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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자동차공업사 이다겸 멘토 인터뷰대전서 자동차 정비하던 아버지 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 가까이 있던 공장에 자주 드나들며 마치 놀이터처럼 뛰어놀았다. 그때 현장 일하던 아저씨들과 스스럼없이 놀 때만 하더라도 나중에 공업사 대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학교 행정실, 공기업 전산실, 벤처기업, 개인 공방 등을 거쳐 지난해 12월 아버지와 함께 금성자동차공업사를 인수했을 때 각오를 다졌다. 옥천에서 40년 역사를 자랑하는 금성공업사의 명성을 되찾겠다고 말이다.아버지 본가가 군서면 사양리라 옥천은 친숙한 동네였다. 그런데 차량 정비를 맡기로 온 손님 중에 반신반의하는 시선을 보낸 이가 있었다. ‘아가씨가 여기 무슨 일로 있으셔요?’ 공업사 대표라고 밝히면 그제야 태도가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금성자동차공업사 이다겸(39, 대전) 대표는 정비 현장 경험이나 자동차 분야에서 일한 경력은 없지만 차량 접수, 회계, 손님 응대, 업체 미팅 등 주요 업무를 맡고 있다.쉽게 말하면 공업사 현장에서 이뤄지는 모든 진행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는 자리다. 그런 만큼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현장 전문가들과 소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마련. 그는 보험사나 부품사 등 업체 간 회의가 있을 때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도록 여성이 가진 섬세함과 친화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공장 내 홍일점으로서 현장 분위기가 삭막해지지 않게 하는 데도 공을 들인다고.그가 매출보다 직원들의 복지와 건강을 생각하는 것도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전하는 존중의 표시였다. 일례로 공업사 40년 역사상 처음으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8월은 매주 토요일 휴일을 가져간 게 그런 맥락이었다. 또한 공업사를 인수하고 약 6개월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월 옥천소방서 지정 정비업체가 되는 데 소기의 성과를 냈다.지난 8월9일과 10일 이틀간 옥천읍 대천리에 있는 금성공업사에서 청소년마을일터체험 프로젝트 일환으로 <정비 실무 체험을 통한 자동차 만나보기> 프로그램이 열렸다. 이다겸 대표는 옥천에서 활동하는 어른으로서 옥천고등학교 2학년 유준수, 강수형 학생을 멘토 자격으로 만났다. 이 대표는 자동차 정비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 차량 정기 검사, 일반 경정비 등 직무체험 기회를 제공하며 진로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이야기를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 금성자동차공업사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세요1980년도에 옥천에 최초로 생긴 40년 역사를 자랑하는 자동차 공업사예요. 이곳에서는 교통사고로 인한 파손차량을 수리하거나 소형차부터 대형차까지 모든 차량의 경정비(기계나 설비, 자동차 따위의 간단한 고장을 손보는 정비) 또는 차량 정기검사를 하고 있어요.현재 옥천에 있는 공업사가 대여섯 군데가 있는데요. 초창기에 금성공업사에서 배우고 나가신 공장장님들이 차렸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분업화가 됐지만 예전에는 이곳에서 부품 관리를 해서 아예 차를 만들어서 나갔다고 알고 있고요. 금성공업사는 1급 정비 위에 있는 종합정비 회사로서 소형차부터 대형 트럭, 포크레인까지 정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공장이에요.차량 정기 검사를 맡고 있는 검사원님은 금성공업사 초창기 멤버로 40년 이상 베테랑이고요. 사업장은 부문별로 대형부, 하체부, 판금부, 도장부, 검사부로 나뉘어서 저까지 직원 7명이 있어요. 정비사 모두가 30년 이상 이 분야의 전문가예요.■ 현장에 소방차가 들어오는 모습도 보였는데요저희 금성공업사가 옥천소방서 지정 정비업체인데요. 영동군, 보은군, 옥천군에 있는 소방서 차량은 저희가 다 관리해요. 또 2주에 한 번씩 레미콘, 믹스트럭, 덤프차 등 특장차 정비 업무도 맡고 있고요.■ 공업사를 인수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40년 전만 하더라도 인력도 많고 규모가 컸는데 지금은 줄어들은 상태예요. 초대 사장님은 돌아가시고 다른 분들을 거쳐 저희까지 오게 된 건데요. 옥천에서 명성을 널리 알렸던 공업사로 재건해보자는 생각으로 인수해서 이제 8개월이 지났네요. 아버지(사장 이종찬)는 대전서 40년 넘게 자동차 정비를 했는데요. 금성공업사와 예전부터 업무적으로 왕래가 있던 가운데 인수 제안을 받아서 오게 됐습니다.■ 정비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있나요?저는 기술 분야가 아닌 회계 쪽 담당인데요. 정비 분야에서 일한 경험은 여기 들어오고 처음이에요. 사실 자동차를 제대로 고치고 검사해서 나가는 것도 중요한 업무지만 이 공업사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도 만만치 않아요. 예를 들어 자동차 보험 처리할 때 보험사 담당자와 연락해서 부품이 얼마만큼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결재해서 차를 내보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쉽게 끝나지 않거든요. 무엇보다 고객이 만족해야 모든 일이 끝날 수 있어요.■ 정비 분야가 처음이라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제가 직접 기계를 다루진 않지만 고장 난 차가 새 차처럼 만들어져서 나가는 걸 보면 정비사분들이 정말 큰 일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고요. 저 또한 성취감을 얻곤 합니다. 사실 남편이 자동차 회사에 다녀서 제가 모르는 점들을 물어봐요. 얘기를 들어보니 완성차가 나오는 공정 자체가 굉장히 길다고 들었어요. 한 예로 현대 제네시스 차량이 처음 출시될 때 연구개발(R&D) 비용으로 약 5천억원을 투자했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게 벌써 17년 전 일인데 그만큼 우리 생명을 담보로 하는 자동차에 얼마나 많은 일손과 자금을 투자했겠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이 타는 귀한 자동차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고쳐 나가고 있습니다.■ 자동차 정비사라는 직업의 장점이 궁금합니다기술직이다 보니 다른 사무직보다 급여가 높은 편이고요. 또 문제가 있는 차량을 새로 고쳐서 내보낸다는 성취감이 정말 커요. 물론 서비스 사업장을 운영하다 보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따라와요. 어떤 기계를 잘못 만져서 고장나면 보상 처리 해드려야 하니까요.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라 완벽할 순 없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 최대한 완성품에 가깝게 뽑아내려는 노력으로 모든 직원이 일하고요. 어려운 과정을 해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 진로에 고민이 많은 학생들인데 직업 선택에 조언을 해준다면돈을 좇아야 하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좇아야 하나 그런 고민 하잖아요. 제 자녀에게도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네가 살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추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텐데 그게 맞아요. 사회에 나가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어떤 위기의 순간이 올 때가 있거든요. 때론 자존심도 내려놔야 하는 상황도 오고요. 그럴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 무너지지 않고 견딜 수 있어요. 그 말을 해주고 싶어요.■ 정비에 관심 있는 친구들은 어떤 준비과정이 필요할까요?어떤 직업이든 자격증이 있으면 기회를 얻을 때 유리한 거 같아요. 현장에는 자격증 없이 손기술이 좋은 사람이 있고요. 자격증은 있는데 실무가 전혀 안 되는 분도 있어요. 그런데 사회는 자격증이나 경력을 우선으로 봐요. 현장의 관점에서 보면 (자격증을 취득할) 기회를 놓쳤을 뿐이지 최고의 기술을 가진 명장들이 계시거든요. 그런 분들이 진정한 베테랑이 아닐까 생각해요. 자격증이나 학력이 전부는 아니지만 기회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앞으로 진로를 정할 때 참고하면 좋겠어요.■ 현장 분위기에 녹아드는 노력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험한 일이든, 편한 일이든 여러 경험을 해보는 게 좋은 거 같아요.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올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자기 거로 만들면 다 써먹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사람 잘 만나는 것도 기회이자 복이에요. 사람 마음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돈을 따라가지 말고 내 편을 만드는 게 중요해요. 제가 살면서 배운 거거든요. 사람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요.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몰라요.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미리 준비해야 해요.■ 대표님 고향은 어디인가요저는 대전에서 나고자랐고요. 아버지 본가가 군서면 사양리에 있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는 40년 넘게 대전서 자동차 정비를 하셨는데요. 공장은 제 놀이터나 마찬가지였어요. 집 가까이에 공장이 있어서 왔다 갔다 하면서 공장 풍경을 보고 자라왔거든요. 그래서 하나도 어색하지 않아요. 현장 일 하는 분들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요.■ 정비 현장과 가깝게 일하는 여성으로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어르신 손님 중에는 ‘아가씨가 왜 여기서 일하냐’는 듯 보는 분들이 계세요. 그래도 장점도 있어요. 사람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잖아요. 업체 간 미팅을 할 때 소통이 부드럽게 가야 차후에 문제가 안 생기거든요. 분위기 자체가 삭막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공장이라고 삭막할 거 같잖아요. 그러지 않아요. 제가 이 동네 꽃이거든요(웃음). 그리고 현장에서 2시간 가량 실랑이가 벌어졌던 일이 있었는데 단번에 해결한 적이 있어요. 제가 예전에 공방을 운영한 경험이 있어서 색깔에 눈썰미가 있거든요. 도색을 한 차량이라는 걸 금방 알아봐서 민원사항을 금방 해결한 적이 있어요.■ 끝으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저는 직업적인 조언보다는 이 얘기를 하고 싶어요.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공업사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어떤 문제를 안고 오시는 분들이잖아요. 그분들에게 친절을 베풀면 지인들을 데려올 수도 있고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거예요. 그 사람의 마음을 사라는 거죠. 어떤 손님은 고마워서 ‘우리 가족이 차가 세 대 있는데 다 여기로 올게’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영동이나 금산, 심지어 수원에서 굳이 찾아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저는 신념이 있어요. 당당하게 살자. 그게 제일 중요해요. 남한테 폐 끼치지 말고 행실을 잘하자 늘 되뇌어요. 그래서 옥천에서 이렇게 얼굴 내밀며 일하는 거 아닐까요.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08-19 11:38

지난 6일 장야리에 있는 커피랩 지앤지점 내 무대에서 옥천을 연고로 한 20대 청년들로 결성된 AM밴드가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무더운 날씨에도 이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분모 하나로 똘똘 뭉친 청년들이었다. 각자 다른 지역에서 직장을 다니는 가운데 짬을 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무대 위에 올라 재능과 끼를 맘껏 뽐냈다. 한 자리에 모여 합주 연습하는 데 물리적으로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나름 최선의 결과를 뽑아냈다. 청중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싱그러운 공연을 선사한 이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화답했다.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청년들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치유가 된 시간이었다.지난 6일 토요일 오후2시, 옥천읍 장야리에 있는 커피랩 지앤지점(대표 강병연)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바로 AM밴드(리더 김수진)가 선보인 <새로운 시작> 콘서트를 관람하면서 주말에 느긋한 여유를 즐기기 위해 카페에 찾아온 것. 실용음악 전공자들로 결성된 AM밴드는 피아노 김수진, 일렉기타 김명기, 베이스기타 유재환, 드럼 장치훈, 보컬 김다빈·서정인 씨가 참여해 음악의 깊은 감동과 여운을 전했다. 특히 이날 황규철 옥천군수가 자리에 참석해 공연 시작하기에 앞서 격려의 말을 전했다.보컬 서정인씨보컬 김다빈씨이날 AM밴드는 카페 내 공연 무대에 올라 △내 사랑 내 곁에(김현식) △비처럼 음악처럼(김현식) △인스타그램(딘) △야상곡(자우림) △사랑이 지나가면(이문세) △Fly to the moon △비(정지용 시 편곡)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김광석) △Make you feel my love(아델) △바람의 노래(조용필) 등 10곡을 선곡해 1시간 가까이 열띤 공연을 펼쳤다. 이날 티켓 1만원을 내고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이었지만 커피랩은 1인당 음료 한 잔을 제공하면서 관람객 80여명으로 북새통을 이뤘다.AM밴드는 지난 5월14일 문화예술회관 앞 광장에서 버스킹 공연을 열었던 바 있다.팀 활동을 시작한 지는 1년, 중간에 보컬 멤버에 변화가 있었지만 이들은 변함없이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AM은 실용음악을 뜻하는 Applied Music의 약자다.AM밴드 리더 김수진씨이원면 대흥리가 고향인 김수진(27) 씨는 읍내에서 한얼음악학원 원장을 맡으며 음악인 양성에 힘쓰고 있다. 공연이 끝난 뒤 만난 김수진 씨는 “관객들의 반응도 들어봐야겠지만 연습할 시간이 부족해 더 좋은 공연을 못 보여드린 것 같아 조금 아쉽다”며 “그래도 (공연을 마쳐) 후련하고, 저희 음악을 들려드릴 장이 생겼다는 점에서 기쁘고, 앞으로 좋은 공연으로 인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김수진 씨는 음악으로 모이기 전부터 알고 지낸 고향 친구들과 타지역 출신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팀을 이끌고 있다. 서울 신사동에서 일하는 김명기 씨는 이원면 윤정리, 대전에서 직장을 다니는 김다빈 씨는 이원면 신흥리가 고향이다. 베이스기타를 맡은 유재환 씨 또한 옥천 출신으로 현재 옥천읍에 살고 있다. 한얼음악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서정인 씨는 부산, 장치훈 씨는 대전 출신이다.이번 문화공연 기획을 맡은 한얼예술기획 김욱성 대표는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무대에 설 자리가 많아지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번에 티켓 값을 1만원 받았지만 커피를 제공하면 관람료는 거의 5천원인 셈”이라며 “커피랩 지앤지점처럼 옥천에 견실한 상가들이 문화 예술과 결합하면 서로 상승 작용이 생길 거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 청년 그리고 음악을 하는 팀들이 지속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공간과 네트워크가 생겼다는 점에서 지역 발전에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고 말했다.한편, 커피랩 지앤지점은 바로 옆에 있는 G&G골프가든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G&G는 스크린 연습장, 프로선수 레슨, 스크린 골프장, 골프 정원, 가든 카페 등이 있는 복합 레저 시설이다. G&G 강병연 대표는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다양한 공연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매 주말마다 마술이나 통기타, 피아노, 밴드 공연을 선보여 옥천에 문화예술 저변을 넓히고 청년들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만들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왼쪽부터 베이스기타 유재환, 드럼 장치훈, 일렉기타 김명기 씨가 연주하고 있다.커피랩 지앤지점에서 진행된 AM밴드의 <새로운 시작> 콘서트를 관람하기 위해 약 80명의 손님들이 입장했다. 커피랩 지앤지점은 매 주말마다 마술, 통기타 등 다양한 문화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08-19 11:33

