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 역사박물관 건립 어느곳으로 ?
 궁금이
 2020-05-21 11:39:06  |   조회: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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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역사박물관 건립 관련 주민설문 조사 및 의견수렴

조선시대 영조는 정책수립에 백성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하여 순문(詢問)제도를 활용했다.
순문(詢問)은 백성들에게 임금이 직접 묻고 의견을 듣고 사안을 결정하는 방법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직접적 여론 청취 방식이다.

옥천군은 역사박물관 건립 추진과 관련해 주민의견 수렴을 위한 현대적 순문(詢問)제도인 설문조사를 27일부터 5월 10일까지 2주간 실시한다.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3월 1일 정유 7번째기사 1591년 명 만력(萬曆) 19년
옥천에 있던 조헌이 일본의 서계에 분개하여 침략에 대비할 것을 아뢴 소장과 첩황

전 교수(敎授) 조헌(趙憲)이 소장(疏章)을 올렸으나 답이 없었다. 조헌이 일본(日本)의 서계(書契)가 패역스럽고 왜사(倭使)도 함께 나왔다는 말을 듣고서 옥천(沃川)에서 백의(白衣)로 걸어와서 예궐(詣闕)하여 소장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신은 생각건대, 선비는 자신의 말의 쓰여지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질 지경이면 혹 분연히 일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옛날 노중련(魯仲連)이 포위된 한단(邯鄲)으로 들어가서002) 진(秦)나라 임금을 황제(皇帝)로 높이자는 의논을 극력 저지시키자 진군(秦軍)이 그 때문에 50리를 물러갔습니다. 한단은 견고한 성이고 삼진(三晉)003) 은 강한 나라였습니다. 전국(戰國) 시대에 임금과 장수가 국가의 수비에 전력을 다 기울였기 때문에 수개월 동안 성벽을 굳게 지키면서 노중련의 분의(奮義)를 기다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가 바다를 건너온 이후 삼국(三國)004) 과 전조(前朝)005) 가 망하기까지 전혀 성을 등지고 일전(一戰)을 했던 때가 없었습니다. 신의 우견(愚見)에는 귤광련(橘光連)과 현소(玄蘇)가 우리 나라로 건너온 날은 실로 우리의 입장이 한단이 포위당했던 경우에 견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많은 말을 아뢰었습니다만 군상(君相)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행신(行身)이 무상(無狀)함을 슬퍼하고 옛날 노중련에게도 매우 부끄러워 영원히 입을 다물고 구학(溝壑)에서 목숨을 마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일본에 갔던 사신(使臣)이 돌아오자 적선(賊船)이 해변에 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우리 나라를 함몰시키고 중국을 침범할 경우에는 중국에 대해 변명할 길이 없고 이들이 기회를 포착하여 갑자기 쳐들어올 경우에는 해변의 방어가 너무도 허술합니다. 반드시 전쟁이 있을 지역인데도 아직까지 조충국(趙充國)006) 과 같은 경략(經略)이 없었고 원(元)나라의 사신을 영접하지 말라고 항의한 정몽주(鄭夢周) 같은 이도 없었습니다.

진회(秦檜)와 왕윤(王倫)이 나라를 그르치자 변주(汴州)·항주(杭州)가 함몰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필부(匹夫)가 군왕을 현혹시키자 수욕(羞辱)이 자심하여 강상이 날로 실추되고 군부의 화(禍)가 급박하여졌으므로 간담이 찢어지는 듯한 분노로 머리털이 곤두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역경(易經)》 복괘(復卦)의 초구(初九)에 ‘머지 않아 회복될 것이어서 뉘우침이 없게 될 것이니 크게 길하리라.’ 하였는데,

정전(程傳)에 ‘양(陽)은 군자의 도이기 때문에 복(復)은 선(善)으로 회복되는 뜻이 된다. 초효(初爻)는 양의 시작으로 복이 괘의 처음에 있어 제일 먼저 회복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는 머지 않아 회복한다는 뜻이다. 잘못을 머지 않아 회복한다면 후회에 이르지 않게 되어 크게 좋고 길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비괘(比卦)의 괘사(卦辭)에 ‘불녕(不寧)이 바야흐로 오고 있으니 시기가 늦으면 강부(强夫)라도 흉하리라.’ 하였는데, 정전(程傳)에 ‘사람이 스스로 안녕(安寧)을 보전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오면 친히 하고 도와줄 사람을 구하게 된다. 도와줄 사람을 구하게 되면 안녕을 보존시킬 수 있다. 불녕한 때에는 당연히 서둘러 도와줄 사람을 구해야 되는데 만약 혼자서 자신만을 믿고 도와줄 사람을 구하는 뜻이 늦추어진다면 강부라도 흉한데 더구나 유약(柔弱)한 사람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오늘날의 사
세를 헤아려 보건대, 국가의 안위와 성패가 매우 긴박한 상태에 있으니 참으로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히 왜사(倭使)의 목을 베고 중국에 주문(奏聞)한 다음 그의 사지를 유구(琉球) 등 제국(諸國)에 나누어 보내어 온 천하로 하여금 다 함께 분노하게 하여 이 왜적을 대비하도록 하는 한 가지 일만이 전의 잘못을 보완하고 때늦은 데서 오는 흉함을 면할 수 있음은 물론 만에 하나 이미 쇠망한 끝에 다시 흥복시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가 성주(聖主)께서는 속히 잘 생각하시어 사람이 못났더라도 말만은 버리지 말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지체하지 말았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만주(李滿住)에게 자급(資給)을 준 한 장의 종이로 중국에 실수를 저질러 장영(張寧)이 나와서 책할 때 광묘(光廟)007) 께서 대답할 말이 없어 무안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馬)을 공납(貢納)하고 사죄하였지만 이만주를 토벌하는 거사가 있을 적에 무과(武科)에 1천 8백 명을 시험보여 일국의 병력을 다 보내기에 이르렀는데 병마의 사상도 대략 그 숫자와 맞먹었습니다.

