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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 듣고 있나요.청포도 익어가는 칠월이 오면가신님들의 파랗게 질려 허공에 얼어버린 비명소리를,그 누구 듣고 있나요.누구 보고 있나요사슴도 숨어 산다는 노근리 쌍굴다리에 서서주검을 뒤집어쓰고 총알을 피하며 흘러드는 핏물 마시며 나흘을 버텼다는 아수라장을,그 누구 보고 있나요.누가 알고 있나요.난데없이 쌕쌕이와 포틴과 기관총의 표적이 되어 철도 레일이 휘고 소가 공중 분해되는 학살의 현장에서등골이 오뉴월 서릿발로 오싹하다 혼절하여백척간두에서 떨어지던 목숨의 꽃을,그 누가 알고 있나요.누가 알고 있나요.난데없이 쌕쌕이와 포탄과 기관총의 표적이 되어철도 레일이 휘고 소가 공중 분해되는 학살의 현장에서등골이 오뉴월 서릿발로 오삭하가 혼절하여 백척간두에서 떨어지던 목숨의 꽃을,그 누가 알고 있나요.누가 말하고 있나요아버지 등에 엎혀 피란하던 아들이 쓰러지고시어머니 등에 엎혀 살리려던 어린 딸이 쓰러지고총알받이로 아들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쓰러지고포탄이 날아와 할머니 시신조차 날아가고눈앞에서 오빠와 남동생은 즉사하고한 쪽 눈이 빠져나와 덜렁거려 빼버렸다는 무서운 역사를,누구에게 전하고 있나요.주곡리, 임계리 하기리의 우리 이웃들이세월의 지층 속에 가매장되어 있습니다.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적군인지 친구인지도 모르던 하얀 옷을 입은 민초들의 이유 없는 죽음이망초꽃으로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역사는 누더기처럼 기워지고 있는이 망각할 수 없는 헛헛한 현실 앞에서우리의 기억은 푸르게 성장할 것입니다.진실은 말하고 전하여학살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영문을 모르고 시름하는 300여 영혼들이시여새파랗게 맺힌 한 푸시옵소서.망초꽃 꽃상여 삼아 쌍무지개 굴다리 너머로 보내드리오니칠월 때마다 강림하시어 흠향하사옵고이 땅 위의 신화를 지켜주소서.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3-03-09 22:54

 그러므로 한자를 익히려면 먼저 천자문이 떠오르며 천자문은 6세기경 주홍사(周興嗣)가 양무제(梁武帝)의 명을 받아 지은 것으로 사자일구로 총 이백오십구, 합계 천자로 이뤄졌기 때문에 천자문이라 일컫는다. 또한 제왕(帝王)의 명을 받은 주홍사는 이백오십구의 운문(韻文)을 하루만에 지으면서 얼마나 노심초사 하였던지 천자문을 끝내자 머리가 갑자기 세었다 하여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한다. 물론 여러 천자문이 있으나 역시 주흥사의  천자문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일찍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제일의 한문 초독서(初讀書)로 사용되어 왔으며, 한문 초독서로 얼마나 애용 되었는가 하는 사실은 토지의 순서를 매길 때에도 천자문의 글자 배열순서에 따라 천자답(天字畓)으로 구분했으며 족보의 장수(張數)도 천자문 글자의 순서로 표기 하였다.  그리하여 한문하면 지금도 하늘천 땅지를 연상 할 만큼 한문학습의 초독서(初讀書로 알려져 왔다. 천자문은 널리 읽혔던 만큼 여러 판본과 필사본이 있는데 그 중에도 선조때 한석봉 선생이 쓴 행서(行書)천자문을 본(本) 바탕을 삼아서 4자소학 해서(楷書) 다음으로 연재를 하오니, 한문에 관심이 있거나 서예(書藝)를 취미삼아 연구하는 옥천신문 애독자 분들께 다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울러 잘못된 오류가 발견되면 따끔한 질정(叱正)으로 바로 잡아 주시길 바랍니다.천지현황 우주홍황 天地玄黃 宇宙洪荒하늘은 위에 있어 그 빛이 검고 땅은 아래 있는고로 그 빛이 누르다.일월영측 진숙열장日月盈仄 辰宿列張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점차 이즈러진다.즉 우주의 진리를말함.진(十二辰) 숙(二十八宿) 즉 성좌가 해 달과같이 하늘에 넓게 벌려져 있음을 말함.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3-03-02 22:41

