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별 뉴스
옥천장터
뉴스
최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인물
정보
연재기획
의견
여론광장
구독
로그인
회원가입
제보
기사검색
검색
상세검색
닉네임
비밀번호
제목
파일1
게시물 옵션
비밀글로 설정
내용
문향헌(聞香軒) 춘추민속관 터가 바로 옥천구읍의 대대손손 벼슬 명실상부한 큰 명당.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 장군, 옥천이낳은 역사 속에 숨겨진 별,(2왕비,6정승, 11판서의 후손) 명성왕후,효의왕후, 6정승 11판서 의 후손 김규흥 앞으로는 옥천의 자랑인 범재 장군을 영화화와 넓이 알려야 합니다, 이제야 알게 돼 죄송합니다,역사 속 숨은 독립운동가 의열투쟁 비용 70만 불, 누가 준비했나? 한국인 김규흥이 합작한 의열투쟁 신흥무관학교 하사관 김규흥 동제사 총 사령관 범재선생이 대동단결선언 무오독립선언 2.8 동경 선언3.1운동 임시정부수립 파리강화회담에 화려한 주인공 아버지 !! 왜 바보같이 광복투쟁하셨어요. 김규흥 장군의 시(1920년 독립신문) 편지중에서 입술과 이의 밀접한 하나 오랜세월 두고두고 뼈속깊이 사무쳐 나홀로 뗏목위에 외롭게 의지하고 거친파도 헤치고 와 이곳 몸던져 외롭고 고달픔에 그리운 고향생각 넘치네 별빛비친 나의 칼 반짝 반짝 빛나 돌아갈까 유혹속의 찰라 흔들렸던 마음 눈뜨고 깨달으니 부끄러움 그지없어 몸둘바 없어라 조국에 바친 이몸 다른생각 있으랴 이목숨 다하도록 힘쓰고 힘써 애국애족 이국땅 이곳저곳 뜻맞는 동지 찾아 호걸 들과 손에 손을 잡아 힘모아 서로 서로 뭉쳐서 모든 간난 구제하리라. 옥천 구읍 청풍김씨 고택 문향헌(聞香軒) 춘추민속관 1760년에 지어진 청풍김씨의 고택 聞香 金致信 영조(英祖) 47년(1771)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8위(38/74) 통덕랑,부(父)] 김술로(金述魯)사재감주부, [조부(祖父)] 김고(金橰)[文: 승정원 승지, ] ,[증조부(曾祖父)] 김순(金洵)[進] 돈지돈녕부사,고조부 김극형(金克亨) 공조정랑,5대조 김인백(金仁伯) 이조판서, 춘추민속관 전경 이 집이 바로 옥천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범재 김규흥 장군의 생가로서 지금은 춘추민속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범재(凡齋) 김규흥(金奎興) 장군(죽향초등학교 기념비) 대한 독립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범재 얼마나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던가? 참으로 그의 업적이 그늘에 묻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고옥은 1760년(영조 36년)에 문향(聞香) 선생이 지은 250여년이 된 전통가옥으로, 처음 지은 분의 호를 따서 문향헌(聞香軒)이라 하며, 2010년 1월 옥천군에 의해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범재 김규흥 장군이 1936년 중국 천진에서 서거한 후, 애국지사들의 자손들이 대개 그러하듯 어버이의 보살핌 없이 궁핍한 가운데 집안은 고옥은 방치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고택은 두 채로 이루어져 있다. 왼쪽 건물은 우물 정자(井字)형의 문향헌(聞香軒)으로 청풍 김씨 범재 선생의 생가이고, 원래 와가 85칸과 초가 12칸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55칸만 보존되고 있다 한다. 오른쪽 건물은 우국지사 괴정(槐庭) 오상규(구한말 탁지부 국장) 선생이 거처하던 곳이다. 상량문에 1856년(철종 7년)이라는 글귀가 선명하여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문향헌 뒤란으로 가니 거기 작은 지붕을 둘러 쓴 석파정(石坡井)이란 아담하고 예스런 우물이 나타난다. 金奎興 1872~1936 김규흥은 청풍김씨 23세손, 金奎植 1881~1950 김규식은 청풍김씨 23세손,1919년에는 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김규식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운동. '범재 김규흥의 민족운동과 독립군 양성계획'(지도교수 박걸순)에 따르면 그의 조부 김동교(金東敎)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원납전을 1만냥이나 내는 등 구한말 옥천지역 최대 거부였다. 실제 고종실록 3년(1866) 10월 1일자 기사의 원납인 명단에는 그의 조부 '동교'(東敎)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의 충남 강경에 20칸 규모의 집을 소유했었고, 현 옥천 죽향초등학교 부지는 그의 목화밭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김규흥 선생은 어려서부터 열심히 학문을 익혔다. 그러다가 큰 그릇이 되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는 고향을 떠나 상경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경성으로 상경한 그는 주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데 힘을 쓰게 된다. 