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무엇이라고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제 신문사를 떠나려 합니다.1989년 5월8일 옥천신문에 입사했습니다. 취재기자였습니다.그보다 7년 전인 1982년 대학 입학을 앞두었던 저는 대전 문화동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삼양네거리에서 군서를 거쳐 금산 칠백의총을 들렀고, 대전 집까지 그때 유행했던 하이킹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혼자 나섰던 자전거 길이었습니다. 그해 초여름이었던가요? 대학 동아리에서 마침 옥천에 살던 동기생의 집에 모를 심어주러 왔던 기억 또한 살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 집이 삼양리 한전 뒤였고, 국도 주변 쯤으로 모를 심으러 갔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그 주변이 모두 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그렇게 옥천과의 기억을 쌓은 후 1989년 당시에는 알아주지도 않고, 생소했고 어디를 가도 별로 반겨주지도 않았던-지금도 역시 전국 일간지, 도단위 일간지 기자들보다는 한 급 아래로 치는 시각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만-주간신문 취재기자가 되었습니다.스물여덟 살이나 된 나이에 첫 직장으로 옥천신문의 기자가 되었고, 여기저기 옥천을 누비다 보니 그나마 지역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쌓을 수 있었습니다.신문 창간 초기 약국 의료보험이 처음 시행되었고, 국민연금이 시작되었으며, 1991년부터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어 군의원, 도의원을 뽑았고, 1995년부터는 민선 군수가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생소했던 지용제는 1989년 5월에 이미 2회 행사를 열었고, 옥천신문은 아직 지용제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저는 지용제가 열릴 당시 정지용 시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정지용 시인의 생가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있다는 사실을 보도해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정지용 생가복원 추진을 이끌었던 일, 광복 50주년을 앞두고 죽향초 통일탑으로 쓰였던 일본 황국신민서사비와 서사비 아래 일본 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자갈돌을 발굴했던 일,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보도연맹원 학살 보도, 청산면 노루목재 미군기 폭격사건, 군수 등 지역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 보도, 우리 고장 인물 발굴과 현대사 발굴 보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강 물길 따라 각 고을의 얘깃거리와 역사문화를 탐방하며 걸었던 '금강 여울길' 등은 제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 원동력이었습니다.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제가 현장에서 거리가 멀어지면서 제게는 가끔 "안 기자 잘 있어?" 하며 질문하는 어르신들이 계시다는 말을 후배 기자들에게 듣곤 했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었음에 비추어 어쩌면 저를 '이 기자'보다는 '안 기자'로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마도 그 명칭이 더 편했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신문사에 몸담고 있던 30년 9개월 동안 옥천은 제게 모든 힘을 주었습니다. 살아갈 의미를 선사했습니다. 생각을 열어주고, 좀 더 넓은 세상 볼 수 있게 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비록 신문사를 떠날지라도 제 인생의 가장 황금기를 보냈던 옥천신문에 대한 관심은 거둘 수가 없습니다. 옥천신문이 비록 가난하지만 옳은 것은 옳다고 얘기하고 우리 고장 옥천을 따스하게, 건강하게 가꿔주는 의미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당연한 얘기지만 우리 아이들의 고향이 된 옥천, 제가 살아온 세월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 온 옥천 그 어디서든 밝은 모습으로 반갑게 악수할 수 있길 원합니다. 30년이 넘게 저는 쓰고 싶은 기사, 쓰고 싶었던 얘기, 하고 싶었던 옥천 역사문화 얘기를 담아 왔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했던 것만으로, 저는 충분한 특권을 누려 왔습니다. 그 특권을 행사했던 시간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떠나는 마당에 되지도 않는 소리만 잔뜩 늘어놓습니다. 희망으로 맞이한 경자년 새해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이안재의 옥천신문 30년을 지탱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 가득 안고 신문사를 떠납니다. 감사했습니다.