더구나 수길(秀吉)이 우리에게 길을 빌어 중국을 침범하려는 악랄함은 이만주에게 견줄 정도가 아니고 글을 보내어 우리를 무함하는 방술이 중추(中樞)의 자급에 그칠 정도가 아닙니다. 만약 중국에서 그들의 간계(姦計)를 깨닫지 못하고 당(唐)나라 때처럼 성대한 노여움을 발하게 될 경우에는 당연히 이적(李勣)·소정방(蘇定方)의 군대가 나와서 고구려·백제의 죄를 물은 것과 같은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주(聖主)께서는 어떻게 사과하시겠으며 신민(臣民)들은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간교한 오랑캐의 말이 매우 어리석고 교만하므로 지사(智士)들은 흔히 그가 반드시 패망할 것을 예견하고, 그가 제도(諸島)를 궤멸하고 사람을 무수이 죽였으므로 군하(群下)들은 많이 그 해독을 원망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계모가 있다면 성토(聲討)하여 절교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꺾어 우리의 사민(士民)으로 하여금 미리 토적(討賊)의 의리를 깨우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마다 분발할 마음을 먹게 되어 그들을 제재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공손술(公孫沭)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和親)을 약속하였으나 외효(隗囂)가 그 사신을 베자 공손술이 감히 농서(隴西)를 엿보지 못하였으며008) , 살리갈(撒離喝)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항복하게 하였으나 유자우(劉子羽)가 베니 살리갈이 감히 추격하여 오지 못하였습니다009) 대방(大邦)에서 군대를 양성하여온 것이 어찌 유자우의 군대가 패전한 끝에 겨우 살아남은 1백 10명보다야 작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스스로 의의(意義)를 진기시키지 못한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수길이 이미 종성장(宗盛長)의 족속을 궤멸시키고 자신의 심복인 평의지(平義智)로 하여금 대신하게 한 다음 대마도(對馬島)에다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몰래 습격할 음모를 축적하고 있으니, 우리를 버리고 먼저 중국을 공격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 따라서 늦추어 주문(奏聞)해도 허물될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너무도 생각이 모자란 것입니다.

신이 삼가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왜적들이 우리 나라 사람을 서남만(西南蠻)의 제도(諸島)와 양절(兩浙)에다 팔면 그들이 다시 전매(轉賣)되어 일본으로 되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객상(客商)들의 왕래가 베짜는 북처럼 누비고 다닌다는 증험인 것입니다. 간교한 오랑캐가 우리에게 답한 글에 이미 자신들의 성세(聲勢)에 대해 극도로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데 더구나 남양(南洋)의 제도에야 그들의 위무(威武)를 자랑하여 겁에 질리게 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은 황윤길(黃允吉)의 배가 처음 대마도에 정박했을 때 저들이 먼저 이 사실을 남양의 제도에 전파시켜 조선(朝鮮)과 통빙(通聘)했다고 하면서 제도를 제재하여 복속시키려 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양절(兩浙) 지방의 장리(將吏)들이 듣지 못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황제에게 주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국에서 의심하고 있은지 이미 오래입니다. 더구나 이 교사스런 오랑캐는 항상 상대가 방비하지 않고 있을 적에 엄습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있으니, 우리의 변장(邊將)이 얼마쯤 수비할 태세를 갖추어 전연 침범하기 어렵게 되면 저들이 반드시 중국을 침범하는 것이 이롭다고 여길 것입니다. 따라서 소주(蘇州)·항주(杭州)에 말을 퍼뜨려 자신들이 이미 조선을 복속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왔다고 할 경우 노포(露布)를 급급히 전한다면 반개월이면 경사(京師)에 도달될 것입니다.

시장에 사나운 호랑이가 날뛰고 있다는 말도 세 번 잇따라 들으면 의심을 갖게 되는 것이고, 사람을 죽였다는 말도 세 번 잇따라 듣게 되면 증자(曾子)의 어머니도 베짜던 북을 던지고 달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호랑이와 승냥이 같은 사나운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고 성상의 학문이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지경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황제가 증자의 어머니와 같이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중국에서 북쪽으로는 달로(㺚虜)의 공격을 받고 남쪽으로는 일본의 침구를 받아 소정방과 이적 같은 군대를 동쪽으로 파견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가 오랑캐로 빠져들어 갔다고 여겨 허겸(許謙)이 후회하듯 하고010) 사가(史家)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다면 당당한 예의(禮義)의 나라로서 또한 너무도 수치스럽고 오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종(祖宗)의 2백 년간 수치스러운 종계(宗系)의 일을 겨우 정성을 다하여 소설(昭雪)하였는데 전하에게 끼쳐질 천만세의 오욕을 제때에 씻어버리지 못하신다면 삼강 오륜이 장차 이로부터 땅에 떨어지고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께서도 반드시 제향(祭享)이 끊기는 슬픔이 있게 될까 염려스러울 뿐더러 배우지 못한 신민(臣民)들에게 윗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도리를 책임지우기가 어렵습니다.

한 번 사신을 늦게 출발시키게 되면 만사가 와해되는 걱정이 있게 되는데도 이끗을 생각하고 잘못을 감추려는 신하들은 손을 잡고 화(禍)를 부르고 있으면서도 중국이 격노할 것이 걱정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시(城市)와 촌야(村野)의 백성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왜사를 베지 않으면 의리를 진기시킬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찌 이치가 없기에 공자(孔子)가 임금을 현혹시키는 자를 베자고 청했겠으며011) , 여기에 어찌 이치가 없기에 호전(胡銓)이 싸우지 않아도 사기가 배로 진작될 것이다012) 고 했겠습니까.