김규흥이 15살이 되던 해인 1886년, 그의 할아버지가 별세하시게 된다. 그리고 5년 뒤인 1891년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김규흥은 2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에 경성에 머물며 동지를 사귀는 데에 더욱 집중하였고, 집안은 어머니와 동생에게 맡겼다. 김규흥은 도일하여 일본의 선진 문물들을 보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교육의 필요성을 몸소 느끼게 되어 자신이 태어난 곳인 충북 옥천에 죽향초등학교 전신인 진명(창명)학교를 세웠다. 1906년, 김규흥은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면서 나라를 개화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자강회에 속한 장지연, 박은식, 양기탁을 비롯한 이들과 자연스럽게 교우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런데 고종의 밀사로 중국에 가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일경의 감시와 함께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자, 이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김규흥 선생은 1908년, 중국 관동으로 단신 망명하여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본명을 김복으로 변경하였다. 중국에서 그는 자신의 인맥들을 넓혀가며 중국 내에서 항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사재를 털어 가면서 망명초기의 독립지사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에 모일 수 있었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기획하고 결정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김규흥은 1911년 10월, 한국인 최초로 공화제를 주창한 신해혁명에 참여하여 혁명정부의 도독부총잠의 겸 육군소장을 역임함으로써 핵심인물 6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 되었다. 또한 김규흥은 독립운동 총 본부와도 같은 ‘동제사’라는 비밀 단체에서 독립 운동지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동제사는 1912년 7월 건립되었으며, ‘동포들이 다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에 도달하자’는 뜻을 지닌 단체였다. 1913년 김규흥은 동제사를 통해 홍콩에서 최초의 한중합작 잡지인『향강』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지역 내에 박달학원을 건립하여 많은 독립지사들을 일구어 냈다. 또한 동제사의 인맥을 통해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주요 독립지사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하기도 하였다. 1919년 8월, 김규흥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우선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김규흥은 여러 독립선언서의 발표를 주관하기도 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배후에서 후원하였다. 1919년 11월에 의열단이 창립되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총리 대리직을 할 것을 교섭하였으나 김규흥은 이를 거절하였다. 3·1운동이 있은 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립되었다. 김규흥도 여기에 참가하였는데, 그는 김규식을 돕기 위해 파리로 파견되었다. 그는 김규식과 함께 대한민국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힘을 쏟았다. 하지만 열강들의 매몰찬 외면으로 인해 그들은 원하던 민족 자결주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 후, 김규흥 선생은 북경에서 박용만과 무장투쟁노선에 따른 독립 운동을 펼치게 된다.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은 ‘대조선국민국’을 조직하려 했으나 자금 문제로 인해 조직을 구성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김규흥은 박용만과 함께 각종 사업을 벌여 그 이익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환하는 '둔전제적 독립운동'을 구상, 이를 실천으로 옮기고자 했다. 1922년, 박용만과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했고, 당시 개점식에는 김구 선생도 참석했다. 