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장아리에 沃川義兵將 李得男 의 祠堂및 遺跡이 있는가?
 독립정신
 2018-12-29 18:38:20  |   조회: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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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동학2대교주 최시형이 청산땅에 자리를 잡고 동학농민혁명의 본부역할을 한 곳도 옥천이다.
그리고 인봉 전승업, 의병장 이득남 등 충절인물과 범재 김규홍, 검한재 김순구 등의 독립운동가등 많은 역사인물들이 옥천에서 나고 자랐다.

돌아온 의병장의 말(馬)

때는 1636년 병자년 12월 말경 추운겨울이었다. 충청도 옥천군 옥천읍 장야리에 전의이가들이 모여 처마를 맞대고 살고 있었다.
북풍의 찬바람에 밥 짓는 저녁연기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골목에 낮게 드리운다.
마을을 방문한 손님은 불온한 생각이 들었다. 마을에서 제일 큰 어모장군(禦侮將軍)댁의 고택은 마을의 중심에 있었다. 고택은 지영(16세)의 윗대인 사직(10세) 할아버지가 개경에서 낙향해서부터 살기 시작했다. 이지영(李枝暎)은 어모장군(정3품당하관)을 지냈다.

고려개국2등 공신 이도(李棹)와 조선의 명문가출신 집안이었다. 이지영의 나이 올해 만56세였다. 아내 영산김씨 덕난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어모장군의 고택은 크고 웅장했다.
담장이 높아 마당을 들여다 볼 수가 없으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마당에 정원이 있는데 연못이 있고 개경에서 옮겨온 이끼를 입은 석탑이 있다고 했다. 지영의 아내는 매일 불공을 드린다고 했다. 그리고 연못의 북쪽에는 정자가 있다고 했다. 어모장군 이지영댁은 대가족이었다. 장남인 득남(得男)을 비롯해 여남(汝男)까지 5형제와 딸 셋을 두었다.

“아버지 용서하십시오.”(군자감주부 득남이 밤에 말을 타고 불시에 찾아왔다.)

“장남인 네가 구지 가야겠느냐?(어모장군을 지낸 지영 대감이 물었다.)

“이미 700여명의 옥천의 의병을 모아 내일아침 출정합니다. 잠시 틈을 내어 왔으니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지원자가 1000여명이 넘었으나 어린이와 늙은이는 제외시켰다.)

“너를 다시 못 볼 수도 있겠구나?”(아버지 지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아닙니다. 꼭 살아 돌아와 효도를 다 하겠습니다.”(득남이 무릎을 꿇고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했다.)

“알았다. 말발굽소리가 션찮아 보이더구나. 아들아 내 말을 타고 가려무나.”

“아버지께서 자식처럼 아끼던 명마가 아닙니까?”

지영 대감은 벽에 붙은 격문을 보고 나라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조를 구할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위기에 처한 왕을 구한다는 의미였다. 지영 대감은 아들 득남이 옥천의 의병장이 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인조는 올 12월 중순에 만주의 후금이 쳐들어와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었다.

후금(後金)은 여진 몽골족 등으로 9년 전인 인조5년(1627)에도 조선에 쳐들어와 형제의 맹약을 맺은바 있었다. 이후 후금은 청으로 나라이름을 바꿨다고 했다. 과다한 세폐를 요구해 왔다고 들었다. 지영은 관심이 없었다. 평화롭게 살자고 개경에서 충청도 옥천에 내려와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내가 갔어야 옳았다. 내가 아직 젊은데 자식을 사지로 보내다니”(그날 밤 지영 대감은 통곡을 하며 울었다.)

득남은 어모장군댁에서 가까운 용암사에서 100일 불공을 드려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어모장군은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원했다. 막내 여남까지 네 아들을 내리 얻었으나 안 귀한 아들이 없었다.

득남은 어모장군의 뜻에 따라 무과에 급제하고 군자감주부(종6품)을 하면서 나라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막내 여남은 문과에 급제시켰다. 여남은 어려서부터 천재였다. 성리학을 공부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문과에 급제해 한양에 있었다.


광해군은 후금의 부상으로 고민이 많았었다. 후금이 만리장성을 넘어 명을 공격하였다. 이에 명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광해군은 어느 편도 들 수가 없었다. 새롭게 부상하는 후금과 임진왜란 때 파병해준 명 때문이었다.