동네방네 | 이안재 기자 | 2020-02-07 00:43
독립운동가 권태석(1895~1948)-청산면 백운리 출생-조선민족대동단, 신간회 등 독립운동-건국훈장 애국장 서훈독립운동가 김규흥(1872~1936)-옥천읍 문정리 문향헌 출생-중국 신해혁명 참여 첫 한국인, 무장투쟁-건국훈장 애국장 서훈한국화 6대 화가 박승무(1893~1980)-군북면 국원리 255 출생-당대 시·서·화를 함께 표현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화가-소박한 겨울 풍경 담아낸 최고 설경작가농민문학 소설가 유승규(1921~1993)-군북면 추소리 출생-이무영과 함께 농민문학의 대표-‘빈농’으로 데뷔, 농민문학의 꽃을 피운 소설가한학, 금석학의 대가 임창순(1914∼1999)-청산면 법화리 복우실 출생-4.19혁명 교수단 시위 주도, 문화재위원장 역임-우리나라 한학, 금석학, 서예의 대가독립운동가 전좌한(1899~1986)-옥천읍 죽향리 64번지 출생-조선총독부 폭파 시도 등 의열투쟁-건국훈장 독립장 서훈독재를 반대한 변호사, 정치인 정구영(1899~1978)-옥천읍 문정리 출생-일제하 독립운동가 변호, 대한변협 회장-박정희 삼선개헌, 10월유신 반대한 정치인작곡가 정순철(1901~?)-청산면 교평리 310번지 출생-새싹회 조직, 방정환 등과 어린이운동-동요 짝짜꿍, 졸업식노래 작곡독립운동가 조동호(1892~1954)-청산면 백운리 299번지 출생-여운형과 평생동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O 독립운동가 곽중규(1891~1950)-이원면 백지리 출생-부친 곽준희부터 이어진 3대 독립운동-건국훈장 독립장 서훈우리 고장은 인물의 고장이다. 인물의 내력을 쭉 이어도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줄줄 꿸 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많은 인물은 아직 주민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바로 옆에 옥천을 빛낸 인물이 태어난 집이 있어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거나 심지어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 지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재 옥천의 인물 가운데 선양되거나 생가 등에 안내판이 설치되어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한 곳은 조헌, 김문기, 정지용, 송건호, 육영수 등 몇 명에 불과한 실정이다.마땅히 선양되어야 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안내판 등이 설치되지 않아 옥천 인물을 소개하고 주민들에게 알리는 사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이에 따라 옥천문화원과 옥천신문사에서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에 옥천인물 선양사업을 공모 신청해 우리 고장의 인물 10명에 대한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각 인물의 생가나 거주지에 안내판을 제작, 설치했다. 안내판을 설치한 인물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우리고장 인물 10명의 업적을 기록한 안내판이 설치됐다. 사진은 정구영 선생 생가
동네방네 | 이안재 기자 | 2019-12-05 23:59
제23회 중국(상해/항주) 지용제가 9월26일부터 29일까지 중국 상해와 항주 일대에서 펼쳐졌다. 중국에서는 스물세 번째, 상해와 항주 지역에서 개최되는 지용제로는 세 번째이다.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주최하고 항주사범대학 외국어대학, 정지용문학센터, 남방아리랑창작위원회, 정지용기념사업회가 주관했으며, 충북문화재단이 후원한 이번 중국지용제에는 김재종 군수와 김승룡 문화원장, 김외식 군의회 의장, 이의순 의원, 김일환 교육장, 정병덕 농협은행 지부장 등 40명이 참가했다. 첫날인 9월26일에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과 폭탄제조소,
문화일반 | 이안재 기자 | 2019-10-04 12:53