항적(項籍)은 싸움을 잘 하였기 때문에 진실로 한왕(漢王)013) 으로서는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만 동공(董公)이 한번 명분(名分)을 바루어야 된다는 의논을 진술014) 한 뒤에는 광무(廣武)에서 항적의 열 가지 잘못을 수죄(數罪)할 적에 항적이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음은 물론 한군(漢軍)에 초가(楚歌)가 비등하게 되었습니다. 석늑(石勒)은 강포하여 스스로 약한 진(晉)나라를 능가(凌駕)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015) 진나라에서 한번 서폐(書幣)를 불태우자 조적(祖逖)이 없었어도 감히 강회(江淮)를 한번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말이 정직하고 의리가 확고하면 사리에 어긋나는 기운은 저절로 꺾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스스로 반성하여 보아도 늘 정직했고 전하께서 사대(事大)하는 정성은 신명(神明)에 질정할 수 있고 전하께서 이웃나라를 돌보는 의리는 먼 데 사람을 회유시켜 오게 한다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고 전하께서 백성을 보호하시는 인자함은 늘 필부(匹夫)라도 손상이 있을까 염려하였고 전하께서 변방을 공고히 하는 모유(謀猷)는 늘 스스로 잘 지켜 침략받는 일이 없게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증자(曾子)가 이른바 ‘상대가 부(富)를 들고 나오면 나는 인(仁)으로 맞서고 상대가 벼슬을 들고 나오면 나는 의(義)를 가지고 맞선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대해 나간다면 진(晉)나라 초(楚)나라 같은 부강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데 더구나 수길(秀吉) 같은 필부의 용맹이겠습니까. 그가 칼을 품고 임금을 시해(弑害)할 적에는 사람마다 드러내어 죽일 것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가 사람을 삼대를 베듯이 했을 때에는 귀신도 은밀히 벨 것을 모의했을 것입니다. 그가 죄없는 이들을 해친 것이 삼묘(三苗)016) 정도뿐이 아니며 우리 대방(大邦)을 엿보니 귀방(鬼方)017) 이야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온 천하가 다같이 분노한다면 수고롭게 전쟁을 할 것도 없이 흉역 완안양(完顔亮)처럼 저절로 죽을 것이나 간서(簡書)를 빨리 보내지 않는다면 왜적이 뜻밖에 출동하여 중국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자사(子思)가 ‘모든 일에 있어 미리 준비를 하면 그 일이 잘 되고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잘못되는 것이므로, 사전에 일에 대한 계획을 확정해야 잘못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예비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람의 머리에 목줄을 감고 꼬챙이처럼 꿰는 로 (히데요시의) 악행이 유구(琉球)·점성(占城)에까지 미쳐 급기야는 중국에까지 도달하게 되면 천하 후세에서 전하를 어떠한 분이라고 여기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변란을 알리고 토벌할 것을 청하는 주문(奏聞)을 하루 늦게 보내면 결단코 백년의 걱정이 있게 될 것이고 열흘 늦게 보내면 결단코 천년의 화(禍)가 있게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아, 정강(靖康)018) ·건염(建炎)019) 연간에 금(金)나라와 화친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한 사람들은 양시(楊時)·이강(李綱)·장준(張浚)·호안국(胡安國)이었는데 이들을 모두 붕당(朋黨)으로 지목하여 배척하고 기용하지 않았습니다. 간신(奸臣)들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은 예부터 이러하였습니다. 성주께서 역사를 읽으실 적에 또한 반드시 송나라 임금에 대해 개연(慨然)한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지금 화란(禍亂)의 급박함도 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마식(馬植)이 돌아오자마자 금나라의 군대가 하수(河水)를 건넜고 왕윤(王倫)이 양자강을 건너자 올출(兀朮)이 남쪽으로 달려왔습니다. 남의 다리를 베고 자면서 해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오랑캐의 마음을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눈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미성(尾星)과 기성(箕星)의 분야(分野)에 형혹성(熒惑星)이 바야흐로 나타나 있으니 이것이 실로 우리 나라에 먼저 침구(侵寇)할 조짐이며 동남 지방에 지진이 없는 달이 없었으니 이것은 영남(嶺南)·호남(湖南)이 전화(戰火)를 당할 징후인 것입니다. 남쪽 도서(島嶼)의 항로(航路)를 쟁취하지 않고 먼저 기전(畿甸)·해서(海西)로 달려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의 우견(愚見)으로는 일찍이 일대(一代)의 명장(名將)을 선발해서 주아부(周亞夫)에게처럼 곤임(閫任)을 위임시킨 다음 군사들을 선발하여 가볍게 무장시켜 무관(武關)을 거쳐 곧바로 내려가서 적이 침구해올 때 반드시 쟁취하려 할 지역에다 은밀히 선척을 소각시킬 도구를 준비하게 하소서.