“내 손바닥에 침을 뱉어 때려서 결정할 것이니 그리들 아시오”(광해는 왼손의 손바닥을 펴서 침을 뱉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펴서 치려했다.)

나름 현명한 광해군은 1619년 강홍립이하 1만의 군사를 주어 참전케 하였다. 비록 명에 군사를 보내주기는 하나 형세를 판단해 조선에 유리하도록 행동하라고 지시한다. 조명 연합군은 사르르 전투에서 크게 패하니 강홍립은 잔존 군사를 이끌고 후금 군에 투항했다. 청태조 누루하치는 조선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무사히 돌려보내 주었다.

1623년(광해군 15) 조선에 서인(西人)들에 의해 반정이 일어났다. 성리학을 따라 의리를 존중하던 서인들이었다. 광해군은 폐위되고 조카인 능양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인조(仁祖) 임금이다.

대대로 오랑캐라 업신여겨오던 여진족이었다. 명에 대한 의리로 왕좌에 오른 인조는 청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이괄은 북방을 책임지는 장수였다. 조정에서 파견한 임경업에 진압되자 반란군을 이끌고 청으로 넘어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황제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청은 조선에 용골대를 보내 군신관계(君臣關係)를 요구하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인조는 주전파의 뜻에 따라 무시했다.

청군을 비롯한 연합군 12만 8000이 1636년 12월 7일 압록강을 넘어 2차 조선을 침략을 해왔다. 청군이 갑자기 한양까지 밀려 내려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했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양화진과 개화리길도 막혀있었다.

인조는 최명길의 제안에 따라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군량미가 고작 50일치가 전부였다. 이후 강화도로 피신을 노렸으나 실패하며 근심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청군은 10만 병력으로 남한산성을 그물처럼 조여 왔다. 인조는 전국의 도병마사와 관찰사들에게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에 와서 싸우라는 격문을 띄웠다.


“남쪽의 왜구나 북쪽 오랑캐는 타고난 종자가 다르기는 하나 우리 조선을 침범한 원수임은 매한가지인데 어찌 우리가 뒷짐만지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이참에 나서서 싸우지 않는다하면 저 오랑캐에게 금수보다 못한 대접을 받을 것이 뻔하다. 비록 우리군의 세가 불리하다고는 하나 우리 집 울안에 들어온 도적을 잡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가자!”

옥천의 의병장 이득남은 옥천지역에서 의병 700여명을 모아 이끌고 공주에 있는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와 합류하기 위해 장령산 자락을 넘고 식장산을 넘었다. 군량을 실은 말들이 눈길에 미끄러져 산을 오르기도 힘들었다. 의병들은 청군 대신 동장군과 먼저 싸워야 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 임금을 구하기위해서는 한 짬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마침내 옥천의 의병 700명을 이끈 이득남이 공주에 도착했다. 이득남은 키가 훤칠하고 마른편이나 30대 중반의 나이로 설득력 있게 옥천의병들을 지휘했다. 통솔력과 지략을 겸비한 장수 같았다.

“장군 옥천의 병력 700을 데리고 왔습니다.”(이득남이 예의를 갖춰 보고했다. 의병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겨우 700이요?”(충청도병마사 이의배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리 하시오.”(이득남의 곁에서 지켜보던 정구삼 의병이 한마디 했다.)

“걱정 마십시오. 옥천 이원의 박동룡이 300을 이끌고 온다고 했습니다.”

“청군은 12만 8000 그것도 대부분 기병이요.”(이의배는 지시를 기다리라며 돌아섰다. 굶주린 의병들이 동요했다.)

“지들은 뭘 잘했다고”

반면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는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에 올라 오위도총부부총관(종2품)에 올라있었다. 당시 나이 69세로 이미 고령이었다. 공주관아 선화당에 모인 충청도 의병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었다.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는 의병 7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비록 고령이지만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가 선봉에 서기로 했다. 공주를 떠나 진천 안성을 거쳐 양지를 지나 남한산성 남쪽 40리 떨어진 지점인 경기도 험천현에 도달했다.

1637년 1월 2일이었다. 이득남이 이끄는 의병들이 옥천을 떠난 지 닷새만이었다. 청군은 발 빠른 기병이 대부분인 반면 조선 의병은 기병과 걷는 육병이 반반이었다. 이의배의 고백으로 싸우기도 전에 의용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와 엄청 춥다. 바람이 장난 아니네유~”(득남이 말하는 의병을 말위에서 내려다 봤다.)