절기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있다. 엄동설한에 바깥출입도 못하다가 입춘 지나고 추소리부터 옥천읍내까지 찬찬히 걸어보았다. 이백리에서 하천을 끼고 좁은 길을 걸어 들어가니 처음 본 서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자기를 굽는 집인지 그릇들이 여기저기 앉아있고 한 번더 좁은 둘레 길을 따라 들어갔더니 ‘이지당’이라고 옛 조선의 유생들이 공부했던 곳에 발길이 멈추었다. 맑은 하천이 흐르고 뒤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펼쳐진 서당, 공부하고 사색하기에는 그만인 곳이었다. 여든이 넘어도 동네에 있는 보물인지 문화재인지도 처음 보았으니 우물 안 개구리가 맞기는 하다.■ 우리를 지탱시키는 뿌리들여든 네 살이지만 나도 한 때는 갈래머리에 교복 입고 다니던 황금빛 시절이 있었다. 오래전 세월을 더듬어 보면 그 기억의 끝자락에서 요란한 징 소리가 들린다. 눈망울만 초롱초롱 하던 여섯 살 계집아이 귀에 들리던 꽹과리 소리, 징 소리가 해방을 알리는 소리인줄 그때는 몰랐다. 한참을 지나 교과서에서 보았던 우리의 해방!손주들과 지난주에 병천 독립기념관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말만 들었던 독립기념관을 직접 가보니 천정을 올려다봐도 끝이 안 보이는 대리석 입구부터 우리의 역사를 하나하나 보존해놓은 것들을 보고 시골할미지만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지금의 나도 고생을 많이 한 세대지만 우리 윗세대는 처참한 시절을 겪고 지금의 우리를 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해야 한다.잘 물려줘서 고맙고 잘 지켜줘서 고맙다고….독립운동의 전시장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던 이유도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해방의 그날을 맞기 위해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거룩한 피를 흘렸는지 알게 되어 역사의 현장을 복원한 박물관이 주는 힘을 알았다.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들 역사 교과서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위대한 유산들이다.희미하게 기억되는 마을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내가 태어나 역사의 현장에 처음 서 보았던 날이었다.■ 전쟁 난리 속의 통곡소리, 막내 여동생을 잃다그 함성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난리가 났다. 젊은 아이들이 기막힌 사건들이 발생하면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고 무심히 말하는데 그들이 난리를 겪어보기나 했던가. 난리를 겪어본 이들은 그리 말할 수 없다.김천으로 피란 가던 길. 영동 어디쯤에서 비행기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하늘을 날더니 어디선가 쾅 소리가 나고 다시 이어지는 비명소리 또 비행기 소리, 다시 비명소리 지근거리 였을 거다. 귓가에 쩌렁쩌렁 울렸으니….그렇게 찐 고구마 두 개로 3일을 버텼고 무명옷은 한 달 내내 한 번도 갈아입지 못했다.전쟁 통에 웬 볕단 인가 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논두렁에 시체들이 볕단처럼 쌓여있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시체 썩는 냄새에도 코를 틀어막지 않은 것은 그 냄새쯤은 아무것도 아닌 충격적인 장면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겨우 걸음을 걷는 아이들이 엄마 손을 놓쳐서 울며불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고 엄마는 엄마대로 아이를 찾느라 인파속을 해맸다. 우리 가족도 그들 사이에서 통곡을 하면서 막내 순자를 불러댔다.“순자야 순자야”동생 손을 놓친 나는 겁에 질렸고 그 다음에는 동생을 잃어버린 죄책감 때문에 물 한모금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언제 끝일지 모르는 그 난리가 진짜 난리다.