매화리에 위치한 린나이해오름 보일러의 모습단호박 속에 훈제오리가 쏘옥 들어가서 별미를 자랑했던 매화리 우미관이 옥천 유일의 린나이가스대리점으로 변신한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주인이 바뀌거나 건물이 매각된 것은 아니었다. 업종을 바꿨을 뿐이다. 각각 고향이 옥천읍 매화리와 동이면 세산리로 옥천토박이인 손세현, 임명희(50)씨 동갑내기 부부는 일찌감치 결혼해서 터를 잡기까지 지역에서 많은 고생을 했다. 스무살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해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으니 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손세현 씨는 죽향초, 옥천중, 옥천공고 전기과를 졸업하자마자, 가스 일부터 시작했다. 배달부터 판매까지 가스에 관한 한 전문가를 자처했다. 아내가 2002년부터 18년 남짓 우미관이란 단호박오리 전문 식당을 경영할 때도 뒤에서 음식과 설거지를 도와주면서도 틈틈이 가스 일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다양한 린나이 제품들가스통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보일러 영역까지 넓혀갔다. 난방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 옥천 주민들에게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난방보일러를 공급할 수는 없을까가 그의 평생 화두였다. 오죽하면 그의 꿈이 옥천 유일의 린나이대리점을 운영하는 것이었을까? 여러 회사의 보일러를 경험했던 그는 린나이 제품이 가장 그가 바라는 이상적인 보일러에 부합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러던 차에 린나이코리아 대전지사에서 대리점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기뻤다고 했다. 어쩌면 성실하게 린나이 제품을 꾸준히 팔아온 그만큼 적격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직접 설치하고 효능을 살펴보느라 집에 설치한 보일러만 해도 여러 개, 그리고 린나이가스건조기까지 실제로 사용하고 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수많은 보일러와 한편에 마련된 가스 건조기였다. “전기건조기는 건조하는데 2시간 남짓 걸리고 물도 따로 빼야 하는 등 번거롭잖아요. 가스건조기 한번 써보면요. 여기서 못 헤어나올 거예요. 30분 남짓이면 다 마르고 물을 따로 뺄 필요도 없어요. 설치가 다소 번거롭다 뿐이지, 잔 고장도 없고 참 좋답니다” 이미 그는 린나이가스 예찬론자가 되어 버렸다. 제품을 직접 써보고 권하는 자신감이야 말로 마케팅의 가장 큰 핵심요소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열정과 자긍심은 50대에 다다랐을 때 아내가 주로 운영한 우미관 식당 간판을 내리고 ‘린나이코리아 옥천대리점’ 간판을 기꺼이 걸게 했다. 간판만 건 것은 아니었다. 아내 임영희 씨도 본격적으로 남편 손세현 씨 일을 두 팔 걷고 돕기 시작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던가. 한마음 한뜻으로 하던 식당을 과감히 폐업하고 임명희 씨도 손세현 씨와 함께 가스보일러 설치 기술을 배워 같이 다닌다. 말하자면 부부 보일러 설치 기사인 셈이다. 그 때가 벌써 4년 전. 일손 부족과 아내 건강 때문에 접은 식당을 2020년부터 린나이코리아 옥천대리점 간판을 걸고 해오름 화목보일러와 함께 운영을 하고 있었다. 금술 좋은 부부의 일과 삶은 어땠을까? 인터뷰에 응하는 손세현(50) 씨의 모습이다■ 20살 때의 꿈을 이루다“20살에 처음 가스 일을 시작했어요. 여러 브랜드의 제품을 직접 접해 설치하고, 어떤 제품이 괜찮은지 많은 공부를 했었죠. 그 중에서도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린나이 제품이 가장 좋았어요. 당시 린나이 대리점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꿨을 정도로 말이죠. 시간이 지나, 제 판매량 실적을 본 린나이에서 옥천 대리점을 맡을 생각이 없냐고 먼저 제의했어요. 수락하게 되면서 20살 때의 꿈을 드디어 이루게 된 거죠. 당시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매출 2억을 달성해서 본사에서 진열장 지원도 받았답니다. 코로나 지원금은 받지 못했지만, 매출을 달성할 수 있어서 뿌듯합니다” 인생의 반을 보일러·가스와 함께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손세현 씨는 보일러 설치와 시공에 남다른 애정이 있어 보였다. 그는 도란도란 옥천맘 카페에 올라온 여러 장문의 후기 몇 개를 보여 주었다. 그중에서도 이사 전 보일러를 교체했다고 들었지만, 사실 도시가스 노즐만 교체해 잔고장으로 말썽이던 집의 보일러를 깔끔하게 교체해 줘서 고맙다는 후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연통이 빠지려고 해서 잘못하면 가스 중독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까지 갈 수 있었는데, 타이밍을 잘 맞추어 교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고맙다는 인사가 담긴 정성 가득한 후기 덕분이라고. 매사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과 설치·시공 실력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해오름화목보일러 전시장린나이제품들이 대리점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부부가 함께해서 더 좋아요린나이 해오름 보일러가 군민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식당 폐업 후, 부부가 함께 설치 일을 시작하면서 여성 고객들의 만족감이 더 커졌기 때문. 집에 혼자 있는 여성의 집에 남자 혼자 설치하러 오면 걱정하게 되기 마련이다. 홀로 거주하고 있는 노년층의 집을 방문하는 경우에도 자식들이 걱정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부가 설치하러 온 모습을 보고는 고객들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쉰다.그렇게 부부가 함께 일하는 린나이 해오름 보일러는 안심할 수 있는 업체로 자리 잡았다. 함께 일하게 된 이유도 특별하다. 워낙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의 손세현 씨가 다른 사람들보다 아내인 임명희 씨가 일을 보조해 주는 게 훨씬 믿음이 간다는 게 이유다.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일을 하니 합도 잘 맞고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린나이 해오름 보일러를 찾는 고객들은 늘 만족스럽다는 평이 자자하다. ■ 취약계층에 보일러설치 서비스 보람“사회적 취약계층에 속하는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국가유공자, 등록 장애인 분들은 친환경 보일러 설치를 할 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어요. 알고 계신 고객분들도 계셨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분들에게는 설치하면서 알려드린 경우도 있답니다. 이럴 때 보람을 느끼곤 하죠. 취약계층에 속하는 분들께 이런 사업이 있다는 게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단순 설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조금 정보까지 빠짐없이 알려주니 고마워할 수밖에. 그는 그렇게 곳곳을 다니며 물심양면 선행을 하고 있다. 다만, 옥천군에서 정책적으로 하는 소상공인점포리모델링사업에서 보일러 교체 리모델링 할 시 지역업체로 설비를 묶어두면 서로 살리는 경제효과가 날 텐데, 지역 제한이 없다보니 막상 지역업체는 이 사업의 혜택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군 정책적으로 리모델링이나 설비를 지역업체로 하게 묶어두면 지역 업체도 같이 상생할 수가 있거든요. 그러지 않아서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이는 정책적으로 반영을 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향수OK카드 같은 정책은 참 좋은 정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도 향수OK카드는 계속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소상공인이나 지역업체 뿐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거든요”린나이 해오름에서는 보일러를 비롯한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튀김기, 음식물 처리기, 전자레인지 등은 가게 리모델링을 원하는 소상공인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린나이 튀김기는 다른 브랜드의 튀김기보다 오래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옥천 해오름 지점에서 다른 곳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고 있어 알만한 옥천 소상공인 상인들에게는 소문났다고 한다. 손세현 씨의 취미인 천체망원경이다■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았어요손세현 씨 부부는 최근 늦둥이 딸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현재 죽향초 5학년에 재학 중인 손영희 소프트테니스(정구) 꿈나무 선수가 막내 늦둥이 딸이다. 최근 엄마인 임명희 씨도 소프트테니스의 매력에 빠져서 함께 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빠인 손세현 씨의 취미는 천체 망원경인데, 늦둥이 딸과 함께 달과 별을 보기 위해 시작한 취미라고. 다정한 딸 바보인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취미로 시작한 지는 약 8년이 되었고, 딸과 친구들을 불러 함께 개기월식이 일어나는 날이나 슈퍼문이 뜨는 날에 함께 한다고 말했다. 옥천 곳곳을 누비며 부부가 함께 보일러를 설치하러 다니는 손세현 임명희 씨 부부가 옥천의 겨울을 따스하게 만들기를 희망해본다. 주소 : 옥천읍 옥천동이로 137-1 린나이 해오름전화 : 043-733-5290

인물일반 | 권채윤 인턴기자 | 2022-08-12 13:41

작품 'Dreaming - Spring breeze'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전 은 작가의 모습이다전시관 문을 여는 순간 보랏빛 색채의 향연들이 느껴진다. 보랏빛이 주는 힘은 무궁무진하다. 신비롭고 창조적인 것이 창작의 욕구를 마구 샘솟게 한다. 적어도 보라색은, 전 은 작가에게 조금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파스텔톤의 보랏빛과 푸른색이 섞인 색채를 따라 그림 속 의미를 느껴보면 그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자유, 행복, 여유 같은 것들.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전 은 작가의 작품들이다■ 나에게는 친근하고도 예술적 영감을 주는 옥천구읍 교동 갤러리 카페에서 열린 전 은(56, 충북 영동군) 작가의 7번째 개인전 ‘Dreaming Life’는 청주 가람 신작에 이어 열게 된 개인 전시회다. 구읍 교동 갤러리 카페는 매달 새로운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는데, 따스한 바람이 부는 5월 어느 날 그녀는 지인 작가의 갤러리를 구경할 겸 구읍에 위치한 교동 갤러리 카페에 들렀다가 그만 그곳에 폭 빠져버리고 말았다. “사실 옥천이란 곳 자체가 저에겐 친근한 곳이에요. 이원에서 저희 어머니가 태어나셨고 옥천에서 학교도 다니셨기 때문인지 옥천이 늘 친근한 이미지로 와닿았거든요. 그래서 작품 전시하려고 이곳저곳 다닐 때 자주 옥천에 들렀는데, 올 때마다 이 풍광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제 고향 풍경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해서, 또 특히 이 구읍은 의미 깊은 곳이기도 하잖아요? 육영수, 정지용 생가가 있기도 하고, 딱 예술인들이 좋아하는 마을인데 이곳에서 전시하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더라고요”7번째 개인전을 열게 된 전 은 작가는 단체전 70여 회 및 각종 아트쇼를 비롯한 2018~2021 대한민국충북미술대전우수상3회 및 특선1회, 2018 대한민국 청원미술대전대상, 2013 파렌하이트 미술대전 장려상 등 2013년부터 꾸준히 경력을 쌓아오고 있다. 현재는 한국미술협회, 영동미술협회 서양화분과위원장, 충청작가회, 평화미술협회, 충청예술초대작가, 청원미술대전 초대작가로 활동하고 있다.작품명 - '시간 여행 Ⅱ'왼쪽부터 작품명 - 'Dreaming 2', 'Dreaming 3', 'Dreaming 1'■ 혼자 걸어온 길은 창작의 샘물이 되어주었다.“아버지께서 자유롭게 취미를 즐기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어요” 그녀가 창작의 문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이유다. 그녀의 아버지는 예술적인 취미를 즐기셨다. 아버지는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셨고 시를 쓰셨으며 악기도 다루셨다. 아버지의 드로잉 북에는 스케치가 늘 그려져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예술적 영감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충북 영동이 고향인 그녀에게는 주변의 모든 풍경이 그림의 재료들이었다. 숲과 아름다운 자연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음미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워낙 좋아했고, 재능도 있었던 것 같았다. 유년 시절 그림대회를 나가면 상을 계속 타기도 했다. 하지만 전공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취미로 그쳤다. 직장도 미술과 전혀 관련 없는 일반회사에 들어가 근무했다. 그래도 그림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림은 늘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와도 같았으니까. 그녀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은 33살 무렵, 한 손에 셋째 막내 아이 손을 잡고 문화강좌를 들었을 때였다. “미대를 나오지 않았고, 오로지 독학했어요. 우연히 영동에 있는 문화강좌를 들었는데, 다양한 그림들을 그리니까 너무 재밌더라고요. 크레파스부터 시작해서 유화, 아크릴화, 보타니컬 아트까지 5~6년 동안 다양한 분야들의 그림을 배웠어요” 군에서 운영하는 미술 무료 강좌들을 들으면서 다방면의 그림들을 그렸다. 그 후, 대전에서 강좌를 들으러 다니기도 하고 직접 책도 사서 공부도하고 전시회도 다녔다. 재료를 이것저것 사서 여러 방면으로 그려보고 공부도 하다 보니 어느새 작가반열에 올라, 충북미술대전 초대 작가가 되어있었다.꾸준히 펜과 종이를 놓치지 않았던 것, 혼자서 그림을 공부해온 것, 그림을 진정으로 즐겨왔던 모든 것들이, 그녀의 작품을 발전시켰다. “물론 미대에 가서 전문적으로 기초부터 쌓아 올라갔다면, 탄탄한 실력을 갖추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을 거예요. 하지만 그 길을 걷지 않고 저만의 길을 걸어온 것이 오히려 창의성을 키워준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제 작품이 독창적이라는 평을 많이 받기도 해요”■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가기까지보랏빛 색채가 단연 돋보이는 전 은 작가의 그림은 색채만 눈에 띄는 것이 아니다.추상적인 그림과 독특한 질감에서 뿜어 나오는 아우라는 볼수록 매력적이다. 그림을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면 또 다르다. 전 은 작가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서 10년 동안은 구상에만 매진하다가, 12~13년 무렵 즈음에 비구상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구상은 이 옆에 있는 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말해요.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비구상은 이것을 틀어서 그려요. 추상화죠. 비구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같은 맥락이에요. 그런데 비구상은 더 어렵죠. 더군다나 전공하지 않고 비구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더 어려워요. 그래도 공부도 많이 하면서 스스로 열심히 터득해 나가고 있죠. 사실 비구상이란 것도 누군가가 터득한 기술들이잖아요.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너무 재밌어요. 이렇게 저렇게 응용도 하고, 구상이랑은 또 다른 즐거움이에요. 내 생각을 마구 자극하게 하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볼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도 복잡하고 그렇죠”전 은 작가가 가장 애착이가는 작품 'Dreaming Ocean 1'이다■ <Dreaming Life> - Dreaming Ocean 1‘자연’은 그녀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안식처이다. 이번 전시회 작품들 역시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는데, 수많은 자연 중에서도 ‘에콰도르’ 쪽을 여행하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직전 다녀온 여행이 그녀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 그녀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Dreaming Ocean 1>이라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찬찬히 느끼다 보면 몽환적인 느낌과 함께 다채로운 색의 바다, 마치 꽃들을 싣고 있는 것 같은 배, 독특한 질감으로 표현된 구름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제가 몽환적인 느낌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바다인데 바다의 개념을 넘어선 대서양, 그러니까 마음속에 품고 있는 꿈들은 각기 다르지만, 엄청 원대하잖아요. 이 꿈을 가지고 바다보다 더 넓은 대양에서 여기저기 다니고 싶은 그런 욕망을 표현했거든요. 근데 너무나 크고 아름다운 꿈들인데, 한 곳에만 있기엔 너무 아까운 거죠. 그래서 사랑, 행복, 희망과 같은 꿈들을 이 배 안에 가득 싣고 어디든지 가고 싶은 마음의 상태를 이 작품 속에 넣었어요” 여객선을 타고 유유히 바다 위를 떠다니면서, 지는 노을과 끝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들은 그녀의 상상력을 마구 자극했다. 바라보면서, 들뜨고 행복한 기분들 가운데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도 들었다. 지난날 살아오면서 이루었던 삶의 가치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그리고 현재들을 사색했다. 이 모든 것들을 돌아보니 문득 든 생각은 ‘내 마음의 바다는 끝이 없구나’라는 것이었다. 둥실 떠 있는 마음의 상태와 행복한 마음을 윗부분에다 표현하고, 물 밑에 비췄던 아름다운 배의 느낌은 바다에 표현한다. 나아가고 싶은 꿈들도 계속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으로 그림에 표현한다. 안정감이 있는 그림체와 색채감은 은은하면서도 볼 때마다 새롭다. 깊이감과 두께감이 느껴지는 마티에르 기법은 작품을 한층 더 매력적이게 만든다.왼쪽부터 '행복한 꿈', '사랑의 기쁨'이라는 작품이다■ 소소하지만 행복한 꿈을 그린다.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전 은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를 직업으로 삼으니 정말 행복했다. 그렇지만, 욕심은 내지 않았다. 일이 많고 온전히 내 그림에 집중을 할 수 없으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그릴 수 없기 마련이기에. “큰 욕심내지 않고, 마음을 비우면서 하고 있어요. 대외적인 일로 바쁜 주변 작가님들 보니까 작품이 안 나오더라고요. 작품에 집중할 시간이 없으니까, 그게 스트레스가 엄청 큰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제가 아무리 유명해진다 하더라도 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은 따로 비워놓고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한 마디로 균형을 잡는 거죠. 그래서 제가 지금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강의들도 있는데, 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하고 있어요. 강의하는 것도 수강하시는 분들이 행복해하시고 하니까 그걸 보고 보람도 느끼고, 의욕도 생기고” 이번 전시회 작품은 그녀에게 ‘자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하는 것들 자체가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지만, 공모전에서 수상하기 위해서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릴 수 없는 법이었다. 공모전이 끝난 후,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외부로부터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니 그림에 마음의 여유가 묻어져 나왔다.그녀의 꿈은 어떻게 보면 소박하지만 정말 행복한 꿈을 그리고 있었다. 너무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고, 그저 내가 행복한 만큼 그리는 것. 자신의 독립적인 성공보다는 한 여자로서의 행복이 더 중요한 삶. 한 아내의 남편이자 자녀의 어머니로서 가족 구성원을 안정적이게 잘 이루는 것이 제일 큰 행복이라고 했다. 내 중심과 초심을 잘 지키고, 행복한 마음과 소중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이 그녀의 꿈이자, 그림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살면서 좋아하는 것들은 언제든지 비집고 나와요” 인터뷰 내내 그림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전 은 작가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저 그림을 그리는 것들이 즐거웠고, 행복했기에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그림을 보며 따라 그리던 어린 시절, 관련 없는 일에 종사하는 나날이었던 20대를 지나,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때 까지 꾸준히 그려온 그림들은 지금, 그녀만의 특별한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작품 'Dreaming Ocean 1'을 바라보는 전 은 작가의 모습이다 