이웃 동네의 낯익은 의병은 무기도 들지 않았다. 양손을 소매에 깊숙이 집어넣고 치를 떨고 있었다. 가볍게 죽창을 들고 나온 노인도 눈에 띄었다. 700 옥천 의병 중에 제대로 된 병기를 갖춘 의병은 채 500이 되지 않았다.

“무기를 들지 않았거나 죽창을 든 의병들을 한쪽으로 모이게 하시오!”(득남은 곁에 있는 행정관리를 맡은 정구삼 의병에게 지시했다.)

“왜요? 무기가 없는 의병들은 집으로 돌려보내려고유~”

“내 그러기에 집에 있는 조선낫이라도 들고 오라고 했잖아유~ 내참”

“서두르시오! 앞에서 적들이 보고 있습니다.”

방금 전 작전회의에서 충청도 병마사 이의배의 지시가 있었다. 아예 무기가 없거나 죽창을 든 의병들이 1차 전투에 투입대상이었다. 충청병마사 이의배는 실전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이었다.

득남이 배운 병법에도 그리 나와 있었다. 지역의 관리들이 의병을 모을 때 호마다 숫자만 채우면 된다고 해서 어린이와 노인들이 많이 참여했었다. 부녀자들이 다수 있었으나 주로 음식을 짓는데 동원됐다. 1차 정묘호란이 있었다.

오랑캐들은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순순히 돌아갔다고 했다. 이의배는 그때처럼 12만 청군을 12만 의병으로 맞서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머릿수에 연연했다. 무기도 없는 의병들에게 자신의 무기를 내어주고 싶었지만 이곳 엄연히 전쟁터였다.

득남은 무기가 없어 분리되는 의병들을 보며 험천의 건너편을 말위에서 응시했다. 아직 적들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기병에다 병력이 풍부한 청군은 주로 주간에 공격해온다고 했다. 아적 이른 새벽이었다. 충청도 병마사 이의배는 무기가 없는 의병들을 너른 들에 펼쳐놓기 시작했다. 인해전술처럼 보였다. 옥천의 의병 100여명도 그쪽에 합류되었다.

옥천 의병장 이득남은 관리 주현종을 관찰사가 있는 본부와 연락책으로 그리고 힘이 좋은 기병 유동호와 무과에 급제한 기병 김영배를 좌우 지휘관으로 삼았다.
그 밑으로 기병 김운식 기병 곽정홍 기병 김인홍 기병 김기우 등이 균형 있게 배치되었다. 그리고 의병장 호위병으로 기병 20명을 따로 뽑아 호위토록 했다. 군서의 이갑노가 종군일기를 썼다.


“우리가 각자 맡은바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일당백은 문제없다고 본다. 언덕싸움이란 말이 있다. 형세를 유리하게 만들고 유인하여 궤멸시킵시다.”

지략을 겸한 이득남은 의병 분대장들의 역할을 나누어 적을 분리시키고 한쪽으로 몰아넣은 다음 미리 매복한 궁병으로 하여금 공격하는 작전을 쓰기로 했다. 일단 적장으로부터 적들을 분리하면 속도가 빠른 적의 기병들은 대낮에도 길을 잃고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우선 궁병부터 앞으로 내보내 들판의 볏짚을 엎고 매복하도록 지시했다.
창병은 일부 빠져 나오는 기병을 공격토록 지시했다. 단지 염려가 되는 것은 야간전투에 쓰는 작전을 주간인 낮에 쓴다는 것이었다. 준비를 마친 이득남은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아버지 전상서/ 그동안 안녕하신지요? 저는 드디어 전쟁터에 도달했습니다. 눈앞에 눈 덮인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으나 적들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두려워 미칠 지경입니다. 논바닥 얼음이 튀는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곤 합니다. 바람 불고 춥고 배고프고 지옥의 입구처럼 보입니다.

정말 따뜻한 아랫목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얼마나 편안한 것인지 저는 압니다. 저는 천주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따뜻한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날 조선이 불교와 성리학에 취해 우리 문화에 빠져 앞서가는 서양을 보지 못해 당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화파와 주전파가 싸우는 것이 무슨 나라에 도움에 되겠습니까?

아버지께서는 늘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전장에 와서야 깨 닿습니다.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저들이 칼 대신 총포를 들이대는데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만일 제가 죽어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후세들에게 전해주세요.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었다고, 곧 출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버지 키워주고 공부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1367년 1월 2일/ 경기도 험천진에서 불효자 이득남 올림.