흥화실업은행은 금융기관을 표방하였을 뿐, 사실은 대일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김규흥 선생은 조선, 중국, 러시아와의 3국 합작을 통해 시베리아 지역을 차용하자고 주장했고 나중에는 내몽골도 이에 포함시키려 했다. 그리고 철저한 계획을 세워 북경과 만주 지역의 토지를 사고, 동지들을 모아 경작하게 하면서 각 군사단체들을 하나로 모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1923년, 주식금을 모으고자 했던 계획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목표액 10만엔의 1/10밖에 모금하지 못하는 등 가시밭길 시작이었다. 김규흥 선생은 이때 고향 옥천에 손을 내밀어, 죽향초등학교 앞에 남은 옥답인 전답을 팔아 중국으로 송금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김규홍 선생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김규흥 선생은 손문, 진기미, 진형명 등 중국의 혁명세력들과 박은식, 신규식, 여운형 등 한국의 항일독립지사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중국 내에서 항일전선을 구축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애석하게도 범재 김규흥 선생은 1936년 8월 16일, 한인 애국단이 조직된 지 5년 만에 천진에서 이질로 작고하게 된다. 그의 유해는 화장된 후 국내로 운구돼 현재 대전 현충원에 영면해 있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범재 김규흥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일하여 한국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공영방송인 KBS 1TV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2015년 8월 20일 밤 11시 40분에 ‘발굴 추적! 항일무장투쟁의 선구자, 김규흥’이란 제목으로 범재 김규흥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전 과정을 특집으로 보도하는 바람에 이제는 한국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누구를 위한 독립운동인가? - 나는 청풍김문과는 무관하지만 옥천사람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울뿐이다. 독립지사 가문의 고택 우체국 앞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돌아든다. 옥천읍 문정리. 얼마 가지 않아 예사롭지 않은 돌담을 두텁게 두른 한옥채가 반긴다. 넓은 집터는 한옥 고택 두 채와 300여 년 된 회화나무, 담장을 따라 시립한 문인석, 곳곳의 바닥돌로 묵직하다. 1760년(영조 36년)에 세워진 안채 문향헌(聞香軒)과 1856년(철종 7년)에 세워진 바깥채 괴정헌(槐庭軒)이 함께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25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문향헌은 청풍김씨 18대손 문향(聞香) 김치신(金致信) 공에 의해 건립됐는데, 당시에는 와가 85칸과 초가 12칸으로 100칸 대옥이었다. 대원군의 경복궁 복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가렴주구가 극심해지자 가세가 크게 기울었는데, 1872년 23대손 애국지사 범재(凡齋) 김규흥(金奎興) 공이 태어났다.한일늑약으로 나라 잃은 백성이 된 공은 독립운동에 투신하다가 유명한 고종의 비자금에 얽힌 조칙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고 난 뒤 1908년 초 중국 광동으로 망명한다. 이곳에서 30년 가까이 3ㆍ1운동, 의열단 투쟁, 은행 설립, 언론사 설립, 둔전제 실행 등 독립운동의 획을 긋는 주요한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하면서도 그는 일경의 체포되지 않았다. 문향헌은 김 공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살림이 어렵게 되면서, 지금은 이곳을 춘추민속관이라 이름을 붙이고 정태희 관장이 관리하고 있다. 문향헌은 비가 새고, 건물이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처마 밑 곳곳이 떨어져 나가고 있고, 비가 새는 등 보수가 절실하다. 옥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고, 한옥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지만 보수 재원을 마련할 길은 막막하다. “문화재급 한옥 고택을 유지하는 일은 고행입니다. 2년 전에는 군에 신청한 보수 예산 4천여 만 원 전액이 의회서 삭감됐어요. 지금껏 돈이 생기는 대로 털어넣고 있지만 뜻대로 안 되더라고요. 고택 몇 채를 ‘함마’로 뭉갰어요. 지자체도 정부도 나 몰라라죠. 피눈물을 삼킵니다.” 독립운동과 독립지사에 대한 냉대와 푸대접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