얼마가 지났는지 모르지만 저녁 무렵이면 날씨가 추워지면서 깊은 가을을 맞이하고 우리는 다시 옥천으로 돌아왔다.아홉 식구가 내려갔지만 우리는 막내를 잃어버렸다. 동생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 못하고 대문을 열고 들어설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수십 년을 보냈다.그 이후로 우리는 막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산가족 찾기에도 신청해 보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우리 막내는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우리는 남은 여덟식구가 막내를 기다리면서 서로 위로하고 함께 울었지만 우리 막내는 혼자서 그 악몽 같은 시간을 견뎌내야 했을텐데….아, 가엾은 막내 피붙이를 잃어버린 삶과 죽음의 현장이 맞붙어있는 곳이 전쟁터이다.함부로 난리라는 말을 쓰는 요즘 아이들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 인생의 바다위에서 만난 운명의 조각들그 전쟁 통에서 우리는 살아났고 무심한 세월 속에서 나는 여든 네 살이 되었다.젊은 날에는 내가 여든이 넘도록 살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다.목재소를 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입에 풀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옥천여중까지 다녔다. 교복을 입었으니 그나마 행운아다. 여중을 졸업하고 살림을 돕다가 남동생이 청주에서 연초제조창에 다닐 때 청주에 가서 남동생의 자취를 도왔다.밥도 해주고 나는 수예점에서 일을 도우면서 수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니 아르바이트였다. 남동생이 퇴근하기 전 몇 시간 동안 일을 배우고 수예점도 도우면서 5만 원정도 급여를 받았다. 우연히 구판장에 들렀다가 수예점 언니가 곱게 생겼다며 놀러오라고 했던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인생사는 내일 일을 모른다고 하지만 정말 맞는 말이다.예측할 수 없어서 설레고 두려운 것이 인생사다.수예점 언니는 내가 방긋방긋 잘 웃어서 방글이라고 불러주셨는데 손님들도 방글아 방글아 하시며 예뻐해 주셨다. 어느 날 휴가 나온 군인이 수예점에 왔다. 키가 훤칠하니 멋진 남자였다.수예점 사장님은 “방글아 내 동생이야” 나는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애써 태연한척 쑥스러운 인사를 하고 그날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가슴이 떨려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휴가 나온 군인은 다음날도 우리 수예점에 들렀다. 손에는 단팥빵을 한가득 들고 들어섰다. 수예 솜씨가 좋았던 나의 60년된 보물■ 동전의 양면을 닮은 아름다운 날들, 악몽 같은 날들그에게 잘 보이려고 예쁘게 먹느라 물 마시는 것도 잃어버려 목을 캑캑거리며 먹어댔다.수예점 사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는데 일부러 나가신 것이다.그 군인은 나에게 영화배우 누구를 닮았다면서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나도 그에게 마음이 있던 터라 웃으면서 응대했고 우리는 그날부터 동네 산보도 하고 며칠간의 휴가를 꿈처럼 보냈다.강원도 화천에서 근무하던 남자는 부대로 돌아가고 나는 그가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고 보고 싶었다.주고받은 편지는 수백 통을 넘겼고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내 나이에 연애하고 결혼한 부부가 과연 몇이나 될까. 수많은 편지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추억자리가 다 사라진 만큼 속상하다. 제대를 하고 결혼을 했다. 결국 수예점 언니와는 시누이 올케가 된 것이다. 시누이와 같이 수예점을 하고 남편은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남편이 박봉이었지만 나도 수예 솜씨가 좋아서 살림에 보탤 만큼의 돈을 벌었고 우리는 5남매를 낳았다. 