그리고 깨끗한 희생(犧牲)과 정한 폐백(幣帛)으로 은밀히 두류(頭流)·창해(蒼海)의 수신(水神)에게 바람을 돌려 불게 해줄 것을 빌게 하고 적과 대적하여 교전할 때 황개(黃蓋) 같은 장수 하나를 구해서 거짓 양선(糧船)을 탈취하여 항복을 청하는 것처럼 하면서 마른 갈대를 가득 적재하고 그 사이에 화약(火藥)을 비치한 다음 수미(首尾)가 거의 접근될 적에 불을 붙이고 달아난다면, 저들이 믿고 있는 정선된 군병이 틀림없이 뜨거운 불꽃으로 산화되고 말 것입니다. 일개 서생(書生)이 군대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참람하고도 가소로운 것이기는 합니다만, 성패는 지장(智將)이 기미에 따라 변에 대응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대소 장사(將士)들로 하여금 다 함께 수길(秀吉)의 죄를 성토하게 하여, 종행(從行)하는 군졸들도 그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자임을 알게 하고 그들 중에서 지혜로운 자가 계모(計謀)를 베풀거나 용사(勇士)가 뉘우치고서 기회를 포착하여 목을 베어 바치는 자가 있으면 중국에 주문(奏聞)하여 땅을 나누어 봉하고 국상(國相)으로 삼도록 할 것이며, 도주(島主)로서 한결같이 원씨(源氏)의 구제(舊制)를 따라서 우공(禹貢)의 훼복(卉服)020) 의 조공을 폐하지 않게 한다면, 완안양(完顔亮)과 팽총(彭寵)021) 처럼 사악(邪惡)한 자들을 응징하는 칼과 화살이 수길에게 집중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남은 병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김히 서쪽으로 건너오지 못할 것이어서 기전·해서가 절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그들이 멋대로 왕래하게 하여 태평에 젖어 있는 곳을 진동시키게 한다면 보따리를 싸놓고 있는 백성들은 흩어지기가 쉽고 굶주림에 지친 군졸들은 소문만 듣고도 흩어질 것이며, 따라서 한수(漢水)·패수(浿水) 사이가 모두 유린당하는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아, 금나라가 송나라에 대해 날마다 침삭(侵削)시킬 계책을 세우고 있는데도 진회(秦檜)의 무리는 오랑캐들의 실정을 철저히 숨긴 채 당시의 임금과 장수가 혹시라도 깨우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회유(回諭)하는 조서(詔書)의 글자가 손바닥만큼씩 컸습니다만, 진회는 이를 급히 열어보였다가는 서둘러 거두어버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땅을 떼어주자는 한 마디 말만을 다행으로 여긴 채 공전(攻戰)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장준(張浚)·한세충(韓世忠)·악비(岳飛)·유기(劉錡)022) 등의 제장(諸將)이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면 귀자(龜玆) 지역도 보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수길이 우리 나라에 대해 병탄할 계책을 세우고서 대마 도주(對馬島主)를 살해, 은밀히 자신의 복심인 평의지(平義智)를 보내어 대신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왼손을 빼앗아 첩보(諜報)할 길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또 신장(信長)을 사신으로 보내어 엿보아 회사(回謝)를 처치하는 한 가지 일을 살피게 하여 갑자기 출병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달에 대마도에 군대를 숨기더라도 상하가 말하기를 꺼리고 있으므로 대대적인 거사가 있을 것을 모르게 한 것이니, 그들이 품고 있는 화심(禍心)이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억(供億)을 중국 사신과 다름없이 하고 있습니다. 적사(賊使)가 두 길로 나누어 올라올 적에 영남·호남의 각 고을에서 이민(吏民)을 모두 거느리고 원역(院驛)에 나가 기다리느라고 여러 날 지체하면서 한 번도 방비에 대한 일을 돌보지 않고 있으니, 안진경(顔眞卿)과 같은 선각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참호를 파고 성을 완벽하게 할 계책을 세울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 사신을 대우한 것은 매우 박하게 하였는데도 우리는 먼저 기운을 잃은 기색을 보여 왜노(倭奴)로 하여금 우리의 장리(將吏)들에게 교만을 부리기를 천례(賤隷)들에게 하는 것같이 해도 감히 한 마디 예의(禮義)로써 책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른바 후대하라는 분부는 실로 우리의 국명(國命)을 위축시켜 영원히 스스로 진기할 수가 없게 하고 우리의 민력(民力)을 손상시켜 감히 적을 물리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니,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가운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선래 역관(先來譯官)이 수길의 패만스런 내용의 글을 가지고 와서 일도(一道)에 전파시켰고 이것이 호서(湖西)·호남(湖南)에까지 퍼져갔으므로 사류들은 말하지 않는 이가 없고 백성들도 듣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이 말이 널리 퍼질 것만을 두려워하고 일에 앞서 모의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하나도 거론하여 진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023) 의 상소가 혹시라도 초택(草澤)에서 나올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어찌 성주(聖主)까지도 왕(汪)·황(黃)·회(檜)·윤(倫)024) 의 술책에 빠뜨리려 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주서(周書)》에 ‘덕을 쌓으면 마음이 편안하여 날마다 즐겁고 거짓된 일을 하면 마음이 수고로와 날로 졸렬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저들이 중국을 공격하겠다고 하는 말을 하는데도 우리들이 존경하고, 저들이 우리를 병탄할 계책을 품고 있는데도 우리가 너그럽게 대한다면 이는 성신(誠信)으로 교린(交隣)하는 도리가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끝내는 내정(內政)·외비(外備)가 날로 졸렬해져가는 것을 숨길 수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추로(醜虜)에게 수모를 받게 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진회·왕윤 같은 무리를 베지 않고서는 중국에 치사(致謝)할 수 없게 될 것은 물론 삼군(三軍)에 명령을 신칙시킬 수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아, 육가(陸賈)가 정색(正色)하고서 거만스럽게 걸터앉았던 위타(尉佗)를 굴복시켰고025) , 범중엄(范仲淹)은 글을 불태워 조원호(趙元昊)의 패만스러운 마음을 꺾었는데026) , 이들은 모두 수행원이 없이 혼자서 자신들의 왕기(王氣)를 장엄하게 한 사람들이고, 의리가 담긴 말 한 마디로 흉봉(凶鋒)을 꺾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어찌 김성일(金誠一)의 무리가 1천 석의 곡식을 적재하고 국악(國樂)을 가지고 가서 적을 즐겁게 하면서 헌원씨(軒轅氏)가 치우(蚩尤)를 격파한 도구를 모두 오랑캐들의 소득이 되게 한 것과 같은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