충청도 의병 7000은 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지휘아래 험천(險川:동막천 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배수진을 쳤다. 상대는 청의 장수 양굴리(楊古利)였다. 목책을 세우고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는 아침부터 선봉대를 투입했다. 이의배는 300의 기병을 이끌고 험천을 건넜다. 개울에 불과한 험천은 두텁게 얼어붙었다.

그때였다. 산위에서 내려다보던 청군의 기병들이 바위덩이처럼 몰려 내려왔다. 일부는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했으나 어찌나 빠른지 산이 무너지는 굉음소리처럼 들렸다. 겁에 질린 선봉장 충청도 병마사 이의배는 기수를 돌려 옆으로 빠져 달아나기 시작한다. 1차 선공은 그렇게 실패로 끝나고 의병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2차는 청의 장수 양굴리가 먼저 공격해왔다. 이번에는 이득남의 옥천기병 100명과 300의 육병이 목책을 열고나가 험천의 얼음판위에서 칼을 들고 청군의 기병을 맞아 싸웠다. 이득남 장군이 이끄는 기병은 육병이 얼음판위에서 청의 기병과 싸우는 사이 뒤로 가서 밀려오는 적들을 막았다. 험천에서는 엄청난 백병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의병이 유리한 싸움이었다. 청의 기병들은 넘어진 말을 일으켜 세우며 허둥대고 있었다.

선봉장 이의배의 도망으로 사기가 저하됐던 충청도 의병들은 2차전 승리를 거두며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득남은 맹활약했다. 목을 벤 청군의 수가 10은 되었다. 청군의 기병들도 험천까지 왔다가 돌아가며 쉽게 공격해오지 못했다. 유인책을 쓰는 것 같았다.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는 이번에는 직접 대규모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 쪽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옥천 의병장 이득남은 수백 명의 의병들을 매복시키고 철수하는 위장전술을 충청도 관찰사에게 제안했다. 계획대로 전면 철수를 결정하자 산위에서 기회를 노리던 청군의 기마병 수백이 험천을 넘어왔다. 매복을 하고 있던 창병들이 이중 삼중으로 에워싸고 청군의 말들을 공격하자 예상대로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달아나는 청군을 궁병들이 공격하니 적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득남이 선봉에 서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고 좌우에서 유동호와 김영배가 맹활약 했다. 뒤이어 곽정홍 김운식 김인홍 김기우 등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적들을 칼로 베었다. 양쪽군의 시체가 험천에 쌓여 말이 나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와 옥천 의병장 이득남은 적 정예부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같은 날 1367년 1월 2일(성 피란 19일째) 남한산성 동문밖에 큰 깃발을 세우고 커다란 양산이 펼쳐져 있는 것을 인조가 보았다. 청태종이 와 있었다. 인조가 홍서봉 등을 적진에 내보냈다. 적장이 탁자위에 누런 종이에 편지를 써 놓았다.

홍서봉 등이 네 번을 절하고 편지를 가지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편지의 내용은 대청국 황제가 조선의 국왕에게 조칙을 보냈는데 대청이 몽고를 공격할 때 조선이 맞아 싸우고 명나라를 도와 내나라 대청을 해하여도 오히려 개의치 않았더니

우리가 얻은 명나라 땅에서 내 백성을 유인하여 명조에 갖다 바치니 짐이 화가나 정묘년에 조선을 친 것인데 어찌 대청과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절하는가를 물었다.

결국은 조선의 왕이 군신관계를 받아드릴 것을 요구하는 협박이었다. 이 편지를 인조와 함께 읽어본 주화파인 최명길이 청태종에 전할 답서를 써왔다. 이를 본 주전파의 김상헌이 답서를 빼앗아 읽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요?”(답서를 읽던 김상헌이 인조가 보기도 전에 갈기갈기 찢어서 어전에 버렸다.)

“김상헌 대감 어찌 이 나라가 처한 상황을 보고도 이러시오?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시오!”(최명길이 찢어진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주워 모았다.)

“당장 그 해괴한 짓을 멈추시오!”

“김상헌 대감 당신이 찢으면 나는 얼마든지 주워 또 붙일 것이오.”