아이들이 다들 착하고 공부를 잘해서 알콩달콩 재미나게 잘 살던 날들이 이어지다 우리는 청천벽력같은 운명을 다시 만나게 됐다. 남편이 퇴직하고 좀 쉴만하니 갑자기 소화가 안 된다고 활명수를 몇 달을 마시면서 체기를 가라 앉혔다. 큰 병원에 가봐야 하는데 동네의원에서 소화제만 내내 타다 먹었다.결국 숨이 차오르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대전충남대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췌장암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모두 오열했다.서로의 무심함을 원망하면서 나도 건강한 남편이라 방심했고 남편도 스스로 건강을 자신했다. 자식들을 불효자로 만들어버렸다.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 다들 열심히 살던 죄밖에 없었는데….우리 큰아들이 남편을 선산에 묻고 오열하던 그날의 쓰라린 잔영이 아직도 남아 있다.결국 누구나 혼자 태어나 혼자 떠나는 길인데 유난을 떨었으면 남편이 조금 더 살지 않았을까 자책감이 든다.인생사 무심하게 흘려보내자 했던 것이 남편의 명을 재촉했나 싶다.누군가는 인명제천이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남편을 보낸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다.이지당■ 인생 소풍 길의 끄트머리를 준비하다 나도 여든이 넘으니 사브작 사브작 기억이 희미해지고 깜박깜박 하는 날들이 계속 쌓여간다. 아직은 혼자 조용히 지내고 있지만 아이들한테 민폐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연명치료거부의사도 밝혀놓았고 장기기증도 다 해놓았다. 그리고 내가 아프면 바로 요양병원으로 보내달라고. 대신 시설이 좋은 곳으로 보내주고 자녀들도 각자의 삶이 있으니 매주 한번만 돌아가면서 한 명씩만 와 달라고 요청도 해두었다.미리 말을 던져놓으니 아이들은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라고 하지만 내심 위안이 될 것이다.병든 애미를 보살피는 일이 자식들 삶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서로의 안위를 지키면서 돌봐주는 것이 가족이다. 무작정 헌신은 한사람은 살고 한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가족끼리 왜 그 지경까지 이르러야 할까. 다들 같이 살아내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이다.나도 중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독서를 즐기고 살면서 많은 경험을 얻었다. 세상의 문리를 좀 아는 할미다. 이제는 치매초기라 예전 같지 않지만 지금은 우리가 살던 그 세대와 다르다. 우리가 살던 삶의 모양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할 이유도 없다.나는 젊은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이 와야 된다고 생각한다.비혼주의자라고 나를 놀래 킨 우리 손녀딸은 서른일곱 살인데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에 다니고 성격 좋고 인물은 누굴 닮았나 너무 예쁘다. 그런 녀석이 결혼을 안 한다니.왜 결혼 안하느냐 했더니 결혼은 출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해야 하는데 출산할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으니 갈등하지 않을 수가 없단다. 똑같은 환경에서 여자들만 희생하는 거라고 마치 국회의원처럼 연설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이를 낳을 환경을 만들어줘야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하겠단다. 나랏일 하는 분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우리 때는 북적거리며 같이 살 부비고 사는 게 미덕이었는데 지금 세상은 삭막하지만 자기결정권이 있는 삶이라 무엇이 좋다 나쁘다 편가를 수 없다. 