군졸에게 옷을 바꾸어 입혀 순환(循環)시킨 것은 바로 이광필(李光弼)이 적장(賊將)을 속인 술책인데도 저들은 모두 깨닫지 못하였고027) , 선척을 진설하고 병위(兵威)를 자랑한 것은 바로 이희열(李希烈)이 중사(中使)를 속인 계책인데도 저들은 실로 두려워했습니다028) . 5개월 동안 접견하지 않은 것은 바로 구금시킨 것이고, 음식의 진설을 몸소 살핀 것은 바로 마음을 꾄 것이고, 질그릇 술잔으로 마시다가 깨뜨린 것은 끝내는 맹약을 파기한다는 것을 보인 것이고, 아이를 안고 상대했다는 것은 우리를 어린 아이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적추(賊酋)의 간휼(奸譎)스러움은 이토록 헤아릴 수 없이 단서가 많은데도 저들은 돌아와서 아뢰기를 ‘적은 오지 않을 것이다.’고 아뢰어 결국 장사(將士)들의 마음을 해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소위 일덕대신(一德大臣)들은 왕윤(王倫)처럼 봉사(奉使)를 잘했다고 성대하게 칭송함으로써 금장(金章)의 총애를 받게 하였으니, 나라를 욕되게 한 무상(無狀)한 자일지라도 권간(權奸)에게 빌붙으면 순차에 따라 높은 직위에 함께 오를 수가 있습니다. 이러고서야 어떻게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들의 기세가 날로 치성하여 백주에 위를 속이고서는 혹시 공론(公論)이 격발될까 두려워하여 이에 ‘수길(秀吉)이 진짜 반역한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한착(寒浞)을 순신(純臣)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통신사(通信使) 일행이 저들의 실정을 깊이 깨닫고 미리 방비하는 조처를 했으니 도움이 작지 않을 것이다.’ 했는데, 영남(嶺南)을 버려두고 방비하지 않았으니 이는 양주(梁州)를 버려 오(吳)나라에 주려는 처사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앞서 호남의 중망(重望)에 세 사람의 패장(敗將)으로 삼망(三望)을 갖추었는데 이들 가운데 하나는 이발(李潑)과 정여립(鄭汝立)을 잘 섬긴 자이고 또 하나는 최영경(崔永慶)을 노예처럼 섬긴 자였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약사(藥師)와 범경(范瓊)이 연주(燕州)·변주(汴州)를 보전할 수 있고029) , 송(宋)나라를 그르친 장수 진의중(陳宜中)030) 이 앉아서 책략을 정할 수 있다고 한 것과 같은데, 이른바 예비책(豫備策)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술책입니까. 호서(湖西)·영남(嶺南)을 보면 명령을 봉행하기에 지쳐 읍리(邑里)가 쓸쓸한 지경에 이르렀고 호남(湖南) 지방을 보면 이진(梨津)의 군량이 불타버리자 다른 진보(鎭堡)도 굶주리게 되었으니, 이때는 바로 주야로 걱정해야 할 급박한 시기입니다.

실제로 행진(行陣)의 경험이 있는 사람을 얻더라도 사세가 제때에 조처하기 어려운 실정인데 아첨하는 신하들은 스스로 나라를 그르치는 대죄(大罪)를 저지르며 오직 임금이 깨우칠까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변고를 주문(奏聞)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여국(與國)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도 않으면서 평안히 앉아서 교사스런 오랑캐의 명령만 따릅니다. 그들로 하여금 계모(計謀)를 완성시켜 앉아서 만전책을 다지게 한 다음에 성식(聲息)이 있기를 기다려 장수를 파견하고 백성을 몰아다가 싸움을 한다면 적들이 장구(長驅)하여 쳐들어오는 형세를 실제로 막을 수 없는데다가 군사들도 연습을 시키지 않았으므로 그저 적에게 념겨주는 격이 될 것입니다.