인물일반 | 전세림 인턴기자 | 2022-08-12 13:37

집 안뜰에서 환하게 웃어보이고 있는 황찬임씨■ 뽕나무집 딸, 양잠학교 나와 양잠교사 되다1947년 읍 마항리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옥천이 실을 생산하기로 한창 유명했을 때, 아버지는 뽕나무를 재배하셨다. 가족들이 일하러 가면 동생들을 돌보는 건 내 몫이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고모와 번갈아가면서 하루는 동생들을 돌보고, 하루는 학교에 갔다. 그러느라 졸업이 조금 늦었나 보다.9살에 들어간 학교를 16살에 졸업했다. 어렵사리 삼양국민학교(15회)를 졸업했는데, 그땐 월사금을 안 내면 졸업장을 안 주는 시대였다. 고모랑 나랑 아버지를 붙잡고 ‘아이고 아버지’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도 결국 못 받고야 말았다. 여하튼 그때 나는 한문도 잘하고, 서예도 잘하고, 공부도 좀 더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작은 여자를 들이는 바람에 제대로 공부도 못 했다.대신 졸업한 뒤에 1년 정도 동생들을 돌보고, 뽕밭 매는 일을 도왔다. 그러다 17살에 아버지 말씀 따라 청주 사직동에 있는 양잠(누에를 길러 비단실을 생산하는 농업)학교에 들어갔다. 누에 밥 주고, 깨끗하게 관리하느라 잠도 못 자면서 1년을 꼬박 공부한 끝에 우수로 졸업했다.양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옥천에 돌아와서는 군청 산업계에서 양잠교사로 일했다. 누에는 평생 다섯 잠을 잔다. 네 잠까지는 유충으로 자고, 다섯 번째 마지막 잠을 자고 나면 실을 뽑아낼 수 있는 누에고치를 짓기 시작한다. 그런데 누에가 유충일 때는 개미만 해서 잘 보이지가 않는다.내가(양잠교사) 젊어서 눈이 좋으니까 누에가 두 잠을 잘 때까지 키워서 좀 보일만 할 때 안남, 안내, 동이면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그 집에 가서 소독도 해주고 그랬다. 그때만 해도 공장 같은 게 없으니까 양잠하는 게 꽤 돈이 됐고, 당연히 내 일도 많았다.여름이면 날이 더우니까 새벽 시간에 맞춰서 갖다 주고 그랬다. 말도 못 하게 바빴어도 일하면서 돈 벌어다 친정 먹여 살리고 애들 공부 가르치고 할 수 있었으니 보람이 컸다. 그때는 딱히 돈 벌 곳도 없었고, 고구마 농사 지으면 그걸로 죽 끓여먹고 살던 때였다. 동참섬유 다닐 적 동료들과 함께■ 갑작스레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결혼23살에 결혼하면서 양잠교사 일을 그만뒀다. 그 해엔 큰일이 많았다. 10월 보름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6월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옛날 일인데도 시간대별로 돌아가시던 날이 다 기억난다. 아버지가 작은 여자 들이고서 엄마가 화병에 걸리셨던 것 같다. 전날 저녁에 먹은 게 체하셨는지 배가 점점 불러오더라.리어카에 실어서 장내과에 갔는데, 원장님이 엄마 배를 만져보더니 장이 안 움직인다는 거였다. 그 길로 저녁 6시쯤 택시를 타 가지고 대전 도립병원에 갔다. 신발 벗겨진 것도 모른 채로 8시쯤 도착해서 우리 엄마 좀 살려달라고, 수술해달라고 했다. 외국인 의사들이 처음에 장비를 턱, 턱 펼쳐 들었는데, 당장 돈이 없다고 하니 다시 장비를 척, 척 접어 닫더라.그때는 카드가 있나, 뭐가 있나. 엄마는 몸부림치고 있고, 의사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는데도 가 버렸다. 그날 새벽 넘어가는 때, 엄마가 마흔셋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 우리 5남매 중 내가 스물세 살, 막내 여동생이 여덟 살 먹었을 때였다.나 시집 보내면서 이불 해준다고 광목천을 떼어다 놓은 채로 돌아가셨으니 정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5남매가 다들 잘 큰 게 위로가 된다. 엄마는 아직도 그립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우리 엄마가 살아계시면 백수(白壽, 99세)를 맞으셨을 터이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호강도 시켜 드리고,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낌없이 많이 해 드리고 싶다.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결혼은 예정대로 해 동이면 청마리로 들어가게 됐다. 남편은 위로 누나 셋, 아래로 여동생 하나라 혼자만 아들이었는데, 중학교를 나왔던 데다 첫인상이 악해 보이진 않는 사람이었다. 시집간 시댁에서는 나를 너무 예뻐해주셨다. 나도 나 먹고 입는 그대로 다 해 드리면서 평생 시부모님 속 끓인 일 없었다.시아버님이 술을 좋아하셨는데, 열심히 만들어놓으면 동네 사람들 다 부르셔서 한달음에 다 드실 때가 있었다. 속이 상하긴 했어도 한 번도 뭐라 말씀드린 적 없었다.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4년, 시어머니는 2년 정도 대소변을 다 받았다. 23살에 결혼한 후 시어머니가 84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34년을 모시면서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다. 애들이 안남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에서 효부상도 받았다.그래도 나도 사람인지라, 정말 힘들었던 때가 있기는 했다. 시아버지가 대소변을 못 가리실 때는 시어머니와 같이 모셨다. 그때는 요양원이랄 게 따로 없었는데, 시아버지 기저귀는 다 손으로 빨아야 했다.사실 그것까지도 괜찮았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바로 또 아프기 시작하셨을 때는 정말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일회용 기저귀를 쓰고, 고등학생이던 막내딸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은 간호사가 됐다. 3교대로 일하던 때라 일이 저녁에 끝날 때면 ‘친구 만나더라도 조금 빨리 와서 할머니 밥 차려 드려라’했는데, 그러면 막내딸이 늘 ‘엄마, 걱정하지마’라면서 힘이 돼 주었다. 큰딸의 결혼식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저 믿고 따라오세요”…여덟 식구 이끌고 읍 이주시댁은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이렇게 벌어서는 몸은 몸대로 병들고, 4남매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겠다 싶어서 읍으로 나와 1987년도부터 국제기계에 다녔다. 애들 중학교 보낸다고 수몰 토지 보상 받은 걸로 85년도부터 읍에다 집을 구해 두었던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드릴로 구멍을 뚫으며 센방(선반) 깎는 일을 하다가 시어머니가 편찮으셔서 하는 수 없이 내가 다시 청마리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시어머니가 읍에 나오셔서 아이들을 돌봐주시게 됐다. 그런데 누에든, 고추든 농사는 지을수록 빚만 늘어나는 형세였다. 그래서 아예 다 같이 읍으로 나와서 살자고 가족들을 설득했다.아버님이 ‘(농사를 안 지으니)너 나 굶어 죽이려고 그러냐’라고 반대하시길래 ‘아버님 어머님 안 굶길 테니까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고 꼭 필요한 것만 갖고 오시라’라고 하면서 용달차에 대충 쓸만한 것들만 갖고 읍으로 나왔다.결단하고 여덟 식구를 다 데리고 나온 후엔 동창섬유에서 20년 정도 일했다. 실을 빼서 장갑도 짜고, 옷도 만들고. 3교대라 오전 6시에 나가면 2시에 들어오고, 오후 2시에 나가면 저녁 10시에 들어오고, 저녁 10시에 나가면 새벽 6시에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힘들긴 했어도 죽어라 일을 하고, 남편도 사료 배달하는 일을 하면서 같이 버니 돈이 좀 덜 필요해지더라.열심히 번 돈으로 아이들 장가보내고 시집보낼 때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다. 방 얻을 돈이 없어 서울 의정부 이모네서 지내며 대학교를 다니던 큰아들이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이 됐다. 군인일 때 연애하던 지금 큰며느리랑도 졸업 전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 애들이 돈이 어디 있었겠나.소 팔아다가 전세이긴 해도 집 얻어주고, 결혼식도 다 치러줬다. 그렇게 내가 낳은 새끼들 잘 키우고, 짝도 잘 맞춰줬다. 잘 커 준 애들에게 고맙고, 열심이었던 나도 참 장했다.늘 최선을 다했음에도 못내 미안함이 남는 건, 큰 딸애다. 딸애가 고등학교 진학할 무렵에 큰아들이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셋째 남동생이 바투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랬더니 딸애가 고등학교에 못 가겠다고 하더라.엄마가 밤잠 못 자며 3교대로 회사 다니는데 비싼 월사금을 어떻게 감당하겠냐고. ‘엄마, 나 산업체로 갈래요’ 그랬다. 논산에 있는 방직공장에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가슴이 너무 아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벌어서 나온 돈을 저 시집갈 때 쓸 돈으로 모으지는 못하고 엄마한테 다 갖다 줬다.월급이 나오는 날이면 딸애가 삐삐를 쳤다. 그럼 그때 전화하고 읍에 나가서 돈을 빼서 오는 거다. 그래서 큰딸 결혼할 때는 집터를 팔아서 농협 예식장도 다 빌리고, 시댁에서 ‘해도 너무 많이 해 온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 갖춰서 보냈다. 그러고 나니 미안함이 조금은 가시더라. 아이들에겐 늘 고맙다.지난 2009년 받은 모범노인 표창장. 안방에 걸어두었다.■ 사람 돌보는 사람으로 사는 낙가만히 있으면 누구한테 뭐라도 갖다 주고 싶고, 돌봐주고 싶은 게 내 성정이다. 내 가족은 물론, 동창섬유 다닐 때는 아는 사람들을 알음알음 회사에 소개해주고, 필요한 기술들도 다 가르쳐줬다. 고맙다는 인사도 듣고, 퇴직할 때는 금 4돈이랑 감사패를 따로 받기도 했다. 일은 62살에 위암에 걸려서 그만뒀다. 5년 동안 쉬면서 예후를 지켜보다가, 다시 다문화가정 아이들 돌봐주는 일과 경로당 밥 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는 매일 아침10시부터 오후1시까지 마암리 경로당에서 15명분의 밥을 해 주는 일을 하면서 지냈다. 밥 해주고, 내일 뭐 할지 상의하고 준비하다 보면 하루가 꽉 찬다. 누가 혹여라도 안 오면 전화해서 안부를 확인한다. 언제는 두 사람이 안 왔길래 물어보니 한 사람은 허리가 아프다고 하고, 한 사람은 교회에서 어딜 갔다고 하더라.코로나 때문에 지난 2년 반을 밥을 못 해 먹고 사니 사람들이 우울해서 어쩌지 싶었고, 나도 잠이 안 와서 약을 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올해 코로나 거리두기가 풀리고 경로당을 나가면서부터는 약을 안 먹어도 잠이 잘 왔다.낮에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사랑하며 어울리는 게 내 취미이자 일인 셈이다. 요즘 다시 경로당에서 밥을 같이 못 먹게 돼서 걱정이 많다. 상추며 호박이며 심어서 같이 뜯어 먹곤 했는데, 개인적으로 반찬 만들어다 주는 것도 혹시 모르니 하지 말라고 하더라. 경로당에서 같이 만날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얼른 코로나가 사라지면 좋겠다.지금 바라는 꿈은 요양원 안 가고 자다가 세상 떠나는 것, 남편 먼저 보내고 바로 따르는 것, 그거 하나다. 자녀들, 손주들에게는 맘 편하게, 행복하게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성공은 그저 내가 벌어서 먹고 살고, 남한테 손 안 내밀고 도둑질 안 하면 그게 성공이다.인간 대 인간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살아라, 가정 잘 지켜라, 돈이 100만 원이 생기면 딱 100만 원어치만 쓰고 누리며 살아라. 인생은 물같이 흘러가는 것이니, 얘들아 욕심을 부리지 말아라. 그저 행복하게 감사하며 살아라.멋진 남편과 함께 한 컷. <막내딸 신중순씨 편지>엄마, 막내딸 중순이에요. 우리 4남매를 지금껏 잘 키워줘서 고마워요. 모든 일에 항상 열심히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엄마의 모습이 존경스럽다고 늘 생각해왔어요. 문득 어렸을 때가 기억나요.엄마가 월급날 노란 봉투를 받아 와서 돈을 셀 때, 옆에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애교를 부렸죠. 그래도 뭐 하나 떨어지는 게 없어서 혼자 슬퍼하고, 조금은 엄마를 미워하기도 했어요. 어렸을 땐 엄마의 그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그런데 이제는 내가 엄마가 되고, 돈도 벌다 보니, 그 돈이 어딘가로 다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돈으로 우리 여덟 식구를 다 먹여 살려야 했던 거죠. 그걸 아니까, 이제는 이해가 가요.엄마, 항상 보고 싶고, 제가 세상에서 엄마를 제일 사랑하는 거 알죠? 나도 엄마처럼 우리 아이들 잘 키워서 존경받는 엄마가 될게요. 엄마, 나는 다시 태어나도 사랑하는 우리 엄마 막내딸이고 싶어요.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요♥ 