그저 80년 넘은 세월 속에서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서 우리는 그저 현기증을 느끼면서 살 뿐이다.비록 학문적인 이론은 습득하지 못했지만 80여년의 세월이 무심히 흘러갔다 한들 그시간이 함몰되지 않았다. 우리 자손들에게도 흔적이 남을 것이고 나는 우리 후손들이 정말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만 주고 떠날 것이다. 그것만한 유산이 어디 있을까?사랑의 마음 진실 된 애정의 마음, 우리가 남길 정신의 유산, 위대한 유산이라는 말로 부족함이 없다.내 사랑 우리 막내 손녀 

주민기자 | 김경희 시민기자 | 2023-02-24 10:41

붉은 노을 돌아서는 아직은 회색빛 이른 저녁 하루해는 일을 마치려 어둠을 깔고 있다그제부터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와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온 노인은 흐릿한 눈으로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서 걷은 옷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바로 뒤뜰에 나갔던 며느리는 어둠과 같이 들어와 늦은 저녁을 짓느라 분주하다복숭아뼈까지 늘어진 치마소리는 늦은 저녁의 미안함을 대신하고 있는 듯 하다얼마 뒤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기침소리는 1년 내내 시원찮다벌써 사나흘 전 하늘에서 명단을 받고 대기 중인걸 그는 알았는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전날 손주가 사온 서양냄새가 나서 싫다던 빵을 몸에 저장하고 쿨룩댄다365일 늘 그렇듯 기침소리에 밥하는 며느리는 재촉의 소리려니 무감각이다한참동안의 기침소리는 그는 문을 열어 재치더니 마루에 쓰러지며 얼마동안 피를 토해낸다그렇게 노인은 하늘의 부름을 받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평생을 쭈그렁밤송이처럼 살아온 그의 육체는 자궁에서부터 불량품이었는지그동안 끈질기게 발버둥 치며 살아온 낡아빠진 육신을 이제는 벗어던지고 저승 가는 길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갔겠지까마귀도 이젠 보이질 않고 며느리는 주인 없는 사랑채에서 노인의 숨결들을 정리하고 있다살아생전 노인의 기침소리를 들랑날랑 거리던 고무신 끄는 소리넘어질까 조심조심 더듬대던 지팡이 소리도 다 떠나가고언제나 편안한 자리를 내주던 사랑채마루비 맞을까 마루 밑에 깊숙이 숨어있던 나들이 고무신 넉넉하게 따스함을 주던 마음 착한 햇상도 바닥에 주저앉아주인 잃은 허전함을 달래고 있다1978년 10월 5일 그는 하늘에 부름을 받고 2018년 10월 5일 40주기 할아버지 제삿날 난 그 영정 앞에 서있다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3-02-24 10:35

이갑순씨는 평생 일하며 살았다,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누에를 기르고, 가마니를 짜 살림을 꾸렸다. 살림을 꾸려온 그의 일은 세상을 아우르는 넓고 푸른 몸짓이었다.살림이란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을 말한다. 사람들은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해야 하는 빨래, 밥 짓기, 청소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안남면 청정리에 사는 이갑순(85)씨는 한 집안을 꾸리는 일을 하며 살아왔다. 주름살 배긴 이마, 정성스레 봉숭아 물 들인 손톱, 안남면 어머니학교 화백으로 불릴 만큼 그림을 잘 그리는 이갑순씨는 그렇게 85년을 살았다. 이갑순씨의 일은 ‘집안일’이라는 작은 그릇 안에 담기에는 너무나 넓고 푸르르다. 출렁, 하고 넘쳐 마음을 메우는 이야기 보따리가 하나씩 풀린다.■ 전쟁, 떠나간 사람에 대한 기억이갑순씨는 군서면 동평리 굴말에서 태어나 자랐다. 길지 않은 시간 군서국민학교애 다니며 배웠던 일본어를 아직도 기억한다. 요즘 ‘기역 니은 디귿 리을’을 배우듯 ‘가기구계고’를 입으로 되뇌었다. ‘이찌니 산시 고로크 시찌 하지 큐쥬’ 일본어로 숫자를 세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우리나라 다 뺏기고, 자기네 말만 쓰라고 했지. 