많이 궁금했다.옥천읍 서정리 마을에 한 번씩 가다보면 언젠가부터 ‘기찻길옆뜰’이란 조그만 안내 간판이 보였다. 뭐지? 하지만 실제 가볼 생각은 별로 못했다. 호기심 부족이었을까?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기찻길옆뜰을 마주했다.서정리 마을과 철로가 있는 사잇길로 무작정 들어갔다가 마침 한 사람으로부터 더 이상 가보았자 길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기찻길옆뜰’ 간판이 새겨진 곳이다.차를 세우고, 길이 없다고 안내해준 이에게 물었다. 여기가 야생화 농장이냐고.그렇게 만난 사람이 안성이(61, 옥천읍 서정리)씨다.“여기에 꽃을 사 들이고 심고 한 지 이제 8년이 지났네요. 서정리에 지인과 함께 축사를 하려고 사놓았던 땅이 여기인데, 하던 일을 접고 나서 다육이 농장을 순례하다시피 했어요. 판암동도 가고 보은도 가고 다육이가 좋아서 찾아가고, 사들이고 그랬죠. 그런데 보은을 가니까 다육이와 야생화도 같이 하는 거예요. 야생화를 보니 꽃이 더 이쁘더라고요.”그렇게 안씨의 야생화 여행은 시작됐다.처음부터 무슨 목적을 가지고 하던 일을 그만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던 일 잘 안됐던 것도 아니었다.웬만한 옥천 사람들이라면 안씨가 운영했던 상호를 한 번쯤 들어봤을 터.처음에 ‘오복떡집’을 했다. 대전 친정에서 배운 떡 기술을 기반으로 떡집을 차렸고, 떡집은 잘 됐다. 하지만 밤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행사가 많은 금요일, 토요일을 꼬박 새워야 하는 떡집은 너무 힘들었다. ‘이게 사람 살려고 하는 일인가?’ 하는 생각에 만 7년을 하다가 그만두자고 했다.그래서 두 번째로 문을 연 것이 옥천읍 중심가에 낸 ‘사과나무’였다. 떡집을 그만두고 무얼할까 고민하다가 마침 떡볶이 요리가 한참 개발될 때 청소년, 학생들이 많이 찾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만들었다. 떡볶이에 치즈를 올려 판매를 하니 인기가 좋았다. 사과나무를 운영할 당시 학교를 다녔던 청소년이라면 한 번쯤은 가봤던 곳이기도 할 터이다.사과나무를 8년을 운영했다. 정신없이 음식 만들고, 매일을 전쟁처럼 지냈던 그 시간이 지날 무렵,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니 뭐랄까 목적의식 같은 게 사라졌다. 인생 권태기 같은 게 엄습했고, 잘 나가던 사과나무를 접기로 했다.그게 2011년이다.“옥천신문에 내니 1주일도 안돼서 다른 사람이 하겠다고 나서더라고요. 새로 하신다는 분에게 1달 동안 인계해주고, 김장해놓고 겨울을 지냈어요. 근데 당시에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봄 되니 2012년이잖아요? 그때부터 다육이 구경하러 판암동부터 시작해서 순례를 다녔어요.”여기저기 다육이도 보러 다니고, 예쁘면 사오기도 하고.그러다 보은 하늘빛식물원에 갔는데 야생화가 보였다. 그러다보니 다육이보다 야생화가 더 예뻐 보였다. 그래서 꽃집을 해볼까 하고 ‘우리꽃방’에 가서 3개월 동안 있으면서 꽃 공부를 했다.그런데 안씨 눈에 자꾸 야생화가 밟혔다. 야생화 쪽으로 자꾸 눈길이 갔다.그 와중에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생활원예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고, 평소 남편과 알고 지내던 강영경씨와 함께 야생화 공부에 빠져들게 되었다.“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우리도 전문 기술이 있으면 좋겠다. 몇몇이라도 야생화 모임을 만들자고 했어요. 그래서 향수길야생화연구회를 창립하게 되었고요. 강영경씨가 회장을 맡고 4년 동안 총무를 맡아 했지요.”8년 전의 일이다. 총무를 하면서 충청북도내 야생화 단체는 물론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아마도 100군데 이상을 다녔을 거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은 내려놓았지만 향수뜰야생화연구회 회장도 역임했다.“이쁜 꽃 보면 갖고 싶죠. 사서 키워야 공부가 된다고들 했어요. 처음에는 한 개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요. 가지다 보니 자꾸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야생화를 하도 사들이다 보니까 신랑한테는 꽃값이 실제 사온 금액의 ‘반값’이라고 하기도 했고요. 이거 신랑이 알면 안 되는 얘긴데. 하하.”꽃이 좋아 쫓아다녔고, 꽃을 사들이고 키우는 데만 열중했던 시절이었으니 별다른 수입이 있었을 리는 만무한 일. 그래도 좋았다.언젠가 방송을 보았는데 나이 50을 넘어서 장사하려면 취미삼아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이 딱 가슴에 와닿았다.야생화 농장을 하자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 종일 풀 뽑고, 정리해주고, 바쁜 일상이다. 그래도 꽃을 키우면서는 힘들어도 힘들지 않다고 느낀다. 힘들게 하루를 보냈어도 꽃을 보면 힘든 생각이 사그라든다. 어쩌다보니 야생화 농장을 업으로 하게 되었지만 ‘잘되면 돈 벌어서 좋고, 안 된다고 해도 꽃 구경해서 힐링돼서 좋고’란다.“그거 아세요? 산이나 들에 있는 들꽃을 예쁘다고, 귀하다고 그냥 캐오면 그 아이들이 십중팔구 죽어요. 