인물일반 | 양유경 기자 | 2022-08-12 11:15

처음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색한 건 둘째 치고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상대가 불순한 의도로 내게 접근한 사기꾼이면 어쩌나. 그 뿐인가, 말은 토씨 하나에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버리고 듣는이의 생각에 따라 의도가 왜곡되어 전달 되기도 한다. 그러니 그들의 거절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낯선 전화번호를 누른다. 연결음이 간다. 소리가 멈추더니,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윤종훈 기자가 인터뷰를 하고있다. ■ 우리 동네 상가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묻고 또 묻다그의 하루는 낯선 목소리와 거절들로 가득하다. 윤종훈(32,마암리)은 옥천에 있는 예비사회적기업인 커뮤니티디자인회사 ㈜우리동네에 소속된 기자다. 그는 매주 우리 지역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이야기를 신문 ‘오크지’에 기사로 담아내고 있다.오크지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우리 지역상가의 이야기,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무가생활정보지다. 뿐만 아니라 취재를 하며 알게 된 이야기를 옥천FM공동체라디오에서 ‘우리동네이야기’라는 프로그램으로 풀어내고 있다. 옥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쉬는 날에는 걸어서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기도 한다.하지만 인터뷰를 따내는 것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다. 어떤 때에는 50 곳에 인터뷰 요청을 했는데 모두 다 거절당한 적도 있다. 홍보비 한 푼 받지 않고 상가의 이야기를 기사로 싣는 것이지만, 무료가 확실한지부터 홍보가 되긴 하는지 등등 걱정이 앞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각자가 겪은 어려움도 다양할 터이니 그들의 으심을 이해한다. 인터뷰를 요청할 때마다 윤종훈씨는 “우리 지역 상가의 이야기를 통해 무료로 상가를 홍보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지역에서 파는 음식, 물픔 등을 지역주민들에게 소개하는 신문이고, 사장님의 가게를 소개하고 싶다”고 말한다. 특별한 노하우는 없다. 그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그의 최선이다. 그렇게 인터뷰 요청이 성공할 때면 기쁜 마음과 함께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고.■ 우리 동네 상인들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힘이 되기를윤종훈씨는 “오크지는 지역경제 활성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흔들린 지역경제 속에서 지역의 상인들은 직접적으로 그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다. 옥천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위태롭게 흔들리는 삶이 마음에 와닿는다.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질 만한 막막한 순간도 있다. 그래서 인터뷰로 만난 취재원은 인터뷰가 끝날 때 즈음엔 힘을 내길 바라는 우리 동네 가게 사장님으로 기억하게 된다고.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지역 주민들에게도 그 이야기가 와닿을 수 있도록 기록하고 있다. 얼마 전 윤종훈씨는 몇 달 전에 만났던 취재원에게서 “늦었지만 기사 잘 읽었다. 나만큼 힘든 사람이 많다는 게 슬프지만 이상하게 힘이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생길 때가 있다. 세상과 동떨어진 어둠 속에서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을 들고 있는 느낌이 들고, 그 때 드는 막막함과 무기력함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와 같은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이 된다.취재원들의 그런 연락은 윤종훈씨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주민들에게 상가를 소개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상인들이 서로의 고충을 공유하고, 기사를 읽으며 힘을 낼 수 있길 바라고 있다.우리지역 소상공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는 윤종훈 기자의 모습■ ‘말’로도 전하는 ‘우리동네이야기’20년을 넘게 운영한 가게를 그만두고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울 거라는 사장님부터 이제 막 옥천에 살기 시작해 가게를 준비 중이라는 사장님까지, 인터뷰로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표정들이 진하게 남았다. 작년 겨울 옥천FM공동체라디오가 개국하며 시작한 ‘우리동네이야기’ 프로그램을 통해 윤종훈씨는 그들의 이야기를 말로도 풀어내고 있다.지면에 담지 못했던 내용이나 한 번 더 소개하고 싶은 지역인들의 삶과 상가를 말을 통해 다시 한 번 생생하게 풀었다. ‘우리동네이야기’를 진행하는 시간은 윤종훈씨가 기자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제가 만나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라디오에서 다시 이야기하면서, 저를 돌아보곤 해요. ‘내가 이 사람을 이만큼 까지만 알고 왔구나,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게 조금 더 노력해볼걸’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인터뷰에 응한 취재원에 대한,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상인에 대한 그의 애정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옥천을 알아가는 시간이 ‘고맙습니다’옥천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윤종훈씨가 옥천에 온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공과대학에서 공부를 하다 대학원까지 갔다. 6개월간 연구소에서 공부를 하다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고 대학원을 그만뒀다. 그 시기에 기자가 된 친구를 보며 언론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지만 두려움이 있었다. 그는 두려움과 막막함을 가지고 잠시 쉬며 생각을 정리하고자 인도로 여행을 갔다.인도 여행에서 그는 “더 한 두려움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인도 여행 중 반강제적으로 관광사기를 당했는데, 사기임을 알고 있음에도 100만 원이 넘는 돈을 내야만 하는 위험한 상황을 겪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행이 끝날 무렵 언론인이 될 수 있을 지에 대한 두려움과 맞설 용기가 생겼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언론학을 배울 수 있는 대학에 다시 들어갔고, 기자가 됐다. 옥천에 온 지 2년이 된 그는 인터뷰를 하며 오히려 취재원들에게 배우는 게 참 많다. 몇십년을 옥천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옥천을 꿰고 있었다. 처음 보는 기자에게 옥천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는 사람들을 보며,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그는 “내가 너무 옥천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기사를 쓰려고 해서 나를 좋지 않게 보실 수 도 있는데, 하나하나 설명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고맙다”고 말했다. 수 십 번의 거절 끝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윤종훈씨는 오늘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처음보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 말을 걸었고, 그 사람도 처음 보는 그에게 마음을 열고 대답을 해줬다. 그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기사들은 우리 지역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으로 다가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에게 전화가 오면 한번 용기를 내주셨으면 해요! 좋은 취지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이니 진심이 전달되길 바라요.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는게 쉽지 않지만 한 번은 해볼 만한 것 같아요. 저를 이용해서 가게도 홍보하고 자랑도 많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인물일반 | 박나혜 인턴기자 | 2022-08-11 22:15

현대 여성들은 많은 강박관념을 지니며 살아간다. 공부도 해야 하고, 직위도 있어야 하고, 외모도 가꿔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며, 여기에 자녀들이 있으면 양육도 챙겨야 한다. 지난 6월 한 달간 구읍에 있는 갤러리카페 교동에서 <Queen, 보화(寶畵)>를 주제로 전시를 연 김경희(58, 대전) 작가는 말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더 나아가 이제는 여성들이 자기 색깔을 마음껏 드러내 자기 욕망을 표출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여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석이 어울린다고 봤다. 여성과 보석을 같이 그려내 자존감을 높이고 빛나게 해주고 싶었다고.충남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한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조형미술학과를 졸업한 김경희 작가는 개인전 33회, 단체전 635회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재작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미술대회인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심사위원으로 역임해 감회가 남다르다고 한다. 시댁이 옥천인 그는 옥천예총 부회장, 옥천미술협회지부장으로도 역임한 이력이 있었다. 또 옥천교육도서관, 옥천군평생학습원, 옥천문화원에서 다년간 서양화·아크릴반 수업을 맡았다고. 옥천과의 인연이 그만큼 각별하다고 볼 수 있다. 김경희 작가의 이야기를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김경희 작가가 작품 앞에서 전시 도록을 들며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선구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다이아몬드와 결합해 다양한 색채로 표현했다.■ 그림 주제가 <Queen, 보화(寶畵)>인데 어떤 의미인가지난 15년 동안 퀸(Queen) 시리즈를 연작으로 그렸다. 자기 성찰이 있는 여성을 Queen이라 명명해 저만의 색깔과 아크릴기법으로 표현했다. 여성은 제 일부이면서 전부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여성들이 자기 색깔을 감췄다면 이제는 자기 욕망을 드러내고 표출하자는 의미로 그림을 그렸다. 보화는 보배로울 보(寶), 그림 화(畵)로 보배로운 그림을 말한다. 그림에 그려진 보석들은 여성들의 존귀한 가치를 뜻한다. 보석을 배경으로 풀어낸 작품도 있고, 전면에 내세운 작품도 있다. 퀸은 보화이고, 보화는 곧 퀸이다. 그것은 곧 높은 가치와 존귀함, 보배로운 귀함을 말한다.김경희 작가는 내면의 성찰에서 나오는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존감을 그림에 담아냈다고 말했다. 그림에 나온 인물들은 김 작가가 실제 만났던 여성의 모습을 본떠 일부 변형해 그렸다.김경희 작가는 내면의 성찰에서 나오는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존감을 그림에 담아냈다고 말했다. 그림에 나온 인물들은 김 작가가 실제 만났던 여성의 모습을 본떠 일부 변형해 그렸다.김경희 작가는 내면의 성찰에서 나오는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존감을 그림에 담아냈다고 말했다. 그림에 나온 인물들은 김 작가가 실제 만났던 여성의 모습을 본떠 일부 변형해 그렸다.김경희 작가는 내면의 성찰에서 나오는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존감을 그림에 담아냈다고 말했다. 그림에 나온 인물들은 김 작가가 실제 만났던 여성의 모습을 본떠 일부 변형해 그렸다.김경희 작가는 내면의 성찰에서 나오는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존감을 그림에 담아냈다고 말했다. 그림에 나온 인물들은 김 작가가 실제 만났던 여성의 모습을 본떠 일부 변형해 그렸다.■ 그림에 나온 여성은 상상으로 그렸나상상으로 그린 건 없고, 조금씩 응용하고 변형한 부분이 있다. 각계각층에 있는 여성들을 만나 대화하고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했다. 거기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이 확고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있다. 몇 마디 나누면 첫 느낌으로 안다. 자세히 보면 눈빛이 살아있다. 그분들의 가치를 높여주고 싶었다. 오랜 시간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나면서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묻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림을 그릴 때 사진을 참조해 저만의 자세나 색깔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개인적으로 쌍꺼풀이 없고 올라간 눈을 선호한다.■ 여성성이 화두가 되는 요즘 시대와 맞아떨어지는 주제인 것 같다그런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여성성이 옛날에는 감춰져 있었다면 이제는 여성들이 가진 욕망이나 욕구, 성장을 표출하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드러내는 게 필요하지 않나 싶었다. 작품에 있는 여성들의 눈빛, 손끝을 보면 다 나와 있다. 손끝이 어떤 언어일 수도 있고, 대상을 지시하는 것일 수 있고, 어떤 느낌이나 욕구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욕망이라 하면 성적 욕망을 포함한 모든 욕망을 말한다. 이런 세밀한 지점을 발견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 그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어렸을 때 충남 부여군 남면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마정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던 김경호 선생님께서 그림에 재주가 있다고 보셨다. 수업 끝나고 남아서 그림을 그렸고 학교 대표로 각종 미술대회에 참가해 상을 탔다. 중학교 가서도 반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뽑아 미술부에 들어갔다. 그때 이경희 선생님을 만났는데 나를 많이 아껴주신 기억이 난다. 같은 길을 가려고 하는 제자라서 더 예뻐해 주신 게 아닌가 싶었다.■ 대학에서도 미술을 전공했다서양화를 전공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세부전공으로 추상화(비구상화)를 했다. 나중에 대학원 과정을 밟을 땐 구상화를 그려나갔다. 점차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그림 방식을 접목했다. 대학교 다닐 때는 도서관에 가서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책을 읽곤 했다. 언젠가는 이 글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습작도 병행했다. 남성들의 세계를 알고 싶어서 삼국지 책도 읽었다. 사실 그림과 관계없는 일이지만 지성을 채우고 싶었다. 대학교 졸업한 뒤 잠깐 서울 논현동에서 미술 강사를 하다가 지역 신문사에서 2년 반 정도 일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줄곧 그림만 그려왔다. 학창시절 만났던 선생님, 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들이 내 뿌리와 밑바탕인 셈이다. 내 역사는 내가 쓰는 거다. 자식들에게도 말한다. 네 경력은 네가 만드는 거라고.■ 신문사는 언제 들어갔나졸업하고 26살 때 부여신문에 입사해 만평위원, 문화부차장을 역임했다. 취재기자도 잠깐 했다. 만평은 이달의 화제가 되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는 일이었는데 젊었을 땐 어떤 일도 하겠다는 용기가 있었다. 나에게는 그런 건강한 에너지가 있다. 돌아보니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습작하고, 신문사에서 취재기자하고, 만평을 했던 경험들이 내 삶에 어떻게든 도움이 됐다. 글로 문화예술을 표현한 게 그림 세계와 연결이 된 셈이다.■ 이번에 옥천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옥천과 인연은시댁이 옥천읍 서정리라 대전에 살면서 왕래했다. 예전에 옥천미술협회지부장도 맡았고, 옥천예총 부회장도 역임했다. 개인전도 했다. 옥천교육도서관에서 내 개인전을 옥천에서 처음으로 했고, 옥천문화예술회관에서는 충북문화재단 지원을 받아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교육도서관에서 서양화반, 아크릴반 수업을 10년 가까이 진행했고, 평생학습원에서도 강의를 했다. 또 옥천문화원에서 서양화 문화교실을 6~7년 가까이 했다. 가끔 머리를 식혀야 할 때 편안하게 다가온 곳이 내겐 옥천이었다.■ 가정을 돌보고 그림을 그리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두 가지 일을 다 잘할 순 없다. 그래도 내 역사는 내가 쓴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개인전을 33회 열고, 단체전도 지금까지 635회 참여했다. 재작년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맡은 것은 내게 큰 자부심으로 남는다. 수상이력이 곧 김경희 작가의 역사다. 그림 경력은 지금까지 30여년 됐을 거다. 그림은 내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계속 갈 것이다. 한 분야에서 빠르게 뻗어나가고 싶은 기질이 내 안에 있다. 물론 집안 살림하고 일상을 지키는 여성들도 소중한 가치가 있지만 사람마다 자기 특색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삶의 주체성이 있는 여성들을 찾아내고 만나고 싶은 게 꿈이다.■ 그림을 보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어떤 사람이든 자기 위치에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각자 자리에서 여성의 드높은 가치를 찾아봤으면 좋겠다. 이 그림들이 어떻게 보면 하나의 이상이자 꿈이나 마찬가지다. 20살, 30살 때 다들 꿈이 많았을 것이다. 그때 가졌던 꿈을 혹시 잊고 살았던 건 아닌지 다시 들여다보고 밖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행운이 가득한 선물행운이 가득한 선물 II5월의 선물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08-05 13:42