인조가 자리한 어전에서도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싸움만 하고 있었다. 전국에 격문을 써 붙여 의병을 모아 보내라고 했지만 남한산성에 도착한 의병은 여태껏 한명도 없었다. 남한산성은 그동안 확장과 개축 수축을 거처 철옹성에 가까웠다. 버티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식량이 문제였다. 강화도도 안전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7년 임진왜란보다 더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입고 있었다.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의 근왕병과 양굴리(청태종의 매부)가 지휘하는 청군이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험천에서 아홉 차례나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충청도 이성현감 김홍익과 남포현감 이경징 그리고 공주영장 최진립이 전사했다, 험천에는 양쪽군의 시체가 2600여구가 쌓여 산을 이루고 있었다. 흘린 피가 강을 이루고 있었다. 싸움이 멈추려면 적의 장수를 잡아야 했다. 적장 양굴리의 정체가 들어났다. 그는 적장이지만 늘 앞장서서 싸웠다.

그러나 그의 비호처럼 빠른 말에 궁병들의 화살은 빗나가고 번번이 저격에 실패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옥천의 의병장 이득남은 아버지가 내어준 말을 타고 앙굴리를 향해 바람처럼 돌진했다. 그때였다. 적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말은 어쩔 줄을 모르고 이득남의 곁에서 날뛰기만 하여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득남의 시체는 앙굴리가 가져갔다. 말이 돌아온 것은 사방에 땅거미가진 뒤였다. 충청도 의병장인 정세규가 명마임을 알아보고 대신 타기로 했다.

전투경험이 없는 정세규는 야음을 틈타 잔병 5000과 뒤늦게 도착한 옥천 이원의 박동룡군 300을 합쳐 총공격을 단행했다. 정세규는 오늘밤 안으로 적진을 뚫고 남한산성에 입성하는 게 목표였다.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총지휘자 정세규가 말위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는 것을 의병들이 발견해 수원으로 퇴각했다. 잔존 의병들은 출발지 공주관아로 후퇴했다. 선화당 마당에 모인 인원이 출발 시 절반밖에 안 되었다.

지영은 충청도 잔존 의병들이 공주 관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들 득남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생때같은 자식이 죽다니, 내가 대신 갔어야 옳았다.”(지영은 앓아눕고 곡기를 끊었다.)

아들을 잃은 상실감이 너무 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일어난 지영은 시체라도 찾겠다며 밖으로 나왔다. 말이 없었다. 기르던 말은 지영이 취중에도 집까지 데려다 주었었다. 득남이 두고 간 말이 있었으나 아들이 걸어간 길을 찾아갈리 만무했다. 전쟁 중이라 시체도 찾을 길 없으니 장남의 장례도 후하게 치를 수가 없었다.

“어모장군 대감 말이 돌아왔습니다. 나와 보세요!”

지영이 대문 밖으로 나와 보니 정말 마구간에 말이 돌아와 있었다. 지영은 장남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아 꿈만 같았다. 부상을 심하게 당해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지영을 보고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며칠 후 말이 죽었다. 지영은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김화와 광교산에서 승첩이 전해졌지만 의병들은 남한산성에 이르지 못했다. 믿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왕자들과 왕비 등 왕실 가족들이 인질로 붙잡혔다. 남한산성에도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인조가 삼전도에 나가 항복하고 치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거행했다. 남한산성에 피신한지 45일 만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500여명의 대신과 함께 인질로 청나라 심양으로 붙잡혀갔다.

“공은 죽음 앞에서도 그리 초연하신 것을 보니 과연 충신 중에 충신이요”(주화파였던 최명길이 김상헌을 칭송했다.)

“아니오.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화의를 주장한 공이 충신 중에 충신이요.”(이번에는 주전파였던 김상헌이 최명길을 칭송했다.)

끝까지 척화를 주장했던 김상헌과 주화를 주장했던 최명길 둘 다 청의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되어있었다. 김상헌은 전쟁을 주장했다는 죄로 그리고 최명길은 청에게 협조하지 않은 게 죄였다. 두 사람은 청의 감옥에서 그렇게 서로 화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조정에서 옥천 의병장의 말이 돌아와 죽은 것을 뒤늦게 알고 무덤 앞에 의병장 이득남의 말에게 충신문(忠臣門)을 내려주려 했으나 아버지 이지영이 거절했다.
지영은 평소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하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이득남의 아버지 어모장군 이지영은 세수 75세까지 살다가 옥천에서 돌아가셨다.

생전에는 솟을대문을 하냥 열어두고 빗장을 채우지 못하게 하셨다. 3남과 한양에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이여남이 내려와 문상객을 맞았다.
2018-12-29 18: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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