그 조건에 맞춰서 살던 애들이기 때문이에요. 그 꽃이 살던 그 곳에 놔두고 보는 기쁨이 더 큰 거죠.”안씨가 보유하고 있는 야생화는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300종은 넘을 것이란다. 8년 동안 꽃을 사들이고 공을 들여 안씨의 손때가 묻은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돈을 준다고 해도 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오래 키워온 것들이다. 가령 안씨의 화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물싸리가 그런 종류이다. 누가 팔라고 해도 못 파는 그런 꽃. 안씨에게 있어서는 차마 팔기 어려운 것이리라.안씨는 자신의 행복을 여럿과 나누고 싶어 했다. 교육청 행복교육지원센터와 연결됐다. 센터 관계자가 안씨의 야생화농장을 방문한 후 군내 학생들에게 훌륭한 체험학습장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다. 기찻길옆뜰 야생화농장이 이제 우리 고장 아이들의 야생화 체험장으로 공개될 날이 머지않았다.“꽃들 중에 잘 번성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냥 뽑아버리기도 아까워서 포토에 담아서 오시는 분들에게 그냥 드리기도 하죠. 그러면 어떤 분들은 나중에 드링크 음료 한 박스, 수박 한 통도 사오시고 그래요. 서로 나누는 기쁨이 있죠. 이제 야생화 농장으로 간판 걸고 본격적으로 영업을 한 지 1년이 좀 지났네요. 꽃 구경 하시고 싶으면 언제든 오세요. 그리고 ‘오늘은 꽃 구경 하러 왔다’고 말씀만 하세요. 꽃 보며 힐링하고 가신다면 저야 더 바랄 바가 없어요.”나이 예순에 새로 시작한 인생 2막. 안성이씨의 기찻길옆뜰 야생화 농장엔 수많은 꽃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인물일반 | 이안재 기자 | 2019-07-10 13:46
원웅식품 개업식에 참석한 김재종 군수와 이규생 대표(가운데)가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김미정 공동대표, 이의순 군의원, 김재종 군수, 이규생 대표, 황규철 도의원, 이용수 군의원, 곽봉호 군의원.“규생이형은 스물다섯 살 때부터 노조운동을 같이 하면서 송영길 의원과는 친형제보다도 더 깊은 애정을 가진 그 이상의 관계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 규생이형이 만들면 그 제품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인천시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송영길 의원의 부인 남영신씨가 6일 오전 이원면 장찬리 원웅식품 개업식 현장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석못한 송 의원 대신 왔다며 소개한 말.이원면 현리 출신으로, 인천시체육회 전 사무처장을 지낸 이규생씨가 원웅식품의 대표이사다. “이원중학교 2학년 1학기를 다니다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향을 떠났는데 따뜻하게 반겨준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예순이 넘었지만 제 인생은 멈추지 않고 처음으로 기업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윤이 생기면 함께 살아가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이규생 대표의 말 속에는 진심이 묻어났다.이규생 대표김재종 군수는 인사말에서 “옥천은 친환경고장으로, 옥천에서 나는 농산물은 여러분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앞으로 원웅식품과 이규생 대표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고 말했다.이날 원웅식품 창립식 및 공장 개업식에는 이원면 주민을 비롯, 인천시 등지에서 200여명이 참석해 발전을 기원했다.(주)원웅식품(대표 이규생)은 쓴맛나는 오이로 잘 알려진 여주 혼합추출물과 구지뽕, 돼지감자, 율무, 양파 등 5개 채소를 주재료로 한 음료 ‘여주의 하루’를 본격 생산․판매에 들어갔다.여주는 천연인슐린으로 불리는데, 혈액내 당이 축적되는 것을 방지하고, 당뇨 정상수치 만들기, 당뇨혈당 낮추기 등 성인병 예방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여주의 하루’는 한 박스(50포)에 8만원이며, 구매는 ㈜원웅식품 홈페이지 쇼핑몰에서 하면 된다.구매문의는 032-434-2288.김재종 군수와 황규철 도의원, 김광수 전 도의회 의장이 이규생 대표로부터 공장 설명을 듣고 있다.
동네방네 | 이안재 기자 | 2019-07-10 1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