고려 말엽에 왜적이 진강(鎭江)을 거쳐 영남(嶺南)·호남(湖南) 사이로 돌입하여 이때 영동(永同)·화령(化寧)이 모두 병선(兵燹)의 화(禍)를 당했었는데, 더구나 이 강적은 발도(拔都)의 세력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데이겠습니까. 그렇게 될 경우 신처럼 노둔한 사람은 어디로 달아나 죽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한번 죽기는 마찬가지인 바에야 차라리 자공(子貢)이 연(燕)·초(岧)로 돌아다니며 유세(遊說)하여 제후(諸侯)들의 군대로 하여금 오(吳)나라를 쳐부수어 노(魯)나라를 보존시킨 것031) 처럼 한다면 성주(聖主)께서 신을 살려준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고 하늘이 남아(男兒)로 태어나게 한 뜻에도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남(海南)의 만리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면 신에게 절월(節鉞)을 빌려주어 사행(使行)의 말단에 충당시켜 주소서. 그러면 주야로 서쪽으로 달려가 현소·평의지의 머리를 중국 조정에 바치고서 삼가 신포서(申包胥)의 통곡을 본받아 우리 임금의 심사(心事)를 밝히겠습니다. 다행히 황제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아 호소가 이루어지면 남쪽 국경으로 말을 달려 적의 사지(四肢)를 남양(南洋)의 제국(諸國)에 나누어 보내고 나서 ‘군대를 정돈하고 편리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 수길(秀吉)이 서쪽으로 침구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선척을 출동시켜 공격하고 일본에다 격문(檄文)을 전하라.’고 효유(曉諭)한다면, 훼복(卉服)032) 에서도 무기를 되돌려 수길을 공격할 사람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소원(疏遠)한 천신(賤臣)이 감히 분수에 넘친 일을 청하였습니다만 시사(時事)가 매우 급박한데 미리 대비하지 않음으로써 패망당할까 두려웠습니다. 이에 중국 조정에 변란을 주문(奏聞)하는 소장을 초잡았고 유구 국왕(琉球國王)과 일본·대마도에 있는 유민(遺民) 중 호걸들에게 적사(賊使)를 체포하게 할 격문(檄文)을 초안(草案)하였으며, 영남·호남의 비왜책(備倭策)에 대해서도 모두 일에 따라 차기(箚記)하여 삼가 별지(別紙) 7폭(幅)에 갖추 기록해서 소매 속에 품고 있습니다. 사대(事大)·교린(交隣)에 대한 법규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사리가 정직하지 못하면 도(道)를 드러낼 수 없다고 한 맹자(孟子)의 훈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건대 이렇게 한다면 사리가 절로 밝아지고 말도 정직하고 의도 장엄하게 되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소원한 몸으로 참람스러워 감히 바로 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혹 성주(聖主)께서 보잘것 없는 말을 곡진히 채납(採納)하여 주시어 즉시 세숙(世叔)과 자산(子産) 같은 사람을 시켜 토론하고 윤색하게 하여 괴원(槐院)으로 하여금 아침에 전사(轉寫)하여 점심 때 봉하게 한 다음 특별히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치주(馳奏)하게 하되 행장을 꾸리는 일순(一旬) 안에 먼저 1본(本)을 등사해서 역관(譯官) 1인을 붙여주어 천신으로 하여금 먼저 요계(遼薊)에 알리고 나아가 연경(燕京)에 알리게 한다면, 중국 조정의 군신(君臣)들이 우리가 주야로 달려와 제때에 고하는 정성에 감동되어 두루 제진(諸鎭)·제국(諸國)에 효유하여 미리 방비하여 은밀히 조처하도록 하고 천하가 다같이 분노하여 기어코 이 왜적을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게 하소서. 그러면 신은 도로(道路)에서 죽더라도 노모(老母)는 강회(江淮)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수욕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완악한 기운이 풀어지지 않아 천일(天日)이 항상 음산하므로 신은 국가를 위한 걱정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통분을 견딜 수가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받들어 올립니다."
하였다.

또 첩황(貼黃)이 있었는데 그 대략에,
"기밀(機密)스러운 일은 비밀히 하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에 능란한 적사(賊使)가 동평관(東平館)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으니 신의 봉장(封章)이 또한 늦은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의 상소문을 머물러 두시고 기책(機策)을 은밀히 조처하시되 동평관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득(購得)할 수 없게 할 것은 물론 신의 이름을 조보(朝報)에 싣지 않게 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갔으나 비답(批答)이 내리지 않았다. 또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번후(藩侯)로서 경급(警急)한 일이 있으면 빨리 간서(簡書)를 보내지 않을 수 없고 필부(匹夫)로서 임금을 현혹시키는 일이 있으면 목을 베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멀리서 중국을 삼키려는 근심스런 소식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분노를 견딜 수 없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달려와서 품은 마음을 피눈물을 흘리며 아룀으로써 성주(聖主)께서 머지 않아 깨우칠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위로 중국 조정에 죄책을 받지 않고 안으로는 종묘(宗廟)에 수치스러움을 끼치지 않고 밖으로는 추로(醜虜)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고 아래로는 생령(生靈)들에게 화(禍)를 끼치게 하지 않는다면 평생 글을 읽은 힘으로 한 번 중대한 강상을 부지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임금이 고구려·백제가 당한 걱정을 면할 수 있게 되고 신의 노모가 강회(江淮)의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겠습니다. 진실로 이렇게만 된다면 어떠한 혹독한 형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만 봉장(封章)을 올린 지 3일이 되었어도 아직껏 분부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성주께서 관용(寬容)하는 마음에서 신을 죄주려 하지 않으시는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나라를 구원하고 노모를 살리는 계책이 쓰여지는 것은 단지 오늘날에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방에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멀리서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중국의 죄책(罪責)이 일단 있게 되면 아무리 걱정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신은 7폭의 소장을 머물러 둠으로써 명주(明主)께서 한번 살펴 뉘우칠 때가 있기를 바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교사스런 오랑캐는 반복이 무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것인데 금(金)과 원(元)의 사신 같은 자들을 후대하면서 남쪽에서 침구를 당하는 수모가 없게 되리라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송(宋)나라 때 진회(秦檜)·가사도(賈似道)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인 것입니다. 수길은 자기의 임금을 주저없이 풀베듯 하였는데 이웃 나라라 하여 엿보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금을 살펴보아도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신이 기필코 명장(名將)을 시켜 은밀히 동남쪽을 방비하게 하라고 청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구국(琉球國)이 보내온 글에 우리 때문에 일본을 섬긴다고 했다는데 이 말이 발설된 지가 오래이니, 중국 조정에서 듣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정방과 이적(李勣)의 군대가 동방으로 출동한 것은 단지 백제·고구려가 신라의 입공로(入貢路)를 단절시키려 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교사스런 오랑캐가 이런 소문을 천하에 퍼뜨릴 적에 반드시 우리 나라가 빈복(賓服)하였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중국에 대해 받은 은혜가 작지 않으니 저들의 패만스런 글을 보았으면 의리상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주문하는 것이 당연한 조처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일을 지연시키면서 절사(節使)의 행차에 순부(順付)하려 한다면 인마(人馬)가 너무 번잡스러운 것은 물론 봄 전에 부경(赴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교사스런 오랑캐가 강절(江浙) 지방에 보낸 격문(檄文)은 반드시 반개월도 못되어 북쪽으로 보고될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씨(史氏)의 기록을 어떻게 씻어내어 밝힐 수 있겠으며, 장영(張寧)033) 의 문책을 어떻게 모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중국 조정의 은애(恩愛)가 바야흐로 깊기는 하지만 중국 황제의 한번의 노여움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건주위(建州衛)를 토멸시키게 한 것도 바로 황조(皇朝)의 가법(家法)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힘을 알지 못하고서 기필코 우리에게 일본을 토멸시키라고 한다면 우리의 잔약한 병력으로는 스스로의 수비에도 겨를이 없는데 무슨 남은 힘이 있어 동정(東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홍다구(洪茶丘)의 8만 병력과 김방경(金方慶)이 규합한 병력으로도 동쪽 바다에서 뜻을 얻지 못하여 사상자(死傷者)가 반절이 넘었었습니다. 더구나 중국에서 홍다구와 같은 병력을 출동시키지도 않고 우리 나라에서는 또 김방경에 버금갈 만한 장수가 없다면 감히 동정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중국 조정의 노여움은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평소 사랑하던 아들도 조금만 아비의 뜻을 거스르면 아비의 노여움이 반드시 깊은 것입니다. 이럴 시기에 소정방·이적과 같은 문책의 군대가 나온다면 일본을 의지해서 물리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소정방·이적의 군대가 백제·고구려를 다 소탕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10만여 호(戶)를 강회(江淮)로 옮길 수가 있었으니, 수륙(水陸) 머나먼 길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어찌 다 살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신에게는 연로하고 병이 극심한 계모(繼母) 한 분이 계시는데 이 분을 업고 피해갈 땅이 없습니다. 적사(賊使)가 좋은 말을 할 때에는 성주(聖主)께서 스스로 태연하게 걱정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계십니다만, 기회를 포착하여 돌발하게 되면 그때는 온 나라의 국력을 다 동원하여 동쪽으로 나아가야 할 터인데 서방에서 밀려오는 문죄의 군사를 다시 무슨 힘으로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성역(聖域)에서 농사지으며 병든 노모를 봉양하면서 강회를 옮겨가는 고통스런 행렬에서 면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미 한번 아뢰었습니다만 재삼 번독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주께서는 신의 상소 1통을 보관하고 계시다가 일이 닥쳐왔을 때에 다시 살펴주신다면 신이 노모를 위하고 국가를 위한 간절한 마음이 농사를 그만두더라도 오활하게 되지 않겠습니다.