[옥천, 청년을 만나다] 막연하게 만나고 싶었다. 옥천에 사는 청년이 있다면 어디든 가보자는 심산이었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어떤 이야기든 듣고 싶었다. 요즘 어떻게 사는지부터 해서 취미는 어떤 게 있으며 고민거리는 없는지 알고 싶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시간이 훨씬 많은 이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뿐이다. 비가 조금씩 내리던 지난 6월7일 오후1시, 올해 초 군 제대한 20대 옥천 토박이 두 청년을 둠벙 카페에서 만났다. 자연스레 군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정준혁(23, 읍 수북리) 씨는 강원도 춘천에 있는 특수기동지원여단에서 공병 특기로 불도저 운전병을 하다 올해 1월23일 조기 전역했다. 실제 전역, 이른바 찐전역은 2월28일인데 군 생활 내내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휴가를 못 쓰면서 제대할 때가 되어서야 휴가를 몰아 쓴 것. 말 그대로 미복귀 전역을 했다. 당시 외출도 면회도 허락되지 않아 근 1년간 부대에만 머물러야 했음에도 준혁 씨는 군 생활이 재밌었다고 한다. 좋은 선·후임을 만나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며 지냈다고.옥천에서 나고자란 동갑내기 친구 정준혁(왼쪽), 최민호(오른쪽)씨를 둠벙 카페에서 만나 근황을 들었다.■ 좋은 선·후임 만난 게 행운이었어요“제가 다녔던 부대는 우리나라 최초로 창설된 지뢰제거 전담부대예요. 보직이 공병으로 걸려서 자대 가서 불도저를 몰았는데요. 그전에 후반기 교육을 받았지만 처음 운전하는 거라 힘든 점이 있었죠. 그래도 좋은 선임들을 만나서 일도 금방 배우고 익숙해져서 크게 어려운 건 없었어요. 코로나가 함께했던 군 생활은 조금 달랐던 거 같아요. 화생방 훈련도 안 하고, 생략된 교육 일정이 많았거든요. 군 생활에 잘 적응해서 그런가 요즘 들어 부사관 지원도 고민하고 있어요. 제 주변에 부사관으로 들어간 지인이 있는데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거든요. 다시 간다고 하면 공병 특기로 들어가고 싶어요.”죽향초, 옥천중을 졸업한 준혁 씨는 고등학교를 충남기계공고로 진학했다. 사회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자 대전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당시 충남기계공고를 다녔던 고향 친구들이 8명 정도 있었다고. 준혁 씨는 학교에서 CNC선반을 배웠는데 그때 전공을 살려 충북도립대 기계자동차과에 입학했다. 세부전공으로 기계과, 자동차과로 나뉘는데 CNC선반, 용접, 캐드(CAD) 도면설계 등을 배우고 진로 선택의 폭이 넓은 기계과를 지망한다고. 현재 1학년 1학기까지 다녀 8월 중 복학을 앞두고 있다.“제대하고 나서는 찐전역 날까지 집에서 쉬었고요. 얼마 전에는 군에서 하는 청년 일자리 아르바이트에 신청했어요. 제 용돈은 스스로 벌고 싶어서 장령산휴양림 매표소 안내원 일을 두 달 했는데요. 자동차도 없고, 버스로 다니기에는 시간도 애매하고, 조금 멀더라고요. 지금은 그만뒀고 복학하기 전에 운전면허,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을 따 놓으려고요.”■ 김종석 면대장님 감사합니다!최민호(23, 읍 가화리) 씨는 중학교 3학년 때 준혁 씨를 같은 반 친구로 만나 7년째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삼양초, 옥천중을 졸업한 민호 씨는 마찬가지로 충남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충북도립대 기계자동차과에 진학해 친구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다. 실은 미래 진로에 고민이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서 기계과를 전공했으니 흘러가는 관성처럼 대학에서도 같은 전공을 이어가지 않았나 하는 것. 세부전공으로 기계과를 지망해 중견기업 취업을 목표로 삼았지만 공부해보면서 이 길이 적성에 맞는지 찾아보고 싶다고. 그 또한 8월 중 복학을 계획하고 있다.민호 씨는 올해 3월23일에 조기 전역했다. 찐전역은 4월12일. 군대는 상근으로 나왔다. 상근 중에서도 군 상근(군서면 월전리 부대)과 지역 상근이 있는데 민호 씨는 읍·면 행정복지센터에 출근하는 지역 상근을 발령 받아 고향 옥천에서 군 생활을 했다. 안내면 그리고 군서면행정복지센터에 출근해 예비군 일정 및 인적사항 관리 업무를 맡았다고.“2019년엔가 카카오톡으로 문자가 왔어요. 저는 상근으로 나오고, 준혁이는 군대 카톡이 왔거든요. 주변에서 시샘 많이 했죠. 어디 멀리 떨어진 게 아니고 집 가까운 데서 일하니까요. 상근할 때 면대장님이 한 분 계셨어요. 안내에서 일하다가 통합되어서도 전역할 때까지 같이 일했던 김종석 옥천서부통합면대장님이라고 계시거든요. 옥천 서부는 군서, 군북, 안내, 안남면을 아우르는 말이에요. 그때 면대장님께서 챙겨주신 덕에 별 탈 없이 군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지 조금 민망하네요(웃음).”제대한 뒤 6·1지방선거 아르바이트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던 민호 씨는 요즘 헬스에 관심이 있다. 먼저 헬스장을 다니던 준혁 씨가 추천해 몸집은 더 키우고, 얼굴 살을 빼는 방향으로 운동에 매진한다고.■ 일자리 찾으려면 어디든 가야죠2024년에 대학 졸업을 계획하는 준혁 씨와 민호 씨는 조금씩 취업을 위한 걸음마를 떼고 있다. 그러면서 옥천 바깥세상으로 나갈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주변 친구들 또한 수도권에 있는 공장에 들어간 상황이라 일자리를 찾으려면 정든 고향을 떠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들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학창시절을 돌아볼 때 기억에 남았던 일이 있는지 물었다.“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이랑 같이 천안 테딘워터파크에 놀러 갔던 기억이 있고. 또 기숙사 생활할 때 새벽에 몰래 빠져나와서 영화 컨저링을 봤어요. 외출, 외박도 가능한데 안에만 있으면 조금 답답하잖아요. 저희가 학교 다닐 땐 축구부와 같이 붙어있던 기숙사라 그쪽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빠져나가면 안 걸렸거든요. 지금은 막혀있지 않았을까요(웃음).”옥천신문은 읽고 있는지 궁금했다.“구인구직 정보를 보려고 옥천신문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둘러보곤 했어요. 그리고 지용제나 안터마을 반딧불이 축제 소식이 올라오면 재밌게 봤고요.” (정준혁)“상근할 때 종이로 나오는 옥천신문을 봤어요. 저는 식당 사장님 인터뷰나 옛날 가게 소개하는 기사를 꼭 봤어요. 청산이나 면에 있는 가게가 소개된 기사도 봤는데 거리가 멀어서 찾아가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최민호)어렸을 때부터 옥천에 살면서 추억이 있는지 물었다.“동네 친구들이랑 또랑에 가서 놀았죠. 옛날에 수북리에 있는 향수호수길에서 빙어낚시축제를 했잖아요. 가족이랑 같이 가고, 친구들이랑 거기서 팔던 어묵을 먹었던 게 떠올라요. 초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아마 안전사고 문제 때문에 지금은 (축제를) 못 하는 걸로 알아요.” (정준혁)■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 그리고 옥천평소 분데스리가, EPL 등 해외축구 경기 보는 걸 좋아하는 준혁 씨와 리그오브레전드(LOL) 게임을 즐겨한다는 민호 씨. 취업 같은 단기적인 목표를 떠나 살면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지 묻자 이들은 한목소리로 ‘내 집 마련’을 말했다. 좋은 주거공간에 살고 싶은 건 모든 이들이 꿈꾸는 바다. 학교 선배들로부터 취업 진로에 관한 조언을 들은 게 있는지 물었다.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등학교가 특성화고라서 3학년 때 취업을 잠깐 했다가 옥천이 그리워서 다시 온 거거든요. 학교 추천을 받아서 저희 말고 다른 친구들도 여러 곳에서 일했는데요. 계속 있었다면 방위산업체에서 군 생활을 대체할 기회도 생기지만 포기했죠. 거기서 1년 일하고 선택이 되면 34개월을 더 일해야 군 문제가 해결되는데 급여나 근무시간 등 근무여건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어요. 이때 학교 선배에게 여러 조언을 들었죠.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사회생활을 접하면서 배운 점도 있고요. 후회는 없어요.”인터뷰가 끝나면 헬스장에 갈 예정이었던 두 청년. 이들에게 복학하면 공부도 공부지만 동아리 활동을 해볼 것을 권했다. 관계의 폭을 넓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사귀어 보라는 바람이었다.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을 만나면서 세상을 더 깊게 알아간다는 마음으로. 오는 8월22일 2학기 개강을 앞둔 두 사람의 건투를 빈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08-05 13:36

초등학교 시절, 필자는 피아노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학원 등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알았다. ‘아, 나는 피아노 적성이 아닌가 보다.’ 머리와 손이 따로따로 놀았다. 기초부터 배운다고 교본에 있는 악보에 맞춰 건반을 누르는데 따분하게 느껴졌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그만두지 않았다. 학원비를 내준 부모님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한 1년을 다녔을까. 체르니 100번을 마치고 한계를 느껴 그만뒀다.실은 피아노학원을 쉽사리 못 그만둔 이유가 또 있었다. 마음에 담아둔 이성 친구가 있어서 그랬다. 성령이라는 친구를 매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학원 가는 길이 언제나 설레었다. 머릿속에 피아노 건반 치는 일은 언제부턴가 뒷전으로 밀려났다. 학원에 가면 같이 공기놀이도 하고, 왁자지껄 떠들고 장난치는 시간이 즐거웠다. 지나고 보니 내 인생의 영원한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피아노 악기와는 멀어진 시간이었다.지난 3월 장야초등학교 앞에 김지은피아노교습소를 개원한 김지은 원장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김지은 원장 같은 선생님을 만났다면 피아노와 더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김 원장은 시간정원제 수업으로 개인 특성에 맞게 학생들을 일대일 지도하고 있었다. 수원대학교 음악학부 피아노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생 때부터 개인지도, 학원 출강, 부원장 경력 등 지금까지 20년 이상 피아노만 가르쳐왔다.■ 학생 성향에 맞는 일대일 지도 방식서울, 대전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을 하다 옥천서 처음으로 피아노교습소를 연 김지은 원장. 그간 많은 학생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교습소를 연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한다. 그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 ‘성향에 따라 받아들이는 부분이 다르다’는 노하우를 체득했다. 여기서 학생 성향에 맞게 교육방식을 달리 가져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피아노를 ‘평생 가는 친구’가 될 수 있게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현재 교육생은 유아,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하다.“옥천에는 지난해 5월에 왔어요. 태어난 곳은 서울인데요. 남편 회사가 대전에 있어서 결혼하고 대전 와서 살았거든요. 주말에 시간 내서 옥천에 많이 놀러 왔죠. 남편이랑 저랑 장령산을 좋아해서 휴양림에 자주 왔거든요. 그때 당시에는 옥천에 살 생각은 없었는데요. 주말마다 옥천에 오니까 마음이 평안하더라고요. 실은 가화리에 이사한다고 했을 때 남편보다 더 좋아했어요. 막상 오니까 아는 사람들이 적어서 조금 적적하더라고요. 그래도 이번에 교습소를 열고 아이들과 학부모를 만나면서 옥천 분들과 교류할 길이 열린 거 같아요.”그에게는 예전부터 꿈이 있었다. 자녀가 생기면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서 피아노학원을 차리는 것. 아침에 7살 된 아들을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이번 교습소 개원이 꿈을 실현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지은 원장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어머니 권유로 6살 때부터 피아노를 접했다. 특히나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그는 찬송가를 부를 때 필요한 피아노 반주를 오랜 시간 맡으며 피아노라는 악기와 더 가까워졌다. 음악과 함께하는 삶은 인생에 또 다른 선물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일상을 살면서 열심히,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음악을 즐기는 시간만큼은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정서적인 안정과 함께 일상의 활력이 덤으로 온다. 어떤 이에게 음악은 자기 자신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접하면 정서함양에 도움이 된다는 김지은 원장은 그의 아들에게도 양손을 쓰고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피아노 연주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장기적으로 학습능력이 좋아지는 효과 또한 기대하고 있었다.■ 단순한 연주도 아름답게 들릴 수 있어요유아 때부터 피아노를 접하면 음감이나 리듬감이 더 좋아지는 면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피아노를 배우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성인 또한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의지만 있으면 따라갈 수 있다. 최근 중학생 아이를 두고 있는 주부와 대학교 다니는 학생이 개인 취미 삼아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며 김지은 원장에게 연락한 일이 있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음악적 감성과 표현력은 훨씬 깊고 풍부한 연주로 완성될 수 있다. 무엇을 배우는 데 늦을 때란 없다.“항상 아이들에게 그래요. 지금 배운 게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취미생활이 될 수 있다고요. 평생 가는 친구처럼요. 물론 기초가 쌓이고 쌓여 아이들이 연주를 잘해야 피아노를 좋아하거든요. 못하면 하기 싫어해요. 저는 피아노를 잘하게끔 도와주는 일을 하고, 아이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피아노를 친구처럼 여길 방법을 항상 고민하고 있어요.”김 원장은 학생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과정에서 선생님과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아이들마다 교육 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빠르게 집중해서 습득하는 아이도 있고요. 오랫동안 앉아서 천천히 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아이가 조급해하지 않게 선생님과 부모님이 옆에서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단순히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치더라도 못 치는 게 아니거든요. 간단한 곡이라도 아이들이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아름답게 들릴 수 있어요. 그게 중요한 거 같아요.”김지은 원장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기초·중급반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성인들은 예외로 시간을 따로 정해 수업을 진행한다. 기초반은 하루에 45~55분, 중급으로 올라가면 수업 시간은 더 길어진다. 시간 정원제로 운영하는 만큼 일주일에 2~3번 수업을 진행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매일 피아노를 접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김 원장의 지론이 있었다. 피아노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중간 중간 슬럼프가 오기 마련. 안 되는 날은 편한 곡들을 위주로 지도하고, 잘 되는 날에는 집중해서 연주해 피아노와 멀어지지 않도록 한다.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방 4곳, 키즈룸 1곳이 있다. 교습소 중앙 홀에는 학생들이 피아노 이론을 공부할 수 있도록 자리를 배치했다.■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권해드려요“아이들이 물어봐요. ‘피아노의 끝은 어딘가요? 선생님은 다 끝났어요?’ 그러는데 ‘선생님도 아직 안 끝났어’라고 말해줘요. 아이들은 의아해하죠. 그렇지만 20년 넘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저도 하면 할수록 알아가는 게 많거든요. 표현하고 싶은 연주가 어제오늘이 달라요. 더 어려운 곡을 해서 뛰어 넘겠다는 게 아니라 표현력이 풍부해지는 거죠. 그래서 끝이 없는 거 같아요. 또, 몸으로 배우는 거라 단번에 끝나지 않아요. 피아노는 길게 하는 거예요.”김지은 원장은 한 달에 한 번 학생들이 각자 하나씩 좋아하는 곡을 골라 연주회를 연다. 지난달 27일에는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특강 연주회를 열었다. 그는 아이들의 피아노 실력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연주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기록을 남겨놓는다. 연주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부모님에게 피아노 치는 모습을 자랑하면 칭찬도 들을 수 있어 동기부여에도 도움이 된다. 앞으로 코로나가 잦아들면 원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콩쿠르 대회에 참가해 경험을 쌓게 할 계획도 있다.그는 학생들을 처음 만나면 2주 정도 적응기간을 잡는다. 김 원장도, 학생도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어떤 학생은 배운 지 한두 달밖에 안 됐는데 영화 OST를 연주하고 싶다고 요청할 때가 있었다. 요즘에는 쉽게 나온 악보들이 많아 아이들이 소화할 수 있는 곡으로 악보 일부를 변형해 알려주면 학생들이 좋아한다고. 그렇지만 입맛에 맞는 곡만 연주하다 보면 자세가 흐트러질 수 있어 기초 과정을 병행해 지도한다고 한다.피아노라는 악기를 통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지은 원장은 동시에 자기 자신도 성장하는 과정으로 이 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수업 끝나고 피아노를 더 치고 싶은 친구들도 가끔 있는데요. 대개 놀러 오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아이들과 친해지면 저는 좋죠. 다 인근에 사는 아이들이니까요. 요즘 부모님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키울지 고민 많이 하시잖아요. 제 아이도 같은 고민이지만 옥천에 있는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아이들에게는 노는 시간이 참 소중하잖아요. 배우러 온 아이들이 인생의 좋은 친구로 피아노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원장실에는 학생 개인 상담 및 수업 지도 준비가 이뤄지고 있다. 교습소 벽면에는 피아노 기초를 익히는 데 필요한 음표가 붙여져 있다.지난 3월 장야초등학교 앞에 개원한 김지은피아노 교습소 전경. 주소 : 옥천읍 장야리 306-3전화 : 010-4031-0737영업시간 : 시간정원제 수업 / 매주 토요일 일요일 휴무인스타그램 : piano1204je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07-29 14:16

