다.정지용이 태어난 고을에서 하필 내가 글쓰기를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겠다. 잘 들어맞았다는 생각으로 긍지를 가져야겠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 진정 행복한 일이다. 내가 즐기는 일을 할 때처럼 좋을 때는 없다. 인생 후반기를 이 즐기는 일로 풍성히 가꿔야겠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3-01-06 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