먹을 것도 안 남기고 다 뺏어갔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일만 하고, 먹고 살려구 쌀 숨겨놓기라도 하면 쇠꼬챙이로 막 찔러 가지고 조사 해서 다 가져가. 들키면 벌금도 때리고 사람도 때리고 그랬지. 왜놈들이 총탄 만든다고 숟갈을 다 가져가서 밥도 못 먹었어.유관순 같은 사람이 태극기 들고 만세 부르면서 해방됐던 게 12살 때였어. 그때 이제 일본말 공부할 필요 없다고 학교를 안 댕겼어. 한국말은 안 배워도 되니까. 애들이 학교에 안 가니께 나도 안가고 집에서 심부름만 했지. 어른들 밭 매러 가면 집에서 나와도비(고무줄놀이), 자치기, 숨바꼭질 같은 거 하면서 놀고. 지금은 컴퓨터 한다고 다 모를 걸? 그땐 정말 재밌었어.”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갑순씨에게 전쟁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사남매 중 막내라고 말하다 무언가 생각난듯 말끝을 흐리는 이갑순씨는 7살 어린 나이에 전쟁으로 세상을 떠난 남동생을 가슴속에 묻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받았던 이상한 느낌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인민군들이 아버지 땅굴 파라고 저 먼데 데려갔었어. 어덴가는 몰러. 아버지는 안 돌아가셨는데 7살 먹은 동생 하나는 죽어버렸지. 앵-하고 날아다니면서 폭격하는 비행기 소리에 놀라서 뒤져버렸어. 우리는 몰랐지. 밖에서 놀다 놀랜 걸 어떻게 알아. 놀랜 아가 말도 못 하고 그냥 숨만 빨따닥, 빨따닥 쉬는디 내가 의원을 데려왔어. 밑에 동네 가서 주전자에 막걸리 받아다 의원을 대접했지. 근데 아무리 해도 약이 들어먹어? 놀랜 약을 바로 썼으면 괜찮았을 텐데 우리는 것도 몰랐지. 폭격기가 뺑-하니까 까무라친 거여. 그래서 그냥 죽어버렸지 뭐. 일곱 살이면 컸어. 남자앤데 똑똑하고 영리했어.”한국 전쟁 당시, 큰언니는 서울에서 아이를 낳아 살고 있었고 큰오빠는 경찰지서에 근무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오빠가 잠든 이갑순씨를 깨웠다. 느낌이 이상했다.“전쟁 났을 때 나는 쪼만했었지. 그때 뭐를 알어. 집에서 자는데 생전 안 그러던 큰오빠가 엄마, 아빠한테 가재. 쪼만했는데도 이상해. 내 예감에. 엄마, 아빠한테 가서는 인사를 하더라고. 그때 인민군이 옥천을 지나서 내려가던 중이었거든. 인민군이 큰오빠를 데려갔던 거지. 그렇게 데려간 뒤로 소식을 몰랐어. 나중에 팔공산에서 전사했다고 유골이 왔더라고. 집 뒤에 있는 종산에 장례를 모시고 그냥 살았어. 올케는 과부가 돼 버렸으니 우리집 왔다 갔다 하다가 가버리고. 나는 작은 올케랑 살았지.”■  스물한 살 새댁의 시집살이스물한 살이 되니 이갑순씨 주변 여자들은 대부분 시집을 갔다. 하나둘 떠나던 즈음 이갑순씨도 중매로 만난 남자와 결혼했다. 할 줄 아는 것 없는 어린 새댁의 시집살이는 고되었다. “밥 먹고 일만 했지. 집에서 좀 배워 왔으면 이겨내는데 그것도 못해서 허덕였어. 아침밥 하고 나면 샛밥(끼니 외에 참참이 먹는 음식)하고, 점심밥하고 나면 샛밥하고, 저녁밥하고 하루 다섯 끼 만드는 걸 매일 했지. 그것 뿐이야? 모 심을 때는 미역국 끓이고, 저녁 때는 감자 삶아주고, 풀 베어다 작두로 썰어서 이만치 큰 솥에 소죽 끓여주고 그랬지. 쌀도 많이 없어서 솥 가운데 동그랗게 뿌리고 다른 잡곡으로 채워서 밥했어. 다 처음 해보는 거니까 힘들었지. 집에서 밥을 해봤어, 빨래를 해봤어. 그때는 엄하고 무서웠어. 마실도 제대로 못 가게 하고, 베 짜고 밭 매고 밤에는 또 옷을 기워야 했어. 지금은 옷이 엄청 많잖아, 그때는 안 그랬거든. 호롱불 켜놓고 이런 소매들 다 꿰맸지.그렇게 3년 동안 시어머니, 형제들, 동서, 시아주버이, 조카 둘 데리고 한집에서 살다가 따로 살림을 차려 살았어, 어른 밑에서 살림을 나오는겨. 그래도 호강스럽게 컸어. 집 사주고 땅도 주고 장가 간 날 낳았다는 소도 한 마리 주더라고. 그거 가지고 농사지어 벌어 먹고 살았지.”모든 일이 처음이었던 스물한 살의 이갑순씨에게 시집살이는 말 그대로 중노동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배우고, 다른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바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이갑순씨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는다.