장애인기능경기대회 네일아트 부문 3년 연속 수상자 현은남 씨가 네일아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할머니 등에 업혀 옥천을 봤다. 어릴 적 봤던 서정리의 아름다운 꽃들이 기억에 남아서일까. 어느순간 집에서 네일아트를 하고 있더라. 내 손으로 만들어내는 작은 ‘손톱꽃’들은 어렴풋이 기억하는 할머니의 등처럼 포근하고 친근하다.   전동 휠체어와 장애인 콜택시를 두 다리 삼아 옥천에 살아온지 벌써 46년. 읍내 사회적 기업 경리직에 일을 하고 있지만, 머릿속은 온통 네일아트 뿐이다. 남들과 다른 삶에 네일아트는 그저 ‘선물’같았다고. 이제 기다리는 거엔 신물이 났다. 그래서 네일아트가 좋더라. 내가 노력한 만큼 예뻐지는 정직한 손톱이 좋았다. 현은남(46, 옥천읍 서정리) 씨의 네일아트엔 그의 꿈이 담겨 있다. 취미로 시작한 네일아트는 이젠 그의 모든 삶에 스며들었다. 낮에는 사회적 기업 경리, 일과 후엔 네일아트를 연습하고 공부한다. 힘들 법도 하지만 좋아서 하기에 힘들지 않다고. 작은 손톱 안 현은남 씨가 그려가고 있는 ‘손톱꽃’들을 옥천도서관 앞 사진카페 2월에서 들어보았다.현은남 씨의 네일아트 작품현은남 씨의 네일아트 작품■ 장애인기능경기 3년 연속 수상, ‘내가 왜?’취미로 시작한 네일아트지만 이제 네일아트 없는 내일은 생각할 수 없다는 현은남 씨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네일아트에 대해 말했다. “원래 제가 네일아트를 좋아해서 조금씩 집에서 취미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3년전에 복지관에서 네일아트 강좌가 생겨서 본격적으로 강사님께 배우게 됐죠” 실제로 현은남 씨는 복지관에서 알아주는 스타다. 지난 달 29일 열린 충청북도장애인기능경기 네일아트 부문 은상을 수상한 것. 장애인기능경기대회 3년 연속 수상이라는 영예와 함께 작년에는 충북대표로 전국대회에도 출전했다. 대회에 나갔다 하면 수상을 하는 믿고 맡기는 ‘복지관 메달리스트’인 셈이다. “장애인기능경기에서 3년 전에 처음 네일아트 종목이 생겼어요. 복지관에서 나가보라고 해서 경험삼아 나갔죠. 수상자로 호명됐을 때 깜짝 놀랐어요” 뒤이어 현은남 씨는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에 수상했을 때는 ‘내가 왜?’ 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어요. 주위를 봐도 저보다 잘하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그 이듬해에도 상을 받고, 이번에도 상을 받아도 여전히 같은 생각이에요. 도대체 내가 왜?”장애인기능경기대회 네일아트 종목은 약 40분 가량 두 손가락 기준 젤네일과 풀컬러, 그리고 케어를 평가한다. 준비시간 포함 1시간 가량 진행되는 대회에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인인 현은남 씨는 불편한 점도 많았다고. “제가 자세를 자유롭게 할 수 없고, 네일을 받으시는 분이 최대한 편하게 해드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고정된 자세로 할 수밖에 없어요. 몸을 최대한 당겨서 눈을 가까이 붙인 자세로 40분 정도를 있는거죠. 끝나고 나면 어깨랑 허리가 많이 아파요”■ 복지관에서 받은 만큼, 지역사회에 환원하고파평일에는 읍내 사회적 기업 경리로 일하고 있는 현은남 씨는 주말엔 자원봉사자가 된다. 복지관에서 받은 만큼, 지역사회에 돌려주고 싶다는 그는 말을 이었다. “6월에 복지관에서 안남면으로 자원봉사를 나갔어요. 그때 저도 같이 갔죠. 안남면에 계신 어르신분들에게 네일아트, 손톱케어를 해드렸어요” 어르신들이 너무 좋아하셨다며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현은남 씨는 말을 덧붙였다. “어르신 분들이 손톱케어만 해도 ‘시원하고 깔끔해서 좋다’고 말씀해 주시니까 너무 뿌듯했죠. 보통 농사일을 많이 하시니까 손톱 관리를 따로 하기 힘드시잖아요. 받으신 할머니 한 분은 농사일로 손톱에 물든 게 안  좋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건강이 허락되면 더 많이 자원봉사에 동참하고 싶은 게 현은남 씨의 심정이다. 그러나 매달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을뿐더러 멀리 이동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항상 더 해드리고 싶은 게 제 마음이죠. 간다면 가능한 외곽에 사시는 분들을 찾아가려고 해요. 멀리 사시는 노인들뿐만 아니라 장애인분들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8월에도 읍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원봉사를 계획하고 있어요”■ 우리 지역 저상버스는 단 1대, 작은 턱에 가슴은 ‘철렁’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작년 12월 기준 옥천에 살고 있는 지체장애인은 총 2천229명에 달한다. 이는 옥천군 총 인구 대비 약 5%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수치다. 100명 중 5명이 지체장애인이라는 셈. 그러나 이들이 살아가는 우리 지역은 녹록치 않다. 할머니가 업어주던 초등학교 시절과 비교해 크게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는 현은남 씨는 옥천에서 지체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에 대해 말했다. “옥천 시내버스 중에 제가 탈 수 있는 저상버스는 1대 밖에 없을걸요? 항상 장애인 콜택시에 의지하는 편이죠. 그마저도 보조사의 도움 없이는 힘든 실정이에요. 카페를 가거나 식당을 가도 턱과 계단에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도록 해놓은 곳은 거의 없어요” 실제로 통계청에 따르면 7월 기준 옥천군 시내버스는 총 29대다. 그러나 그중 저상버스는 단 1대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대전노선을 경유하는 607번이라 면 단위 지역을 오고 가기에는 쉽지 않다.식당과 상가의 턱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현은남 씨가 ‘사진카페 2월’을 자주 찾는 이유도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경사로가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렵다고. “저희가 흴체어를 타고 들어오면 가게에 계신 분들이 어떻게 할 줄 몰라 하세요. 서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인 거죠. 그런 상황이 되면 서운한 마음이 들죠. 근데 이곳은 들어오면 사장님이 알아서 의자도 빼주시고, 자리도 잡아주셔서 좋아요”■ 취미로 시작한 ‘네일’아트, 이제는 ‘내일’을 꿈꿔요.마지막으로 현은남 씨는 웃으며 말했다. “복지관에서도 많이 지원해주시고, 강사님도 열정적으로 지도해 주셔서 상을 받고, 자원봉사도 하고 있어요. 내년부터는 복지관 다른 분에게 대회 출전을 양보하려고요. 다른 분들도 정말 잘 하시거든요. 저는 이렇게 말했는데 내년 되면 또 나갈지 잘 모르겠네요”현은남 씨 주위 친구들의 손톱은 항상 알록달록하다.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은 그의 마음이다. 작지만 큰 그의 따뜻한 손이 우리 지역을 ‘손톱꽃’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인물일반 | 주찬식 인턴기자 | 2022-07-29 14:10

온당농장 강성식 대표좋은 먹거리는 건강한 육체의 기본조건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좋은 먹거리를 찾아 발품을 팔기도 한다. 이처럼 친환경 농산물, 건강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 간다. “지난 19년 동안 농장을 운영하며 친환경농법을 고수했습니다. 사과 대추를 무농약으로 재배하고 그 나무 밑에는 각종 나물과 건강한 식재료를 재배해 먹고 있습니다. 이런 농사일과 관련되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건강과 발효식품에 관심이 많아 이와 관련해서 가진 지식에 대한 이야기들을 유튜브에 담고 있습니다” 이원에서 사과 대추 농장을 운영하고 유튜브 채널에 농업 기술 지도와 건강 먹거리에 대한 컨텐츠를 올리는 온당농장 강성식(55, 이원면 장찬리) 대표를 만났다.■ 건강을 생각해 귀농을 결심하기까지강성식 대표는 충남 논산에서 나고 자라 충남대학교 화학과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하여 대기업에 입사해 화학약품을 주로 다뤘다. “첫 직장에서 인공위성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거기서 만든 위성이 우주에 쏴서 올라가졌어요. 밀폐된 공간에서 인공위성 부품들을 세척하는 일을 했는데 그게 어떤 약품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니깐 몸에 해로운 독성물질을 계속 접하고 업무 특성상 혼자서 감당하다 보니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내 몸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성식 대표는 업무 특성상 화학약품을 많이 다뤄 건강이 해칠 것을 염려해 직장을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 호흡기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름에도 1년 내내 비염처럼 콧물을 흘리고 폐까지 전부 헐어버리니깐 나이가 들수록 더 병을 얻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직장 안에 있는 산을 개간해서 텃밭을 가꾸고 야콘을 재배하게 되니깐 야콘의 효능에 대해 알게 되고 이걸 토대로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물론 집안의 반대도 있었다. 오랜 설득을 끝으로 귀농하게 되어 야콘 농장을 지었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친환경으로 야콘을 재배하고 그걸 가공하는 공장까지 짓다 보니깐 가진 걸 다 쏟아 부어도 벌이가 잘 안 되고 판로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강성식 대표는 마케팅과 판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지자체의 도움을 받았다. “지자체에서 조금씩 해주는 마케팅 교육을 하다 보니깐 인터넷이나 SNS를 통하지 않고 농민이 판매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껴졌어요. 그러다가 기기를 잘 다루는 특성을 살려 직접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 편집하고 쇼핑몰을 만들어보기도 했습니다” 강성식 대표는 초보 귀농 농가의 어려움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결해 나갔다. 유튜브 채널 '강성식 건강먹거리'.■ 유튜브 채널 ‘강성식 건강 먹거리’를 운영하며“개인 쇼핑몰을 만들어 운영하려다 보니 너무 경쟁이 치열해 홍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하지만 크게 홍보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고, 비용이 덜 들게 블로그를 운영하는 등 혼자서 해결해보려 했지만, 노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러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찾게 되며 이용하다 보니 어쩌면 유튜브 아니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성식 대표는 홍보를 위해 초반에는 유튜브에 맨땅에 헤딩하듯이 부딪혔다. 채널 운영은 유튜브에 검색해서 강의를 찾아 듣고 하나하나 몸으로 익혀갔다. “초반에 요즘 트렌드를 따라가려고 하다 보니 조금 배웠던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기술을 활용하고 기본적인 전산 지식, 저만의 요약하고 추려내는 기술을 활용하며 ‘원테이크 무자막 무편집’이라는 나만의 색깔을 찾아 가볍게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강성식 대표는 유튜브 채널 ‘강성식 건강 먹거리’를 운영하며 전국 각지를 돌며 사과, 대추, 호두, 체리, 포도, 복숭아 등의 농장을 돌며 기술 지도를 한다. 또한 발효식품에 대한 영상과 더불어 이계호 교수와의 대담으로 건강과 먹거리, 요리에 대해서도 다룬다. 영상은 한 번에 원테이크로 촬영하여 많은 편집 없이 30분에서 1시간 안에 업로드한다. 건강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 외국인 시청 비율이 5%에 다다를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많다, 지난 6월엔 구독자 6천명이 유입되고, 6월 유튜브 수입이 300만원이 나오는 등 강성식 대표는 올해 구독자 3만명, 내년 10만명을 목표로 달리고 있다. ■ 친환경 농사를 지으며 유튜브로 네트워크 확장을 꿈꾸다귀농을 시작하고 19년간 친환경 농법을 고수해 온 강성식 대표는 친환경 농법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올해는 기후 위기 때문인지 사과 대추 순에 파리들이 너무 끼고 알을 까면 싹이 아예 나질 못해 어쩔 수 없이 관행 농법으로 농약을 조금씩 뿌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친환경을 추구해왔던 만큼 PLS(농약 허용기준 강화제도)의 허용치보다 양과 횟수를 적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성식 대표는 병해충 상황이 호전된다면 다시 친환경 농법으로 전환하여 사과 대추를 재배할 것이라 말했다.강성식 대표는 유튜브를 통해 자신이 공부했던 건강 먹거리를 다루고 전국으로 기술 지도를 다니며 만들어지는 네트워크를 통해 사업의 확장도 꿈꾸고 있다. “앞으로의 비전은 이제 농사를 즐기는 수준,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서 짓고 싶어요. 제가 먹는 걸 재배하고 제가 재배하지 못하는 부분은 농사를 잘 짓는 사람을 발굴하여 공급받아 먹으면서 건강 먹거리를 추구하고 싶어요” 강성식 대표는 전국 각지에서 기술 지도하며 만난 사람들과 인프라를 쌓고, 자신의 농업기술이나 마케팅 방법 같은 노하우를 농민의 시각에서 질문하고 전수하며 더 확장되길 바란다. “이런 노하우나 지식을 가지고 일부 지인, SNS 상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하고 교류하면서 사업도 확장하면 좋을 것 같아요” 강성식 대표의 친환경 농사와 건강 먹거리를 향한 애정과 노력은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유튜브 ‘강성식 건강먹거리’ 채널 주소 : https://www.youtube.com/c/강성식건강먹거리