신이 더욱 마음아픈 것은 이번에 올라올 적에 적사(賊使)가 경유했던 두 도(道)를 거쳐 오면서 저 왜노들이 마치 중국 사신처럼 멋대로 무시하였으므로 우리의 관리(官吏)들은 모두 기운이 저상되어 온 도내의 힘을 다 기울여 그들을 공억(供億)하느라 방비하는 일은 전연 잊었다는 말을 세세히 들은 것입니다. 이 사신의 왕래만 가지고도 뒷날 대패할 것을 점칠 수가 있는데 조정에는 호전(胡銓)과 같은 의논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고 초야에는 진동(陳東)과 같은 의논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황이옥(黃李沃)의 상소문이 서울에서 나온 일은 있습니다만, 앞으로 전패(顚沛)되어 떠돌게 될 때 분발하여 급한 일에 달려갈 사람이 없게 된다면 성명(聖明)께서 의지할 수 있는 문천상(文天祥)·육수부(陸秀夫) 같은 사람이 끝내 누구이겠습니까. 한(漢)나라 말기에 제현(諸賢)을 당고(黨錮)시켜 기필코 살해하였고 당(唐)나라가 망할 적에는 청류(淸流)들을 기필코 황하(黃河)에 던졌는데, 이는 성세(聖世)에서는 듣기를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정몽주(鄭夢周)는 전조(前朝)034) 가 위의(危疑)스러울 즈음에도 오히려 혐의를 피하지 않고 널리 국사(國士)를 맞아들여 담론(談論)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詩)에,
자리엔 손님 늘 가득하고
술잔에 술이 비지 않누나
라고 하였는데, 일을 맡은 신하가 문을 닫고 혼자 앉아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지 않고 국가를 부지시킨 경우는 예전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은밀히 고굉(股肱)의 신하에 대한 유무를 살피고 의심스런 단서를 물리쳐 버림으로써 참적(讒賊)의 입을 막아버린다면 사직(社稷)에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아, 종군(終軍)035) 은 약관의 나이에 적을 묶어올 포승줄을 요구했고 모수(毛遂)036) 는 자천(自薦)하여 특이한 일을 해냈으니, 이들이 어찌 전혀 염치를 잊은 자들이겠습니까. 단지 상하가 전도되고 종국(宗國)이 망하여 의관(衣冠)과 골육(骨肉)이 모두 오랑캐에게 함몰될 것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서 기력(氣力)을 내어 몇 해 동안의 편안함을 보전하게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진(秦)나라의 간첩에게 금(金)을 받고 제왕(齊王)에게 진을 섬기라고 권했기 때문에 공전(攻戰)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 임치(臨淄)가 갑자기 진나라의 땅이 되게 만들어서 송백(松栢)의 노래가 만고의 사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 외방에서 살고 있으므로 관리로서 해야 할 걱정은 없습니다만, 사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을 적에는 강혁(江革)037) 처럼 노모를 업고 난을 피하려 하나 피할 곳이 없을까 매우 두렵습니다. 변(變)을 듣고 나서 십일 동안을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일이 있기 전에 미리 대비하라는 경계를 가지고 완전무결한 계책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들이 꺼지고 기둥이 불타는 화(禍)가 닥쳤을 때 다행히 천신(賤臣)이 멀리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가난한 서생(書生)으로서 서울에 온 지 여러 날이 되어 낭탁(囊槖)이 이미 비었으므로 동방삭(東方朔)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영원히 하직할까 합니다. 성명(聖明)을 우러러 보건대 황공하고 격절(激切)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7조(條)의 내용을 붙여 아뢰었는데 그 내용은 1. 강적(强賊)을 이간시키는 일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귀부(歸附)하기 전에 해야 하는데 반드시 현소(玄蘇)·평의지(平義智)의 목을 자르고 천하에 선포하여 천하 사람들과 함께 소리를 같이하여 격문을 보내되 허점을 노려 수도(首都)를 공격한다고 하면 이러한 말이 사방에서 동쪽으로 보고되어 수길(秀吉)도 감히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 나라를 엿볼 계책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2. 변란에 대해 황조(皇朝)에 아뢰는 표문(表文)의 초안, 3. 유구 국왕에게 전하는 국서(國書)의 초안, 4. 일본국 유민(遺民)의 부로(父老)들에 보내어 효유하는 편지의 초안, 5. 대마도의 부로들에게 보내어 효유하는 글의 초안, 6. 적사(賊使)를 참하는 데 대한 죄목(罪目)의 초안, 7. 영남 호남의 비왜책(備倭策)에 대한 초안이었다.