“자궁이 시원찮은가, 5개나 내뻐렸어(내다 버렸어). 그래서 무당도 찾아가고, 삼신 굿도 하고, 왜 그렇게 애가 죽는가 하고 빌었어. 옛날에는 샘이나 우물에 가서 물을 퍼와야 했는데, 남부끄러워 새벽에 물 길어다 놓고 그랬지. 삽작거리(대문 밖 가까운 길거리)도 못 나왔어.”그렇게 긴 시간을 고개 들지 못하고 지냈다. 지금이야 여섯 남개를 길러낸 엄마가 되었으나 당시 첫 아이를 길렀을 때는 가만히 자는 모습에도 죽었나 싶어 귀를 대보았다.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했다. 그렇게 키워낸 아이들은 잘 자라 손녀, 손자를 안겨주었다. 이갑순씨는 손녀, 손자 자랑에 여념이 없다.“이제는 다 키웠지. 손녀딸이 소방서에 있고 막냇손자가 대전 유성에 있는데 맨날 1등을 한디야. 근데 너무 1등하고 잘해도 따돌림 받는디 말이야. 걱정이여” ■ 이갑순이 해온 일 이갑순씨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베를 짜는 일, 가마니 짜는 일을 해 저녁 장을 보고 아이를 가르쳤다. 일을 모두 해내려면 잠을 잘 시간도 부족했다. 매일 밥을 줘야 하는 누에는 나흘을 내내 먹는다.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실로 자신을 감싸는 고치를 만든다. 누에는 고치 안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가고, 남은 고치는 면에서 나가 판다. ‘가마니 친다’라고도 말하는 가마니는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담을 때 쓰는 포대를 말한다. 이갑순씨는 남편과 함께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짜서 마찬가지로 면에 나가 팔았다. 이갑순씨가 직접 할 줄은 몰랐지만, 함께 살았던 올케나 동서는 베를 짰다. 목화솜을 따다 물레방아를 돌리면 실이 나왔다. 그럼 그 실에 풀을 먹여 말린 다음 도토마리에 감았다. 도토마리란 베를 짜기 위해 날실을 감아놓는 틀을 말한다. 실이 걸리면 이갑순씨의 동서는 요롱요롱 소리와 함께 베를 짰다. “이런 걸 다 하자니 얼마나 바빠. 잠도 못 자. 또 여름이면 밥하느라 집이 더워져서 방에서 못 자거든. 그럼 마당에 멍석이랑 가마니 깔아놓고 누워 잤지. 그럼 밤하늘에 쫑쫑쫑 하고 떠 있는 별이 반짝반짝한 게 정말 예뻤어. 하늘에서 물 내려가듯 은하수도 보이고, 북두칠성도 보이고, 높고 파란 하늘에 바람이 불어오는 게 시원했지. 지금은 그런 하늘이 안 뵈네.”■ 50년간 놓았던 연필을 잡다85살 이갑순씨는 매주 화요일, 금요일 오전 안남어머니학교로 향한다. 17년을 어머니학교에 다닌 이갑순씨는 읽고, 쓰고, 알아가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다.“처음에 어머니학교 뽑았을 때는 안 들어갔어. 근데 며느리가 어머니학교 가을 소풍에 나를 데려간 거야. 핵교도 안 나가는데 따라다니기 뭐해서 그때부터 학교를 다녔지. 예전에 야학 하러 다녔었거든. 그래서 한글을 조금은 알고 있으니까 민망해서 한번만 가고 안 가려고 했어. 근데 학교에서 연필이랑 가방을 주네? 또 할아버지가 집에서 일하니까 가면 점심도 못 해주고 미안했는데 그냥 가라더라고. 그 뒤로 학교에 다녔어.”어머니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갑순씨는 50년 만에 연필을 잡았다. 시집 가며 쓸 일 없었던 글씨를 다시 쓰려니 작대기 하나만 그어도 손이 떨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쓰고 싶었다. 어머니학교 수업을 마친 이갑순씨는 안남 배바우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에 가서 낮잠도 자고, 책도 읽고, 글도 쓰시라’ 했단 선생님 말씀 때문이다. 그림책을 하나 골라 천천히 읽고, 마음에 드는 그림은 가지고 다니는 스케치북에 그려 넣는다. 이갑순씨의 글과 그림에는 평생 한 집안을 꾸리며 일궈온 이야기가 녹아있다. 그의 웃음만큼이나 맑고 푸르른 그림이 자꾸 더 궁금해진다.  내 삶도 역사의 한 조각 

주민기자 | 옥천닷컴 | 2023-02-17 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