인물일반 | 이영선 인턴기자 | 2022-07-29 13:59

금왕산 선수와 김부영 선수가 함께 멀리있는 과녁에 조준을 하고 있다박경모-김우진-김종호 선수와 같이 세계 제패를 한 이원출신 궁수의 계보를 이을 선수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6월12일 대통령기 전국대회에서 이원출신 이효범(17, 충북체고), 김필중(23, 한국체대) 선수가 나란히 고등부 대학부 개인전에서 1,2위를 기록한 경사가 한달이 지나자마자, 이원중 후배가 전국대회 단체전 우승을 이끌며 그 명성을 더하고 있다.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전북 임실에서 개최한 제43회 화랑기 전국시도대항 양궁대회 단체전에서 청주, 충주, 옥천 등이 연합한 충북팀에 유일하게 참가한 이원중학교 금왕산(15) 선수가 팀을 이끌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지난 5월28일 경북 예천에서 열린 전국체전 단체전 은메달을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충북팀의 주축인 금왕산 선수는 마지막 뒷심을 유감없이 발휘해 금메달을 땄다. 금왕산 선수와 김부영 선수가 함께 멀리있는 과녁에 조준을 하고 있다우리나라 양궁계에 양궁명문 '이원중'이라는 글자가 명확히 각인된 순간이었다. 김필중, 이효범 선수의 대를 잇는 선수로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던 금왕산 선수가 후발주자로 그 이름을 올렸다. 금왕산 선수는 180cm에 달하는 키와 90kg 남짓한 듬직한 피지컬로 동년배들보다 무거운 양궁을 들며 집중력을 발휘해 잠재력이 높은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금왕산 선수는 결승전에서 막판에 9점, 10점을 꾸준히 맞추면서 충북팀이 220점을 기록해 212점에 그친 경남팀을 누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렇게 성과를 내는 양궁팀임에도 불과하고 선수층이 얇고 시설 등 지원이 열악하며 양궁팀 발전을 위해 지역사회와 지자체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대회 우승은 이원초 양궁장 신축공사로 인해 땡볕의 모래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는 등 악조건 속에서 일궈낸 값진 성과였기 때문이다. 금왕산 선수는 “아무 생각 없이 지속적으로 꾸준히 연습한 것이 도움이 됐다”며 “더 나은 성적을 위해 앞으로도 더 노력할 것”이라 말했다. 이원중 금왕산 선수의 우승에 기쁨을 표한 김영주(14) 선수는 “여름에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니 모래가 있어 열기가 더 올라 오는 거 같아서 힘들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금메달을 딴 왕산이 형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김부영(14) 선수도 “운동장에서 잠깐 연습해도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서 연습이 끝나면 지쳐서 쓰러진다”며 “시급히 시설개선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금왕산 선수는 “아무리 더워도 서로가 함께 있으니 더운만큼 더 열심히 할 수 있다”며 “팀원들이 없었으면 이번 금메달 획득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왕산 선수의 꿈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금 선수는 “국가대표 연령 제한이 16세부터 풀린다”며 “내년부터는 국가대표로 선발 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때문에 지금부터 더 열심히 할 예정이다”고 밝혔다.이원중 유영철 교장은 “타 지역에서 양궁부 인원이 3명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메달 획득을 하는 이유를 묻는데 이는 이원 양궁 전통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양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각지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지역사회 각 단체의 지원과 유능한 이범열 감독과 김소정 코치의 체계적인 훈련 및 특별지도가 없었다면 이같은 성과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양궁선수 이효범 선수의 아버지이자 이원양궁 부흥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원새마을금고 이재헌 이사장은 “먼저 옥천군 양궁협회가 만들어져서 지자체 지원을 이끌어내고 초중학교에 지속적인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며 “과거 양궁을 했던 선수 출신들이 옥천에 사는 만큼 이들을 주축으로 협회가 조직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울러 “악조건 속에서도 선전하고 있는 이원초중 선수들에게 고맙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원중학교 양궁부는 예천에서 개최 예정인 제19회 경북도지사기 전국 초,중학교 양궁대회에 출전하여 다시 한 번 메달 획득에 도전 할 계획이다.금왕산 선수와 김부영 선수가 함께 멀리있는 과녁에 조준을 하고 있다 

인물일반 | 권형일 인턴기자 | 2022-07-22 13:58

단우미용학원 권영숙 원장의 모습이다미용 일을 시작한지 자그마치 20년이다. 중학생 때부터 미용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단우미용학원 원장 권영숙(40) 씨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아이들의 머리를 담당해주는 소녀 미용사였다. 졸업사진을 찍을 때면 친구들은 언제나 자신한테 머리를 내주었고, 그녀는 그런 일들이 너무나도 큰 기쁨이었다. 23년 동안 미용 외길인생을 걸어온 그녀는 아직도 일이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 지치는 법이 없다. 수원에서 나고자라 미용인생의 절반을 보냈던 고향에서, 아무런 연이 없던 옥천으로 와 미용학원을 개업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우미용학원 간판사진이다단우미용학원 입구 모습이다단우미용학원 강의실 내부 모습이다■ 23년, 미용 외길인생어렸을 때부터 미용에 관심이 있었던 그녀는 ‘교내 미용사’였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의 요청에 머리를 손질해주기도 하고, 졸업 사진을 찍을 때면 드라이를 해달라는 친구들로 붐볐다. 그렇게 미용에 대한 관심이 커질 무렵,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미용사’로 진로를 일찍 정하게 되었다. 그 때 당시에는 미용고등학교가 없었던지라 미용학원을 다니면서 열심히 미용을 공부하고, 자격증도 땄다. 학교가 끝나고 다른 친구들이 보습학원에 갈 때 영숙씨는 평일에 미용학원, 주말에 미용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쉬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렸다. 수원에서 계속 학창시절을 보내던 그녀는 대학교도 ‘수원여자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집도 가까웠지만 무엇보다 당시 미용학과가 수원여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가면 장밋빛 대학생활이 펼쳐질 것이라는 로망과 달리, 영숙 씨는 여유 있는 대학생활을 즐기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미용공부와 미용 아르바이트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수원여대를 졸업하고 나서도 그녀의 미용사랑은 끝이 없었다. 서경대학교 미용예술대학원(석사), 건국대 미용교육대학원(석사), 서울벤처대학원(박사) 등 계속해서 미용공부를 하면서 북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현 인천생활예술고)를 비롯한 한성대, 여주대, 현대직업전문학교 등 많은 미용학교를 다니며 출강을 했다. 현재 그녀는 쉬지 않고 모교인 수원여자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지내며 옥천에서 미용 학원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권영숙 원장실 내부에 있는 미용 자격증이다원장실 내부에 있는 주민자치위원회 위원 위촉장이다권영숙 원장의 미용 관련 저서이다■ 미용과 함께 옥천에 온 사연 영숙씨는 올해 남편의 고향이자 일터인 옥천으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그녀는 “실은 처음에 아이 교육문제 때문에 2~3년만 살다가 원래 살던 수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죠”라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사교육이 만연한 한국의 경쟁사회 속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부모의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살다보니 점점 옥천이라는 곳이 좋아졌다. 옥천 학생들에게 주는 혜택이 예상외로 쏠쏠했던 것이다. 1년에 한 번씩 승마도 배우고, 군에서 지원을 받아 무료로 영화도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지원해준다. 주변 이웃인 옥천 주민들도 잘 챙겨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덕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원에서 운영하던 미용실을 같이 일했던 분께 넘기면서 점차 수원에서의 일을 축소했고 경쟁에서 벗어나 잠시 천천히 삶을 내려다보게 됐다. 특히 군내에 있는 옥천중, 충북산업과학고 같은 학교들을 다니며 퍼스널 컬러부터, 두피 타입에 맞는 샴푸 바 만들기를 진행하는 등 진로체험 교육을 하게 됐다. 평생학습원에서는 기본헤어커트 수업도 하다 보니 점점 영숙씨는 옥천에서 할 일들이 많아졌다. 지금은 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뷰티 클래스를 하고, 도립대학교에서도 미용 관련 프로그램 운영을 하고 있다. 생각보다 옥천에서 미용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옥천에 미용학원이 없어 사람들이 대전으로 힘들게 배우러 다니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런 문제를 옥천 내에서 좀 해소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번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주민들을 일일이 찾아갔지만, 미용에 관심 있는 모든 지역민들을 찾아가기에는 몸이 10개라도 부족했다. 이제는 학원을 통해 지역주민들을 흡수하고 싶은 것이 영숙씨의 꿈이다. 인터뷰 내내 미용에 대한 진심 어린 이야기를 하는 권영숙 원장은 그 길을 옥천 지역과 함께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저는 제 일에 자부심이 있어요. 그래서 미용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지역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도 되고, 베풀면서 지내고 싶어요.” 영숙씨는 최근에 주민자치프로그램에서 지역민들과 하는 뷰티 클래스에서 자체적으로 ‘해다움’(예쁘고정답다)이라는 봉사단을 만들었다. 수강생들에게 12월까지 열심히 미용을 교육한 후에, 함께 연말에 지역주민들을 위해 미용봉사를 하는 것이 목표다.단우미용학원 오픈 이벤트 안내문이다미용봉사단체 해다움 단체사진이다■ 진정한 미용을 배우고 싶다면, 단우미용학원미용은 트렌드에 민감한 직업이다. 남을 예쁘게 가꿔줘야 할 뿐더러, 눈 깜짝 할 사이에 새로운 제품과 기술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또한 사람과 사람과의 교감이 필요한 일이라 AI로 대체할 수 없는 직업군 중 하나로 뽑힌다. 영숙씨는 23년 동안 미용의 길을 걸으면서 미용에 대한 트렌드를 익히는 것과 사람을 다루는 일에 능숙하다. 또한 소그룹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 수강생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밀착하여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권영숙 원장은 자격증 취득과 취업 연계를 통해 수강생을 끝까지 케어해준다. “자격증을 준비하는 수강생들은 학원에 오면 무조건 합격을 시켜서 내보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격증 이외에도 취업을 원하면 자신이 원하는 샵이나 지역 등을 물어보고 연계해주기도 하죠.” 이 모든 노하우들을 혼자 준비하기 어렵기에, 옥천의 유일한 단우미용학원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단우미용학원에는 어린 학생들뿐만 아니라, 재교육이 필요한 미용 원장님들, 요양원에서 미용 봉사를 하고 싶은 사람들, 취미로 배우고 싶은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하지만 비용 부담 때문에 학원을 주저하는 사람들을 위해 영숙씨는 이들의 수업료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국비교육사업 허가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남녀노소, 직업, 나이, 신체조건 등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아름다워지고 싶은 본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점점 사람들이 미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그래서 저는 미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꿈을 이룰 수 있게 계속해서 도와줄 거예요.” -권영숙 원장-주소 : (29038)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금로 53 3층전화 : 043. 762. 7878영업시간 : 월~금, 오전 10시~오후 