조헌(趙憲)이 궐하(闕下)에 엎드려 상소에 대한 비답이 있기를 기다렸으나 내리지 않자 머리를 돌에다 찧어 피가 얼굴에 가득하여 보는 사람들도 안색이 위축되었다. 그래도 비답이 내리지 않자 이 상소를 봉진(封進)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받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조헌이 상소를 진달했는데도 정원에서 받지 않고 있는데 상소의 내용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언로가 막히는 단서가 있게 되니 색승지(色承旨)를 파직시켜소서."
하니, 상이 추고(推考)만 하도록 윤허하였다. 조헌은 통곡하면서 물러갔다. 【정유 왜란 때 우리 나라의 어떤 사인(士人)이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들어가서 민간(民間)으로 다니며 구걸하다가 한 사람의 노승(老僧)을 만났는데 그의 말이 ‘수길은 조선에 대해서는 한때의 적이지만 일본에 있어서는 만세의 적이다. 그때에 한두 명의 의사(義士)가 있어 격문을 보내고 의에 입각하여 거사(擧事)하였다면 수길로 인한 재앙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조헌의 비왜책(備倭策)에서 천거된 10여 명은 평상시에는 모두 이름도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모두 기용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김시민(金時敏)·조웅(趙熊) 등은 더욱 두드러져 칭송할 만한 사람이었다.

조헌이 옥천(沃川)으로 돌아가 아들 조완도(趙完堵)를 시켜 평안 감사 권징(權徵)과 연안 부사(延安府使) 신각(申恪)에게 글을 보내어 참호를 깊이 파고 성을 완전히 수리하여 전수(戰守)에 대한 준비를 미리 수거(修擧)하도록 권하였는데, 권징은 그 글을 보고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황해도·평안도에 어찌 왜적이 올 리가 있겠는가. 돌아가 그대 부친에게 부디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라.’ 하였다. 신각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기계(器械)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성내(城內)에 봇물을 끌어들여 큰 못을 만들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이정암(李廷馣)이 성을 지켜 온전할 수가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각이 사전에 준비한 공로를 추모하여 아울러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
2020-05-21 11:39:06
118.xxx.xxx.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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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2 2020-05-30 19:52:08 112.xxx.xxx.113
옥천에 역사 박물관? 국립은 잘 모르겠고... 어려울것 같고......
누구나 관람하고 싶으면 찾아가는 그런 공간.... 일례로 충남 공주에 국립공주박물관, 시립인 같은 충청도죠 시립 충주 박물관, 충남 조치원이라고 많이 말하죠. 충남 연기 박물관이 있어요. 참고해서 생각들 해보세요.

과객이 2020-05-30 09:24:11 211.xxx.xxx.63
옥천역사박물관의 중요성에 대하여
역사박물관은 옛분들의 타운으로 옥천의 숨결이며 거울로써 언제 어느때 이땅위에 누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생활상을 한눈에 볼수있기에
더욱 중요하므로 누구나 쉽게 찾을수 있는 거리이여야 합니다.

지나가다 2020-05-29 19:42:27 112.xxx.xxx.113
옥천에 박물관이 생긴다면, 제가 상관할바는 아니지만 옥천군 안내면에 향토사료관하고 연계되면 좋을것 같네요. 그리고 교통문제 대도시 처럼 대중교통 문제도 있을거 같구요.
누구나 찾아가서 관람하기 쉽게 해놓으면 좋잖아요. 대통령 이었죠. 박근혜 전 대통령님 엄마가 누구에요. 옥천이 고향인 육영수 여사죠. 세월이 흐르면 현대사에는 나올거에요. 박정희 대통령님. 영부인 육영수 여사..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옥천이란 곳이 외가인 셈이죠. 외할머니 할머니 아닌가요. 어느 어떤 여자가 시집갔다고 친정을 끊어요. 남자분들도 정상적인 멘탈이면 처갓집 안가는 사람 없죠. 수천번을 말해도 그런사람이 옥천땅에 있네요 그 자녀한테는 옥천이 외가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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