인물일반 | 지유빈, 전세림 인턴기자 | 2022-07-22 13:50

1952년생 금장로 임재근 옥천의 40년 된 생활유산인 노포(老鋪), 신기닭집한동네서 같은 일을 40년 한다는 건 인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 곧 신뢰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나는 생활유산인 노포(老鋪)의 점주들을 존경한다. 40년간 노포를 운영하고 계신 사장님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뵙기 전부터 인상 좋은 이웃 아저씨를 머릿 속으로 그리면서 신기닭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따님 수정씨의 인형같이 생긴 두 공주님과 아버님을 뵈면서 적잖이 놀랐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잘 생기셨다. 영화배우 신성일과 닮으셨지만 더 잘 생기신 아버님. 아버님은 외모만 배우가 아니라 살아오신 날들도 드라마 속 주인공보다 더 입체적이고 진실했다. 우스갯소리로 명함이 10개도 넘었던 분,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던 이야기 속에 부모님 이야기, 사모님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는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못 잊는 아버님의 흉금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만남은 깊은 울림이 있었다.■ 팔밭 일구며 가난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다  그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저녁달이 꽉 찼을 때 홍역에 걸려 숨이 멎은 동생을 작은 아버지가 지게에 짊어지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동생은 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숨을 쌕쌕 거리면서 죽음이라는 녀석과 필사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국 그날 밤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내 나이 불과 열 살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10남매를 낳았지만 홍역이나 병을 앓고 꽃도 피우지 못하고 떠난 동생들이 있어 우리는 7남매로 성장했고 할아버지도 계셔서 11명 식구가 근근이 먹고 살았다. 산자락의 팔밭을 일구어서 입에 풀칠을 했으니 하루 두 끼는 고사하고 어머니가 밀어주시는 홍두깨 칼국수도 후루룩 후루룩 몇 번만 들이키면 대접 바닥이 훤히 보였다. 먹고 살길이 딱히 없어서 팔밭을 일구느라 다들 진땀을 뺐다. 산에 나무 베서 괭이로 파고 자갈밭에서 돌 들춰 겨우 농사지을 만한 터를 만들어서 고구마며 곡식거리들을 심었다. 다행히 고구마는 잘 버텨내서 쌀 구경이 어려운 우리들에게 구황작물 노릇을 톡톡히 했다. 풀죽 먹으면서 입에 풀칠하면 양반이던 시절, 세월을 탓할 수도 없던 가여웠던 때였다.전쟁 직후라 사는 형편은 다들 앞집 옆집 별 볼일 없었다. 장리쌀 빌려먹느라 피고름을 짜는 집도 허다했고 우리도 몸으로 팔밭이라도 일구면서 안간힘을 쓰며 온 식구가 달려들었다. 중학교라도 다녔으면 최소한 일상의 불편함이 없으니 상급학교 진학은 그림의 떡이고 다들 일찌감치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10대 후반이면 가족의 생계를 부모님과 같이 책임지고 동생들을 돌보곤 했다. 나 또한 예외일수 없었다.우리 남매들은 재용·재근·재순·재복·재희· 재정·재식, 재자 돌림이었다. 얼마 만에 불러오는 형제들 이름인가. 할아버지만 쌀밥 드셨는데 밥 먹을 때 곁눈질하면서 ‘저 쌀밥 한 톨이라도 내 차지가 있을까?’ 밥상 앞에서 눈치 보던 가난한 유년의 내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소싯적부터 험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급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할 여건도 안되서 오덕리 금광, 명티리 탄광에서도 일을 했다. 탄을 직접 캐는 일은 안 했지만 탄광 폭파 사고가 적잖이 일어났는데 사고에서는 무사할 수 있었다. 살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들은 허다하다.■ 웃음밖에 안 나오는 출생신고 장날에 아버지가 오촌 아저씨를 만났다. “재근이 호적에 좀 실어.”   아저씨는 “그랴” 짧은 대답을 뒤로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호밋자루를 짊어지고 밭에 나가면 잊어버리신다. 그리고 한참 지나 문득 생각나면 면사무소에 들러 출생신고를 했다. 그나마 나는 ‘재근’ 이라는 이름이라도 제대로 올려 졌지만 사촌끼리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저 시절을 탓할 수밖에. 나는 호적이 늦어 늦게 군에 가게 돼서 남들 제대할 나이에 군에 갔다.■  군 생활, 보리 카투사 군견병  ‘카투사’하면 폼나 보이지만 나는 미사일 기지에서 보리 카투사로 근무했다. 목공 주특기로 입대했지만 군견병이었다. 군견훈련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세퍼트를 관리했다. 어린 시절에 집집마다 마당에서 잡견(일명 똥개) 한 마리 안 키우는 집은 없었지만 나는 유난히 동물들과 호흡을 잘 했다. 보리 카투사도 카투사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최전방에 근무하는 병사들보다야 몸이 고단하진 않았지만 우리 또한 점호 전에 차라리 한번은 맞아야 편안히 잘 수 있는 그 시절을 보냈다. 군 생활할 때 ‘배우 신성일’ 소리 들으면서 연애편지도 받곤 했다. 눈부시던 그 청춘이 45년의 무심한 세월을 지나 ‘인생 칠십고래희’ 라는 70을 넘어섰다. 그 사이 고단한 시간을 담보로 여기까지 왔다. ■ 사우디아라비아의 찜통더위 1979년도 제대 후에 한창 해외근로자 파견 사업이 진행되면서 나도 그 대열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노동자들이 많이 파견되었다. 물론 신청한다고 다 출국이 가능한 건 아니지만 신원조회부터 짚고 넘어가는 항목들이 까다로웠다. 나도 돈 벌어서 가족들 호강시키고 싶은 마음을 어린시절부터 갖고 있던 차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사우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덥다는 말은 내내 들었지만 새벽에 공항에 내린 사우디는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가마솥 같은 그 땅에서 그래도 뭐든 열심히 하던 평소의 소신대로 성실하게 일하고 매월 꼬박꼬박 고향에 돈 붙이는 재미로 흘러내린 땀이 소금이 되는 그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리야드 국제공항 건설 현장이었다.1년을 마치고 동료들이 다들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도 고향으로 돌아올 준비를 할 때 나를 성실하게 본 회사에서 체류를 권유했지만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내가 찜통더위에서 고생하며 보낸 그 돈을 한 푼도 안 쓰시고 다 모아 놓으셨다. 당시 기백 만 원이면 지금 작은 집한 채 값이다. 탄광, 금광에서 벌었던 돈도 아버지께 드렸었는데 그 돈도 다 모아놓으셨다. 자식이 고생하면서 번 돈을 한 푼도 쓸 수가 없으셨나보다.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 생각하면 70이 넘은 이 나이에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내가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 그 마음의 깊이를 더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고생만 하시다 먼 길 떠나셨지만 나는 그래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좋은 세상 만나서 노년의 평안을 맞이해서 감사하지만 부모님 생각하면 눈시울을 적실 수밖에 없다,■ 40년 전통 신기닭집이 시작된 첫마디 “처남 양계장 한번 해볼까?” 매제가 닭집을 해보자고 해서 병아리 천 마리 정도를 가져다 부화장을 열었다. 사실 만 마리는 갖춰야 뭘 해본다고 할텐데 여건도 그리 넉넉지 않아서 소꿉놀이 하듯이 시작했다. 시작하면서 중신이 들어와서 아내 박숙자를 만났다. 자리를 잡기 전이라 아내의 고생은 말도 못했다.임신한 몸으로 나를 돕고 아이들을 키우고 아내의 고생이 아니었으면 지금 신기닭집도 40년의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다.병아리는 온도에 아주 예민해서 연탄난로를 1년 내내 피우고 30도를 유지해야 건강하게 자라기 때문에 밤샘은 기본이고 한 여름에도 연탄불 옆에서 서너 시간 그것도 쪽잠을 자야 한다. 한 달 반, 두 달 견디면 성계가 된다. 매제는 연탄가스를 맡아서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닭들한테 연탄가스 안 맡게 하려면 결국 내가 쪽잠자면서 불 관리를 잘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도 어쩔 수 없는 불상사들이 반드시 있다. 병아리들도 폐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고 손바닥만한 것들을 땅에 묻을 때는 자식을 보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양계장을 하면서 소매를 시작하고 개고기와 돼지고기도 같이 취급했다. 짬밥이 남으니 남 주기도 아깝고 효율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 병행을 했다. 그리고 신기리로 나와서 닭집을 운영하면서 ‘신기닭집’이 40년의 전통을 갖게 되었다. 한동네에서 세 번 옮겼지만 우리 건물을 지을 때는 그동안의 고생을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벽돌을 직접 나르면서 무거운 줄도 모르고 온가족이 그저 행복해했다.이웃에게 성실하게 보였던지 닭집을 차리고 밀려오는 손님들 덕분에 장사가 잘되는 시기에는 하루에 500마리도 넘게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 때는 아이들 돌볼 틈도 없었다. 인정이 허기를 채우던 시절이라 이웃들이 우리 아이들을 키웠다. 너무 잘 성장해서 내 자랑이 된 우리 아이들이 부모를 존경한다니 내심 고맙고 그만한 위안이 없다.■ 내 이름, 석 자에 흠집 내지 않아 40년을 한결같이 큰 도마 위에 닭을 올려놓고 무거운 칼로 작업을 해서인지 직업병을 얻어서 어깨 수술을 했다. 가벼운 칼을 쓰면 조각이 많아 가시가 생기고 손님들이 드시기에 불편하다.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손님들이 편히 드실 수 있게 하다보니 무거운 칼을 쓰게 되고 시간이 쌓여서 수술대 위에 어깨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깨 신경이 한가닥은 끊어지고 한가닥은 찢어졌다. 5-6개월 정도 휴식을 해야 하는데 손님들은 매일 문을 열고 들어와서 닭을 찾는다.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감사인사를 드린다. 이제 조금 쉬라는 신호다. 고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지금 내 곁을 지키는 아내는 너무 고마워서 나를 눈물짓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우리 남매 손주들은 내 기쁨이며 나를 웃게 만든다. 희로애락의 중심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꼭 안아주고 싶은 그이들이다. 평생 닭을 토막 내면서 살아왔지만 내 이름 석자에 흠집하나 나지 않아 자존심 지키면서 살아온 내 지난 세월도 꼭 안아주고 싶다.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갖고 지난 40년을 위로해주기로 하자. 나에게 한 마디 건네 본다.“임재근, 당신 참 열심히 살았어. 이제 좀 쉬게나. 수고했어.”아빠 수정이에요.너무 멋진 우리 아빠, 감사합니다.어릴 때 아침마다 양계장에서 주무시던 아빠를 모시러 가는 그 발걸음이 저는 너무 행복했어요. 아빠 품에 안겨서 집까지 오느라 아빠 사랑을 독차지 하는 시간이었거든요.쪽잠 주무시면서 성실하게 사업 일구시고 저희들은 그 모습 보면서 배웠습니다.아빠처럼 성실하고 멋있는 신랑을 만났습니다.너무 행복합니다.엄마 같은 멋진 엄마로 살고 싶습니다. 아빠, 엄마! 세상에서 제일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따님 편지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2-07-15 11:43

농촌소년단 : 조보권·조민성·김병주(옥천읍, 25) 한상윤(이원면, 25)시골농촌에서 문화예술의 꿈을 갖기란 쉽지 않다. 부모와의 갈등은 필연적이고, 연마하기 위해 다녀야 하는 학원 자체가 없어 인근 도시로 찾아야 한다. 남들보다 진학을 위해 비용과 시간을 배로 이상 투자하지 않으면 꿈을 이룰 재간이 없다. 하고 싶은 일은 죽어도 해야 하는 법. 한상윤씨는 고등학교 때 노래에 꽂혀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을 지키기 위해 오로지 노래에 심취하고 매진했다. 학교를 일찍 마치고 하루 꼬박 10시간, 재능을 확인할 수 없었던 그는 ‘마음마저도 노력하고’, 노래에 취해 대전 보컬학원에 내내 살다시피 했다. 꿈에 그리던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맘 맞는 크루들과 음원을 내고 나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고향 옥천에 내려왔다. 고향에 내려와도 그 좋아하는 음악을 멈출 수 없었기에 그는 동갑내기 친구들 3명과 함께 농촌소년단을 전격 결성했다. ‘농촌소년단’은 세계적인 K-팝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을 오마주한 그룹명이다. “좁은 활동 범위에서도 눈에 띄고 싶은 방탄소년단의 영향력을 바라고 이름을 지었어요”한상윤(25, 이원면 신흥리)씨는 ‘농촌소년단’의 리더를 맡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듣는 것과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에이브릴라빈에 미쳐있었다던 고등학교 2학년은 부모님의 반대 가운데에 한상윤씨가 음악을 시작한 나이다. 늦었다면 늦은 시기이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만은 그 누구보다 빛났다. 당시 월 40만원인 대전에 있는 보컬학원에 다니기 위해 주말에 보신탕집 알바를 했다. 해가 중천인 12시부터 달이 걸리는 밤 10시30분까지 보컬학원에 다니며 스스로 만든 기회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 (상윤씨는 예체능을 한다고 3교시만 끝내고 학원에 갈 수 있게 도운 옥천고등학교 조규현 담임선생님께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후 열정과 재능을 살려 백제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보컬을 전공했다. 작곡부터 악기까지. 다재다능한 한상윤씨는 농촌소년단이 부를 커버곡을 선정/편곡한다. 노래 파트를 나누고 그룹의 음악 방향성을 설정하는 ‘주춧돌’과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농촌소년단에서 4명 모두의 포지션은 확실하다. 국제기계에서 일하는 조보권씨는 흔히 노래의 꽃이라 불리는 고음을 담당한다. 친구가 된 7~8년 동안 짜증 내는 모습을 본 적 없을 정도로 그저 잘 웃는 순한 성격의 소유자다. 김천대 공과 대학생인 김병주씨는 SNS 운영부터 영상편집까지 농촌소년단 홍보를 책임지고 있다. 이어 분위기 메이커이자 행동대장을 맡은 조민성씨는 소방 관련 일에 종사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서글서글하게 말을 잘해 필요한 상황에 언제나 훌륭한 MC가 되어준다. 민성씨가 군 청년동아리 지원사업을 발견하고 같이하자고 제안했다. 음악이 연결고리가 되어 인연을 맺은 4명의 옥천고 학생들이 졸업하고도 5년 후에 ‘농촌소년단’으로 모일 수 있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경험 자체에 의미를 두는 활동농촌소년단은 심사를 통해 군 청년동아리에 선정되어 2022년 4월 1년간 100만 원을 지원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동아리를 만든 취지가 음악을 이용해 봉사하며 옥천의 문화예술을 살리고자 함이었다. 공적 가치를 추구하며 노래하는 청년들이 지역에서 눈에 띈 것이 분명하다. “(옥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예울림 단체 김용주 사무국장님이 옥천 내 요양원 등에서 봉사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항상 잘 챙겨주세요” 덕분에 농촌소년단은 금강휴게소 상시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이웃 돕기 주말 공연’에 참가했다. 시민들의 버스킹공연을 통해 모금을 모아 생계가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 의미 깊은 행사이다. 7월31일 관성회관 야외공연장에서 계획된 ‘포도복숭아가요제’에 참가를 장려해 주시기도 했다. ‘포도보숭아축제’에서는 처음으로 4명이 다 같이 노래를 부른다. 지금까진 따로따로 준비해온 노래를 순서를 정해 불러온 지금과는 다르게 포도복숭아축제에서 선보일 화음을 열심히 준비 중이라며, 설레 보이는 웃음과 함께 상윤씨는 말했다. “음악전공자도 저밖에 없고 활동을 많이 안 해봐서 경험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어요”더불어 옥천FM공동체라디오에서 프로그램을 하나 맡아 기획을 하고 있는 중이다. 프로그램명은 ‘농촌소년단, 오늘의 노래’이다. 사실 지역 환경상 어르신들을 관객으로 하는 무대가 많다 보니 부를 수 있는 노래 장르가 한정적이었다. 라디오에선 K-팝, 팝송, 발라드, 인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노래할 계획이다. 농촌소년단의 다양한 매력을 들을 수 있는 ‘농촌소년단, 오늘의 노래’는 오는 7월 중순부터 녹화를 시작해 격주로 옥천 라디오 유튜브로 올라갈 예정이다.■ 상윤씨의 과거 작업물, 지금, 바램 이미 한상윤씨는 대학졸업 후 칠론(CHILoN)이란 닉네임으로 서울에서 음악활동을 하고 있었다. 인디그룹 ‘AY UP’의 보컬로 ‘Make It Move’ ‘Sweet Heart’ 등의 노래를 발매했다. 서울에 살며 그룹 활동을 하는 도중 작년에 사회복무를 하러 고향에 내려왔다. 죽향초등학교에 근무하는 동시에 올해 4월부터 옥천고 동창들과 함께 농촌소년단으로 활동하게 된 것인데 타이밍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상윤씨는 신흥리 부모님 집에 거주하고 있다. 이원면에 하나뿐인 오토바이 수리 전문 ‘영오토바이’의 대표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집 앞에 컨테이너를 세워 음악 작업실(윤스튜디오)을 만들어 놓고 항시 음악 작업 중이다. “저도 농촌소년단 시작할 때 큰 무대는 상상도 안 했는데 작은 무대부터 하다 보니 기회가 생기고 자연히 밖으로도 저희가 알려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옥천 라디오도 그렇고 요즘에 만들고 있는 지역 홍보 CM송도 그렇고 저희를 믿고 기회를 주시면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 드릴 수 있어요.”농촌소년단의 활동은 연말에 끝난다. 다양한 기회가 주어져 내년까지 유지될지는 그들조차 모른다. “음악을 안정적인 직업으로 삼기에는 사회가 좀 각박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옥천에선 음악 하기 힘들어요. 저도 대전까지 가서 고생한 생각 하면 후배들한테는 조금 더 다양한 꿈을 꿀 수 있도록 많은 인프라가 갖춰지면 좋을 것 같아요.” 시골 농촌의 직업군이 단조로운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더 이상 꿈을 키울 수 없어 떠나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많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수십 년을 거쳐오면서도 지자체뿐 아니라 우리도 이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해결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그래서 이야기한다. “꿈을 키울 수 있는 공적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저처럼 부모님이 크게 반대 한다거나 대전으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간다거나 하는 것이 반복될 것 같진 않아요. 새로운 군수님이 교육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기대가 많이 됩니다. 저희들도 취임식 영상에서 바람을 한마디씩 이야기했거든요.”

인물일반 | 옥천닷컴 | 2022-07-15 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